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그래픽 노블 중 가장 예술적인 작화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 프랑스에서는 [만화] 라는 장르를 [예술] 카테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유럽 대부분이 그렇다. 최근 몇년 간,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망가] 라는 카테고리가 새로 생겨났지만, 그래픽 노블과는 차별된다. 현대 미술가의 화집을 능가하는 프랑스 그래픽 노블. 최근까지도 크고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남미의 혁명과 게릴라들의 활동상. 그것들을 예술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 놓치면 안될듯!! 

 

 

 

 

 

 미술 서적들 중에서 스토리 컨텐츠의 활용에 있어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아트북스의 신작. 아트북스의 책들은 언제나 '재미있다.'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거나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얽어가는 능력들이 다른 미술 출판사들과는 꽤 수준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필진들이 뛰어나고, 기획력 또한 참신하다. 미술 전문서적은 출판사와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파워와 노하우를 무시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어떤 종이에, 어떤 인쇄가 가장 편안한지부터가 바로 노하우이기 때문이다. 보다 디테일한 화가의 삶을 짚어볼 수 있는 기회. 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과연 어떤 생활환경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느끼며 만지고 있을까? 

 

 

 이 시대 가장 뛰어난 독설가이자, 그에 걸맞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미학자. 미술이란 시대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이 책은 진중권 교수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고 있는 서양 미술사 시리즈의 두번째 편이다. 첫번째 편이 2008년에 나왔으니, 무려 3년만이다. 그동안 진중권 교수 개인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왔다. 3년전과는 분명 다른 눈으로 미술의 역사를 읽는 혜안을 보여줄 진중권 교수의 신작. 게다가, 시대의 흐름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모더니즘' 의 해설이다. 날카로운 교수님의 강의실에 들어가는 기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감과, 나한테 뭔가 질문하시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기분좋은 두근거림. 

 

 

 

 희대의 명작 대부의 시나리오와 제작노트. 코폴라감독의 다각적 인터뷰는 물론, 영화 뒤의 많은 이야기들, 스틸컷들이 들어있단다. 골든 글로브는 물론 오스카 작품상까지 상이란 상은다 휩쓸었던 희대의 명작. 대부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두근거린다. 현대 영화의 바이블이자, 시나리오의 바이블. 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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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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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독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니시던 작은 교회를 다녔고, 대학때 보다 깊이있는 예배와 공부를 위해 좀 더 많은 신자가 섬기는 교회로 옮겼다. 20대 중반에는 청년부 회장도 맡고, 제자훈련도 받으며 신앙을 키웠고, 열정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적인 신앙관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현재 한국 교회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심도있는 공부를 하기도 했고, 젊고 박식하며 열린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이슬람, 성공회, 가톨릭을 넘나드는 성경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의문만이 가득했다. 사후의 세상부터가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실 종교의 대부분은 현실의 삶 보다는 사후의 삶을 중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사후 세상이 믿겨지지 않는다니. 그럼 뭘 믿길래 교회를 다니냐는 말도 들었다!

 결국 난 '기독교를 반만 믿는다.' 고 말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 그것을 한쪽만 믿는 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 즉 기독교의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이지만, 그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들의 종교 기독교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한 종파는 "예정론" 을 신봉한다. 내가 다니던 장로교의 교회도 철저하게 예정론을 신봉하는 교파였다.

 돈독하게 지냈던 목사님은 내게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더랬다. 내가 하나님을 접하고, 어쩌면 이렇게 의문과 의심을 갖는 것 또한 그분의 예정이신거고, 나는 결국 그분의 예정으로 인해, 의문과 의심을 거두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의문과 의심이 학문으로서의 '신학' 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목회자의 길이 아닌 신학도의 길을 권유하기도 하셨었다. 모든 의심과 의문을 내려놓고 순전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하게 '신' 의 뜻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신이 원하시는 대로' 라고 고백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인' 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그런 신앙인의 표상인 '목회자' 즉, '목사' 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중순 평양.

