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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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개천가에 커다란 고물상이 있었다.

항상 트럭이 드나들던 고물상의 대충 만들어진 울타리 뒤로 한가득 쌓여있는 폐품들은 어린 내 눈에 보물 산처럼 보였다.

한동안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터가 되어 주던 천변에 버려진 오래된 포니 승용차도 거기 어딘가 쳐박혀 있었고, 그렇게 갖고 싶던 다양한 자전거들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렇게 보고싶던 아동 문학 전집이나 동화책 무더기도 언듯언듯 보였다. 

내 첫 자전거도 그 고물상에서 사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보조바퀴를 떼어 주시고 체인에 기름칠을 하고 여기저기 조이고 닦아서 새 자전거처럼 만들어주셨고, 나도 신나게 동네 언덕에서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한동안 동네 어디에나 고물상들이 있었고, 커다란 철가위를 철컥거리며 폐품을 수집하고 뻥튀기로 바꿔주는 아저씨들이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녔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고쳐쓰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내가 사는 동네엔 제법 큼지막한 고물상이 있다. 

무심코 그 앞을 지나다가 지창씨 생각이 났다.

지창씨는 해미의 아버지고, 지창씨와 해미 부녀는 [소각의 여왕]의 주인공들이다. 

일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라는 소설에 버려진 집의 내부를 정리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했었다. '주택보존 서비스' 라 명명되는 이 직업은 오랫동안 방치된 집을 주인이 다시 꾸며 팔기 위해 해묵은 가구와 장식, 쓰레기 따위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당시 그 소설을 읽으며 그 직업에 관한 흥미가 생겨 여러모로 정보를 뒤져보다가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억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어린시절, 그렇게 가까웠던 고물상에 드나드는 트럭들 중 하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찮게 엊그제, 동네 어귀의 빌딩 고층에서 가구들을 내리는 큰 트럭에 [폐가구 수거차량] 이라는 팻말이 크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러니까 지창씨가 이런 트럭을 운전했겠구나.' 

그리고 이윽고 해미가 물려받게 되겠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열광금지, 에바로드] 와 [소각의 여왕]의 아버지들은 대단히 닮아있었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순박하게 일평생 자식을 돌보며 살아온 아버지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사라지고 있는 세대로구나, 우리가.

아버지의 직업을 이을 수 없는 세대로구나, 우리가. 


[소각의 여왕] 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부녀를 구분짓지 않는 태도를 통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지 불행한 것은 우리 세대만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소위 386세대라고 하는 이들도 시절의 수혜를 받은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함께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낼 뿐이다. 

폐휴지 줍는 할머니도, 고물상을 운영하는 지창씨도,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게 되는 해미도 단지 절망만을 향해 치달아갈 뿐이다. 

물론 지창씨는 시절의 수혜를 잠깐 받았지만, 더한 해악을 입고 모두 잃어버린다. 

그나마 작은 조각에 희망을 잔뜩 걸고 있지만, 해미는 그조차도 없었다. 

절망을 향해 달려가는 큼직한 네발달린 철상자 안에서, 그저 절망할 밖에. 


2016년. 눈과 귀를 막아버린 집권층은 여러 악법으로 절망적인 세대의 숨통을 움켜쥐고, 청년들은 헬조선에서 절망으로 신음한다.

방법은, 정말 없는 것 같다.

해미처럼 절망의 트럭 안에서, 절망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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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몰락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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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으로 이미 큰 감탄을 했던 켄 폴릿의 역사소설이다.

1914년을 시작으로 1920년까지 유럽 각지의 인물들을 다루는데, 시기상 가장 큰 이슈는 단연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방대한 인물 소개와 함께 역사적 실존인물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 부분은 책의 말미에 저자가 스스로 밝힌 '역사와 허구 사이에 줄을 긋는 법' 과 통해있기도 해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역사소설을 가늠하는 기준이 있는데(이 기준은 판타지 등 장르물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데)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나 습관을 얼마나 '그 시대적' 으로 풀어내면서,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주는가이다.

