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1
우오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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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20~21년 사이에 많이 들어봤다.

"진격의 거인" 의 뒷자리를 바로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

이사야마 하지메 이후 비슷한 뉘앙스의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천재나 귀재라는 표현을 우리보다 흔하게 쓰곤 한다.

마케팅의 일종이겠지만, 솔직히 이 작가들이 토리야마 아키라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에 비한다면 천재나 귀재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가들을 폄하하려는게 아니라, '천재'나 '귀재'가 갖춰야할 재능의 허들이 꽤 낮아보인다는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일본에서 연재 당시에 천재적인 작가의 작품이라고 호들갑을 꽤나 떨었던지라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첫 장을 펼쳤다.


일단, 작화 수준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만화에는 다양한 기술과 재능이 필요하다. 작화, 연출, 서사, 인물 등.

그 중 한가지가 매우 특출나면, 다른 부분들이 다소 떨어져도 독자들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만, 작화의 경우 작품의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다른 무엇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만화에서는 첫 페이지가, 그리고 첫 화가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쉽게 꺼내서, 쉽게 열고, 쉽게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만화를 "완독" 하겠다는 목표 따위를 갖지 않는다. 잡지에는 여러편의 작품들이 실려있고, 그 중 한두 작품 쯤은 읽지 않아도 상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격도 싸다. 그렇기에, 만화책 한권 쯤이야. 첫 에피소드만 읽고, 맘에 안 들면 쉽게 내던진다.


독자를 유혹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면서 기본적인 무기는 작화이고, 그를 보완하는 것이 연출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잡지 주간 연재만화는 2~4페이지 안에 독자를 빨아들이지 못하면 주목받지 못하고, 작가로서 데뷔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 만화는 그렇게 오랫동안 주간 연재 만화 시스템이 고이고 고여, 첫 페이지와 첫 화에 대한 다양한 연출기법들이 교과서처럼 정립되어 있는데,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 라는 작품의 첫 페이지 역시 그런 주간 연재 만화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작화의 부족함이라는 단점을 완벽하게 숨기고, 전형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무엇을 바쳐야 이 세상의 전부를 알 수 있냐?" 는 도발적인 도입 씬 만으로 나는 충분히 빠져들어, 2권까지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이야기는 15세기 초반, 프랑스의 어느 한 도시에서 시작된다.

작품이 꽤나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국가 이름이나 종교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누가봐도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가톨릭 국가들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얄팍하게 감추지만, 이 작품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룰 것이라는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지地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 라는 제목답게 이 작품은 지동설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이단 심문관 "노바크"의 잔인 무도한 고문장면과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 소년 "라파우"로부터 이 진중한 주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이야기 전체의 도입부인 1권만으로도 구성이 매우 뚜렷하고, 사건의 개연성은 물론 캐릭터들이 획득하고 있는 핍진성도 매우 훌륭하다.

특히, 라파우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진지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그 쯤 되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인 불안정한 작화는 다소 뒤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만화에서 "작화" 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가독성" 때문이다.

텍스트로 이뤄진 문학작품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첫번째 덕목은 "얼마나 잘 읽히는가" 이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해도 읽는순간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한 문장 안에 수많은 내러티브와 함의를 담는다 해도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오독하게 한다면 어떠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겠는가.

만화에서 "그림" 이란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제 아무리 유려한 화력을 뽐내더라도, 독자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어떤 인물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적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좋은 "만화"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의 작화수준은 그림체가 안정적이지도 않고, 데셍이 정확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가독성을 망가뜨릴 정도는 아니다.

특히, 비교되는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 1권과 비교해본다면 더더욱.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며 칼을 휘두르지도 않고, 십여명에 달하는 동료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기에 "가독성" 면에 있어서는 작화력의 우선순위가 뒤쪽으로 밀려도 크게 문제될 부분이 적다.

(오히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엽기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덜 끔찍해 보이는 장점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나도 가끔 생각해본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결혼과 출산, 양육이 유일한 이유이자 목표라면.