유엔군의 개입으로 열세였던 한반도의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전쟁 초기, 낙동강 유역까지 밀렸던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휴전선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함락시킨 뒤, 기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한다. 바로 그 시기의 평양. 육군 특무대 정치정보국 소속의 이대위는 유엔군 치하의 평양으로 파견되어, 파견대 대장인 장대령과 조우한다.

 이 대위가 평양으로 파견되어서 받은 첫번째 임무는 평양에서 일어난 목사 실종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평양이 유엔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평양 시내의 주요 교회의 목사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납치당한 14 명의 목사들 중 12 명이 총살되었고, 2명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대위는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를 만나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 12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과정중에 비 인륜적인 집단 총살을 당했다면 서방 국가들에 북한군의 만행을 선전할 수 있다. 육군 정치 정보국은 이러한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두 목사의 생생한 증언을 통하고자 한다. 이 대위는 자신의 임무를 위해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나서는데, 두 명 중 젊은 목사인 '한목사' 는 미쳐버렸고, 남은 한명의 목사, '신 목사' 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

 과연 신 목사가 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대위는 죽은 열두명의 목사들 중, 절친한 사이인 박 대위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종교색이 강한 작품이다. 사건의 핵심에는 '신앙인' 이 자리잡고 있고, 또다른 축인 '박 대위' 는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도' 라고 부르며 의절한 상황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고, 죽음이 눈 앞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쳐가는 전쟁터. 그것도 적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나는 신앙인들의 갈등. 그것이 참으로 적나라하고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편이다. 토론과 논쟁의 핵심은 '설득' 에 있다. '종교' 는 본질적으로 토론이나 논쟁과 매우 흡사하다. 종교는 태생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위한 거대한 기구가 있고, 때론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한 특권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국 '설득' 이다. 인간은 '신'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섭리' 에 종속된 존재이며, 때로 그 인간의 인생은 '신' 또는 그 '섭리' 의 손길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지를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목사, 신부, 랍비, 부처, 도사, 사두인...등등이 성경, 성서, 카발라, 꾸란, 경전, 기도문 등등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종교는 아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지만 엄청나게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으니 바로 '신앙' 즉,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이성과 논리를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신앙인들은 불가사의한 대상인 동시에, 존경스러운 대상이다. 내가 신앙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것은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해소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얄팍한 지식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완벽하게 '신앙 안' 에서만 작용해야 한다. 신앙이 이성과 논리와 접목되면, '신의 뜻' 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고 적용시키려는 행동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대단한 신앙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뿐 만 아니라, 중세시대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신의 뜻' 을 마구잡이로 해석해대곤 했다. 신앙인들에게 '신의 뜻' 이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메시지이고, 신의 뜻을 해석하고 받든다는 '목회자' 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들에겐 신의 목소리와도 같을 터다.

 

 그 때, 1950년 10월의 평양은 지옥과도 같았을터다.

친구, 친지들은 어디선가 날아와 아무데서나 펑펑 터져대던 폭탄의 폭발에 휘말려 산산 조각나고, 연료가 없어 생쌀을 씹어야 했을터다. 생쌀과 같은 곡기라도 있었으면 다행이었을 터다. 유엔군으로부터의 구호 식량은 간신히 한 끼를 떼울 정도였을 터이고, 그것도 몸이 성해야 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식수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씻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터이고, 밤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격포와 전투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터다.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전염병. 그 속에서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평양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들 중 하나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1904년에 시작된 '원산 대부흥'의 종결점을 찍은 일종의 '기적' 으로서, 이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기독교가 퍼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치고 굶주린 평양 시민들에게 목회자들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터다.

 그리고, 북한군의 잔혹한 총 앞에 무너져간 열두명의 목사들.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장렬하게 죽어간 열두명의 목사들이야 말로, 피폐해진 삶에 큰 위안이 되고, 자긍심이 되었으며, 원동력이 되었을터다.

 

신 목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열두명의 목사들이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했을 것이다. 북한군의 총부리 앞에 하나님을 부인하며 목숨을 구걸한 목사가 있었을수도 있다. 신 목사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두번째는, 자신이 신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열 두 명의 목사들은 죽었는데, 신목사와 한목사는 살아남았다. 한목사는 미쳤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신목사는 멀쩡히 살아나왔다. 열두명의 목사들은 최후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신목사는 마지막 순간 신앙을 거부하고 북한군이 시키는대로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과연 신목사는 무엇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의 신은. 그의 하나님은 어떤 일을 원하고 계시는가?

