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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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2008년 1월 8일에 쓴 감상문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1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니, 안타깝게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하기는 힘들다.

난 참, 무의미하게 10년을 보냈구나, 싶다가, 10년동안 블로그에 적은 글과 그림들을 살펴봤다.

그렇게 무의미하지도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통장의 숫자가 내 삶을 평가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자위나 정신승리, 라고 해도, 어쩔거야. 내 삶인데. 


작가의 지식과, 그 지식을 현실에 대입시키는 통찰력, 지식인 특유의 허영과 과시욕, 동시에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희망 등이 물씬 느껴진다.

10년만에 읽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은 그대로지만, 진지함과 해학을 오가는 정서들도 그대로였다. 

르네는 여전히 고독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며 만끽하고 있었고, 팔로마는 여전히 풍요로움 속에서 감성을 말려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책의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여러개로 쪼개져있는 각각의 챕터마다 주제의식이 명확했고, 그것들을 풀어내는 사유의 방식, 치열한 관찰을 수반하고 차곡차곡 쌓아온 지식에 기반한 사색을 통한 통찰 등이 워낙 잘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가장 가까운 한 챕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서사의 줄기를 따라가기 위해 애쓰기보다 매 페이지, 모든 문장들이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특히, 하위문화(서브 컬쳐)랄 수 있는 일본의 망가부터 고급문화랄 수 있는 클래식 오페라까지 망라하는 르네의(작가의) 문화적 소양이 부럽고, 흥미로왔다. 때문에, 후반부에 펼쳐지는 르네와 팔로마의 드라마는 덜 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읽으니, 각 인물들의 드라마가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르네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새삼 내 나이때의 르네를 생각하니, 글쎄, 그렇게 안쓰럽지도 않더라.

르네는 비록 초졸이지만, 독학을 통해 많은 문화와 예술을 접했고, 타고난 재능으로 그것들을 '습득' 해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은 단순히 '감상' 하는것 만으로는 소양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는다.

피아노를 쳐본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와, 피아노를 전혀 쳐보지 않은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는 감상의 단계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회화나 문학도 마찬가지다. 직접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술 너머 작가의 심상이 존재한다. 컨텍스트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을까?

어떤 분야에서든 간접경험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독학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이고, 들리기에. 

우리에게 선생님과 선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르네는 선생님과 선배님이 없이 오로지, 스스로 찾아서 들리고 보이는대로 빨아들였다. 관련된 지식은 책을 통해서 접했을 것이다.

우리는 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책' 이 그대로 '지식'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어디 책 뿐이랴. 수학 공식을 외웠다고, 단숨에 수학 점수가 늘지 않듯, 철학책을 읽었다고, 이기론과 이원론으로 세상을 볼 수 없듯,  단지 보고, 듣고, 읽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지적 수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올바른 책 읽기에 대한 책도 있다!!  

그렇다고 르네가 아주 치열하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닐터다.

그런 르네가 그정도의 철학적 사유와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는 것은, 르네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는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집안일을 도왔고, 일을 했다.

뿐만 아니다. 홀로 독신으로 살 각오를 했는데, 갑자기 동반자도 생겼다.

그녀가 한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안일을 도왔을 뿐이었다. 외모에 신경도 1도 안쓰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인데, 그냥, 어떤 남자가 왔다.

 

 헌데, 이 남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르네의 외양 속에 숨겨진 현명함을 알아챈 남자다. 가정적이고, 조용하며, 사교성도 좋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식이 아주 떨어지지 않았고, 지식이 곧 지혜와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준 남자다. 손재주도 좋았고, 직업정신도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바람도 피지 않았던 것 같다. (ㅡ,.ㅡ;;;;) 

르네가 보다 폭넓은 지식과 문화를 향유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을 것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간들.

특히, 그 남자는 르네가 일하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이 두 부부 사이에 아이도 없었던 것 같으니, 르네에겐 여가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을터다.

(게다가...적당히 살다, 적당할 때에 가주신다....쿨럭....)


그....

이정도 삶이면, 내가보기엔 그....

에....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는 르네의 삶이, 난, 그냥 부럽다. ㅋㅋㅋㅋ


여튼, 다시 읽으니, 저자와 부딪히는 지점들도 꽤 읽혔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단어들은 일견, 허영과 허세처럼 느껴졌다.

일본문화에 대한 상찬이나, 지나친 미화는 물론이고, 르네와 팔로마가 다른 사람들을 제 멋대로 평가하고 단정짓는 장면들도 상당히 불편했다. 사실 르네가 마뉘엘라, 팔로마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은 '뒷담화' 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성적인 욕망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다. '질 낮은 농담' 정도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꼈던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고정관념을 쌓고,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자라난다.

국가, 언어, 가족, 친구 등 수많은 외부요인과, 선천적인 요인들이 모여 뚜렷한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 틀을 결코 부술 수 없다.

아, 조금 수정해야겠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서, 스스로 가지게 된 이 틀을, '자기 혼자서는' 결코 부술 수 없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파훼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온전히 '타인' 에 의해 분쇄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오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르네, 당신은, 당신 언니가 아니에요."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깨뜨려주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누군가를,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맞이한 그 순간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오해한 것도 모른채, 오해 속에서, 오해하며 죽어갈 것이다.

어쩌겠나.

그 또한 인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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