재미있게도, 이 기준은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을 읽으면서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소설에 대한 의구심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국가의 많은 인물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 얼마나 발휘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1910년대 영국. 근대화의 문을 활짝 열고 민주주의의 불꽃을 당겼지만, 아직 신분제 사회였다. 에버로언의 피츠허버트 백작은 여전히 대지주였고, 광부들은 여전히 소작인이었다. 에버로언의 피츠허버트 백작의 저택에서 어린 나이에 하녀장을 맡게 된 에설은 에버로언 광부 노조의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탁월한 당찬 여성이었다. 

 작품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큰 지분은 바로 이 '에설 윌리엄스' 가 차지하고 있다. 광부의 딸에 하녀, 그리고 여성, 게다가 미혼모이기까지 한 그녀가 어떻게 한 사람의 뛰어난 운동가로 자라나는지를 보면 수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째서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했는지 알 수 있다.

솔직히 [세계의 겨울]까지 읽다보니 당시의 영국,미국 의회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회가 더 허접스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한 축은 에버로언 백작의 여동생인 모드 피츠허버트와 독일 외교관의 아들인 발터 울리히가 차지하고 있다. 에설 윌리엄스가 여성 운동가의 일면을 보여준다면, 모드와 발터는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유럽을 휩쓴 대전쟁 치하에서 적국에 연인을 둔 두 남녀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참으로 애달프다. 

이 작품 안에는 유독 강인한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한데,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정계나 언론계, 노동계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면 보통 외모와 멘탈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드는 그에 걸맞는 신분과 외모, 멘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성으로서 쓸 수 있는 무기는 다 쓴다" 는 주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여성 인권 신장에 있어 불같은 추진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결국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드와 발터가 전쟁이 터지기 직전, 외교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일희일비 하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매우 희극적이었다. 본국에서 내려오는 쪽지 한장에 '전쟁이 나면 우린 어째~' 했다가, '전쟁 안 나려나 봐요. 행복해요~' 했다가, 또 , '전쟁 날 것 같아요, 우리 어떡해요.' 했다가, 또 '전쟁 난대요. 우리 어떡해요.' 를 몇차례나 반복하는데, 그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의외로 희극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에설과 모드에 대한 이야기가 2/3 정도 차지한다면, 나머지 1/3은 거스 듀어를 통해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과정과 귀족 혈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의 상류층 이야기, 그리고 그리고리와 레프 페시코프 형제를 통해 러시아의 붉은혁명과 미국 이민 1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스 듀어의 이야기에서는 로사 헬먼이라는 여성 기자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으로 생각된다. 진보적인 사회주의자인 헬먼은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은 기자로 한쪽 눈에 장애가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거스 듀어와 로사 헬먼의 러브 스토리는 솔직히 남성 판타지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바로 이 둘의 러브 스토리 중에 등장한다. 

그리고리와 레프는 남성들이 생각할 때 가장 멋있는 요소들을 나눠가진 인물들이다.

그리고리는 무척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목표를 설정하면, 그 목표를 향해 올곧게 걸어가는 인물이다.

반면 레프는 요령이 좋고, 바람둥이에 말솜씨가 좋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리는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이고, 레프는 매력 넘치는 나쁜남자랄까.

그리고리를 통해 당시 러시아 군대의 처참한 상황과, 러시아의 차르가 무너지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혁명을 성공시키는 과정이 그려지고, 레프를 통해 당시 미국의 러시아 마피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거인들의 몰락]의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한 타임라인 위에 수많은 세계의 이야기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 당했을때 러시아,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의 반응과 얽히고 설킨 국가간의 약속들. 그리고 힘의 균형에 이리저리 휘청이는 중심축. 그 안에서 '위' 의 명령에 따라 역시, 이리저리 휘청이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무능력한 위정자들, 지도자들, 장교들. 

비슷한 시기 세계 각지의 고위층들의 결정에 수천, 수만, 수백만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들을 광범위하게 펼쳐놓고 인물과 이야기에 따라 화려하게 직조하는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정말정말 엄청엄청 재미있다.

1권도, 2권도 무심코 펴들었다가 밤을 홀딱 새버릴만큼 재미있다.