 

 작품을 읽는 내내 굉장히 괴로웠다.

과연 나라면 어찌했을까? 그리고 신목사가 처해있는 심각한 딜레마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신목사가 처한 환경은 '인간' 예수가 처해있는 상황과 대단히 흡사하다.

"저들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지만,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깊이 묻어나 있다.

죽은 목사의 숫자가 예수의 제자들과 동일하게 열두명이고, 박 대위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와 겪는 갈등은, 신목사가 자신의 하나님(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과 겪는 갈등을 대비시키고 있다. 박대위가 아버지의 신앙을 부정하고 미워하듯, 신목사 또한 자신의 신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부정의 마음이 자라난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실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양심' 이라고 불러보기로 하자. 결국 '신의 뜻' 은 우리의 양심의 방향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즉, 신의 유무나 신앙의 유무를 떠나도 이 작품이 하는 이야기는 명명백백하다.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고하지만, 대중들의 영혼은 구제할 수 있다. 어쩌면 일신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손가락질 받고, 비난받을 것이며 영원한 불명예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실을 드러내고 본 것을 모두 말하면 피폐해진 대중들의 영혼은 더욱 더 상처받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지만, 더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절망에 찬 대중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다.  

 

 '순교'

종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행위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하면 될까?

사람을 위한 희생이 아닌, 신을 위한 희생을 순교라고 한다. 순교의 개념은 어느 종교에나 있지만,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종교 자체의 기반이 '예수의 희생' 에 있기에 순교의 의미가 더욱 크고 중하다. '신앙' 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선 타인의 희망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희생은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종교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은 다름아닌 희생에 있다. 희생은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소외받은 자들에게 향했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으며,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까지 감싸안았던 숭고한 희생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종교적인 멘트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신목사의 결단 또한 그래서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무엇보다 절망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강인한 모습이 아름답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섬기는 종교의 지도자였지만, 스스로 그 율법을 어겼고, 그에 대한 책임도 끝까지 지고 간다. 자신의 절망을 타인의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대중들이 던지는 돌을 당당하게 맞아내고 비난들을 아낌없이 받아낸다.

 그도 인간이기에 한때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다. 때로는 스승 예수를 부인하기도 했고, 누구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이 모시던 스승 예수와 그가 설파하고자 했던 진리, '복음' . 즉 신앙을 위해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불에 타 죽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듯, 타인의 행위를 통해 감동받고, 감화되기 마련이다.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래한 초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목 앞에 칼을 들이대고, 굶주린 사자의 이빨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 에서 지극한 절망 속에서도 불꽃처럼 피어나는 희망을 본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절망하지만, 사람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진실과 사실. 그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의 뜻과 인간의 뜻. 그것들 중 진실은 무엇이고, 사실은 무엇인가?

희망과 절망. 그것의 차이 또한 무엇인가?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신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믿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이 있다고 믿고, 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과,

신이 존재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국 이 작품 속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의 뜻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은 등장한다.

모든 진실과 모든 절망. 그리고 모든 고통과 모든 고난을 등에 지는 사람.

자신의 모든 삶을, 눈 앞에서 고통받는 나 아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완벽하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  그렇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진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진정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 을, 진정한 '신앙인' 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한층 더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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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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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일리언' 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무렵이었을까? 늦은 밤,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아빠옆에 누워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휴일 밤에 방송되던 '에일리언' 을 보았더랬다. 거대한 외계 행성, 괴기한 배경 사이로 바닥에 가득한 투명한 젤리같던 에일리언의 알들.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붙는 에일리언의 유충 '페이스 허거'. 그리고 사람의 배를 뚫고 나오는 새끼 에일리언과 번들거리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입 안에 또 입이 있는 괴기한 디자인의 어른 에일리언. 내가 '그로테스크' 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 바로 그 순간이 최초일 것이다.  

