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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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군 2022년 초입에 이 책을 잡게 된 건, 의도와 우연이 적당히 겹친 결과일터다.

이 책에 의하면 손석희 앵커가 뉴스룸을 마지막으로 진행한게 2020년 5월이었고 이 책의 초판 인쇄가 2021년 11월이니, 저자도, 출판사도 엄청나게 열심히 제책작업에 매달렸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뉴스" 를 다루고 있으니, 무엇보다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을터이니, 쓰는것도 쓰는거지만, 검열, 교열 등 후반부 작업에 훨씬 더 많은 품을 들였을터다.

요즘 젊은, 아니, 나도 아직 젊으니, 어린 친구들은 손석희 '앵커' 보다 손석희 '사장' 이 익숙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80년대 초반생이나 70년대 형님 누님들에게 손석희란 이름은 'MBC' 와 '뉴스' 그 자체일 것이다.

매끈한 외모에 적확한 발음, 그리고 매력적인 음색과 발성을 자랑하는 손석희는 백지연 앵커와 함께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언론인이다.

이 책은 방송언론인 손석희로서 그가 MBC를 떠나는 순간부터 JTBC 사장이 되어, 뉴스룸을 런칭하여 앵커석에 앉았다가 내려오기까지 겪은 일들에 대한 '가벼운' 기록과 그 시간 전체를 지배했던 묵직한 상념들을 적어낸 책이다.

대선 시즌을 맞아, 음악 선곡 하나때문에 여당의 압박에 하루아침에 라디오 DJ에서 하차한 이재익CP와 기자협회가 좌편향 되었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모 후보, 발언 하나를 꼬투리잡아 프로그램 하차 요구를 받는 YTN 변상욱 앵커끼지, 방송언론인의 수난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여러가지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젠다 키핑" 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 이 책 전체가 방송언론인 손석희의 머릿속에 '어젠다 키핑'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구체화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소 생소했던 이 개념은 첫 챕터의 제목부터 등장하여, 손석희 사장이 JTBC에서 처음으로 다뤘던 삼성 관련 사안이었던 "노조 무력화 관련 문건" 과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이후 어젠다 키핑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구현되고, 최순실 타블렛 사건을 통해 다듬어진다.

이어지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의 탄핵은 더 이전, 손석희가 MBC를 떠나게 만든 단초였던 이명박 시절 MBC에 가해진 압력 속에서 공고해지고, 이후 치뤄진 대선을 통해 자리잡게 된다. 서지현 검사로 시작해 김지은씨로 폭발된 미투 현상과 북한과의 화해무드부터 경색국면까지 더듬어가며 어젠다 키핑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가 닿는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시 JTBC로 출근하게 된 계기를 찬찬히 되짚으며 '저널리즘' 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으로 회귀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을, 어쩌면 '촉발'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당사자의 책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은 JTBC가 보도했던 최순실 타블렛부터였고, '젠더 감수성' 의 근원인 미투의 시작도 서지현 검사가 JTBC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테니까.

 

언론이란 무엇인가? 언론인이란 어떤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어젠다 키핑' 은 결국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의 초입에 언급된 필립 티치너의 '언론의 경비견(Guard dog) 모델 가설' 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미디어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언론은 '감시견' 과 '애완견' 으로 비유되어 왔다고 한다.

감시견으로서의 언론은 사법, 입법, 행정의 3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제4의 부 역할을 맡아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것이고, 애완견 언론은 주인 무릎에 앉아 애교를 떨듯 정치, 경제 권력 등 엘리트 계급에 충성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경비견 언론은 전체 사회가 아니라 기득권 집단을 위한 경비견으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

애완견 언론과 비슷해 보이지만, 경비견 언론은 기득권을 의존하지만, 복종하지는 않으며 지배세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침입자에 대한 경고를 미리 울리기도 하고, 지배그룹 내에 불화가 생기면 그 갈등을 정치화 하고,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경비경 언론은 특정한 지배집단을 위해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지배 시스템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가설을 증명하는 좋은 예시가 실려있기도 한데, 나는 영화 "내부자들" 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언론사 논설주간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 책은 저자 손석희가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개념 안에 어젠다 키핑이라는 또다른 개념을 녹여내고 구체화 시키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개발이랄까.     