일단 인물들의 개성이 엄청나게 뚜렷해서, 등장인물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무척 쉽게 기억된다. 로마시대에 비하면 이름들도 무척 짧고 간결하며, 참~~ 쉽다.(ㅋㅋㅋ) 게다가 인물 수가 많다지만, 한 국가에 서너명이기 때문에, 이 국가 이야기가 나오면 이 인물, 저 국가 이야기가 나오면 저 인물이 등장하기에 쉽게 각인된다. 

또 한가지, 간간히 등장하는 에로틱한 장면들이 감각을 톡톡 잡아 챈다. 

위에 언급했듯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한 역할의 여성들은 남성 중심 사회의 정점에서 남성들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성향만큼 성적인 표현에서도 조금 남다른 적극성을 보여준다. 이런 부분들이 한 밤 중에도 잠을 확 깨게 만들어 결국은 밤새워 읽게 만들곤 했다.

참고로 에설이 남편과 크게 다툰 뒤, 화해의 방법으로 침대 위에서 남편에게 자신의 벗은 가슴을 보여주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떠돌았던 '남자친구 화 풀어주는 방법' 이 떠올라서 박장대소를 했더랬다. 이 작품이 '픽션' 임에도 정말 그 시대에도 그랬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푹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강렬함은 전쟁에 대한 공포이다.

위에는 희극적인 느낌까지 난다고 했으나, 모드와 발터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전쟁에 대한 참상이 잘 묘사되고 있다. 전쟁이 터지고 징집되어 끌려가는 젊은이들. 에버로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츠허버트 백작은 신분에 걸맞게 장교로, 에설의 남동생 빌리는 사병으로 전쟁터로 끌려간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전쟁의 참화 속으로 이끌려간다. 전쟁터에서도 보수와 진보, 신분과 계급도 존재했다.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로 애국심이 넘쳤지만 무능했고, 사병들의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여겼다. 빌리는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사병도 인간이고,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인격, 전력적으로 지나치게 낙후된 러시아의 사병인 그리고리는 더 끔찍한 꼴을 당한다. 바로 이 전쟁통에 그리고리는 혁명정신을 깨우치게 되고, 붉은 혁명에 앞장서게 된다.

끔찍한 참호전도 무척 잘 묘사하고 있다. 런던까지 들렸다던 프랑스 솜강 전투의 대포 소리, 매일매일 전사자 통보가 끊이지 않았던 에버로언의 광부촌, 빵 한덩이를 위해 매일매일 몸을 팔아야 했던 평범한 러시아의 아내들 역시. 전쟁터는 물론이고 전쟁을 치르는 국가들의 끔찍한 참상이 잘 담겨져 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오직 위정자들 뿐이었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 이 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작품의 엔딩 또한 무척이나 돋보였다.

결국 노동당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에설이 의사당 계단에서 피츠허버트 백작과 맞닥뜨리는 장면인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계급과 신분으로 상원의원을 '물려받은' 피츠허버트와, 그의 하녀장이었지만 지역민들의 선거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에설.

그렇지.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백작과 하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볼 수 있는 사회. 


훌륭한 역사소설은 그 시대의 생활상과 정신을 설득력 있게 묘사해내기도 하지만, 그에 비춰 현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거인들의 몰락] 역시 그러한 훌륭한 역사소설의 미덕을 정확하게 갖추고 있다. 드라마의 요소도 무척 풍부해서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터, 특히 매력적이고 개성넘치는 인물들에 푹 빠져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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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정월대보름 입니다!^^
주무시면 눈썹셉니다~하얗게!
 
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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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역사 소설을 꽤나 좋아하는 30대 남자로써 '로마' 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된 로마 문명.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집정관과 호민관, 원로원이 어우러진 초기 공화정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거대한 대제국. 다신교 문화에서 피어난 유일신교의 씨앗. 그리고 극적인 역전 등, 수박 겉핥기만으로도 충분히 달달한 이야기들이 죽죽 흘러 내린다. 나처럼 어설프게 아는 독자들도 '시저'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영어로는 줄리우스 시저, 원래 발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리고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리고 '부르투스 너도냐!' 까지. 실제로는 했네, 안 했네, 원래는 이런 말이었네, 저런 말이었네 말도 많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일 것이다. 키케르와 클레오파트라까지 덤으로. 


