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1
우오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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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20~21년 사이에 많이 들어봤다.

"진격의 거인" 의 뒷자리를 바로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

이사야마 하지메 이후 비슷한 뉘앙스의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천재나 귀재라는 표현을 우리보다 흔하게 쓰곤 한다.

마케팅의 일종이겠지만, 솔직히 이 작가들이 토리야마 아키라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에 비한다면 천재나 귀재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가들을 폄하하려는게 아니라, '천재'나 '귀재'가 갖춰야할 재능의 허들이 꽤 낮아보인다는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일본에서 연재 당시에 천재적인 작가의 작품이라고 호들갑을 꽤나 떨었던지라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첫 장을 펼쳤다.


일단, 작화 수준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만화에는 다양한 기술과 재능이 필요하다. 작화, 연출, 서사, 인물 등.

그 중 한가지가 매우 특출나면, 다른 부분들이 다소 떨어져도 독자들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만, 작화의 경우 작품의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다른 무엇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만화에서는 첫 페이지가, 그리고 첫 화가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쉽게 꺼내서, 쉽게 열고, 쉽게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만화를 "완독" 하겠다는 목표 따위를 갖지 않는다. 잡지에는 여러편의 작품들이 실려있고, 그 중 한두 작품 쯤은 읽지 않아도 상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격도 싸다. 그렇기에, 만화책 한권 쯤이야. 첫 에피소드만 읽고, 맘에 안 들면 쉽게 내던진다.


독자를 유혹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면서 기본적인 무기는 작화이고, 그를 보완하는 것이 연출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잡지 주간 연재만화는 2~4페이지 안에 독자를 빨아들이지 못하면 주목받지 못하고, 작가로서 데뷔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 만화는 그렇게 오랫동안 주간 연재 만화 시스템이 고이고 고여, 첫 페이지와 첫 화에 대한 다양한 연출기법들이 교과서처럼 정립되어 있는데,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 라는 작품의 첫 페이지 역시 그런 주간 연재 만화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작화의 부족함이라는 단점을 완벽하게 숨기고, 전형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무엇을 바쳐야 이 세상의 전부를 알 수 있냐?" 는 도발적인 도입 씬 만으로 나는 충분히 빠져들어, 2권까지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이야기는 15세기 초반, 프랑스의 어느 한 도시에서 시작된다.

작품이 꽤나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국가 이름이나 종교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누가봐도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가톨릭 국가들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얄팍하게 감추지만, 이 작품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룰 것이라는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지地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 라는 제목답게 이 작품은 지동설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이단 심문관 "노바크"의 잔인 무도한 고문장면과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 소년 "라파우"로부터 이 진중한 주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이야기 전체의 도입부인 1권만으로도 구성이 매우 뚜렷하고, 사건의 개연성은 물론 캐릭터들이 획득하고 있는 핍진성도 매우 훌륭하다.

특히, 라파우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진지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그 쯤 되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인 불안정한 작화는 다소 뒤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만화에서 "작화" 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가독성" 때문이다.

텍스트로 이뤄진 문학작품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첫번째 덕목은 "얼마나 잘 읽히는가" 이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해도 읽는순간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한 문장 안에 수많은 내러티브와 함의를 담는다 해도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오독하게 한다면 어떠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겠는가.

만화에서 "그림" 이란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제 아무리 유려한 화력을 뽐내더라도, 독자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어떤 인물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적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좋은 "만화"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의 작화수준은 그림체가 안정적이지도 않고, 데셍이 정확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가독성을 망가뜨릴 정도는 아니다.

특히, 비교되는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 1권과 비교해본다면 더더욱.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며 칼을 휘두르지도 않고, 십여명에 달하는 동료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기에 "가독성" 면에 있어서는 작화력의 우선순위가 뒤쪽으로 밀려도 크게 문제될 부분이 적다.

(오히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엽기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덜 끔찍해 보이는 장점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나도 가끔 생각해본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결혼과 출산, 양육이 유일한 이유이자 목표라면.