자식을 위해 삶을 쏟는것만이 우선순위고, 정답이라면,

지구가 돌건, 하늘이 돌건.

무슨 상관일까?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성장이란, 다른말로 "살아있음" 을 소모하기 시작한다는 의미, 죽어간다는 의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보람찼건, 허무했건, 그냥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질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은 죽기위해 살아간다.

오직 죽음을 위해 달음치는 것이 삶.

나는, 넉넉잡아 100년 뒤면,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었던 것 처럼 완벽히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왜 살고 있지?

다른 어떤 사람들의 정답처럼 종족 번식을 위해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아닌 삶을, 왜, 영위하고 있지?

나의 선택은, 나의 삶은 "틀린" 것인가?


아마 이러한 질문은 인류가 "문명" 이라는 것을 시작한 순간부터, 언젠가 멸종할 그 날까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다. 혹은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이번 생을 "태어나지 않은" 걸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생을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살기로 했다.

오롯하게 봉사단체만을 좇아다니며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다.

어떤 이는 국가를 위해,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이는 욕망을 위해, 어떤 이는 종교를 위해....

어떤 이는,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 무언가를 위해, 하루를 죽어간다.


문제는, 어떤 누군가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에, 자신의 가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결혼과 양육일 수 있고, 삶의 태도와 죽음 후의 세계일 수도 있다.

"불신" 은 "지옥" 이라거나 "낳지" 않으면 "멸종" 이라는 협박이 들어가기도 하고, "진리" 가 아니면 "칼" 이라는 폭력이 수반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할까??

나의 삶은, 타인의 삶보다 가치있는가? 의미있는가? 숭고한가?

그런 "가치" 를 부여할 만 한 것인가?

그런 판단을 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신은 너의 신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던 그 시절의 그들보다 진리에 가깝다고 평가하는가?

지구가 돈다는 단순한 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리보다 더 진실한가?


이 작품은 한 이데올로기가 세계관 전체를 꼬챙이에 꿰어 놓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이로 인해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고, 새로운 시각이 세계관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진리였던 시대가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여성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어린아이는 동물과 같아서 훈육에 폭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종교가 다른 인간은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동물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왕과 귀족은 하늘이 선택했다는, 대기 중에는 에테르라는 물질로 가득 차있다는, 지구는 평평해서 계속 나아가면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진리" 인 시기가 있었다.

불과 5~600년 전까지도 그랬고, 개중 많은 것들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천동설들이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뒤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500, 60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일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걸지도.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하고, 케플러가 검증했던 지동설은 갈릴레이로 이어졌다.

1권 라파우의 에피소드는 명백히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모티프로 보인다. 마치, 갈릴레이의 선택을 변호하는 듯한 1권의 에피소드는 기대를 벗어나는 과감한 엔딩으로 나를 깜짝 놀래켰다.

2권에서 작가는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역시,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지동설이 당대의 "평범한 소시민들" 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탐구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는 진리를 좇는, 지구는, 인간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중심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귀족도, 학자도 아닌 쓰레기 취급을 받던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은, 과연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기대만큼, 그리고 화제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여전히 천재나 귀재같은 표현해는 동의하지 못하겠으나.)

앞으로의 전개도 엄청나게 기대되고, 일본에서 성황리에 완결을 지었다는 사실도 반가웠다.

적어도 수년동안 애타게 기다릴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사족으로, 작품을 읽는 내내 사카모토 신이치의 "이노센트" 라는 작품이 계속 떠올랐다.

역시 중세 유럽을 다루고 있고, 굉장히 하드코어한 고어씬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과 달리 어마어마한 작화력이 장점인 작품이다.

만약 이 작품을 사카모토 신이치가 작화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더불어, 제발 이 작품을 일본에서 어쭙잖은 실사화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차라리 판권을 해외에서 사갔으면....BBC나 HBO같은데서 만들어줘....HISTORY채널도 좋아.

제발 일본에서만 만들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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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뜨기에 관하여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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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접하는 이영도 작가님의 저작이다.