이 책은 에세이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아무래도 "뉴스" 에 관한 소재이니만큼 팩트를 정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워낙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분석한 서적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담긴 함의를 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점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손석희" 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잘 알고, 대선을 앞둔 마당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의지가 보였다.

이 책에서만큼은 '운동가' 가 아닌, '저널리스트' 로서의 "손석희" 로 읽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때문에, 진보쪽 인사들이 손석희에 가했던 비난, 그리고 비난을 마주한 손석희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뉴스룸의 상징이었던 앵커브리핑에 대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중간에 작은 부분을 할애해서 MBC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정들과 JTBC로 취임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라면, 부분일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MBC시절의 손석희는 MB시절이었지.    




-.

JTBC의 뉴스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나는 아론 소킨 각본의 드라마 "뉴스룸" 이 먼저 떠올랐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윌은 메인 앵커이지만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선 후보 토론에서 양쪽에 동일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사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싫어하지만, 공적으로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치적 이념이 완전히 다른 국가를 머리위에 얹고 사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보주의자는 곧 사회주의,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북한과 결부시키는 사회니까.

이 드라마 속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처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발전적인 타협이 가능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깊게 들어가보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지향점은 같다. 

같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게 정치이념의 지상목표니까.

민주주의의 최종 진화단계로 여겨지는 기본소득 개념이 결국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되살릴 필요도 없고,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토지제도가 굳건한 사적소지제 안에서도 다양한 공유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역시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이겐 아직 너무나 먼 일이지만.  



-.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쓸 즈음은 대선 전이었는데,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미 대선이 끝난 후다.

앞으로 시작될 5년.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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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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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챕터는 총 세개로 이루어져 있다.

"1996" 과 "1997". 그리고 에필로그인 "그 후" 이다. 하지만, 마치 이 작품은 앞의 챕터들에 비해서는 얇디얇은 몇 페이지 "그 후" 를 위해 쓰여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마지막에 던지는 파문은 상당하다. 


소설은 1996년 8월, 마지막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가 컬럼비아 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빌리" 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을 설명하는 몇 문장들과 빛과 공기마저 느껴질만큼 디테일한 분위기 묘사가 순식간에 나를 잡아끌었다. 

화자가 빌리와 함께 수강하는 과목은 창작과 합평으로 이뤄진 워크숍으로 소수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창작물에 비평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교류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형태는 국내의 문예창작 수업에서도 자주 이뤄진다고 알고 있다. 문창과 출신의 지인들로부터 이 과정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고, 분야는 다르지만 나 역시 창작에 살짝 발을 담궜던 사람으로써 비슷한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발가벗겨져 몸의 구석구석을 평가받는 느낌. 나아가 X-ray 나 CT, MRI로 피부 아래, 근육 아래, 뼈와 장기들까지 샅샅히 드러나는 느낌.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과정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한다. 

빌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변호해줬던 인물이었다. 

이는 이후 화자가 빌리에게 품게되는 막연한 호의, 또는 호감에 대해 높은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소소한 대화들과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렇게 능숙하게 화자와 독자들에게 빌리를 소개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든다.  

곱씹어보면 뜨악한 일이지만, 화자가 안지 2주밖에 안된 빌리에게 홈 쉐어링을 제안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자와 빌리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첫눈에 반해서 시작하게 되는 연인관계와 비슷하고, 홈 쉐어링을 시작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에피소드 역시 그러했다.

호감에서 시작된 무조건적인 호의와 정기적으로 갖는 둘만의 시간, 자연스러운 집안일 분담과 그로인해 시작되는 갈등, 그렇게 쌓이는 오해와 악감정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퀴어 로맨스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화자는 빌리의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매일 바에 출근해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벌고, 학비를 벌어야 했던 빌리는 심지어 바 지하 창고에 딸린 다목적 룸에서 살아야 했지만, 화자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자녀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고, 좁은 침대와 리놀륨 바닥으로 대표되는 대학 기숙사조차도 마다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뉴욕의 집세를 무시하고 대고모가 거주하던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비는 일리노이주와 보스턴주라는 서로의 고향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빌리는 "블루칼라", 화자는 "화이트 칼라" 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 드러나는 빌리의 정치적인 성향, 자유로운 성생활, 인종적 편견과 추구하는 지향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저자는 독자에게 빌리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롯하게 화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화자처럼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빌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게 된다.

