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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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2008년 1월 8일에 쓴 감상문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1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니, 안타깝게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하기는 힘들다.

난 참, 무의미하게 10년을 보냈구나, 싶다가, 10년동안 블로그에 적은 글과 그림들을 살펴봤다.

그렇게 무의미하지도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통장의 숫자가 내 삶을 평가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자위나 정신승리, 라고 해도, 어쩔거야. 내 삶인데. 


작가의 지식과, 그 지식을 현실에 대입시키는 통찰력, 지식인 특유의 허영과 과시욕, 동시에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희망 등이 물씬 느껴진다.

10년만에 읽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은 그대로지만, 진지함과 해학을 오가는 정서들도 그대로였다. 

르네는 여전히 고독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며 만끽하고 있었고, 팔로마는 여전히 풍요로움 속에서 감성을 말려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책의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여러개로 쪼개져있는 각각의 챕터마다 주제의식이 명확했고, 그것들을 풀어내는 사유의 방식, 치열한 관찰을 수반하고 차곡차곡 쌓아온 지식에 기반한 사색을 통한 통찰 등이 워낙 잘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가장 가까운 한 챕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서사의 줄기를 따라가기 위해 애쓰기보다 매 페이지, 모든 문장들이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특히, 하위문화(서브 컬쳐)랄 수 있는 일본의 망가부터 고급문화랄 수 있는 클래식 오페라까지 망라하는 르네의(작가의) 문화적 소양이 부럽고, 흥미로왔다. 때문에, 후반부에 펼쳐지는 르네와 팔로마의 드라마는 덜 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읽으니, 각 인물들의 드라마가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르네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새삼 내 나이때의 르네를 생각하니, 글쎄, 그렇게 안쓰럽지도 않더라.

르네는 비록 초졸이지만, 독학을 통해 많은 문화와 예술을 접했고, 타고난 재능으로 그것들을 '습득' 해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은 단순히 '감상' 하는것 만으로는 소양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는다.

피아노를 쳐본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와, 피아노를 전혀 쳐보지 않은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는 감상의 단계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회화나 문학도 마찬가지다. 직접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술 너머 작가의 심상이 존재한다. 컨텍스트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을까?

어떤 분야에서든 간접경험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독학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이고, 들리기에. 

우리에게 선생님과 선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르네는 선생님과 선배님이 없이 오로지, 스스로 찾아서 들리고 보이는대로 빨아들였다. 관련된 지식은 책을 통해서 접했을 것이다.

우리는 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책' 이 그대로 '지식'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어디 책 뿐이랴. 수학 공식을 외웠다고, 단숨에 수학 점수가 늘지 않듯, 철학책을 읽었다고, 이기론과 이원론으로 세상을 볼 수 없듯,  단지 보고, 듣고, 읽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지적 수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올바른 책 읽기에 대한 책도 있다!!  

그렇다고 르네가 아주 치열하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닐터다.

그런 르네가 그정도의 철학적 사유와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는 것은, 르네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는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집안일을 도왔고, 일을 했다.

뿐만 아니다. 홀로 독신으로 살 각오를 했는데, 갑자기 동반자도 생겼다.

그녀가 한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안일을 도왔을 뿐이었다. 외모에 신경도 1도 안쓰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인데, 그냥, 어떤 남자가 왔다.

 

 헌데, 이 남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르네의 외양 속에 숨겨진 현명함을 알아챈 남자다. 가정적이고, 조용하며, 사교성도 좋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식이 아주 떨어지지 않았고, 지식이 곧 지혜와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준 남자다. 손재주도 좋았고, 직업정신도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바람도 피지 않았던 것 같다. (ㅡ,.ㅡ;;;;) 

르네가 보다 폭넓은 지식과 문화를 향유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을 것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간들.

특히, 그 남자는 르네가 일하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이 두 부부 사이에 아이도 없었던 것 같으니, 르네에겐 여가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을터다.

(게다가...적당히 살다, 적당할 때에 가주신다....쿨럭....)


그....

이정도 삶이면, 내가보기엔 그....