[로마의 일인자] 는 바로 그 '시저' 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이름의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노회한 정치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눈에 무관 출신의 노숙한 정치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들어온다.


이 두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가슴이 쿵쾅쿵쾅.

로마 공화정 말기의 이른바 '100년 내전 은 로마사에 아주 약간의 관심만 있는 사람이라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동맹시들의 이탈과 반란, 로마 내부의 정쟁, 평민들의 불만과 궐기, 그리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대표되는 평민파와 술라로 대표되는 귀족파의 본격적인 충돌.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과 삼두정치, 그리고 루비콘강에서의 회군.

역시,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로구나!!!!   


어느 왕국이나 멸망 직전이 가장 화려한 법이다.

우리역사만 봐도 삼국시대가 삼국 모두가 그랬고, 통일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다. 특히 고려말~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교체기는 로마의 공화정말기~제정초기와 상당히 닮아있다. 조금 나가 중국 역사만 봐도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 직전에 가장 빛난다. 복잡복잡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아주 작은 불씨 하나로 어마어마하게 타오른다. 


1권 초반에서부터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작품 속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미 40세를 훌쩍 넘은데다가 로마의 귀족 혈통도 아니라 집정관이 될 수 없는 처지로 등장한다.

'어라, 이럴리가? 아니, 이럴수가?' 게다가 작품의 1/3쯤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술라는 애인에게 얹혀사는 기둥서방과 다름없는 건달처럼 보인다. 게다가 양성애자!!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처지였다니!! 

멀리서 봤던 숲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겉핥기만 했던 수박을 쪼개보니, 진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각 챕터가 당 해 연도로 되어 있다. 기원전 110년. 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본격적으로 붙기까지는 아직 수십년 더 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서두를 장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저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1부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정치적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이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상황 묘사로 정말 재미있게 펼쳐진다. 당시 로마의 정치상황에 대한 설명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정도로 주어진다. 특히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던 당시 로마정을 가감없이 묘사하고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혈통과 돈이 필요하고, 권력을 얻으면 혈통과 돈을 그러모아야 한다. 정치의 이유는 오롯하게 자신의 욕망이며 정치 활동 자체도 피호민을 모아 세를 넓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권력의 분립과 견제, 그리고 균형을 모토로 발전해온 공화정은 이미 시궁창 고인물이 되어 썩은내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군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돈만 많고 혈통이 별로라 중앙 정계에 들었음에도 좀처럼 로마 정치권력의 정점인 집정관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의 준동과 끊임없는 북방 이민족들의 위협으로 '타고난 군인' 인 마리우스는 지속적인 기회를 잡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몇차례나 로마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지만 계속된 원정으로 해외와 지방에 있는 사이, 정작 로마는 사투르니누스의 쿠데타를 경험하게 된다.


2부 [풀잎관] 에서는 뜻하지 않았던 병과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사건 이후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시기를 맞아 더이상 권력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좀처럼 큰 찬스를 잡지 못하고 있는 술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관계는 예전만큼 친밀하지는 않아보였으나 서로에 대한 존중과 우정은 여전했고, 로마의 중앙 정계 또한 좀처럼 변할 줄 몰랐다.

마치 고인물처럼 로마 정계는 썩을대로 썩어있었고,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재산을 불릴 마음 뿐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몇 대 가 쌓은 어마어마한 황금과 번듯한 혈통이 필요했다. 권력을 잡은 뒤에는 자신이 그동안 투자한 금액을 몇배로 되돌려 받고자 노력했고, 자식들에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모으고 더 모아야 했다. 권력의 밖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착취당했고, 권력의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그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 쓸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와 북방민족의 전쟁위협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 술라는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과 아시아 속주의 군사적 위협을 통해 집정관위에 오르게 된다. 술라가 아시아 속주를 평정하고,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도 진압, 잔당을 정리하는 사이 로마 중앙 정계에서는 이제 반 은퇴상태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마지막 기회를 잡아 다시 한 번 집정관이 오를 계략을 세우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면대결. 집정관에 의한 첫번째 로마 시내 침공이 벌어지게 되고, 서두에 언급했던 '시저'.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예고한다.  