사실, 빌리는 엄청나게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 문학 등 예술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의감 있고, 압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기까지 할 뿐 아니라, 리더쉽까지 있는 인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시점상 화자가 보지 않는 동안 빌리가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빌리의 전형성(과 그로 인한 변화) 때문에 빌리는 갈수록 매력이 떨어져갔고, 반대로 화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화자가 저지르는 행동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챕터로 향한다.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한 이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싫어하게 될 터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필립 로스의 [울분] 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불가해한 삶의 불공정성, 결코 "올바른 선택" 이란 것이 없는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 대한 웃기지 않은 농담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다. 삶을 뒤바꾸는 농담 같은 선택. 화자 역시 그런 선택을 한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한 여러가지 배경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고, 빌리는 그 반대였다. 

빌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사고를 넓혀가는 한편, 화자는 자신만의 아파트먼트 안에서 안온함을 누리며 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침잠한다.

어쩌면 "창작" 이라는 욕구는 화자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비상구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챕터는 그가 그 비상구의 문을 완벽히 닫은 후의 이야기였다.

빌리의 삶과 업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심 평가절하 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려지기도 했다.

정말 많은 부분, 콕콕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빌리가 되고 싶지만, 화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의 꿈은 갖고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지점은,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는 잣대는 언제나 시대와 상황이 결정한다는 부분이며, 사람들 사이에 재능이라는 차별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재능이란 것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형서 작가의 "신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에서는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지만, 개인의 고집이라는,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적절함' 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리 적절해도 또 바뀌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대중을 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던 작품도, 어느샌가 성차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로 바뀌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절대라고 믿는 정의나 도덕, 윤리관은 이념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던 작품들이 언젠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추앙받는 작품들도 미래의 어느땐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스러질 수도 있다.

너무나 불공정하고, 너무나 불가해하고, 너무나 괴롭지만, 중독적이고, 또 중독적이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창작의 기술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훈련하고 쌓아간다. 

이는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히고, 엄마에게 "안먹었어요." 라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기만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메시지와 동갑내기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한 행위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하는 수많은 공상들과 책과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창작" 의 기술들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 속에서 창작자로의 꿈을 꾸게 된다.

마치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숨결을 느껴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자연현상에 궁금함을 느껴 과학에 투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 빌리와 화자,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같은 인물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창작 지망생들은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된다.

어느정도 학습을 한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과, 자기애에 빠지는 쪽이다.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와 빌리가 이미 대학 4년 이상의 학업을 마치고 심화 단계인 대학원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 벽을 넘어선 단계이다. 화자가 친한 친구들 중엔 데뷔한 친구들이 아예 없고, 화자 자신도 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꽤 해본 인물이다.

전업작가가 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학업중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화자도, 빌리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은 아니다.

다만 빌리는 서너기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타고난 건 맞지만, 동 세대 미국을 통틀어보면 그다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실 그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자의 자기혐오는 곤란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땀샘으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의 역량을 알았고,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기술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실 기술은 재능의 부족을 상당히 보완한다.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플롯과 구성이 탄탄한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거기에 "뭔가" 가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기술로 보완되지 않는 "뭔가". 사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는 이로써 가장 괴로운, 그리고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걸, 작품 안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무책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빌리는 그 "뭔가" 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화자는 빌리가 수정해준 원고로 작은 승리를 한번 맛봤고, 그 뒤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빌리는 자기혐오와는 달과 태양처럼 동떨어진 존재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형용되는 외모도 한 몫 했을테고, 장학금을 받는걸 기본으로 생각할 만큼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화자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처럼 그에게 끌렸을터다.

그리고, 결국은 그에게서도 듣게되는 "뭔가" 의 "결여".

아마 화자에게는 그 지적이 쐐기처럼 깊게 박혀있었을터다.

책 속엔 나오지 않지만, 대학때에도, 어쩌면 그 전부터도.

그리고 그 쐐기를 빌리가 내려치는 순간, 그 울림이 어딘가로 폭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머물던 아파트먼트는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유일한 둥지였다. 비록, 대학원시절 한정이었겠지만, 그 안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그리고, 그 둥지가 뭉개지는 순간, 화자는 자기혐오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삶이라는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지만, 빌리를 통해 잠깐 가질 수 있었던 "뭔가"와 결별하고, 창작이라는 세상과의 소통마저 포기하고.