에....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는 르네의 삶이, 난, 그냥 부럽다. ㅋㅋㅋㅋ


여튼, 다시 읽으니, 저자와 부딪히는 지점들도 꽤 읽혔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단어들은 일견, 허영과 허세처럼 느껴졌다.

일본문화에 대한 상찬이나, 지나친 미화는 물론이고, 르네와 팔로마가 다른 사람들을 제 멋대로 평가하고 단정짓는 장면들도 상당히 불편했다. 사실 르네가 마뉘엘라, 팔로마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은 '뒷담화' 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성적인 욕망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다. '질 낮은 농담' 정도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꼈던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고정관념을 쌓고,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자라난다.

국가, 언어, 가족, 친구 등 수많은 외부요인과, 선천적인 요인들이 모여 뚜렷한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 틀을 결코 부술 수 없다.

아, 조금 수정해야겠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서, 스스로 가지게 된 이 틀을, '자기 혼자서는' 결코 부술 수 없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파훼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온전히 '타인' 에 의해 분쇄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오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르네, 당신은, 당신 언니가 아니에요."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깨뜨려주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누군가를,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맞이한 그 순간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오해한 것도 모른채, 오해 속에서, 오해하며 죽어갈 것이다.

어쩌겠나.

그 또한 인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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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들판 - 완결편 견인 도시 연대기 4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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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덮고 한참을 반추했다.


톰과 헤스터가 처음 만나 아웃 랜드에 떨어져 광야를 헤맸던 그 순간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그 사건들을.

한쪽 눈도 어그러지고, 반만 남은 코도 그나마 거의 뭉개지고, 크고 끔찍한 흉터를 갖고 평생을 살았던 트라우마와 컴플렉스 덩어리인 헤스터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톰의 삶을. 

눈 앞에서 부모님을 잃고, 죽었다가 기계로 되살아난 스토커와 함께 고철 폐기물 더미를 뒤지며 살았던 헤스터의 증오 가득했던 삶을.


견인도시 연대기의 전반부 두권이 간결하고 계획적으로 쌓아올린 서사였다면, 후반부 두권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건의 중첩이었다.

전반부 동안 잘 쌓아올린 캐릭터들이 생명을 얻어 후반부는 제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달까. 

3,4권은 1,2권보다 훨씬 활력 넘치고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사건들이 터져댄다.

물론, 톰과 헤스터의 딸인 렌의 등장으로 인물 자체가 늘어났고, 견인도시들과 반 견인도시 주의자들의 전쟁이 과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정, 증오, 집착, 애착, 모성애, 부성애, 트라우마와 컴플렉스, 거기에 과거의 사건까지 수면위로 드러나며 감정의 화산들이 정신없이 터져댄다. 


이 책들이, 어쩔 수 없게도 뒤로 갈수록 점점 볼륨이 두꺼워지는데, 4권은 대강 봐도 1권의 두배는 된다. 

그만큼 다양한 사건들이 담겨있고,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과연 영화화가 4권까지 된다면...

4권만 세편은 만들 수 있겠더라.

피터 잭슨이 워낙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즐겨 만들기는 하지만...이 시리즈는 순수하게 볼륨만으로 봐도 반지의 제왕보다 많을텐데...



3권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렌과 테오를 보며, 이제 이야기의 축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래도 역시 중심엔 톰과 헤스터가 있었다. 슈라이크도 다시 등장하고, 나가 장군과 위논 제로(나가 부인), 페니로얄과 피쉬케익까지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한다. 

안나-스토커 팽도 마찬가지. 


필립 리브가 이 세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음은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참 팔불출 딸바보 아저씨 같은 작가이다.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결코 숨기는 법이 없다. 

인물들이 아파하는 장면들을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른 티가 역력하다.

그래서, 마지막 권을 맞아, 작가로서 감내해야했을 고통들이 느껴져서, 뭐랄까, 참 좋았다고 해야할까. 복받쳤다고 해야할까.