 79년에 처음 발표되, 4편까지 등장한 에일리언은 바로 이 책에서 나오는 '그로테스크' 의 정의에 가장 합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연구 자료들과 개념과 용어에 대한 설명들을 통해 가장 많이 떠오른 작품이 바로 이 '에일리언'과 에일리언의 아버지이자 현대 미술가인 'H.R 기거' 였고, 일본 만화작가인 '이토 준지' 또한 자주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목처럼 이 책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사용해 오고 있는 단어인 '그로테스크' 라는 단어를 미학적으로 접근해 풀어나간다. 단어나 용어는 세월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 특히 미술이나 문학에서는 더 그러한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고딕''르네상스''로코코''로마네스크''아라베스크''낭만주의''인상주의''초현실주의''사실주의''극사실주의''아르누보''아방가르드''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등등 단어를 그대로 풀이해서는 대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일련의 용어들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 사회적 배경과 그 중심이 되었던 인물과 사건들,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충분해야만 똑바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 

 특히 '그로테스크' 라는 단어는 더욱 그렇다. 이 용어 또한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만들어졌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그 의미와, 의미가 포괄하는 범위가 변해왔다. 특히 그로테스크는 위에 언급한 다른 용어들과 달리 뚜렷한 형식이나 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작품에 흐르는 이미지와 단어가 사용되었던 과거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특징을 찾아내야 했다. 르네상스나 인상주의의 경우엔 그 시대와 환경이 요구하는 일련의 지향점이 있어왔고, 그 시대의 작품들엔 동일한 코드가 있다. 예를들어 르네상스는 '고전으로 돌아간다' 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전주의와 그 맥을 함께 하며,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다른 사조와 구분되어지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하지만, '그로테스크' 라는 단어는 그러한 특징을 지닌 미술적 사조나 화풍이라기보다, 이미지와 감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로테스크는 모든 시대의 모든 작품들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고, 발견되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16세기에 그 용어가 정의되고,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한 부분에서부터 접근을 시작한다. 과연 어떤 작품에서, 어떤 분위기와 느낌을 '그로테스크' 라고 정의했을까? 16세기 로부터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미술작품, 비평집들을 예로 들어가며 '그로테스크' 를 정의하기 위한 위대한 노력이 담겨있다. 

 그로테스크는 형식, 효과, 이미지, 상상 등 모든 것을 망라하는 거대한 '위화감' 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서양인들이 처음 중국문화를 접했을때, 중국풍의 작품을 그로테스크라고 받아들이기도 했고, 기독교 문화가 서양을 지배하고 있을땐 악마주의의 작품을 그로테스크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인간과 기계의 조합 또한 그로테스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인간과 동물의 결합 역시 그로테스크라고 할 수 있을터다. 뿐만 아니라 글의 형식과, 문장의 분위기를 통해서도 그로테스크를 느낄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에일리언의 디자이너 'H.R 기거' 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을 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 카프나와 러브 크래프트 같은 소설가였다. '글' 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미술작품들 보다는 소설들을 예로 들며 그로테스크를 설명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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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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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 이 의견에 딱히 반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맞다. 그림은 시와 같다. 시 또한 아는만큼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면, 학교다닐때 배웠던 시의 내용들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화자가 처한 입장이라느니,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라느니, 시 속에 들어있는 화자의 심정이라느니, 작품의 외적 상황과 내적 상황이 어떻다느니 등등은 기억할 것이다. 그런 작품에 관한 '지식' 들을 알고 시를 접하면, 새삼 그 시가 가지고 있는 깊은 내용들이 또렷하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쉽게 이해되곤 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 하나가, 이중, 삼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인이 처한 환경을 알아내고, 그런 상황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문장들을 적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과 경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도 시와 같다.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된 재료와 기술까지 알 필요는 없다. 붓질을 어떻게 했고, 색을 어떻게 혼합했으며, 어떤 모질의 붓을 사용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이다. 광활한 네모난 백지를 채운 수많은 것들. 그것들이 모두 화가의 마음이고, 정신이고, 대화이다. 시인이 문장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했다면, 화가는 하얀 백지 안의 그림들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 시의 단어 하나 하나가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듯 고르고 고른것들이듯, 그려진 사물 하나 하나가 혈관을 찢어 선혈을 붓에 찍어 그려내듯 고르고 고른 것들이다. 화가의 눈에 보여진 세상이 화폭 안에 그대로 담겨있다. 

