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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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독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니시던 작은 교회를 다녔고, 대학때 보다 깊이있는 예배와 공부를 위해 좀 더 많은 신자가 섬기는 교회로 옮겼다. 20대 중반에는 청년부 회장도 맡고, 제자훈련도 받으며 신앙을 키웠고, 열정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적인 신앙관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현재 한국 교회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심도있는 공부를 하기도 했고, 젊고 박식하며 열린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이슬람, 성공회, 가톨릭을 넘나드는 성경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의문만이 가득했다. 사후의 세상부터가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실 종교의 대부분은 현실의 삶 보다는 사후의 삶을 중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사후 세상이 믿겨지지 않는다니. 그럼 뭘 믿길래 교회를 다니냐는 말도 들었다!

 결국 난 '기독교를 반만 믿는다.' 고 말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 그것을 한쪽만 믿는 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 즉 기독교의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이지만, 그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들의 종교 기독교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한 종파는 "예정론" 을 신봉한다. 내가 다니던 장로교의 교회도 철저하게 예정론을 신봉하는 교파였다.

 돈독하게 지냈던 목사님은 내게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더랬다. 내가 하나님을 접하고, 어쩌면 이렇게 의문과 의심을 갖는 것 또한 그분의 예정이신거고, 나는 결국 그분의 예정으로 인해, 의문과 의심을 거두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의문과 의심이 학문으로서의 '신학' 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목회자의 길이 아닌 신학도의 길을 권유하기도 하셨었다. 모든 의심과 의문을 내려놓고 순전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하게 '신' 의 뜻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신이 원하시는 대로' 라고 고백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인' 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그런 신앙인의 표상인 '목회자' 즉, '목사' 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중순 평양.

유엔군의 개입으로 열세였던 한반도의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전쟁 초기, 낙동강 유역까지 밀렸던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휴전선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함락시킨 뒤, 기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한다. 바로 그 시기의 평양. 육군 특무대 정치정보국 소속의 이대위는 유엔군 치하의 평양으로 파견되어, 파견대 대장인 장대령과 조우한다.

 이 대위가 평양으로 파견되어서 받은 첫번째 임무는 평양에서 일어난 목사 실종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평양이 유엔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평양 시내의 주요 교회의 목사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납치당한 14 명의 목사들 중 12 명이 총살되었고, 2명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대위는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를 만나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 12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과정중에 비 인륜적인 집단 총살을 당했다면 서방 국가들에 북한군의 만행을 선전할 수 있다. 육군 정치 정보국은 이러한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두 목사의 생생한 증언을 통하고자 한다. 이 대위는 자신의 임무를 위해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나서는데, 두 명 중 젊은 목사인 '한목사' 는 미쳐버렸고, 남은 한명의 목사, '신 목사' 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

 과연 신 목사가 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대위는 죽은 열두명의 목사들 중, 절친한 사이인 박 대위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종교색이 강한 작품이다. 사건의 핵심에는 '신앙인' 이 자리잡고 있고, 또다른 축인 '박 대위' 는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도' 라고 부르며 의절한 상황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고, 죽음이 눈 앞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쳐가는 전쟁터. 그것도 적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나는 신앙인들의 갈등. 그것이 참으로 적나라하고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편이다. 토론과 논쟁의 핵심은 '설득' 에 있다. '종교' 는 본질적으로 토론이나 논쟁과 매우 흡사하다. 종교는 태생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위한 거대한 기구가 있고, 때론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한 특권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국 '설득' 이다. 인간은 '신'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섭리' 에 종속된 존재이며, 때로 그 인간의 인생은 '신' 또는 그 '섭리' 의 손길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지를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목사, 신부, 랍비, 부처, 도사, 사두인...등등이 성경, 성서, 카발라, 꾸란, 경전, 기도문 등등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종교는 아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지만 엄청나게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으니 바로 '신앙' 즉,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이성과 논리를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신앙인들은 불가사의한 대상인 동시에, 존경스러운 대상이다. 내가 신앙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것은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해소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얄팍한 지식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완벽하게 '신앙 안' 에서만 작용해야 한다. 신앙이 이성과 논리와 접목되면, '신의 뜻' 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고 적용시키려는 행동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대단한 신앙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뿐 만 아니라, 중세시대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신의 뜻' 을 마구잡이로 해석해대곤 했다. 신앙인들에게 '신의 뜻' 이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메시지이고, 신의 뜻을 해석하고 받든다는 '목회자' 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들에겐 신의 목소리와도 같을 터다.

 

 그 때, 1950년 10월의 평양은 지옥과도 같았을터다.