1권의 첫문장과 이어지는, 4권의 클라이맥스는, 아주 예상치 못한 바도 아니었고, 신선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시리즈의 대단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마무리였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와,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기의 조화는 2권을 넘어서면 신선함을 잃지만, 3권부터는 인물들이 그 간극을 충실히 메꿔낸다. 예측 가능한 전개를, 예측 불가한 미로속에 적절히 잘 넣어서, 뻔한 사건도 뻔하지 않게 만드는 스토리 텔링의 센스 역시, 엄밀히 따지면 '익숙한 것을 낯설게하기' 와 맥이 닿아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센스 역시 1,2권보다는 3,4권에 빛을 발하는데, 생동감이 더해지니 전형적인 인물들조차 입체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등장인물들에 이렇게 깊이 이입한 책도 정말 오랜만이었던 듯.

이제 톰과 헤스터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안타깝고, 벌써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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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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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랫동안 눈 안에 넣어두었던 '모털엔진' 드디어 읽었다.

'견인도시' 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상상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시대배경은 대략 수천년 후이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60분 전쟁' 이라고 불리우는 세계대전으로 모든 문명이 파괴되었다. 지구 궤도에서 발사되는 수많은 원자탄과,'60분 전쟁'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생화학 무기들이 지구 곳곳에 투하됐다.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쿼크라는 사람이 주창한 '도시진화론'을 철학삼아 거대한 캐터필러 위에 도시를 '얹기' 시작했다. 오염된 대지는 더이상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강한 도시는 약한 도시를 잡아먹으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를 모토로, 크고 작은 견인도시(Traction City)들이 황폐해진 대륙 위를 기어다녔다. 


시대는 또다시 흐르고 흘러, 견인도시의 시대도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견인도시들의 수가 급감하여, 대도시들은 건기의 초원을 배회하는 맹수들처럼 굶주려 있었고, 약해져 있었다.

한때 대도시로 난폭한 사냥솜씨를 뽐냈던 '런던' 역시 과거의 영화는 잃고 각종 맹수들이 난립하는 '대사냥터' 에서 밀려나 사냥감이 적은 변두리를 떠돌고 있었다. 

주인공 '톰 내츠워디' 는 런던 역사길드의 3등 견습생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고, 도시 진화론을 맹신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하지만 고아인 청년이었다. 

톰은 런던이 작은 도시를 사냥했던 날, 런던 역사길드의 수장이자 당대 최고의 탐험가인 '밸런타인' 을 타겟으로 한 '헤스터 쇼' 의 테러에 휘말리게 되고, 밸런타인에 의해 런던 밖으로 떨어지고 만다.

움직이는 도시 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톰이 처음으로 밟은 '대지'.

톰은 대지를 처음 밟은 충격과, 경애했고, 목숨을 바쳐 지키려고 했던 밸런타인이 자신을 도시 밖으로 밀어버렸다는 사실에 공황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지만, 테러범 '헤스터 쇼' 와 동행하게 되면서 자신이 몰랐던 세상의 진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정말 푹 빠져 읽었다. 

이정도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를 제대로 느낀 SF 소설은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SF나 판타지 장르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와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기' 로 볼 수 있다. 

예를들면, 스타 워즈 시리즈의 '포스' 와 '광선검' 이나 배명훈 작가의 '고고심령학자'는 '낯선 것을 익숙케 하기'의 정석에 가깝다면, 캐터필러 위에 8층으로 얹혀져 대지를 돌아다니는 런던 시내의 풍광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의 정석에 가까울 것이다. 마치 해리포터의 킹스크로스역 9 3/4 승강장 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이 두가지가 적절하게 섞여있다. 요는 세계관의 핵심이 어디에 더 가깝느냐, 는 정도일 터다.) 

 

이 작품이 사실 새로운 것들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했듯, 이 작품은 새로운 것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보다 '익숙한 것' 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삶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우리는 CD를 저장장치로 사용하지만, 컴퓨터가 없는 이 세계에서 CD는 굉장히 좋은 장식용 도구이다. 조각을 엮어서 목걸이를 만든다던지, 인테리어 장식 도구로 활용한다. 벽시계를 역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취급 주의' 같은 단어가 특별한 고유명사로 쓰인다. 

흔하디 흔한 것들을 '다르게' 사용하는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대단히 신선하게 느껴지게 한다. 


