흰 도시 이야기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L시에 이 전염병이 발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휘는 시의 하급 보안/정보 공무원으로, 이 병에 관해 중앙 정부에서 주관한 집체 교육에 참가했더랬다.

병의 이름은 '다기조' 병.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는다 해서 '다기'(daggi 동물의 보호용 껍질) 발병한 뒤, 병증이 진행되고 말기 증상까지 이겨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옮기 뒤에야 완치가 된다고 해서 '이조'(izo,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이동함으로써 숙주를 떠나는 전염의 방식)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행과정은 나름 정연했고, 병의 진행과정은 거의 동일했다.

불규칙한 과호흡 -> 가벼운 건망 증세 -> 갈증 -> 기침 -> 단기 기억상실, 허언증 -> 이상 음성 -> 신체 말단 근육 소실 -> 청색증 -> 자기 인식 불능 -> 신체 말단 부위의 각질화.  

 전염 과정은 불명확했다. 병자와의 접촉이 전염 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으나, 어떻게든 전염된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병은 대체적으로 신체 말단 부위가 각질화 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끝났다. 걸리면, 신체 말단 부위를 반드시 잃게 되는 무서운 전염병. 남는 것은 '영구한 기억 손상'과 그에 따른 일종의 '현실 재인식'.

그 어떤 대책도 속수 무책이었고, 결국 중앙 정부는 병의 진원지라고 판단한 L시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갈증과 기침 단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났다. 그리고, 결국 L도시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과 하얀 각질로 뒤덮인 사람들로 가득 차다가, 결국 신체 말단 - 주로 손 - 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동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딸을 잃고, 뒤이어 다기조에 걸린 아내가 손을 잃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전에- 이혼을 하게 되고, 결국은 동휘 역시 다기조에 걸려 하얀 석고처럼 손목에서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는 두가지다.

우선, '기억' 이다. 다기조병에 걸린 환자들은 손을 내주고, 기억을 잃게된다. 다기조 환자들은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리고,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조차 잃어버린다.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다기조로 사망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상실감 또한 다기조로 잊혀진다. 그렇다면, 이 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설정들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병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 상관 없게된다.

기억은 한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이자 전부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경험과 그로 인해 쌓은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것이 편견이건, 오해건, 이해건, 나를 아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100명의 마음 속 '나' 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정보-직업, 출신지, 출신학교, 토익, 토플성적, 연봉, 가족관계 등등- 와 어우러진다.  

결국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기조병을 앓고 난 사람들은 결국 이 모든 기억이 무의미해지므로, 종이에 기록된 정보를 통해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외부의 정보에 지극히 민감해지고, 언론과 대중매체에 쉽게 현혹되게 된다.

기억을 통해 쌓은 타인에 대한 경험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저자가 은유하고자 한 대상이 어떤이들이었는지 제법 명확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두번째 테마인 '상실' 이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강렬히 남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상실' 이다.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부모님 손을 놓쳐 길을 잃어 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굉장히 오래 남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가 된다. 애완동물을 떠나보내거나 잃은 기억, 열심히 모은 용돈을 잃어버린 기억, 친한 친구와 헤어지거나, 사별한 기억....

사소한것부터 중요한것까지, 상실의 경험은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기조' 는 손이나 발을 대가로 기억을 앗아간다.

그리고 다기조병으로 아이를 잃은 L시의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기조는 저주라기보다 축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두 테마가 가장 극적으로 맞물리는 순간은 동휘가 병을 이겨내고 딸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동휘의 상황을 명백히 알려줌에도, 이 장면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흔히, 가족을 잃는 경험을 '수족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는 표현을 하곤 한다.

'다기조' 라는 병은 이 오랜 말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손발을 떼어주고, 아이를 잃은 기억을, 나아가 그 당시의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다면, 많은 부모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저자는 이 두가지 테마를 통해 '세월호' 를 끌어올린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잊어가는 참사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유가족들. 

어떻게든 수면 밑으로 끌어 내리려는 세력들과, 어떻게든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세력들.


 서사는 치밀하고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하다. 

화자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 왜곡된 기억과 진정한 현실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데도, 서사가 치밀하다고 느낀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일관적이고, 캐릭터의 변화가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불규칙하게 들쭉날쭉하는 왜곡된 기억과 진실이 그물처럼 촘촘히 조직되어 있어서 잠깐 집중력을 놓치면, 바로 앞페이지의 내용과 뒷페이지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런 연결성의 단락들을 통해 화자의 정신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물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어서 인과가 명확하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다소 리얼하지 않은 느낌-작위적이기까지 한-이 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 통일성을 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고 나면 그 이유가 납득이 간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화자의 왜곡된 기억 안에서는 평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지만, 진실 앞에서는 불안하고 위화감을 준다.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달콤하고, 편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언론의 말을 믿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지금도 그러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게 '통합' 이라고. 무조건 자기들을 믿고, 자기들을 따르라며.

반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고. 다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통합' 을 외치는 쪽에서는 이걸 '분열을 조장한다' 며 비난한다.

이거 왠지, 중국 정부가 홍콩 프리, 를 외치는 이들을 탄압하고 압박하는 장면 같지만, 어느쪽이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지, 공산주의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다 잊고, 묻자고.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고.

그러면, 모든게 편하고 안온해진다고.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파헤치며 들추는 이들에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도, 그 당시의 성노예와 육체노역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한국전쟁때 학살당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홧발 아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다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들, 참혹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의 살갗을 불에 태운 사람들, 생떼같은 자식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킨 부모들에게 말한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다 잊고, 묻으라고.

이제 그만 들추라고. 


진실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인권' 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7세기다.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개념이다.

그 이후 계몽주의가 태동했고, 비로소 '평등' 과 '자유' 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절대왕정 시대, 인류는 얼마나 '통합' 되어 있었는가?

보통사람들은 얼마나 '닥치고' 살아왔는가??

인류가 그래도 나름 평등한 발언의 기회,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문명이 탄생하고 수천년이 지나서야 가능했고, 아직도 완벽히 자유롭진 못하다.

별로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고,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개념은 "표현의 자유" 다.


이 작품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부의 선전에 호도되어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치 히틀러를 연호하는 군중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상황과 현상을 자기 입맛대로 한두마디로 정리한 하나의 '의견' 에 수렴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아이콘은 언론이다.

전제군주 시대의 평민들처럼 언론들이 어떠한 한 집단, 한 단체에게 굽신거리게 된다면, 그 언론은 더이상 가치가 없어진다.


이 작품 속 다기조병 환자들처럼 말이다. 


대중도, 사람도, 언론도, 그리고 정부조차도 "모두 없었던 일" 로 치부해버린 일.

그 일을 기억하려는 사람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격리시켜, 그 사람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

우리 사회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만 봐라.

모든게 '오해' 라고 하지 않나.

엄청난 돈을 쏟아 피해자들을 왜곡하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인간의 수명 앞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돈 앞에서 역사는 조작되는 법이다.


"역사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 

우리가 함께 기억할때 가치를 지닙니다."

우토로 마을을 향한 아름다운재단의 홍보 문구다.


이 책은 결국 세월호를 향한 이야기이지만,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있다.

진실은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힘센 자 옆에 빌붙어 기생하며 호도하고, 왜곡하는 일은 쉽고, 배부르고, 안온한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