나는, 화자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빌리가 마지막에 외쳤던,

"여기서 평생 살 생각이냐" 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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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로 배우는 배경 일러스트 쉽게 배우는 만화 시리즈 65
사케하라스 지음, 김재훈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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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클립 스튜디오 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책입니다.


바야흐로 대 스케치업의 시대다. 


지금까지 만화에서의 배경작업은 대부분 트레이스로 이뤄져왔다.

작품의 설정 구상이란 캐릭터와 스토리 뿐 아니라, 작품의 배경과 환경도 포함된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 구상 기간에 영화의 로케 장소를 탐색하듯, 여러 동네를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아직 데뷔를 못한 지망생들은 필름 값도 부담이어서 원하는 각도대로 쉽게 찍을 수 있는 집이나 작업실 인근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면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배경자료집들을 외서 전문 서점에서 구입하곤 했는데, 필름 인화 가격을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 그게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작법서보다 더 필요한게 자료집이었고, 코믹월드 같은 만화 페스티벌에는 동인지 말고 그런 자료집을 웃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코미커즈" 같은 만화 지망생들을 위한 잡지 뒷부분엔 자료 사진들이 흑백으로나마 실려있기도 해서, 나도 열심히 스크랩해서 모아두곤 했다.

작가들의 작업실에 견학을 가보면 책장 가득 배경화집을 비롯한 각종 자료집과, 잡지 등에서 손수 모은 스크랩북, 직접 찍은 배경 사진들을 모아놓은 클리어 파일들이 꽂혀 있곤 했다.

그것이 모두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인터넷만 두들겨보면 자료로 쓸만한 수많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적당한 금액을 지불하면 트레이스를 할 수 있는 사진들을 구매할 수도 있다. 역시 과거의 필름값을 떠올리면 납득할 만 한 수준이다.

게다가 디지털 작업이 일반화 되면서, 이렇게 구매한 사진을 확대, 축소할 수 있고, 트레이스 대신, 포토배쉬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직접 가공할 수도 있다.


모바일 환경처럼 작은 화면으로 보는 웹툰의 특성상, 적당히 가공된 배경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작화의 퀄리티가 크게 높아 보일 수 있다.


그래선지, 이제는 사진을 가공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의 웹툰들이 3D소프트 웨어인 "스케치업" 으로 렌더링한 배경을 갖다 쓴다.

문제는 스케치업이 3D치고 가벼운 프로그램이라, 곡선렌더링에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고, 자신의 그림체와 어우러지지 않으면, 굉장히 튄다는 점이다.

특히 구도, 원근감의 기초가 부족한 지망생들이 어설프게 합성하면 오히려 퀄리티를 크게 낮춘다.


이 책은 이러한 오류를 최대한 잡아줄 수 있는 정보들이 가득하다.


내가 직접 찍을 수도 있지만, 종이 질이 좋아서, 넘나 반들거려서 인터넷 서점에서 홍보자료를 퍼왔다.



 이런식으로 배경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첨삭하듯 소개하고 있다.

주로 오른쪽 면에는 이론적 설명이, 왼쪽 면에는 실전활용법이 소개되고 있다.

사실,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내용들이라 지나치게 요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런건 원근과 구도에 관한 이론서를 읽는게 낫고, 실전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넘어가기 쉬운 작은 글씨들로도 다양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꼼꼼히 읽으시길...


다만, 배경을 이제 막 입문한 초보자들이라면,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으니, 꼭 구도와 원근에 관한 다른 책들을 함께 읽어보길 추천한다.

한스미디어에서는 "배경작화" 라는 책이 있는데, 기본기가 잘 소개되어 있고, 영진닷컴에서는 "일러스트와 만화를 위한 구도 노하루" 라는 책이 있다.

두 책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한권 선택해서 함께 보시길.

(영진닷컴에서 나온 무로이 야스오의 "가장빠르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작화기술" 이라는 책의 후반부에 실린 구도 잡는 법에 대한 노하우도 배워볼 만 하다.) 


일본의 만화 인프라는 엄청나게 깊고 넓다.

지금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책과 비슷한 작법서들이 이미 수십년 전부터 수백종씩 쏟아지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웹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인프라가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어렸을때, 열심히 만화공부를 하던 그 시절에 지금의 반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이 책 역시, 그정도로, 참 좋은 책이다.