단순히 그것만이었으면 끝이었겠지만, 이 작품의 서사구조 자체도 대단히 흥미롭다.

주인공 톰처럼 견인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진화론' 의 맹신자로써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땅에 사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반 견인도시 연맹' 이다. 이들은 전쟁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자정작용으로 인간이 살만해진 대지에 정착했다. 농사가 가능한 땅도 있어서, 농지도 경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견인도시의 거대한 캐터필러들은 대지에 사는 사람이나 마을을 전혀 거리낌없이 밟아댄다. 결국 정착민들은 산이나 절벽등지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견인도시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가스로 공중에 띄우고, 과거의 유물 엔진들을 수리해 단 비행정들이 등장했다. 견인도시의 주 교통수단도 그것이다. 

 견인도시는 기본적으로 큰 도시가 작은 도시들을 잡아먹는 적자생존의 토대에 세워진 이론이지만, 사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도시들도 있다. 이 '비사냥 견인도시' 들은 주로 무역으로 생존한다. 비행선을 탄 수많은 무역인들이 고대 유물에서 채집한 '올드 테크' 기기들을 사고판다. 사냥당해 잔해만 남은 도시들을 수색해 쓸만한 부품이나 고철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런 설정들이 모두 새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디테일함 때문이다.

올드 테크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그 도시의 유행어가 된다던지, 그런 용어들을 활용한 이름들이 붙는다던지 하는 것들이다. 


견인도시의 엔지니어 길드와 역사학자 길드의 반목도 재미있고, 그럴듯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덜컹대는 도시 안에서 유물들을 지키는 역사학자 길드와, 엔진을 개량하고 개발하는 엔지니어 길드의 반목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엔지니어 길드 놈들이 엔진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이 진동을 좀 보라고!! 도자기가 다 깨지겠어!!' 등등의 불평이 정말 재미있었다. 도시의 경로를 결정하는 '내비게이터 길드' 도 있다.ㅋㅋ 정말 재미있었다.

도시마다 공화정과 민주정, 왕정을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2권에서는 왕정 견인도시가 등장한다. 이 묘사도 정말 깨알같고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톰과 헤스터의 심리묘사와, 갈등도 재미있다. 톰도, 헤스터도 각자의 찌질함을 정말 잘 표현했고(ㅋㅋ), 평생 견인도시 위에서 살아온 견인도시 주의자가 겪는 내적 갈등, 윤리관의 충돌이 설득력 있고, 섬세하다. 


서사도 사실 대단히 훌륭하다. 정말 짜임새있고 스펙터클하다. 특히 후반 클라이맥스에 슈라이크 - 아참, 그래, 세계관 안에서 '60분 전쟁' 으로 현대 문명이 일거에 무너진 뒤에, 문명이 두차례 더 있었다고 한다. 슈라이크는 기계 부활 인간이다. '60분 전쟁' 이전 세계는 사이보그를 부릴 정도로 발전한 문명이었고, 그 뒤의 문명이 그 기술을 발굴해서 재사용했다. 죽은 자를 기계로 부활시킨 사이보그. 이들을 '스토커' 라고 불렀고, 헤스터 쇼는 스토커인 '슈라이크' 와 함께 아웃 랜드(세계관 내에서 황무지를 일컫는 말)를 떠돌며 고대의 쓰레기들을 수집하며 살았었다. - 와의 대결부터 런던 공격까지 숨막힐 정도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그 결말도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무려 피터잭슨이 영화화 한 '모털 엔진' 의 예고편이 공개됐다!!! 

발렌타인 박사를 휴고 위빙이 연기하는구나!! 정말 기대된다. 