이영도 작가는 인터넷 이전의 멀티다중접속 온라인 매체였던 "PC통신" 시절 "하이텔" 이라는 서비스(지금으로 따지면 포털 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다.)에서 활동하던 소설가로 이우혁, 전민희 등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장르소설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다.


이 당시에 집필했던 [드래곤 라자] 는 서양 판타지인 "D&D(Dungeons & Dragons; TRPG라는 보드게임의 설정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 방대한 세계관)" 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유려한 스토리 텔링과 생생한 인물묘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폴라리스 랩소디]와 [드래곤 라자]의 후속편인 [퓨쳐 워커]는 대여점이 난립하며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던 소위 "양판소" 시절에도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바야흐로 "판타지" 라는 장르가 문학(비록 "경계문학" 이라며 모호하게 수식됐지만)으로 자리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영도 작가는 장르 문학 스토리 텔링의 기본기 중 하나라고 언급되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기" 에 매우 능숙한 작가이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속담을 비틀어 드래곤이나 오크 같은 상상의 존재들을 끼워넣거나 평범한 직업들에 뜻밖의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등 독자들을 설득하고, 현혹시키는 데에 탁월한 기술을 선보인다.


이는 이후 D&D의 세계관을 완전히 탈피하고 동서양의 신화속 세계관을 차용한 [눈물을 마시는 새] 와 [피를 마시는 새] 에서 극대화된다.


이영도 작가의 이러한 능력은 장편에서 폭넓게 활용되지만, 중단편에서도 제법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영도 작가는 [피를 마시는 새] 이후 3권 이상의 대하 장편은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최근까지 꾸준히 매 해 한두편 이상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다양한 웹진에 소개되는 단편들이지만, 1권 이내의 중장편들도 존재한다.



이 작품집 [별뜨기에 관하여]는 표제작을 비롯, 이영도 작가가 2000~2012년 사이에 발표한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첫 작품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시작으로 "구세주가 된 로봇에 대하여", "별뜨기에 관하여",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이렇게 다섯작품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나마 연작의 성격을 갖고 있는 SF소설들이고, 나머지 다섯 작품인 "나를 보는 눈", "아름다운 전통", "전사의 후예", "SINBIROUN 이야기", "봄이 왔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부터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지라 다양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다양한 스킬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작품집의 모든 작품들이 고르게 높은 수준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페이지에 불과한 엽편도 있고,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는 이영도의 이름값 치고는 평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여전히 수준이 높고, 장르적 문법의 스킬도 무척이나 뛰어나다.



모든 작품의 감상 기록을 적기보다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작품만 추려보겠다.


우선,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를 이해하려면 첫 작품인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통일 직후, 혼란기 한국의 한 언어학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지구를 방문한 범은하 문화교류촉진위원회, 줄여서 '문교촉위'의 외계인들은 인류가 단계적으로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그들은 일단 중개자의 입장에서 인류와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을 정해주고, 서로 '동화' 한 편 씩을 교환하게 한다. 그 첫번째는 "권티다" 라는 문명의 동화였으나 그들의 언어는 복잡한 구조의 화학식이었고, 인류는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도중 단층을 자극할 정도의 폭발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지구에는 외계문명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생겨났고, 문교촉위는 권티다와 인류의 교류를 취소하고, "위탄" 이라는 문명과의 교류를 재추진한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주인공 화자는 한국어로 위탄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마치 [유년기의 끝](아서 클라크) 과 어슐러 르 귄의 "해인 시리즈", 그리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를 비롯한 다양한 SF 걸작들의 오마쥬 같은 작품으로 짧은 호흡 안에 다양한 내러티브를 함축시키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까지 다섯작품은 연작의 형태로, 제목만 봐도 뭔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중,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는 첫 작품에 등장했던 위탄인과 지구인이 동화 교환을 넘어 제법 충분한 교류를 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간대를 다룬다. 어쩌다 보니 거대한 우주 화물선에서 지구인과 위탄인이 동행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문교촉위의 의도대로 인류는 건강하게 성장하여 심우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거대한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들은 모래사장의 모래 한톨 정도였기 때문일까. 문명과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전쟁 같은 일은 이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문교촉위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 결과 엄격하게 문명간의 접촉을 제한하고, 관리하기로 한 것일 터. 위탄인과 인류는 한 우주선에 동승해도 될 정도로 밀접한 사이가 되었지만, 이 두 문명은 너무너무 달랐고, 신체적 특징은 인간쪽이 너무너무 불리했기 때문에 화자인 주인공은 엄청난 불편을 겪게 된다.