 '눈' 은 '뇌' 와 같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뇌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눈이 만들어 지는데, 마치 뇌에서 더듬이처럼 두개의 눈이 비죽이 솟아나온다. 눈은 피부 밖으로 돌출되는 뇌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보고싶은 것' 만 보고, 때로는 보이는 것을 자신의 머리속에서 재구성 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것' 이다. 그렇기에, 화가가 보고, 화폭에 옮긴 그림들은 화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세상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는' 사람들 또한,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 그림을 보게 된다. 화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 된 세상이, 그림을 보는 관객들의 눈을 통해 머릿속에서 또다시 재구성 된다. 당연히 보는 사람들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그림의 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림과 글자를 동일시 했다. 선비들은 의관을 정갈히 하고, 정성스레 먹을 갈아 글을 쓰듯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획 하나 하나에 넋을 담듯, 매화 가지와 대나무 줄기를 그려내고, 난을 쳤다. 화폭에 담긴 그림들은 화가의 넋이 담겨 살아있는 듯 했다. 우리 조상들의 그림은 비슷한 시기 서양의 그림들과는 완벽하게 그 궤를 달리한다. 서양의 그림은 기법 위주로 발달했다. 캔버스 전체를 꼼꼼하게 메꿔나갔고, 그 안에 그려질 사물들에 정신을 투영했다. 동양의 그림은 정서 위주로 발달했다. 시원하게 뻗어나간 매화는 하얀 여백 위에 둥실 떠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속에서 선비 정신의 웅혼함이 담겨져있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옛 그림들을, 그림의 화제에 따라 사계절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소개 방식은 위의 그림처럼, 먼저 한페이지에 도판이 실려있고, 뒤에 그 도판에 대한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데, 간단히 작가에 대한 소개와 그림에 그려져 있는 화제들에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이 책의 저자이신 손철주 선생의 감상이 자리잡고 있다. 즉, 그림에 대한 강의나 상세한 설명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감상이 대부분인 것이다.  

 손철주 선생은 그야말로 미술에 대해 대단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는 사람' 이다. 그런 저자가 자신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보며 받은 감상을 그대로 가감없이 적어 내려감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림 보는 법' 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고수의 감상법' 을 어깨 넘어로 배워나가는 기분이다. 저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아쉬운 점, 벅차 오르는 점, 연상되는 것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저자의 풍성한 감성과 지식에 경도되어, 즐겁게 화랑을 함께 거니는 기분이었다.  

 예술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동양과 서양의 문화는 그 뿌리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서양화와 동양화를 감상하는 방식 또한 꽤나 다를터다. 이 책은 특히 우리 조상들의 그림이 실려있고, 그림 속에서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감정선을 좇는 감상법을 따뜻한 말투로 알려주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에 보이는 만큼 보인다. 이 책 안에 실려있는 수많은 도판들은 우리에게 먼저 보는 눈을 길려줄 것이다. 그리고, 글들 또한 잘 읽어 나가다 보면, 그림을 '읽는 눈' 또한 충분히 길러주리라고 본다. 

 따뜻한 우리 조상들의 그림과, 세상을 보는 조상들의 따뜻한 시각. 그것들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책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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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서유요원전 대당편 3 만화 서유요원전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수호지], [삼국지연의], [금병매], 그리고 [서유기] 를 통틀어 중국 4대 기서라고 한다.

중국의 수많은 고전들 중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이 작품들은 수많은 영화로, 만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금병매]의 경우는 성적인 묘사들도 꽤나 노골적이기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는 빨간 표지 에로 영화의 소재와 제목으로도 많이 쓰이기도 했다.  