공개된 출연진들을 보니, 어떤 스토리가 잘려나가고, 어떤 스토리를 중심으로 각색했는지 조금은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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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정민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상 작가 이전에 페미니스트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조금 생소한 "비관적 페미니즘" 의 신봉자이다.
'이정도는 남성 혐오 수준 아니야?'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엄청나게 핍박받고, 고통받는다. 남성의 손길을 역겨워하고, 성행위를 고통스러워하며, 아들을, 아이를 혐오한다. 비록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은  이 작품까지 총 세권에 지나지 않지만, 작품 속 여성들의 삶은 남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지 못한다.
 [욕망] 은 그러한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부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이나 가뭄, 기아와도 관계가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 좋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내키면 비싼 옷을 살수도 있고, 동네 여자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하며, 가끔 그런 시선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매 챕터마다 그녀가 남편과 나누는 성행위 장면이 묘사되는데, 엄청나게 직관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사용된다.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이것은 사랑으로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착취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지회사 공장장인 남편은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 화려한 옷을 제공하고, 그녀는 그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굽힌다는 등의 묘사이다. 권력관계에 의한 착취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겐 어떠한 권한도, 선택의 폭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원하는대로 몸을 대주고, 아이를 낳아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과도 같다. 이윽고 그녀는 아들조차 혐오하게 된다. 아들 역시 남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영악하게 남자로 자라나고 있으며, 그녀가 낳았지만, 낳는 순간부터 그녀보다 사회적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남편처럼 아들도 그녀를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적인 서사를 통해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이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중심의 구조, 여성 스스로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공고한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변한다.
 [욕망] 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감정이 전혀 없는 욕망의 덩어리로 그려진다. 패거리를 짓고 회사를 통해 누리는 사회적 지위에 탐닉하고, 그로 인해 따먹는 달콤한 열매들은 자신의 집에서도 고스란히 연결되어야 한다. 그녀는 공장장인 남편이 회사에서 부리는 직원들과 다를바 없다. 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는 남편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그것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그늘 안에서 명줄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의 허벅지는 공장장, 그 끔찍한 승객만을 위해 끓고 있는 그의 욕구에 튀겨져 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는 바쁘게 움직여 그녀의 진입로에 몸을 떨며 짐을 내려놓고 그 대가로 그녀에게 브로치나 금속 팔찌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 일은 곧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자유롭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비웃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다. 당신은 이러한 모습을 구경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이 신사가 샴페인을 들고 당신 집 대문을 소란스레 두드려도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 여자는 즐거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자신을 상자에 넣고 포장할 것이다! 푸른 하늘은 경치를 진풍경이 되게 한다.
사업은 잘된다."
p.183