이제 막 심우주에 진출하게 된 인류와 이미 어느정도 수준높은 진출을 완성한 위탄인의 티키타카는 시종일관 위트가 넘쳐서 무척 읽는 맛이 좋았다.


그 중, "별뜨기" 는 점성학자에 SF적 상상력을 더한 직업으로, 인류가 심우주에 진출하게 되면서 "자식을 원하는 별자리 밑에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 는 신박한 아이디어로부터 탄생했다.


주인공 화자는 문교촉위의 제안으로 특정한 행성에 사는 한 문명을 위해 "별을 뜨는" 다소 황당한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짧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 신박한 아이디어에 감탄해서 육성으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두세번 더 완독했다.


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위탄인과 반드시 잠을 자야하는 지구인의 동행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 가득한 티키타카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너무나 달랐기에 지구인인 화자를 이해하게 되는 위탄인의 통찰로 매조지된다.



이 짧은 이야기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온 이유다.



인류가 먼우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선도해서 이끌어줄 초월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가설은 수많은 SF작품들이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페르미의 역설' 부터 파생된 대여과기 이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처럼 읽히기도 하는 "문교촉위" 는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마키나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우주.


나는 이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면 공황에 가까운 공포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 이 무한한 공간이 오직 "무無" 로 가득하다면 더더욱 공포스럽다.


지구와 인류는 무한에 가까운 무의미한 공간 안에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 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가.



SF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무한에 가까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상. 상상. 비록 망상에 그칠 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저 발버둥치는 자위행위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이 무한한 우주 속에, 우리처럼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상력을 펼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그 형태가 어떠하건. 바이러스 같은 작은 존재부터, 행성처럼 거대한 존재까지.


무한한 우주에 대해 경외감과 공포를 갖는 또다른 존재들이 있으리라는 상상만 해도, 나는, 이 공황에 가까운 공포를 간신히 극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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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
H. R. 맥매스터 지음, 우진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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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史에 해박하신 블로그 이웃 한분이 있다. 한창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심이 있던 무렵, 많은 글들을 찾아 다니다가 태평양 전쟁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됐고, 블로그를 타고 타고 들어가다가 태평양 전쟁은 물론, 중일 전쟁 등 아시아 근대 전사를 중점적으로 포스팅을 하시는 분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됐다. 

바로 욱이님의 '팬더아빠의 전쟁사 이야기(https://blog.naver.com/atena02 )라는 블로그다. 한국전쟁에 대한 최근 공개된 자료와 관련된 글들도 많다. 직접 저술하신 책도 있고, 감수하신 저서들도 많은 분인데, 이 책은 마침 이 블로그를 통한 서평 이벤트로 출판사에서 받은 책이다. 

문학동네 그룹의 인문서적 임프린트인 교유서가와는 개인적인 인연도 있는 편이라, 이렇게 한다리 건너 받게 되니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맥 매스터는 외교안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물론, 트럼프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년만에 당한 "트위터 해고" 로 더욱 알려지긴 했지만, 대북정책에 대한 대표적인 강경파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볓정책을 비판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유화책을 비난했던 일화도 있고, 중국, 러시아, 중동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던 인물이다. 이런 그의 성향은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책은 챕터별로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 을 거쳐 최종 결론으로 향한다.

리뷰 기한인 "한달"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꺼운 첫인상이지만, 우려만큼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훠얼씬 쉽게, 정말 잘 읽힌다.