다양한 정보들이 보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작법서를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는 실력이 올라갈 리 만무하다.

꼼꼼하게 읽을 뿐 아니라, 반드시 한번쯤은 따라 그려보는 것이 좋다.

완벽하게 모작을 할 필요는 없지만, 트레이싱은 절대로 안된다. 

트레이싱은 결코 실력을 올려주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러프하게 콘티 형식으로 모사를 하는 것이 백번 천번 낫다.

스케치업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원근과 구도를 손으로 그릴 줄 아는 사람의 합성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큰 차이가 난다.

작은 모바일 화면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술의 깊이는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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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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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옛날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바로 그 작품을 드디어 만나봤다. 

무려....1965년작이다.

처음 접하면 그 볼륨감에 압도될 수도 있지만, 비견되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두꺼운 정도이고, [왕좌의 게임] 이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 비하면 가벼운 분량이다. 


내용과 감상에 들어가기 전에, 이 소설의 장르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SF장르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들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은 크게 "하드SF" 와 "소프트SF" 로 나뉜다.

"하드SF" 는 이름처럼 제법 엄격한 공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들을 묘사하는데 치중한다. 어떤 우주선이 등장한다고 했을때, 그 디자인이나 연료, 대기권을 돌파하는 모습 등등이 실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 묘사된다. 사회의 모습이나 환경, 등장인물들의 직업도 모두 과학적, 공학적 정합성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허술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 작품을 둔 작가들 중엔 실제 공학박사나 석사 학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먼 예로는 클래식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부터 가까이는 [마션]의 엔디 위어 등을 들 수 있다. 

"소프트SF" 는 공학적으로 정교한 기술보다 인류,사회학적-혹은, 문학적 완성도에 치중한 작품들을 포함시키는데, 하드SF 만 엄격하게 나누고, 그 나머지 전체를 소프트SF 라고 통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지 오웰의 [1984] 나 브래드 버리의 [화성연대기],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연대기] 등이 이에 속한다.


즉,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는 '소프트 SF'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체역사, 시간여행, 돌연변이, 외계인, 초능력, 포스트 아포칼립스, 우주여행, 우주전쟁 등등 수많은 소재들로 카테고리가 나뉜다. 

그 중 "우주" 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스페이스 오페라" 쪽에 포함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내용에 따라 "스페이스 어드밴처" 물과 "스페이스 로망스" 물로 나뉘는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학이 아닌 영화와 드라마를 예로 든다면, 전자는 [스타트렉] 후자는 [스타워즈] 를 상상하면 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는 단어 그대로 주 내용이 우주 곳곳을 여행하며 갖가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생산해내고, 많은 드라마가 "우주선 내부" 에서 벌어진다. 

반면, 스페이스 로망스는 특정한 환경을 가진 행성 안에서 고전적인 서사를 풀어낸다.

우주선과 외계행성을 빼면, 판타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와 로망스는 다소 비하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하드SF 가 엄격한 과학적 근거에 매달리는 사이, 문학적-또는 대중적- 완성도에 집중하며 빠르게 장르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특히,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가 그려내는 외계 행성 문명에 대한 묘사는 인류, 사회학적 정합도가 무척 뛰어나고,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에 등장하는 AI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은 하드SF와의 경계마저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래리 니븐의 [링 월드] 시리즈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참전해 "이 작품이 하드SF인지에 관해" 아직까지도 치열하게 논쟁 중이기도 하다. 실제 공학자들이 작품 속 등장하는 구조물들을 정교한 물리 엔진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을 정도. (역시 덕 중 덕은 양덕....ㄷㄷㄷ) 



 [듄] 은 이러한 스페이스 로망스의 특징들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러개의 항성으로 이루어진 항성계 제국 "페디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파이스" 라는 자원으로, 섭취하면 노화를 멈추게 해주는 특별한 광물이다.

페디샤 세계는 전제 군주제의 형태로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최고자대표회의" 라는, 마치 프랑스 혁명기의 3부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귀족, 군주, 기업의 연합체에 묶여있었다. 심지어 제 아무리 황제라도 함선을 이용한 우주 여행도 "우주조합" 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권력 구조는 오직 스파이스를 둘러싼 치열한 이권다툼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스파이스의 유통 구조야말로 페디샤 우주를 지탱하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가장 순도가 높은 스파이스 중의 스파이스, "멜란지"가 매장되어있는 사막의 행성 "아라키스".