인류의 미래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듯,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와 같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엘프리에 옐리네크를 구글에 검색만 해보아도 수많은 문건들이 뜨는데, 그녀는 대표적인 회의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결코 남성의 지위를 빼앗을 수 없으리란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런 부분을 읽고([욕망]의 권말에 실려있는 해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김영하 작가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인터넷에 검색만 해보면 김영하 작가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그는 우리 '헬조선' 의 젊은이들을 향해 한 강연이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김영하 작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끼워 넣으면 그녀의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된다. 여성들은 김영하 작가가 대상으로 삼은 그들보다 두배 세배는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명확하게 설파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가는 아무것도 못할껄'
그녀가 여성들의 디스토피아를 설파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위', 다시말해 '남성들의 카르텔' 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황폐화된 황무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이니까.
그녀에게 이 세상은 정글이다.
무려 잔디나 잡초, 심지어 흙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적인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흙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땅속으로 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이라는 족쇄에 묶여 '남편' 이라는 악마에게 '섹스' 라는 고문을 당하며 '가정' 이라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여자' 에게 한없이 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15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위에 언급한 것 처럼 포르노 이상의 직설적인 성애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 어떤 누군가는 상상도 못했을 각종 행위들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 어떤 묘사도 에로틱하거나 사랑스럽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와 다름없고, 아들을 키우는 보모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아들로부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남성들에게 읽힐만 하다. 특히나 중고딩 교과서에 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우리나라의 중고딩들은 부적절한 포르노로 물들어있으니까. 나도 그랬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1번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이 작품의 두 챕터 정도(한 30페이지쯤)만 교과서에 실려도 10대 성범죄가 반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 행위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사무칠정도로 묘사된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중인 "부부간, 혹은 연인간에 서로 합의되지 않은 섹스가 강간인 이유" 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공감되는 텍스트가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언제나 상정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치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운동만이 아니다. 삶은 거의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어깃장의 법칙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어깃장을 놓는 법이다. 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관적" 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적어도 '여성이 아닌자,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지 말라' 던가, '여성운동은 여성들만의 것이다' 와 같은 착오적인 주장은 피할 수 있을터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념을 구분하는 방법도 필요한 것 같다. 
예를들어, 페미니즘 비평, 같은 부분이다. 비평에는 여러 기법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컨텍스트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오롯하게 텍스트 안에서만 파고들 수도 있다. 작가의 전작을 포함, 작품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작가 중심의 접근법도 있다면, 당연히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작품의 평가는 언제나 비평하는 모두의 것이고, 작품이 독자의 것이듯, 비평 또한 독자의 것이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전문가의 비평과 독자의 리뷰가 난립하는 바야흐로 백만 네티즌의 시대라는 점 정도이리라.
전문 비평과 단순한 리뷰를 구분하는 역량 정도는 내 스스로가 배워야 할 터다.
적어도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작품' 이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차별적인 작품' 과 같은 평들을 구별해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지적받았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렇듯이, 성경이 그렇듯이 말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려진 작품에는 언제나 여성 차별, 여성 혐오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그 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의 가치가 폄훼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월북 작가의 작품들을 폄훼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작품을 비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친일 작가들의 작품을 혐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터. 인간적인 취향과 작품의 성취는, 적어도 구별하는 삶을 살고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작품은 남편과의 성생활과 아들 육아를 오로지 '고통' 만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도 평범한 남성들이나 여성, 혹은 일부 여성주의자들조차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편향되게 표현된 여성의 성 역할에 읽기조차 힘들 수도 있다. 나 역시 수년 전, 처음 읽었을 땐 불과 몇 챕터 넘기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과장' 과 '편향' 이라 여긴다.
문학은 글을 통해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는 장르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현상들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잠깐의 시간이 한정지을 수 없는 긴 시간으로 과장되고, 작은 감정의 편린이 수천배 수만배 늘어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어떤 여성들이 겪고 있을수도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 위해 편향된 시각과 과장된 역할을 활용한 것 뿐이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 '픽션'. 아닌가.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과장과 편향으로 가득찬 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오롯하게 이 책을 읽는 나의, 독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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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브리튼 마을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힘들게 촌장의 허락을 구해 아들이 사는 옆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모든 관절이 쑤시고 몸 성한 곳이 거의 없지만, 부부간의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깊은 부부는 가장 가까운 색슨족 마을에서 위스턴이라는 색슨족 전사를 만나게 되고, 용에게 상처를 입은 에드윈이라는 소년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에게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색슨족 마을 인근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수도원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최근 과거의 기억을 거의 다 잃었다. 둘의 젊은시절조차 떠오르지 않고, 아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아들이 왜 다른 마을로 떠났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고, 어떤 장면들은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으나, 일대의 모든 마을에서 비슷한 일들이 남녀노소를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었다. 치매와 같은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도중 아서왕의 조카인 늙은 기사 가웨인을 만나게 된다.

가웨인은 오래 전, 아서왕의 명령에 따라 이 지역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암용 케리그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기사였다. 

색슨족 전사인 위스턴 역시 자신의 왕의 명령에 따라 암용을 죽이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참이었으나, 가웨인은 그와 협력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어서 떠나라는 말만 반복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이 과정 속에서 최근 이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기억 상실 현상이 암용 케리그가 잠자면서 내뿜고 있는 입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중 두번째로 읽어본 작품이다.

[나를 떠나지 마] 도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데, 이 작품 역시 대단하다.

고작 두 작품만으로 딱 잘라 평할 순 없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서정적인 묘사에 굉장히 뛰어난 작가인 것 같다.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학교와 주변 광경들, 병원이 위치한 장소의 풍광들과 인물들에 대한 정적인 묘사가 인상깊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적이면서도 농밀한 묘사들이 돋보였다. 빽빽한 나무와 바위, 산, 안개로 가득찬 대기에 대한 느낌이 문장 속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당히 박력있는 액션들이 많은데도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그랬다. 내용면에서 상당히 감정적인 동요가 큰 반전이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서술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중요한 이미지들은 눕거나 앉아있는 장면들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단편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안개로 가득찬 당시 영국의 풍광들에 대한 묘사들은 무척 춥고, 눅진하고, 답답하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서로의 손을 감싸쥐고, 어깨를 감싸고, 챙겨주는 장면들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장을 덮으니, 눈물이 왈칵 났다.