 [서유기]는 특히 너무나 유명한 만화들의 모티브로 작용하여 우리에게 참으로 익숙하다.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천축으로의 여정은 여섯살배기 꼬맹이를 붙들고 물어봐도 알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만화라고도 할 수 있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 볼] 도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 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허영만 작가의 [날아라 슈퍼보드] 역시 손오공이 주인공이다. 카즈야 미네쿠라의 [최유기] 역시 서유기의 새로운 해석이고, 현장삼장 대신 '오로라 공주' 가 나오는 '별나라 손오공' 이라는 일본 TV 애니메이션도 있었으니, 천축으로의 여정은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리메이크 된 셈이다.

 중국의 고전 중의 고전이던 서유기는 동양 만화의 뿌리로서, 그리고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 볼] 은 시기가 모호하지만,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손오공이 지구로 날려온 외계 종족 '사이어인' 이라는 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사이어인이 보름달을 보면 거대한 원숭이 괴물로 변신한다는 점이 흥미롭고, 지구를 노리는 외계인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고, 그들과의 전투를 통해 손오공은 점점 더 강해진다. 초반에는 확실히 서유기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손오공이 성장한 뒤부터는 손오공의 이름 외에는 서유기의 색깔을 찾을 수 없어진다.  허영만 작가의 [날아라 슈퍼보드] 또한 시기가 모호하지만, 서유기의  그것을 비교적 철저하게 따라가고 있다. 근두운 대신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케이드 보드를 타는게 특이하고, 바주카포를 쓰는 덩치 큰 돼지 저팔계와 입에서 나방을 뿜으며, 소리를 잘 못 듣는 사오정 또한 큰 인기를 얻었다.
 카즈야 미네쿠라의 [최유기] 는 보다 서유기에 충실하다. 원 제목은〈가장 즐기는 서유기(最も遊ぶ西遊記)〉로써 (※출처: 위키디피아) 술, 담배, 마작을 즐기는 방탕한 현장삼장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동인지 출신의 작가답게 야오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소년 캐릭터들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홍해아 또한 대단한 미남자이다.
 언급하지 못할 만큼 더 많은 만화들이 [서유기] 에서 모티프를 얻어내고 있고, 국내에도 [날아라 슈퍼보드] 외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더 있다.
 

 이처럼, [서유기] 는 동양 문화 전반에 있어 상상력의 원천이자, 모험물의 뿌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오늘 언급할 [서유요원전] 의 작가 '모로호시 다이치로' 는 1970년에 데뷔한 노장 중의 노장이다. 게다가 30여년간 끊임없이 활동을 해오고 있는 작가인 동시에, 일본 만화계에 굵직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만들어낸 거장이기도 하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이 [서유기] 가 가지고 있는 시대배경을 완전히 배제한 것과 달리 , 모로호시 다이치로는 원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배경을 충실히 하는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서유요원전은 수나라 말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이야기꾼이 언급하는 [대당삼장취경시화] 는 당나라 시대 현장 삼장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북인도에 가서 불전을 얻어온 사실에 입각한 일종의 설화집이다. 현장 삼장의 북인도 방문기는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고, 여기에 문무를 겸비한 종자와 설화적 상상력을 집대성해서 꾸며낸 책이 바로 '대당삼장취경시화' 인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당시에  현장 삼장의 북인도 여행기를 토대로 한 [대당서역기], [대자은사 삼장법사전]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특히 [대당삼장취경시화] 에 간략하지만 비교적 구체적으로 현장 삼장을 도와 신통력을 발휘하던 원숭이 수행자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이 즈음에 이미 서유기의 기본적인 얼개는 완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명나라 시대 오승은은 이 이야기들을 취합하고 집대성해서 서유기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위키디피아 + 네이버 백과사전) 
 

즉,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오승은이 완성한 [서유기] 를 재해석 했다기 보다, [서유기] 의 원전이  된 현장 삼장의 인도 방문기 자체에서부터 재해석에 들어간 것이다. 완벽하게 새로운 서유기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다시 서유요원전의 줄거리로 들어가서,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야욕으로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북방 민족을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수축하였으며, 대운하까지 건설하는 등 백성들은 몸 누일 틈조차 없을 정도로 혹사시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양제는 결국 3차례의 고구려 원정을 모두 실패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시기부터, 손오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남 지방의 작은 마을 '복지촌'.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동네로, 화과산이 굽어보이는 깊은 산골마을이었다.