이 책은 700페이지짜리 국제 보고서가 아니라, 에세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평생 전쟁터를 찾아다녔던 군인의 경험이 정부의 국제외교관계 요직으로 근무하며 접한 정보들이 적절하게 조합된 훌륭한 요리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장들이 우리나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국가들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깊은 역사를 함께 하며 수많은 질곡을 선사했던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출작전으로 국제무대에 우리 실무진들의 우수함을 선보였던 남아시아, 석유값과 함께 휘청이는 우리 경제의 바로미터인 중동과 이란, 그리고 가장 아픈 손가락인 북한. 어느 한 챕터도 대충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저자가 이 책의 도입에서부터 강한 우려를 보냈던 푸틴의 러시아가 실제로 얼마전,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이 책에 대한 신뢰도가 더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팩트에 기반한 수치나 전문용어들이 아닌, 저자가 직접 나눈 대화들, 경험들 위주로 서술된 그의 글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이 리뷰에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한참 뒤로 훌쩍 뛰어넘어 "북한" 챕터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챕터의 시작은 맥 매스터와 정의용 대사의 만남부터 시작된다. (박근혜의 탄핵과 함께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가안보실장에 임명된 정의용 실장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미국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양국에 우호적인 기류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당시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짤막한 소개부터,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 대해 간략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한국전쟁 파병용사의 아들인 맥 매스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고,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의 상황에 대한 내용도 무척 짧게 등장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나중에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책이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을 위해 쓰여진 책임을 상기해보면 우리 근대사를 짧아도 정확하게 소개해준다는 사실은 고마울 따름이다.  
이어,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논쟁, THADD배치, 김정남의 사망과 남북평화공동선언, 핵미사일 개발, 핵개발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 일본과의 무역분쟁 등 우리에겐 마치 어제처럼 또렷히 기억나는 사례들이 맥 매스터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다. 읽다보면, 그가 대북 강경책을 주문한 이유가 납득이 된다. 
하지만, 북한 챕터는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해도 내외부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매조지 된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그의 주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설득력이 높아졌다. 
'러시아' 챕터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던 푸틴의 야욕과 전쟁 가능성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을 몇번 더 펴게 되는 날이 많을 것 같다. 좋은 의미로든, 안좋은 의미로든...
책을 읽어가며 느끼는 건, 비록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지만, 그 역시 결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평화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그건 아주 극히 일부 지역에서나 그렇다. 이 책이 "배틀 그라운드" 로 꼽는 지역들은 지구의 2/3 정도 된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는 완전 배제되어 있으니, 그 부분까지 다 포함하면 열손가락 정도 빼고 다 일 것이다.
그도 우리만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전략적으로 전쟁을 아예 배제하지 않는, 대담함과 계획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뿐이다.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다른 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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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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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군 2022년 초입에 이 책을 잡게 된 건, 의도와 우연이 적당히 겹친 결과일터다.

이 책에 의하면 손석희 앵커가 뉴스룸을 마지막으로 진행한게 2020년 5월이었고 이 책의 초판 인쇄가 2021년 11월이니, 저자도, 출판사도 엄청나게 열심히 제책작업에 매달렸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뉴스" 를 다루고 있으니, 무엇보다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을터이니, 쓰는것도 쓰는거지만, 검열, 교열 등 후반부 작업에 훨씬 더 많은 품을 들였을터다.

요즘 젊은, 아니, 나도 아직 젊으니, 어린 친구들은 손석희 '앵커' 보다 손석희 '사장' 이 익숙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80년대 초반생이나 70년대 형님 누님들에게 손석희란 이름은 'MBC' 와 '뉴스' 그 자체일 것이다.

매끈한 외모에 적확한 발음, 그리고 매력적인 음색과 발성을 자랑하는 손석희는 백지연 앵커와 함께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언론인이다.