사무치는 회한과 아쉬움, 안타까움...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뭐지? 몇페이지의 마지막 장면을 몇번이고 되읽었다. 똑같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가끔 그 마지막 페이지가 불쑥불쑥 되살아났다. 


사람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젊은이는 내일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앞부분보다, 뒷부분 노인에 대한 부분이 더 또렷하게 남아있다.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 먹을수록 "왕년에 내가~" 라는 말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추억이야말로 노인의 허세이자, 본질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좋은 기억은 더 좋게, 나쁜 기억은 덜 나쁘게, '추억보정' 이 되어 서랍 안에 쌓여진다. 

젊은이는 서랍의 빈 공간에 채울 수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노인은 꽉 채워진 추억들을 끄집어 살피며 하루를 지새운다. 

 

 그렇다면, 일제치하를 경험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들이 녹아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당했던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지구에 비하면 도저히 길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책은 동족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성장해왔다. 오로지 피에는 피로, 살육에는 살육으로 맞서왔다. 이러한 피와 증오의 굴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교활함과 야비함에 기인한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인한 손발톱도 없이 진화한 인간에게는 오로지 뇌 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뒤통수를 찌르고, 목을 벤다. 인류의 과학은 언제나 효과적인 살육을 위해 진보했고, 인간의 역사는 시체로 시체를 쌓아온 과정이다. 

위스턴은 같은 색슨족 소년인 에드윈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브리튼족을 증오하거라. " 

친절하고 다정한 브리튼족이었던 액슬에 대한 경애를 품기도 하지만, 그것이 동족과 부모를 학살한 브리튼족들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는다. 위스턴은 다시 대지를 피로 적시기를 원한다. 그것은 복수의 피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망각 뒤에 숨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색슨족이 원하는 평화는 더더욱 아니다.   

가웨인은 살육의 범죄를 기억의 저편에 묻히기를 원했다. 정복자 아서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법사 멀린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것 같은데...'

이 대지에 사는 모든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끊임없는 망각에 시달리며 불안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이어간다.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이것이 인류 문명의 발자취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가장 첫번째 장면은 얼마전 큰 이슈가 되었던 미얀마 로힝야 족의 대학살극이었다. 그것을 묻고 평화의 지도자로 우뚝 선 아웅산 수치 여사였다. 더 전으로 돌아가볼까. 영국의 수많은 식민지 총독들은 어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천만을 학살하고, 실제로 손발을 잘랐을 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거대한 인종분리 정책은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버금갔다. 미국은 역사책의 첫 페이지가 학살이다. 미국 원주민들은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밀려나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암용의 망각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색슨족인 위스턴은 증오와 고통, 슬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색슨족의 왕에게 선택받았고, 거짓 평화를 깨뜨릴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려는 위스턴과, 거짓 평화를 지키려는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망각의 입김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다스리며 거짓 평화 속에서 안주하는 액슬. 


과연 거짓된 평화도 평화인가. 결국 그렇게 완전히 잊을 때 까지 참고, 기다리고, 또 참고, 또 기다리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 책 내용이 싹 잊혀지는 책이 있다. 내가 이렇게 읽은 책의 모든 리뷰를 남기고자 했던 이유이다.

줄거리를 적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적고,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을 적어낸다.

반면, 마지막 장을 덮어도 며칠동안이나 머릿속에 뭔가가 왕왕 울리는 책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사실 그 왕왕 울리는 뭔가를, 정리할 수 없어서 이 글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 군대가 IS의 근거지를 함락시켰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다. 할로윈을 맞은 뉴욕의 한 거리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고, 텍사스의 교회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 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망각속에, 역사의 뒤안길에 잘못을 떠넘긴 사람들이 떠올랐다. 

히틀러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고,학살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떠올랐다.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다.클린턴이 떠올랐고, 오바마도 떠올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떠올랐고,히로부미와 하토야마, 아베가 떠올랐다. 

