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선을 앞군 2022년 초입에 이 책을 잡게 된 건, 의도와 우연이 적당히 겹친 결과일터다.

이 책에 의하면 손석희 앵커가 뉴스룸을 마지막으로 진행한게 2020년 5월이었고 이 책의 초판 인쇄가 2021년 11월이니, 저자도, 출판사도 엄청나게 열심히 제책작업에 매달렸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뉴스" 를 다루고 있으니, 무엇보다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을터이니, 쓰는것도 쓰는거지만, 검열, 교열 등 후반부 작업에 훨씬 더 많은 품을 들였을터다.

요즘 젊은, 아니, 나도 아직 젊으니, 어린 친구들은 손석희 '앵커' 보다 손석희 '사장' 이 익숙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80년대 초반생이나 70년대 형님 누님들에게 손석희란 이름은 'MBC' 와 '뉴스' 그 자체일 것이다.

매끈한 외모에 적확한 발음, 그리고 매력적인 음색과 발성을 자랑하는 손석희는 백지연 앵커와 함께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언론인이다.

이 책은 방송언론인 손석희로서 그가 MBC를 떠나는 순간부터 JTBC 사장이 되어, 뉴스룸을 런칭하여 앵커석에 앉았다가 내려오기까지 겪은 일들에 대한 '가벼운' 기록과 그 시간 전체를 지배했던 묵직한 상념들을 적어낸 책이다.

대선 시즌을 맞아, 음악 선곡 하나때문에 여당의 압박에 하루아침에 라디오 DJ에서 하차한 이재익CP와 기자협회가 좌편향 되었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모 후보, 발언 하나를 꼬투리잡아 프로그램 하차 요구를 받는 YTN 변상욱 앵커끼지, 방송언론인의 수난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여러가지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젠다 키핑" 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 이 책 전체가 방송언론인 손석희의 머릿속에 '어젠다 키핑'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구체화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소 생소했던 이 개념은 첫 챕터의 제목부터 등장하여, 손석희 사장이 JTBC에서 처음으로 다뤘던 삼성 관련 사안이었던 "노조 무력화 관련 문건" 과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이후 어젠다 키핑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구현되고, 최순실 타블렛 사건을 통해 다듬어진다.

이어지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의 탄핵은 더 이전, 손석희가 MBC를 떠나게 만든 단초였던 이명박 시절 MBC에 가해진 압력 속에서 공고해지고, 이후 치뤄진 대선을 통해 자리잡게 된다. 서지현 검사로 시작해 김지은씨로 폭발된 미투 현상과 북한과의 화해무드부터 경색국면까지 더듬어가며 어젠다 키핑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가 닿는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시 JTBC로 출근하게 된 계기를 찬찬히 되짚으며 '저널리즘' 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으로 회귀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을, 어쩌면 '촉발'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당사자의 책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은 JTBC가 보도했던 최순실 타블렛부터였고, '젠더 감수성' 의 근원인 미투의 시작도 서지현 검사가 JTBC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테니까.

 

언론이란 무엇인가? 언론인이란 어떤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어젠다 키핑' 은 결국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의 초입에 언급된 필립 티치너의 '언론의 경비견(Guard dog) 모델 가설' 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미디어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언론은 '감시견' 과 '애완견' 으로 비유되어 왔다고 한다.

감시견으로서의 언론은 사법, 입법, 행정의 3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제4의 부 역할을 맡아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것이고, 애완견 언론은 주인 무릎에 앉아 애교를 떨듯 정치, 경제 권력 등 엘리트 계급에 충성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경비견 언론은 전체 사회가 아니라 기득권 집단을 위한 경비견으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

애완견 언론과 비슷해 보이지만, 경비견 언론은 기득권을 의존하지만, 복종하지는 않으며 지배세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침입자에 대한 경고를 미리 울리기도 하고, 지배그룹 내에 불화가 생기면 그 갈등을 정치화 하고,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경비경 언론은 특정한 지배집단을 위해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지배 시스템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가설을 증명하는 좋은 예시가 실려있기도 한데, 나는 영화 "내부자들" 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언론사 논설주간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 책은 저자 손석희가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개념 안에 어젠다 키핑이라는 또다른 개념을 녹여내고 구체화 시키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개발이랄까.     


이 책은 에세이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아무래도 "뉴스" 에 관한 소재이니만큼 팩트를 정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워낙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분석한 서적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담긴 함의를 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점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손석희" 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잘 알고, 대선을 앞둔 마당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의지가 보였다.

이 책에서만큼은 '운동가' 가 아닌, '저널리스트' 로서의 "손석희" 로 읽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때문에, 진보쪽 인사들이 손석희에 가했던 비난, 그리고 비난을 마주한 손석희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뉴스룸의 상징이었던 앵커브리핑에 대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중간에 작은 부분을 할애해서 MBC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정들과 JTBC로 취임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라면, 부분일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MBC시절의 손석희는 MB시절이었지.    




-.

JTBC의 뉴스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나는 아론 소킨 각본의 드라마 "뉴스룸" 이 먼저 떠올랐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윌은 메인 앵커이지만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선 후보 토론에서 양쪽에 동일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사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싫어하지만, 공적으로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치적 이념이 완전히 다른 국가를 머리위에 얹고 사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보주의자는 곧 사회주의,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북한과 결부시키는 사회니까.

이 드라마 속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처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발전적인 타협이 가능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깊게 들어가보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지향점은 같다. 

같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게 정치이념의 지상목표니까.

민주주의의 최종 진화단계로 여겨지는 기본소득 개념이 결국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되살릴 필요도 없고,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토지제도가 굳건한 사적소지제 안에서도 다양한 공유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역시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이겐 아직 너무나 먼 일이지만.  



-.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쓸 즈음은 대선 전이었는데,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미 대선이 끝난 후다.

앞으로 시작될 5년.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