이 책은 방송언론인 손석희로서 그가 MBC를 떠나는 순간부터 JTBC 사장이 되어, 뉴스룸을 런칭하여 앵커석에 앉았다가 내려오기까지 겪은 일들에 대한 '가벼운' 기록과 그 시간 전체를 지배했던 묵직한 상념들을 적어낸 책이다.

대선 시즌을 맞아, 음악 선곡 하나때문에 여당의 압박에 하루아침에 라디오 DJ에서 하차한 이재익CP와 기자협회가 좌편향 되었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모 후보, 발언 하나를 꼬투리잡아 프로그램 하차 요구를 받는 YTN 변상욱 앵커끼지, 방송언론인의 수난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여러가지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젠다 키핑" 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 이 책 전체가 방송언론인 손석희의 머릿속에 '어젠다 키핑'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구체화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소 생소했던 이 개념은 첫 챕터의 제목부터 등장하여, 손석희 사장이 JTBC에서 처음으로 다뤘던 삼성 관련 사안이었던 "노조 무력화 관련 문건" 과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이후 어젠다 키핑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구현되고, 최순실 타블렛 사건을 통해 다듬어진다.

이어지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의 탄핵은 더 이전, 손석희가 MBC를 떠나게 만든 단초였던 이명박 시절 MBC에 가해진 압력 속에서 공고해지고, 이후 치뤄진 대선을 통해 자리잡게 된다. 서지현 검사로 시작해 김지은씨로 폭발된 미투 현상과 북한과의 화해무드부터 경색국면까지 더듬어가며 어젠다 키핑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가 닿는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시 JTBC로 출근하게 된 계기를 찬찬히 되짚으며 '저널리즘' 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으로 회귀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을, 어쩌면 '촉발'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당사자의 책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은 JTBC가 보도했던 최순실 타블렛부터였고, '젠더 감수성' 의 근원인 미투의 시작도 서지현 검사가 JTBC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테니까.

 

언론이란 무엇인가? 언론인이란 어떤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어젠다 키핑' 은 결국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의 초입에 언급된 필립 티치너의 '언론의 경비견(Guard dog) 모델 가설' 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미디어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언론은 '감시견' 과 '애완견' 으로 비유되어 왔다고 한다.

감시견으로서의 언론은 사법, 입법, 행정의 3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제4의 부 역할을 맡아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것이고, 애완견 언론은 주인 무릎에 앉아 애교를 떨듯 정치, 경제 권력 등 엘리트 계급에 충성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경비견 언론은 전체 사회가 아니라 기득권 집단을 위한 경비견으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

애완견 언론과 비슷해 보이지만, 경비견 언론은 기득권을 의존하지만, 복종하지는 않으며 지배세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침입자에 대한 경고를 미리 울리기도 하고, 지배그룹 내에 불화가 생기면 그 갈등을 정치화 하고,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경비경 언론은 특정한 지배집단을 위해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지배 시스템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가설을 증명하는 좋은 예시가 실려있기도 한데, 나는 영화 "내부자들" 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언론사 논설주간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 책은 저자 손석희가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개념 안에 어젠다 키핑이라는 또다른 개념을 녹여내고 구체화 시키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개발이랄까.     


이 책은 에세이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아무래도 "뉴스" 에 관한 소재이니만큼 팩트를 정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워낙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분석한 서적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담긴 함의를 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점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손석희" 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잘 알고, 대선을 앞둔 마당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의지가 보였다.

이 책에서만큼은 '운동가' 가 아닌, '저널리스트' 로서의 "손석희" 로 읽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때문에, 진보쪽 인사들이 손석희에 가했던 비난, 그리고 비난을 마주한 손석희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뉴스룸의 상징이었던 앵커브리핑에 대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중간에 작은 부분을 할애해서 MBC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정들과 JTBC로 취임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라면, 부분일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MBC시절의 손석희는 MB시절이었지.    




-.