1부 [로마의 일인자]와 2부[풀잎관] 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이다. 

태생부터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혈통이 아니었던 그는 뛰어난 능력에 비해 지지 세력이 전무했다. 숱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많은 돈을 모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혈통이었기에, 가이우스는 바로 한 발 앞에 있는 최고 권력의 의자에 다가설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로마 시민들에 대한 책임감과 충성심이 있었지만, 원로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극적으로 최고 권력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원로원이 정한 원칙들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인의 권력으로 원칙을 깨뜨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공화정의 의미는 퇴색된다. 이후 벌어진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시도와 술라가 집정관위에 오른 뒤 행했던 행동들 모두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반목은 훗날 공화정에 종말을 고하게 되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옥타비아누스)의 반목과 굉장히 닮아있다. 무엇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와의 관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와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비슷한 두 인물에 의해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아마, 콜린 매컬로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장대한 시리즈의 서막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통해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역사소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그 시대 사람처럼 생각하는가?' 이다. 물론 그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 다른 계급을 대하는 태도, 옷차림과 습관, 말투나 리액션 등 개별적인 것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 시대에 맞는 것들이냐는 것인데, 의아함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원로원의 의원들을 통해 보여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로마인들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로 대표되는 새롭고 혁신적인 로마인들의 끝없는 대립을 바라보며, 우리 역사가 떠올랐고, 또 현재의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고대사회에서는 시간은 둥근 순환 고리와 같아서 쇠퇴와 발전의 사이클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생각하는 순환적 시간감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반면 직선의 시간축 위에서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발상은 신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인류의 시작과 끝이 명확한 기독교의 직선적 시간감각에 의해 태어났으며, 진보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7세기 말에 고대인과 근대인 논쟁이 펼쳐진 이래 여전한 논쟁거리인 모양이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p.183 참조)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으며,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발전과 쇠퇴를 거듭한다는 순환적 시간감각 쪽에 마음이 더 갔다. 이처럼 대를 이어 긴 역사를 서술하는 시리즈는 보다 넓고 긴 호흡으로 삶을 조명할 수 있게 해 주는데, 왕정으로 시작해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마무리되고, 결국 거대한 서구 역사의 바탕이 되는 로마의 역사 뿐 아니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드루수스의 한 인생만 보아도 정체기가 있을지언정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개념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대하 역사소설은 호불호가 명확한 장르이다.

기본적으로 서사가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사건 전후의 논리적 인과관계가 한 눈에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대부분 분량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건들이 끊임없이 중첩되며 인물들이 쉼없이 꼬여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과서가 스포일러' 라는 말이 있듯 기록이 이미 사건의 결과를 알려줄 뿐 아니라,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끝' 과 같은 엔딩이 없다는 점이다. 그 어떤 찬란한 업적은 세운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며, 그 업적들 또한 먼지처럼 사라져 한줄의 글로 기억될 뿐이다. 박경리의 [토지] 나  이문열의 [변경] 그리고 콜린 매컬로의 이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처럼 몇대에 걸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식과 땅, 국가를 위해 인생을 다 쏟지만 결말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하 역사소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특히 작가적 상상력의 극치와 편집증적인 사료조사를 통해 작가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완벽한 '그 시대적 사고'를 종이 위에 구현해 낸 콜린 매컬로에 경외를 보낸다. 특히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족적이 비교적 뚜렷한 인물들을 다루는 대담함에 찬사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충분히 알고 있으나, 너무너무 읽고 싶어지는 재미를 주고 있으니, 약간의 시샘이 섞인 거대한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부디 7부까지 무사히 완간되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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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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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게리온.

나처럼 90년대 후반을 중고등학교에서 보낸 평범한, 아니, 만화를 좀 좋아했던 축 치고 에바 신드롬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거다. 