자식을 위해 삶을 쏟는것만이 우선순위고, 정답이라면,

지구가 돌건, 하늘이 돌건.

무슨 상관일까?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성장이란, 다른말로 "살아있음" 을 소모하기 시작한다는 의미, 죽어간다는 의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보람찼건, 허무했건, 그냥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질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은 죽기위해 살아간다.

오직 죽음을 위해 달음치는 것이 삶.

나는, 넉넉잡아 100년 뒤면,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었던 것 처럼 완벽히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왜 살고 있지?

다른 어떤 사람들의 정답처럼 종족 번식을 위해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아닌 삶을, 왜, 영위하고 있지?

나의 선택은, 나의 삶은 "틀린" 것인가?


아마 이러한 질문은 인류가 "문명" 이라는 것을 시작한 순간부터, 언젠가 멸종할 그 날까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다. 혹은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이번 생을 "태어나지 않은" 걸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생을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살기로 했다.

오롯하게 봉사단체만을 좇아다니며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다.

어떤 이는 국가를 위해,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이는 욕망을 위해, 어떤 이는 종교를 위해....

어떤 이는,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 무언가를 위해, 하루를 죽어간다.


문제는, 어떤 누군가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에, 자신의 가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결혼과 양육일 수 있고, 삶의 태도와 죽음 후의 세계일 수도 있다.

"불신" 은 "지옥" 이라거나 "낳지" 않으면 "멸종" 이라는 협박이 들어가기도 하고, "진리" 가 아니면 "칼" 이라는 폭력이 수반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할까??

나의 삶은, 타인의 삶보다 가치있는가? 의미있는가? 숭고한가?

그런 "가치" 를 부여할 만 한 것인가?

그런 판단을 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신은 너의 신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던 그 시절의 그들보다 진리에 가깝다고 평가하는가?

지구가 돈다는 단순한 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리보다 더 진실한가?


이 작품은 한 이데올로기가 세계관 전체를 꼬챙이에 꿰어 놓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이로 인해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고, 새로운 시각이 세계관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진리였던 시대가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여성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어린아이는 동물과 같아서 훈육에 폭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종교가 다른 인간은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동물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왕과 귀족은 하늘이 선택했다는, 대기 중에는 에테르라는 물질로 가득 차있다는, 지구는 평평해서 계속 나아가면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진리" 인 시기가 있었다.

불과 5~600년 전까지도 그랬고, 개중 많은 것들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천동설들이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뒤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500, 60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일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걸지도.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하고, 케플러가 검증했던 지동설은 갈릴레이로 이어졌다.

1권 라파우의 에피소드는 명백히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모티프로 보인다. 마치, 갈릴레이의 선택을 변호하는 듯한 1권의 에피소드는 기대를 벗어나는 과감한 엔딩으로 나를 깜짝 놀래켰다.

2권에서 작가는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역시,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지동설이 당대의 "평범한 소시민들" 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탐구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는 진리를 좇는, 지구는, 인간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중심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귀족도, 학자도 아닌 쓰레기 취급을 받던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은, 과연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기대만큼, 그리고 화제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여전히 천재나 귀재같은 표현해는 동의하지 못하겠으나.)

앞으로의 전개도 엄청나게 기대되고, 일본에서 성황리에 완결을 지었다는 사실도 반가웠다.

적어도 수년동안 애타게 기다릴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사족으로, 작품을 읽는 내내 사카모토 신이치의 "이노센트" 라는 작품이 계속 떠올랐다.

역시 중세 유럽을 다루고 있고, 굉장히 하드코어한 고어씬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과 달리 어마어마한 작화력이 장점인 작품이다.

만약 이 작품을 사카모토 신이치가 작화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더불어, 제발 이 작품을 일본에서 어쭙잖은 실사화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차라리 판권을 해외에서 사갔으면....BBC나 HBO같은데서 만들어줘....HISTORY채널도 좋아.

제발 일본에서만 만들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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