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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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작가로 세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화자는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별거중이다. 영국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귀국해 제법 고난한 시간을 보냈고,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보육원에 갈 나이쯤이 되자 대학 교수로 제법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선 남편은 마치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화자의 작품 활동을 위해 시간도, 장소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영국으로 떠난 남편과 별거하며 자연스레 그 기반들을 잃은 화자는 번역 작업을 주로 하며 근근히 아이를 살피며 삶을 이어가던 중, 자신이 2003년 문창과를 졸업하며 자비출판했던 소설 "난파선" 이 신문지상에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이름은 자신이 아닌 "이유상" 이라는 이름이었고, 이 소설의 작가를 찾는다는 광고 문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난당했다는 불쾌감에 화자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광고를 실었다는 여성, "선우진" 과 만나 "이유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우진의 남편 이유상.
그는 사실 "이유미"라는 여성이었다.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설화들 중 하나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뮬란" 같은 작품이나, 조선시대 "방한림전" 같은 고전문학속에도 등장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신화속에도 등장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 직업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구별되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분장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성으로 분장한다.
이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리기에 매우 적절한 장치인 동시에, 사회의 맹점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율적이다.

 최근 몇년의 한국 문단은 바야흐로 여성문학, 특히 피해문학의 시대로 봐도 무방하다.
수많은 미투 폭로가 쏟아지며 이른바 "젠더권력" 의 추가 급격히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문단도 그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 이름난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피해를 다룬 소설들이고, 사이사이 퀴어 소설이 들어있다. 화제성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는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일텐데, 부디 이번엔 후르륵 끓고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어 좋은 국물이 우러났으면 좋겠다.
문학은 더이상 대중을 선도하거나 사회를 앞서갈 수는 없다. 정보의 바다는 매일매일 업데이트되고, 대중은 실시간으로 그것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재해석되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한박자 늦게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이제 문학의 가장 큰 역할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양한 계층이 동감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 최근 한국 문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기조는 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이방인]은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이러한 최근 한국 문학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거의 배제하고, 피해의식도 거의 발현시키지도 않고, 딱히 여성들의 연대 같은 의식적 고양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충실히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의 오래된 차별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남성을 이긴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모든 남성이 싹 사라진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 구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인습적으로 규정해온 성역할은 오롯히 동물적인 분류에서 시작됐다.
체격, 근육량, 생리, 임신 등등의 신체적 특징들에 더해 정신이나 의식까지 싸잡아 "여성의 정의" 라는 프레임에 가두었다. 다른 수많은 차별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녀의 신체적 특징들은 거의 다 상쇄되었다. 물론, 아직도 신체적 특징이 유리하게 작용되는 면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 동물적', 즉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녀간의 성대결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하는데, 아직은 서로가 등을 돌리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친밀한 이방인] 은 매우 훌륭한 통역사와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서로를 돕는 동시에 상처를 준다. 남성, 여성의 차이는 없다. 오직 사회와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순응할지, 극복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친밀한 이방인] 은 작가인 화자가 쫓는 이유미, 또는 이유상의 다채로운 인생역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고도 충실하게 담아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제법 정교해 보이는 인간의 공동체의 얄팍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꽤나 부유한 축에 속하는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유미는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사회의 변두리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다. 부족할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고교 졸업 후부터 삶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대학에 떨어졌지만, 붙었다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이유미의 삶은 거짓에 거짓이 붙어 한없이 부풀기 시작한다. 두 번의 결혼과 파혼이 있었고, 큐레이터부터 간호조무사, 의사, 작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커리어는 의사라는 엘리트 직업에까지 이르렀고, 남편들과의 결혼생활들은 이유미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박살났다.
하지만, 이유미는 쉽게 낙망하지 않는다. 끝끝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서류로, 신분증으로, 명함으로 마치 변검의 배우처럼 자유롭게 탈을 바꿔 쓰며 삶을 살아낸다. 이 모습에서 나는 꽤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은 대단히 치밀하게 짜여져있다.
적절한 생략과 압축이 매우 효율적이고 적재적소에서 활용되어서, 전체적인 볼륨이 작은 작품이지만, 내러티브가 매우 풍성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유미의 삶을 쫓는 화자가 이유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런 기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남발되면 오히려 이야기가 산만해지고,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때로는 작위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매우 잘 활용되었다. 이유미의 탈이 주변 인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과연 "나" 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작가의 통찰력이 느껴졌다.
많은 거짓들을 스스로 쌓아간 이유미이지만, 뜻밖에, 마지막 거짓말은 선우진의 오해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소설적으로 매우 휼륭한 접근이라고 느껴졌다.  

인간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애초에 '주도적' 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조차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 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사회에 의해,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해 타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점심 메뉴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설계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뿐이다. 책상이나 돌멩이를 점심메뉴로 선택할 수는 없잖은가.
지극히 동물적인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제 아무리 주도적인 선택을 한다 한들, 자연재해나 전염병 한방에 모두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주도적인 삶일까??
이토록 수동적인 삶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친밀한 이방인] 은 이에 대한 작가의 물음으로 읽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때론 이성적으로 유리한 것들을 취하며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던 이유미의 삶은 언듯 주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선택은 수동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와 남편, 아이를 위해 떠밀리고 떠밀리다가 불륜이라는 선택을 하고, 이혼위기를 맞이한 화자는 수동적으로 쫓기듯 살아갔지만, 마지막 선택은 주도적으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이유미에 얽힌 하나의 반전과, 내 예상을 살짝 빗나간 화자의 마지막 선택이 이 질문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두 인물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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