페디샤의 81대 황제 샤담 4세가 블라디미르 하코넨 가문이 맡고 있던 아라키스 행성을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에게 맡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레토 공작에게는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는 대를 이은 원수 중의 원수였기 때문. 

제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지만, 블라디미르가 레토에게 자신의 노른자위 영지를 순순히 내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레토 공작은 기꺼이 그 함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레토 공작의 아들, 폴.

훗날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어린 소년이 아라키스의 척박한 모래 위에 발을 내딛는다.



 서사 구조 자체는 무척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어린 소년이 부모를 잃고, 여러 고난을 거치며 성장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

심지어, 아라키스라는 "행성" 과 작품의 스펙타클을 책임질 우주 강습만 없으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과학" 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설정들이 매우 디테일하고, 무척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고난과 성장과정이 외면보다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와 함께 아라키스 행성의 원 거주민인 "프레멘" , 페디샤 우주의 여성 종교집단 "베네 게세리트", 냉철한 판단력과 높은 전투력을 지닌 용병집단 "멘타트", 그리고 베네 게세리트의 궁극적 지향점인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 "퀴사츠 헤더락" 등 다양한 설정들역시 잘 맞아 떨어지며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세계에 깊은 설득력을 안겨준다.

스파이스라는 자원과 이를 둘러싼 이권 다툼, 권력을 둘러싼 치밀한 음모도 재미있지만, 스파이스의 최대 매장지이자 우주 최강의 괴물이라 해도 무방할 '모래벌레'가 서식하는 아라키스 행성의 생태계는 물론 각각의 문화나 환경들이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다. 이러한 환경 생태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1960년대 당시에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하던데, 지금 봐도 놀랍고 매혹적일 정도로 정교하다.

 프레멘은 척박한 사막행성에 사는 종족으로, 이들의 물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몸에서 발생되는 모든 수분을 모아 음용하는 기술이 발달했고, 종족의 문화적 색채 또한 물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 대다수다. 속담이나 용어, 삶의 방식들 -예를들어, 누군가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남을 위해 자신의 물을 내줬다' 며 감격스러워 한다거나,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를 회수해서 공동체가 나눈다는 등의-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금새 프레멘들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폴이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이 종족에 녹아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데, 그 덕에 아주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것은 폴의 내면적 성장이다. 아라키스의 생태에 대한 묘사가 무척이나 구체적인 반면, 폴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무척 형이상학적이다.

숨쉴 틈 없이 도입부가 지나간 뒤 펼쳐지는 폴의 각성은 매우 급진적이고, 폭발적이다. 몇 페이지 전까지는, 잠재력은 있고, 영민하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폴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이 곳과 우주 너머를 동시에 보는 능력을 통해 거만하고 오만한 청년으로 훌쩍 뛰어오른다. 워낙에 고위 귀족 자제라 되바라진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만하거나 교만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장의 나머지 내용들은 그가 거만함과 오만함을 버리고,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는 과정들이다.

 그리고, 그런 폴을 바라보는 어머니 제시카의 변화도 무척이나 흥미로울 뿐 아니라, 폴과 사랑을 나누는 차니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설정과 세계관 뿐 아니라, 폴과 제시카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도 매우 매력적이다. 

물론, 이들 역시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지만, 그 전형성에도 개연성이 충분하다.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 뿐 아니라, 그 휘하의 가신들, 거니 할렉과 던컨 아이다호도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유에 박사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강력한 최종빌런, 블라디미르 하코넨 남작의 무게감도 빼놓을 수 없고, 2권에서 활약할 것으로 보이는, 사막에서 태어나는 여동생 엘리아 아트레이데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걸 깨달은 애어른이라, 정말정말 흥미로웠다. 과연 폴 무앗딥의 조력자가 될 것인지, 억제기가 될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모든 인물들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군더더기가 없이 빠르고 효과적인 전개가 이 두꺼운 책을 얇게 만들어버린다.

왜 이 시리즈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는지, 수많은 매니아들이 '아직도' 생겨나고 있는지 납득이 갔다.


 폴은 어느순간,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야를 얻게 된다.

이는 너무나 완벽한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 더 중요해지는 경지다.