친구, 친지들은 어디선가 날아와 아무데서나 펑펑 터져대던 폭탄의 폭발에 휘말려 산산 조각나고, 연료가 없어 생쌀을 씹어야 했을터다. 생쌀과 같은 곡기라도 있었으면 다행이었을 터다. 유엔군으로부터의 구호 식량은 간신히 한 끼를 떼울 정도였을 터이고, 그것도 몸이 성해야 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식수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씻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터이고, 밤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격포와 전투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터다.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전염병. 그 속에서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평양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들 중 하나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1904년에 시작된 '원산 대부흥'의 종결점을 찍은 일종의 '기적' 으로서, 이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기독교가 퍼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치고 굶주린 평양 시민들에게 목회자들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터다.

 그리고, 북한군의 잔혹한 총 앞에 무너져간 열두명의 목사들.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장렬하게 죽어간 열두명의 목사들이야 말로, 피폐해진 삶에 큰 위안이 되고, 자긍심이 되었으며, 원동력이 되었을터다.

 

신 목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열두명의 목사들이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했을 것이다. 북한군의 총부리 앞에 하나님을 부인하며 목숨을 구걸한 목사가 있었을수도 있다. 신 목사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두번째는, 자신이 신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열 두 명의 목사들은 죽었는데, 신목사와 한목사는 살아남았다. 한목사는 미쳤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신목사는 멀쩡히 살아나왔다. 열두명의 목사들은 최후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신목사는 마지막 순간 신앙을 거부하고 북한군이 시키는대로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과연 신목사는 무엇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의 신은. 그의 하나님은 어떤 일을 원하고 계시는가?

 

 작품을 읽는 내내 굉장히 괴로웠다.

과연 나라면 어찌했을까? 그리고 신목사가 처해있는 심각한 딜레마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신목사가 처한 환경은 '인간' 예수가 처해있는 상황과 대단히 흡사하다.

"저들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지만,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깊이 묻어나 있다.

죽은 목사의 숫자가 예수의 제자들과 동일하게 열두명이고, 박 대위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와 겪는 갈등은, 신목사가 자신의 하나님(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과 겪는 갈등을 대비시키고 있다. 박대위가 아버지의 신앙을 부정하고 미워하듯, 신목사 또한 자신의 신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부정의 마음이 자라난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실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양심' 이라고 불러보기로 하자. 결국 '신의 뜻' 은 우리의 양심의 방향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즉, 신의 유무나 신앙의 유무를 떠나도 이 작품이 하는 이야기는 명명백백하다.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고하지만, 대중들의 영혼은 구제할 수 있다. 어쩌면 일신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손가락질 받고, 비난받을 것이며 영원한 불명예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실을 드러내고 본 것을 모두 말하면 피폐해진 대중들의 영혼은 더욱 더 상처받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지만, 더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절망에 찬 대중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다.  

 

 '순교'

종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행위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하면 될까?

사람을 위한 희생이 아닌, 신을 위한 희생을 순교라고 한다. 순교의 개념은 어느 종교에나 있지만,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종교 자체의 기반이 '예수의 희생' 에 있기에 순교의 의미가 더욱 크고 중하다. '신앙' 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선 타인의 희망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희생은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종교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은 다름아닌 희생에 있다. 희생은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소외받은 자들에게 향했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으며,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까지 감싸안았던 숭고한 희생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종교적인 멘트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신목사의 결단 또한 그래서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무엇보다 절망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강인한 모습이 아름답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섬기는 종교의 지도자였지만, 스스로 그 율법을 어겼고, 그에 대한 책임도 끝까지 지고 간다. 자신의 절망을 타인의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대중들이 던지는 돌을 당당하게 맞아내고 비난들을 아낌없이 받아낸다.

 그도 인간이기에 한때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다. 때로는 스승 예수를 부인하기도 했고, 누구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이 모시던 스승 예수와 그가 설파하고자 했던 진리, '복음' . 즉 신앙을 위해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불에 타 죽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듯, 타인의 행위를 통해 감동받고, 감화되기 마련이다.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래한 초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목 앞에 칼을 들이대고, 굶주린 사자의 이빨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 에서 지극한 절망 속에서도 불꽃처럼 피어나는 희망을 본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절망하지만, 사람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진실과 사실. 그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의 뜻과 인간의 뜻. 그것들 중 진실은 무엇이고, 사실은 무엇인가?

희망과 절망. 그것의 차이 또한 무엇인가?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신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믿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이 있다고 믿고, 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과,

신이 존재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국 이 작품 속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의 뜻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은 등장한다.

모든 진실과 모든 절망. 그리고 모든 고통과 모든 고난을 등에 지는 사람.

자신의 모든 삶을, 눈 앞에서 고통받는 나 아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완벽하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  그렇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진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진정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 을, 진정한 '신앙인' 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한층 더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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