베트남, 남아공, 로힝야, 미얀마, 아웅산, 남아공, 콩고, 토고,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수니파, 시아파, 아우슈비츠, 게토, 킬링필드, 보도연맹, 티벳,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 

모든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떠올랐다.

망각의 시대에 증오를 전래하는 위스턴이 떠올랐다.

어이없이 죽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떠올랐고,어이없이 죽어가는 아들과 딸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생명들이 중요한가?

그 모든 생명들이 하찮은가?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 끝인가?


그래. 맞다.


죽으면 끝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질터다. 마치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이영도 작가는 인간의 삶,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삶을 "그림자 자국" 이라고 통칭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그림자의 자국.모든 삶은 대지위에 흩뿌려진 그림자 자국에 불과하다.

그 흔적은 불과 몇십년이면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아도 남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야비한 가해자들은 언제나 피해자들의 '망각' 을 꾀한다.

다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자고, '비가역적' 약속을 강요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일관하며 모른체한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민족들에게, 러시아가 소련시절 독립을 꾀하던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사실들을, 미국이 무기를 제공하며 내전을 부추겼던 중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일본이 침략하여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과 위안부 여성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때 학살한 베트남인들에게, 군부 독재 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자신들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눈을 가리고, 평화라는 단어를 악용하며 망각을 기다린다.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이것은,

허무는 아니다.

농밀하고 강력하다.

세상을 뒤덮는 안개처럼.

쫓고 쫓아, 부모의 가죽을 벗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마주한 아들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 쉼 없이 펄떡댄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잊으면 일본과 더 가까워질까? 

창씨개명을 당한 할아버지를 잊으면 일본가 더 가까워질까? 



우리는 진정한 답을 알고 있다.

독일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독일은 자성의 목소리부터 시작했다.

지도자의 목소리에 좌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교육 일성으로 삼았다. 과거를 적확히 기술하고, 아우슈비츠에 자신들의 악행을 남김없이 기록해, 후대를 위해 남겼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 여러번 사과하고, 전후에 성실하게 쌓은 국부를 유럽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독일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우뚝 섰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피해국들은 충분히 납득했고, 용서했다. 


진정한 사과는 어려운법이다.

사람과 사람간에도 한없이 어려운 것이 사과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라면. 


그렇게 위무하며, 이런 거짓 평화를 누리는 것이 최선인걸까? 

망각속으로 묻어놓고, 오늘만 살아도, 되는걸까? 


이러한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바로 언론의 일이다.

[파묻힌 거인] 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암용 케리그의 입김에 영향을 받아 과거를 망각했고, 여전히 망각 중이지만, 색슨족 전사 위스턴만은 그 입김에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암용을 죽이는 전사로 선택된 이유였다. 그는 색슨족 소년 에드윈에게 망각한 과거를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증오' 도 전한다. 단순한 사실이나 역사에 '증오' 를 얹어준다. 아니, 어쩌면 현대의 언론도 잘 하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언론은 때로 자신들이 설정한 선악과 피아의 잣대를 대중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한다. 언론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다. 

암용 케리그의 입김은 정복자이자 학살자인 아서가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것도 언로言路의 한 방향이다. 로마 황제처럼, 전두환처럼 스포츠와 섹스, 영화와 드라마등의 유희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기만했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 간첩으로 호도당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선량한 시민들들을 잊었다. 그 바통을 넘겨받은 노태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 시기를 거쳐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기만당해온 삶을 진정한 삶이었다고 우기며 늙어가고 있다.


오랜 암흑, 잠깐의 빛, 다시 고단한 어둠, 그리고 또 잠깐의 빛.

예수는 로마의 부역자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고 말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암용을 죽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찾아줄 위스턴을 기쁘게 맞이한다. 하지만, 이윽고 액슬을 알아채게 된다. 암용이 죽고 나면 피를 피로 갚는 잔혹한 셈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끈끈한 부부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었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그리워할 젊은 시절도 없었고,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찬 과거도 없었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던 기억들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절망에 빠져 서로를 외면했던 기억들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서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적인 영역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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