휴일이고 자시고를 떠나 애초에 TV관람권(?)이 전무했던 내가 단짝 친구녀석과 함께 시험이 끝난 날 일찌감치 비디오 대여점에 빌려 대원동화에서 정식으로 라이선싱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녀석의 집으로 향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는 창간된지 얼마 안 된 '뉴타입'을 통해 기사와 일러스트로만 접했더랬는데, 녀석의 집에서 '가장 재미있다' 며 틀어주었던 회차는, 7편인가 9편인가였는데, 그 유명한 에바 초호기가 사도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이었다. 시뻘건 피가 도로에 흘러 넘치고 마스크처럼 감싸고 있던 봉인구가 부서지며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면이 있는, 바로 그 회차였다.

당시의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내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뒤로 녀석과 허구헌 날 에바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더랬고, '사해문서' 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온갖 기독교적 메타포들을 찾아 해석하는데 골몰했더랬다. 엔딩을 보며 안노 히데아키를 열렬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뒤이어 감독한 '그와 그녀의 사정' 까지도 함께 보며 '이러다 축하해~ 박수치며 끝날거다' 고 희희덕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녀석은 유부남이 되기도 했던 어느날,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녀석은 회사에서 근무중에도 '소식 들었냐?' 며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국내에서 개봉하는 곳을 찾아 보러가고 싶기도 했지만, 녀석이나 나나 이제 그렇게 쉽게 시간 내서 애니메이션을 보기에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나는 몰라도, 녀석은 직장도, 가정도 너무나 바빴던 시기라서. 

 그 즈음, 디씨 인사이드나 루리 웹, 웃긴 대학 등 당시 오타쿠들이 모여 놀던 이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회자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개봉을 기념해서 세계 곳곳의 에반게리온 관련 부스에서 스탬프를 찍어주고 , 이것을 다 모은 '용자' 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라는 가이낙스의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스탬프를 다 찍은 용자가 무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여튼, 만화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던 당시의 내게 '에바' 는 조금 특별한 의미인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등줄기를 오싹~ 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오기도 했다.

'설마 이 에바로드가 그 에바로드는 아니겠지?'

시끌벅적한 송년회 모임 자리에서였는데, 순간 사위가 고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랗고 보랏빛인 표지가 순간 나를 그 시절로 이끌고 가는 듯 했다. 


 책은 펴자마자 아주 술술 읽혔다.

워낙 잘 아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장강명 작가는 요즘 세대 대표적인 스토리텔러 아니던가.

이야기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30%의 실재와 70%의 허구로 이루어져있는, 모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70%가 허구라지만,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워낙 디테일해서 실제 <에바로드>를 두명이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게 진짜야 허구야,' 헷갈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주인공 종현은 어린시절 가족들을 버리고 훌쩍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뒤로 하고 인쇄업을 하는 아버지와 두세살 터울의 형, 셋이서 살고 있었다. 공부에 열심이지도 않았지만, 크게 엇나가는 짓을 하지도 않은 학창시절은 비교적 평범했지만, 밝은 에너지와 멀끔한 외모를 지닌 종현은 유독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중학교때 우연히 '에반게리온'을 접하고 고등학교 때 만화연구부에 들어 유쾌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때는 IMF의 광풍이 거세던 시기, 인쇄업의 몰락과 함께 사람 좋은 아버지는 사업체를 팔고 집을 팔아 친구들의 사업자금을 대주는 등 자식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고, 종현과 그의 형의 인생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이야기 자체로만 봐도 참 재미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의 르포타주 형태라서 설득력과 몰입감이 배가된다. 