JTBC의 뉴스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나는 아론 소킨 각본의 드라마 "뉴스룸" 이 먼저 떠올랐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윌은 메인 앵커이지만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선 후보 토론에서 양쪽에 동일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사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싫어하지만, 공적으로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치적 이념이 완전히 다른 국가를 머리위에 얹고 사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보주의자는 곧 사회주의,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북한과 결부시키는 사회니까.

이 드라마 속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처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발전적인 타협이 가능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깊게 들어가보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지향점은 같다. 

같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게 정치이념의 지상목표니까.

민주주의의 최종 진화단계로 여겨지는 기본소득 개념이 결국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되살릴 필요도 없고,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토지제도가 굳건한 사적소지제 안에서도 다양한 공유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역시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이겐 아직 너무나 먼 일이지만.  



-.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쓸 즈음은 대선 전이었는데,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미 대선이 끝난 후다.

앞으로 시작될 5년.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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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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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챕터는 총 세개로 이루어져 있다.

"1996" 과 "1997". 그리고 에필로그인 "그 후" 이다. 하지만, 마치 이 작품은 앞의 챕터들에 비해서는 얇디얇은 몇 페이지 "그 후" 를 위해 쓰여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마지막에 던지는 파문은 상당하다. 


소설은 1996년 8월, 마지막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가 컬럼비아 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빌리" 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을 설명하는 몇 문장들과 빛과 공기마저 느껴질만큼 디테일한 분위기 묘사가 순식간에 나를 잡아끌었다. 

화자가 빌리와 함께 수강하는 과목은 창작과 합평으로 이뤄진 워크숍으로 소수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창작물에 비평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교류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형태는 국내의 문예창작 수업에서도 자주 이뤄진다고 알고 있다. 문창과 출신의 지인들로부터 이 과정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고, 분야는 다르지만 나 역시 창작에 살짝 발을 담궜던 사람으로써 비슷한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발가벗겨져 몸의 구석구석을 평가받는 느낌. 나아가 X-ray 나 CT, MRI로 피부 아래, 근육 아래, 뼈와 장기들까지 샅샅히 드러나는 느낌.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과정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한다. 

빌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변호해줬던 인물이었다. 

이는 이후 화자가 빌리에게 품게되는 막연한 호의, 또는 호감에 대해 높은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소소한 대화들과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렇게 능숙하게 화자와 독자들에게 빌리를 소개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든다.  

곱씹어보면 뜨악한 일이지만, 화자가 안지 2주밖에 안된 빌리에게 홈 쉐어링을 제안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자와 빌리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첫눈에 반해서 시작하게 되는 연인관계와 비슷하고, 홈 쉐어링을 시작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에피소드 역시 그러했다.

호감에서 시작된 무조건적인 호의와 정기적으로 갖는 둘만의 시간, 자연스러운 집안일 분담과 그로인해 시작되는 갈등, 그렇게 쌓이는 오해와 악감정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퀴어 로맨스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화자는 빌리의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매일 바에 출근해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벌고, 학비를 벌어야 했던 빌리는 심지어 바 지하 창고에 딸린 다목적 룸에서 살아야 했지만, 화자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자녀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고, 좁은 침대와 리놀륨 바닥으로 대표되는 대학 기숙사조차도 마다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뉴욕의 집세를 무시하고 대고모가 거주하던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비는 일리노이주와 보스턴주라는 서로의 고향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빌리는 "블루칼라", 화자는 "화이트 칼라" 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 드러나는 빌리의 정치적인 성향, 자유로운 성생활, 인종적 편견과 추구하는 지향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저자는 독자에게 빌리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롯하게 화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화자처럼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빌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게 된다.

사실, 빌리는 엄청나게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 문학 등 예술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의감 있고, 압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기까지 할 뿐 아니라, 리더쉽까지 있는 인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시점상 화자가 보지 않는 동안 빌리가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빌리의 전형성(과 그로 인한 변화) 때문에 빌리는 갈수록 매력이 떨어져갔고, 반대로 화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화자가 저지르는 행동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챕터로 향한다.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한 이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싫어하게 될 터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필립 로스의 [울분] 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불가해한 삶의 불공정성, 결코 "올바른 선택" 이란 것이 없는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 대한 웃기지 않은 농담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다. 삶을 뒤바꾸는 농담 같은 선택. 화자 역시 그런 선택을 한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한 여러가지 배경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고, 빌리는 그 반대였다. 