이런 작은 마을도 피해가지 않는 군역으로 징집되어가는 남편 손해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 손해의 부인은 원숭이들에게 납치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손해의 부인을 구하러 산속으로 들어가지만, '주염' 이라는 거대한 원숭이 요괴를 만나서 결국 마을사람들은 손해의 부인을 구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원숭이에게 납치되었던 손해의 부인은 마을 사람들 앞에 갓난 아기를 놓고 사라지는데, 그 아이가 바로 손오공이다.

 손해의 부인이 원숭이에게 납치될 때 함께 있었던 부인의 손 아래에서 손오공이 소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수나라는 멸망하고, 각지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멸망하고를 반복하게 된다. 그 중, '당' 이라는 나라가 가장 큰 위세를 떨치며 주변을 평정해 나가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아직 각지엔 수많은 왕들이 황제를 자처하며 전국 재패의 꿈을 꾸고 있었다. 백성들은 수나라 시대에 이어 여전히 침탈과 굶주림 속에서 연명해 나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 손오공이 식량을 구하러 화과산 깊숙히 들어가 이런 저런 변을 당하고 있던 사이에, 당나라 군대가 손오공이 살던 마을 복지촌을 습격해 초토화를 시킨다. 가까스로 화과산을 빠져나와 복지촌에 도착한 오공. 자신을 길러준 동네 주민들은 물론, 이웃의 모든 사람들까지 처참하게 죽어있는 광경을 보며 망연자실한다. 그 순간, 화과산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고, 손오공은 마치 뭐에 홀린 듯 발걸음을 다시 그 쪽으로 향하게 된다. 화과산의 가장 깊은 곳, 수렴동이라는 곳엔 물을 다스리는 거대한 외눈박이 원숭이 요괴 '무지기' 가 민심을 미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쇠사슬에 꽁꽁 묶여있었다. 손오공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 곳까지 가서 무지기와 마주하게 되고, '제천대성' 이라고 칭하는 무지기는 손오공에게 "넌 나의 핏줄이다" 고 말한다. 자신이 요괴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손오공. 

 하지만, 손오공은 무지기의 계략과 술수로 인해 '제천대성' 의 칭호를 잇는 머리테를 쓰게 된다.
제천대성의 칭호를 잇는다는 것은 무지기를 위해 세상에 전란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지기는 힘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원념이 필요했고, 세상에 전란이 멈추지 않아야만 그것이 가능한 터였다. 무지기는 예로부터 인간들을 미혹하고 자신의 힘을 빌려주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나라를 세워 할거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머리테를 쓰자 손오공 또한 끊임없이 무지기의 목소리와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원혼들의 원망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손오공에게 정신적인 고난을 주고, 실제로 머리테로 인한 신체적인 고통까지 함께 주어 크게 괴롭힌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현장' 이라는 승려가 불경을 외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 순간 손오공을 괴롭히던 머리테의 죄는 듯한 고통은 물론, 원혼들과 무지기의 원념까지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현장과 손오공의 인연은 그리 쉽게 닿질 않고, 반당군인 유흑달의 휘하 '홍해아' 를 만나게 되며, '제천현녀 용아녀' 와 산적 두목인 '금각. 은각' 형제 등을 만나 대당 반란의 중심으로 휩쓸리게 된다.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충실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손오공이 원숭이라는 설정 자체를 좀 더 리얼하게 접근하는데, 마치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해석할때, 곰과 호랑이를 곰을 섬기던 족속, 호랑이를 섬기던 족속 등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게 손오공이라는 '원숭이' 를 재해석 한다. 이 작품 안에서는 거대한 원숭이를 '제천대성' 이라고 섬기던 일종의 민중 신앙을 기반한다. 당연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역시 등장한다. 금각과 은각, 홍해아 등도 리얼하게 재해석되어 등장하며, 손오공의 머리테나 여의봉의 재해석 또한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민중들에 대한 묘사도 대단히 디테일하고 리얼하다. 도적에게 침탈당하고, 지역의 군인들에게도 수탈을 당한다.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기도 하고, 생존 자체가 고난이었을 당시에 민중들. [서유요원전] 의 이야기의 핵심은 손오공과 현장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나간 평범한 민중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완벽하게 리얼한 역사적 접근이라는 것은 아니다. 손오공과 각종 인물들이 '사람' 이었다는 가정 하에,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시켰을 뿐, 만화적 상상력이 배재되어 있지는 않다. 위 장면에서도 보여지는 '주염' 이나 이야기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무지기 ' 등의 요물이나 요괴들도 등장하고, 신기한 주술이나 요술들도 등장한다. 이것들은 손오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좋은 양념이 된다. 실제 역사와,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의 현실적인 재해석, 그리고 만화적 상상력까지 절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이다. 
 