전반부는 종현의 학창시절 만화동아리 '베들램' 과, 1년 선배인 경희에 대한 짝사랑이 그려지고, 중반부는 몰락한 집안에서 대학 휴학을 반복하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와의 재회, 형과의 갈등이 주로 다뤄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월드 스탬프 랠리를 준비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어 매우 흡인력이 높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정말 많이 나와서 더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도 에반게리온이나 국내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들을 제외하면, 뉴타입 등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으나 정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PC통신의 만화 동아리들을 통해 각종 신작의 오프닝 정도만 감상할 수 있었으나, 1분 30여초 남짓 한 그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반나절 가까이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야 했다. 중간에 전화라도 오면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이었고, 그 뒤에도 어마어마한 전화요금 폭탄에 부모님께 들을 큰 꾸지람을 각오해야 했다. 일본쪽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녀석들은 비디오 테잎이나 당시 유행하던 레이저 디스크를 공수해 불법 복제를 해서 팔기도 했다. 물론 용산이나 이태원,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 등에 불법 복제된 일본 애니를 유통하는 장사꾼들도 있었으나, 가격이 어마어마했고, 그나마 집이 부유해서 취미삼아 복제해서 용돈벌이 정도 하는 친구들 덕을 봐야 했다. 당시 비디오 복제는 녹화 기능이 있는 비디오가 두 대 있으면 가능했기에, 몇명이 돈을 모아 한편을 구입하고, 공 테이프에 몇편을 복제해서 나눠갖기도 했다. 당연히 자막은 없었는데, 역시 PC통신 만화 동아리에서 훌륭한 덕후들께서 손수 번역하신 대사집을 무료 배포하기도 하셨어서 그 덕도 많이 봤다. 

 

물론 역사적인 '서울 코믹월드' 의 첫회도 기억한다. 추억속 이름인 '거평 프레야'. 지금은 두산타워가 동대문 패션시장의 아이콘이지만, 밀리오레보다도 전에 거평프레야가 동대문의 밤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이후 여의도 무역전시장으로 옮겨 '리버(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스의 바로 그 유닛)돔' , '에벌레 돔' 등으로 불리던 건물 주변으로 모여들던 각양각색 코스플레이어들의 모습과, 일본 동인지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개인,동인회지들, 일일히 손으로 그려 코팅해 오려 만든 각종 팬시들이 가득했었다.

 요즘엔 워낙 인쇄기술이 발달해서 동인지의 퀄리티도 높고, 팬시물품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그 때만 해도 좋아하는 캐릭터를 직접 그려 사인펜으로 외곽선을 따고 마카로 색을 입혀서 코팅한 것에 핸드폰이나 가방에 달 수 있게 고리를 맨 것이 전부였다.   

뭔가 같은 취미를 가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유쾌한 공기를 사방으로 뿌려대던 기억이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초반, 종현이 하던 알바들도 나 역시 생생하게 알고 있다.

당시 다니던 교회가 동대문에 있었기에 친한 형들이 동대문, 창신동 토박이들이 많았는데, 따라서 평화시장 알바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매대 사이로 원단을 나르거나 음식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비염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고, 일 자체도 너무 힘들어서 하루만에 그만두긴 했는데, 새벽에 불타오르던 그 분위기도 충분히 기억한다.  

IT붐과 함께 웹디자이너가 각광받던 시기도 2~3년 쯤 있었다.

나도 그 광풍에 편승해서 군대 말고 산업체 가라며 꼬시던 컴퓨터 학원에 수십만원 갖다 바치고 웹디자인 과정과 정보처리 기능사 과정을 이수했던 기억이 난다. 자격증도 따고 산업체만 알아보면 될 즈음에 그냥 군대를 갔었는데, 내가 웹디자이너의 끝물이었어서 사실 취업할 수 있는 산업체를 찾기도 힘들었던 터였다. 웹디자이너에 대한 수요는 2~3년만에 포화상태가 되었고, 웹마스터가 자연스럽게 병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도 이러한 장면들이 등장하기에, 나도 넋 놓고 옛 추억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90년대의 단상들이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기도 하겠지.


무슨 리뷰가 아니라 내 추억을 풀어놓는 글이 되어버렸다.ㅋㅋㅋ

이렇게 다시 작품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이게 소설인지 내 이야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여튼, 사람이 늙으면 추억만 먹고 살게 된다던데.

