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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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게리온.

나처럼 90년대 후반을 중고등학교에서 보낸 평범한, 아니, 만화를 좀 좋아했던 축 치고 에바 신드롬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거다. 

휴일이고 자시고를 떠나 애초에 TV관람권(?)이 전무했던 내가 단짝 친구녀석과 함께 시험이 끝난 날 일찌감치 비디오 대여점에 빌려 대원동화에서 정식으로 라이선싱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녀석의 집으로 향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는 창간된지 얼마 안 된 '뉴타입'을 통해 기사와 일러스트로만 접했더랬는데, 녀석의 집에서 '가장 재미있다' 며 틀어주었던 회차는, 7편인가 9편인가였는데, 그 유명한 에바 초호기가 사도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이었다. 시뻘건 피가 도로에 흘러 넘치고 마스크처럼 감싸고 있던 봉인구가 부서지며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면이 있는, 바로 그 회차였다.

당시의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내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뒤로 녀석과 허구헌 날 에바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더랬고, '사해문서' 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온갖 기독교적 메타포들을 찾아 해석하는데 골몰했더랬다. 엔딩을 보며 안노 히데아키를 열렬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뒤이어 감독한 '그와 그녀의 사정' 까지도 함께 보며 '이러다 축하해~ 박수치며 끝날거다' 고 희희덕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녀석은 유부남이 되기도 했던 어느날,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녀석은 회사에서 근무중에도 '소식 들었냐?' 며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국내에서 개봉하는 곳을 찾아 보러가고 싶기도 했지만, 녀석이나 나나 이제 그렇게 쉽게 시간 내서 애니메이션을 보기에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나는 몰라도, 녀석은 직장도, 가정도 너무나 바빴던 시기라서. 

 그 즈음, 디씨 인사이드나 루리 웹, 웃긴 대학 등 당시 오타쿠들이 모여 놀던 이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회자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개봉을 기념해서 세계 곳곳의 에반게리온 관련 부스에서 스탬프를 찍어주고 , 이것을 다 모은 '용자' 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라는 가이낙스의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스탬프를 다 찍은 용자가 무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여튼, 만화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던 당시의 내게 '에바' 는 조금 특별한 의미인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등줄기를 오싹~ 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오기도 했다.

'설마 이 에바로드가 그 에바로드는 아니겠지?'

시끌벅적한 송년회 모임 자리에서였는데, 순간 사위가 고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랗고 보랏빛인 표지가 순간 나를 그 시절로 이끌고 가는 듯 했다. 


 책은 펴자마자 아주 술술 읽혔다.

워낙 잘 아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장강명 작가는 요즘 세대 대표적인 스토리텔러 아니던가.

이야기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30%의 실재와 70%의 허구로 이루어져있는, 모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70%가 허구라지만,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워낙 디테일해서 실제 <에바로드>를 두명이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게 진짜야 허구야,' 헷갈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주인공 종현은 어린시절 가족들을 버리고 훌쩍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뒤로 하고 인쇄업을 하는 아버지와 두세살 터울의 형, 셋이서 살고 있었다. 공부에 열심이지도 않았지만, 크게 엇나가는 짓을 하지도 않은 학창시절은 비교적 평범했지만, 밝은 에너지와 멀끔한 외모를 지닌 종현은 유독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중학교때 우연히 '에반게리온'을 접하고 고등학교 때 만화연구부에 들어 유쾌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때는 IMF의 광풍이 거세던 시기, 인쇄업의 몰락과 함께 사람 좋은 아버지는 사업체를 팔고 집을 팔아 친구들의 사업자금을 대주는 등 자식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고, 종현과 그의 형의 인생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이야기 자체로만 봐도 참 재미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의 르포타주 형태라서 설득력과 몰입감이 배가된다. 