자신의 움직임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그 모든 경우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폴 무앗딥에 궁극적으로 바라본 광경은 페디샤 전체가 전쟁의 광기에 빠져들어 온통 불타는 우주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에는 자신의 이름, '무앗딥' 을 외치는 광신도들이 있었다.

그 광경이 보인 뒤로부터 폴은 자신이 그 어떤 경우의 수를 예측해도 그 미래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자신에게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그 미래는 전혀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폴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아직 수천페이지의 "아트레이데스 사가"가 저 앞에 펼쳐져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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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화집 - 그림꾼의 마감병
석정현 지음 / 성안당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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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스튜디오 네이버 카페 "코믹스튜디오-디지털 만화제작을 배워보자!" 카페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입니다.




우선,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적기 전에, 내가 에세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순전히, 작가의 "이야기" 보다 국내 최고의 디지털 드로잉 작가인 석정현씨의 "그림" 때문이다.

2000년대에 디지털 작화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 석정현 작가의 필명인 "석가"의 작법서나 그림을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디지털 작화계(그런게 있다면)의 지평을 넓히고 디지털 일러스트의 표준과도 같은 이정표를 세운 작가가 바로 석정현이라는 사람이다.

그가 디지털로 구축한 작품세계는 '코렐'의 "페인터" 라는 소프트웨어를 빼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다.

페인터는 이름처럼 오직 '그림그리기' 만을 위해 개발된 프로그램이다.

무척 직관적이고, 디지털임에도 아날로그의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여러 면에서 '어도비'의 "포토샵" 과 비교된다.

포토샵도 여러가지 플러그인을 설치하면 페인팅 작업에 매우 훌륭한 툴이지만, 페인터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포토샵이 진정 "레이어" 위에 픽셀로 그림을 그린다는 느낌이라면, 페인터는 정말로 종이 위에 수많은 진짜 미술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느낌을 준다.

다만, 그만큼 호환성이 부족하고, 초보자들에게는 허들이 좀 높은 편인데, 석정현씨는 그런 단점을 자신의 작업과정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극복, 결국 "페인터" 라는 소프트웨어의 대중성을 한단계 높여준 이다. (코렐사가 정식으로 한국 홍보모델(?)로 위촉했다는 썰이 있을 정도.)


석정현 작가는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만화적 연출력이나 표현력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아, 만화쪽에서는 크게 대표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이 없지만, 상업 일러스트쪽에서는 꾸준하게 작업하며 비정기적으로 자신의 작업물들을 책으로 엮어 내 왔다. 최근에는 "석가의 해부학노트" 라는 방대한 양의 미술용 해부학 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 책들을 본인은 "소품집" 이라고 하지만, 실려있는 일러스트의 퀄리티는 "소품" 이라 부르기엔 대단히 훌륭하다.


그런 와중에, 이 책 만큼은 정말로 "소품집" 에 가깝다. 작품에 가까운 그림과 함께한 소품집.


실제로, 작가가 활동중인 각종 SNS에 그린 그림이나, 저작권상 문제가 없는, 비상업적인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그 그림에 담긴 작가의 소회나, 당시 SNS 에 함께 올렸던 글들이 실려있다.

일러스트의 퀄리티와는 달리, 글의 퀄리티는 제목처럼 "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과 제목, 표지와 작가까지 아주 잘 만들어진 책임은 틀림없다.


평소에 석정현 작가가 한명의 "예술가" 로서 갖고 있는 여러가지 심상들, 고민들, 그리고 사회에 갖고 있는 이념, 그리고 그 이념들을 표출하기 위한 고심이 충분히 드러난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그걸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냈을테지만, 석정현 작가는 유려한 디지털 붓질로 적어냈다.

전작들과는 달리, 작법이나 기술보다는 보다 직업적, 개인적인 심상들이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


중간중간 맘에 담아둘 만한 이야기들도 있었고, 남편으로, 아버지로 변화해가는 "인간" 석정현씨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오랜 팬으로써 벅찬 내용들도 담겨있었다.

동시에, 재능 없는 나로서는, 운이 딱 맞는 때를 만난 재능 넘치는 자를 바라보는 부러움 역시, 한가득이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그림을 보며, 그 그림에 대한 도슨트를 작가 본인에게 듣는 느낌은, 역시 좋다.



※석정현작가의 인스타를 링크해둔다. 이 책에 실려있는 많은 일러스트들은 이 링크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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