난 아직 미래에 대한 고민이 더 크니, 덜 먹었나보다!!! 



p.s 참고로 이 작품의 모태가 된 '에바로드' 의 용자들은 EBS에도 짧게 등장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3Alox690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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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52) 배트맨 5 : 제로 이어 - 어둠의 도시 (뉴 52) 배트맨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배트맨 5 제로이어 - 어둠의 도시](이하 [어둠의 도시])는 전작에 이어 '제로 이어' 타이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시 배트맨 탄생 초기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흐름 상으로도 지난4편과 이어지는데, 레드후드 갱단의 흑막이었던 에드워드 니그마가 본격적으로 야심을 펼쳐낸다. 스콧 스나이더가 리부트된 배트맨 시리즈를 잡은 뒤, 유독 연작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2000년대 후반부터 DC의 기조가 변하면서 시작된 흐름 같은데, 커다란 프로젝트가 아니라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 페어에게 긴 호흡의 장편 타이틀을 맡겨 둔 듯 하다. 

 [어둠의 도시]는 웨인 인더스트리에 근무하던 칼 박사의 괴상한 연쇄살인에서부터 시작된다.
뼈가 제멋대로 자라 끔찍한 몰골로 살해된 시신들이 연달아 발견된 것이다. 사건을 쫓는 배트맨은 지난4권에서부터 고담 시경의 공공의 적이 되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니그마가 사사건건 끼어들며 배트맨을 궁지에 몬다. 그리고, 니그마는 배트맨이 궁지에 몰린 사이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시켜, 고담시를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고립, 자신만의 '수수깨끼 지옥' 을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그 니그마의 입을 통해 '제로 이어' 라는 부제의 의미가 드러난다.

 스콧 스나이더는 4권에 이어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에드워드 니그마;리들러의 거대한 계획을 차근차근 풀어내는데, 간간히 이야기와 상관 없는 듯 한 장면들이 몽타주처럼 등장하는데, 책을 덮을 때 쯤 '아!'하게 만드는 치밀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배트맨은 여전히 고생고생, 생고생을 한다. 작품 초~중반에 맞닥뜨리는 칼 박사 자체도 강력하지만, 고담 경찰들의 집요한 추적도 배트맨을 시종일관 힘들게 한다. 여기에 오해로 얼룩져있는 고든과의 관계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라 배트맨은 홀로 경찰과 범인 모두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 시달린다. 
 작품 속 설익은 배트맨은 아직 스스로를 제대로 못 다루고 있다. 고담 시경에 대한 불신과 범죄에 대한 분노,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고, 주위 인물들도 신경쓰지 않은 채 온 몸 던져 니그마의 계략에 맞선다. 
그 숱한 고생을 하고, 작품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고든과 그리고 루시우스 폭스와 힘을 합치게 되고, 고담시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찾내게 된다.

 스콧 스나이더의 배트맨 시리즈는 유독 '브루스 웨인' 이라는 한 개인과 얽힌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빼미 법정][올빼미 도시] 의 주 적도 웨인 가문과 조상을 함께 하고 있는 먼 혈연 가문과 관련된 해묵은 악연이었고, 레드후드 갱단과는 삼촌인 필립 웨인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칼 박사가 니그마의 계획에 동조한 원인도 브루스 웨인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웨인' 이라는 이름은 때로는 큰 우산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원한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어둠의 도시] 는 여러모로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 중 마지막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고담시를 고립시키는 것도 그렇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알프레드가 평범한 삶을 사는 브루스 웨인을 갈망하는 것 또한 그랬다.

마블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분리했다지만, 출간되는 이슈들이 그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DC의 '뉴52' 유니버스 역시 영화의 분위기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의 배트맨3부작이 안정적으로 마무리 되는 동안 코믹스도 안정적으로 리부트를 마쳤고, 드라마 라인인 '그린 애로우' 와 '플래시' 도 안정적인 시청률을 구가하고 있다. 결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저스티스의 시작] 이 DC유니버스의 진정한 시험대가 될 듯 하다. 
배트맨은 인간의 모든 어두운 감정, 공포, 복수, 분노가 응축된 인물이다.
그는 항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범죄에 분노하며, 범인과 자신의 생사를 외줄에 올려놓는다.
과연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는 배트맨을 또 어떤 곤경에 빠뜨릴 것인가, 그리고 또 그 곤경에서 어떻게 탈출시킬 것인가.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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