전반부는 종현의 학창시절 만화동아리 '베들램' 과, 1년 선배인 경희에 대한 짝사랑이 그려지고, 중반부는 몰락한 집안에서 대학 휴학을 반복하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와의 재회, 형과의 갈등이 주로 다뤄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월드 스탬프 랠리를 준비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어 매우 흡인력이 높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정말 많이 나와서 더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도 에반게리온이나 국내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들을 제외하면, 뉴타입 등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으나 정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PC통신의 만화 동아리들을 통해 각종 신작의 오프닝 정도만 감상할 수 있었으나, 1분 30여초 남짓 한 그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반나절 가까이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야 했다. 중간에 전화라도 오면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이었고, 그 뒤에도 어마어마한 전화요금 폭탄에 부모님께 들을 큰 꾸지람을 각오해야 했다. 일본쪽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녀석들은 비디오 테잎이나 당시 유행하던 레이저 디스크를 공수해 불법 복제를 해서 팔기도 했다. 물론 용산이나 이태원,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 등에 불법 복제된 일본 애니를 유통하는 장사꾼들도 있었으나, 가격이 어마어마했고, 그나마 집이 부유해서 취미삼아 복제해서 용돈벌이 정도 하는 친구들 덕을 봐야 했다. 당시 비디오 복제는 녹화 기능이 있는 비디오가 두 대 있으면 가능했기에, 몇명이 돈을 모아 한편을 구입하고, 공 테이프에 몇편을 복제해서 나눠갖기도 했다. 당연히 자막은 없었는데, 역시 PC통신 만화 동아리에서 훌륭한 덕후들께서 손수 번역하신 대사집을 무료 배포하기도 하셨어서 그 덕도 많이 봤다. 

 

물론 역사적인 '서울 코믹월드' 의 첫회도 기억한다. 추억속 이름인 '거평 프레야'. 지금은 두산타워가 동대문 패션시장의 아이콘이지만, 밀리오레보다도 전에 거평프레야가 동대문의 밤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이후 여의도 무역전시장으로 옮겨 '리버(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스의 바로 그 유닛)돔' , '에벌레 돔' 등으로 불리던 건물 주변으로 모여들던 각양각색 코스플레이어들의 모습과, 일본 동인지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개인,동인회지들, 일일히 손으로 그려 코팅해 오려 만든 각종 팬시들이 가득했었다.

 요즘엔 워낙 인쇄기술이 발달해서 동인지의 퀄리티도 높고, 팬시물품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그 때만 해도 좋아하는 캐릭터를 직접 그려 사인펜으로 외곽선을 따고 마카로 색을 입혀서 코팅한 것에 핸드폰이나 가방에 달 수 있게 고리를 맨 것이 전부였다.   

뭔가 같은 취미를 가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유쾌한 공기를 사방으로 뿌려대던 기억이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초반, 종현이 하던 알바들도 나 역시 생생하게 알고 있다.

당시 다니던 교회가 동대문에 있었기에 친한 형들이 동대문, 창신동 토박이들이 많았는데, 따라서 평화시장 알바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매대 사이로 원단을 나르거나 음식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비염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고, 일 자체도 너무 힘들어서 하루만에 그만두긴 했는데, 새벽에 불타오르던 그 분위기도 충분히 기억한다.  

IT붐과 함께 웹디자이너가 각광받던 시기도 2~3년 쯤 있었다.

나도 그 광풍에 편승해서 군대 말고 산업체 가라며 꼬시던 컴퓨터 학원에 수십만원 갖다 바치고 웹디자인 과정과 정보처리 기능사 과정을 이수했던 기억이 난다. 자격증도 따고 산업체만 알아보면 될 즈음에 그냥 군대를 갔었는데, 내가 웹디자이너의 끝물이었어서 사실 취업할 수 있는 산업체를 찾기도 힘들었던 터였다. 웹디자이너에 대한 수요는 2~3년만에 포화상태가 되었고, 웹마스터가 자연스럽게 병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도 이러한 장면들이 등장하기에, 나도 넋 놓고 옛 추억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90년대의 단상들이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기도 하겠지.


무슨 리뷰가 아니라 내 추억을 풀어놓는 글이 되어버렸다.ㅋㅋㅋ

이렇게 다시 작품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이게 소설인지 내 이야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여튼, 사람이 늙으면 추억만 먹고 살게 된다던데.

난 아직 미래에 대한 고민이 더 크니, 덜 먹었나보다!!! 



p.s 참고로 이 작품의 모태가 된 '에바로드' 의 용자들은 EBS에도 짧게 등장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3Alox690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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