 [서유기] 가 수많은 중국의 고전들 중에서도 '기서' 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는 단순히 모험과 드라마 뿐이 아니다. 서유기는 '천축으로 향하는 여정' 그 자체가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인 동시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특히 현장삼장과 손오공일행이 겪는 사건들은 81난은 유,불, 선이 결합된 일종의 종교적 '레벨업' 의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가지 사건을 통해, 한가지를 얻어내고, 두번째 사건을 통해 부족함을 절감하며, 또 무언가를 얻어내며 사건을 극복해낸다. 끊임없는 유혹과 끊임없는 사건들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고뇌하고, 고민하면서 하나하나 깨달음을 얻어낸다.  


 [서유요원전] 의 뛰어난점은 바로 이런 원전 [서유기]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부분에 있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화려한 액션과 치열한 전투 장면들이 관심을 사로잡지만, 무엇보다 심각할 정도로 끝없이 고민하는 두 인물, 손오공과 현장이 핵심이다. 손오공은 자기 안에 또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제천대성이라 칭하던 괴물 '무지기' 가 불어넣은 자아. 그리고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손해의 아들 손오공이라는 자아. 손오공은 끊임없이 이 두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현장은 승려로써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불교라는 종교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하고 있다. 아무리 공부하고 고찰을 해도 깨달아지지 않는 불교의 오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어느정도 경지에 오르면 자신이 깨달은 종교적인 세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럽고 추한 현실적인 세상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킨다. 그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천축행을 결심하는 현장.
 

 지금까지 애니북스를 통해 3권까지 정식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갈수록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진다. 게다가 400페이지를 넘나드는 엄청난 볼륨도 대단히 맘에든다.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엄청난 이야기와 두께!!

 



 
1970년에 데뷔한 노작가 답게, 그림은 엄청 세밀하거나, 세련되지는 않다. 말 그대로, 옛스러운 그림과 투박한 펜선. 
 

 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출력 만큼은 정말 대단하다. 이 당시의 망가는 보다 '망가식 스토리텔링' 에 입각한 작품들이 많았다. 지금도 일본 망가들은 '시선의 흐름' 과 그것을 통한 전달력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만화나 일본망가가 동일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래픽 스토리텔링' 또는 '비주얼 내러티브' 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컷과 컷의 흐름을 통해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특히 잡지만화에서는 이것에 대해 거의 공식화 되어있는 일종의 연출의 기법과 같은 것이 있다. 미국 만화에서 역시 독자들에게 통할 수 있는, 통하게 되는 공식과도 같은 흐름이 존재한다. 네모난 컷 박스는 어떻게 변화를 주고, 이 컷 안에는 어떤 효과를 주는 그림을 넣고, 이 페이지 안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컷은 어떤 컷의 어떤 그림이고 등, 효과적인 스토리 텔링을 위한 나름의 노하우들이 축적되어 있고, 이것들의 토대는 바로 테츠카 오사무나 오토모 가츠히로, 모로호시 다이지로 같은 1960~70년대의 작품들이다.

 그 때문인지 이 작품은 확실히 요즘과는 다른 전통적인 연출법이 눈에 띈다. 최근의 만화들처럼 영화적인 연출법이 사용되어서 역동적이거나 세련된 맛은 없지만, 독자에게 보다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하다.
노 거장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손오공과 현장삼장의 모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더욱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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