빌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사고를 넓혀가는 한편, 화자는 자신만의 아파트먼트 안에서 안온함을 누리며 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침잠한다.

어쩌면 "창작" 이라는 욕구는 화자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비상구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챕터는 그가 그 비상구의 문을 완벽히 닫은 후의 이야기였다.

빌리의 삶과 업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심 평가절하 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려지기도 했다.

정말 많은 부분, 콕콕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빌리가 되고 싶지만, 화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의 꿈은 갖고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지점은,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는 잣대는 언제나 시대와 상황이 결정한다는 부분이며, 사람들 사이에 재능이라는 차별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재능이란 것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형서 작가의 "신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에서는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지만, 개인의 고집이라는,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적절함' 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리 적절해도 또 바뀌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대중을 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던 작품도, 어느샌가 성차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로 바뀌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절대라고 믿는 정의나 도덕, 윤리관은 이념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던 작품들이 언젠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추앙받는 작품들도 미래의 어느땐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스러질 수도 있다.

너무나 불공정하고, 너무나 불가해하고, 너무나 괴롭지만, 중독적이고, 또 중독적이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창작의 기술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훈련하고 쌓아간다. 

이는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히고, 엄마에게 "안먹었어요." 라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기만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메시지와 동갑내기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한 행위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하는 수많은 공상들과 책과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창작" 의 기술들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 속에서 창작자로의 꿈을 꾸게 된다.

마치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숨결을 느껴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자연현상에 궁금함을 느껴 과학에 투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 빌리와 화자,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같은 인물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창작 지망생들은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된다.

어느정도 학습을 한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과, 자기애에 빠지는 쪽이다.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와 빌리가 이미 대학 4년 이상의 학업을 마치고 심화 단계인 대학원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 벽을 넘어선 단계이다. 화자가 친한 친구들 중엔 데뷔한 친구들이 아예 없고, 화자 자신도 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꽤 해본 인물이다.

전업작가가 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학업중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화자도, 빌리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은 아니다.

다만 빌리는 서너기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타고난 건 맞지만, 동 세대 미국을 통틀어보면 그다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실 그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자의 자기혐오는 곤란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땀샘으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의 역량을 알았고,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기술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실 기술은 재능의 부족을 상당히 보완한다.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플롯과 구성이 탄탄한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거기에 "뭔가" 가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기술로 보완되지 않는 "뭔가". 사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는 이로써 가장 괴로운, 그리고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걸, 작품 안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무책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빌리는 그 "뭔가" 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화자는 빌리가 수정해준 원고로 작은 승리를 한번 맛봤고, 그 뒤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빌리는 자기혐오와는 달과 태양처럼 동떨어진 존재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형용되는 외모도 한 몫 했을테고, 장학금을 받는걸 기본으로 생각할 만큼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화자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처럼 그에게 끌렸을터다.

그리고, 결국은 그에게서도 듣게되는 "뭔가" 의 "결여".

아마 화자에게는 그 지적이 쐐기처럼 깊게 박혀있었을터다.

책 속엔 나오지 않지만, 대학때에도, 어쩌면 그 전부터도.

그리고 그 쐐기를 빌리가 내려치는 순간, 그 울림이 어딘가로 폭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머물던 아파트먼트는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유일한 둥지였다. 비록, 대학원시절 한정이었겠지만, 그 안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그리고, 그 둥지가 뭉개지는 순간, 화자는 자기혐오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삶이라는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지만, 빌리를 통해 잠깐 가질 수 있었던 "뭔가"와 결별하고, 창작이라는 세상과의 소통마저 포기하고.


나는, 화자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빌리가 마지막에 외쳤던,

"여기서 평생 살 생각이냐" 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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