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뜨기에 관하여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접하는 이영도 작가님의 저작이다.


이영도 작가는 인터넷 이전의 멀티다중접속 온라인 매체였던 "PC통신" 시절 "하이텔" 이라는 서비스(지금으로 따지면 포털 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다.)에서 활동하던 소설가로 이우혁, 전민희 등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장르소설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다.


이 당시에 집필했던 [드래곤 라자] 는 서양 판타지인 "D&D(Dungeons & Dragons; TRPG라는 보드게임의 설정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 방대한 세계관)" 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유려한 스토리 텔링과 생생한 인물묘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폴라리스 랩소디]와 [드래곤 라자]의 후속편인 [퓨쳐 워커]는 대여점이 난립하며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던 소위 "양판소" 시절에도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바야흐로 "판타지" 라는 장르가 문학(비록 "경계문학" 이라며 모호하게 수식됐지만)으로 자리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영도 작가는 장르 문학 스토리 텔링의 기본기 중 하나라고 언급되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기" 에 매우 능숙한 작가이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속담을 비틀어 드래곤이나 오크 같은 상상의 존재들을 끼워넣거나 평범한 직업들에 뜻밖의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등 독자들을 설득하고, 현혹시키는 데에 탁월한 기술을 선보인다.


이는 이후 D&D의 세계관을 완전히 탈피하고 동서양의 신화속 세계관을 차용한 [눈물을 마시는 새] 와 [피를 마시는 새] 에서 극대화된다.


이영도 작가의 이러한 능력은 장편에서 폭넓게 활용되지만, 중단편에서도 제법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영도 작가는 [피를 마시는 새] 이후 3권 이상의 대하 장편은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최근까지 꾸준히 매 해 한두편 이상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다양한 웹진에 소개되는 단편들이지만, 1권 이내의 중장편들도 존재한다.



이 작품집 [별뜨기에 관하여]는 표제작을 비롯, 이영도 작가가 2000~2012년 사이에 발표한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첫 작품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시작으로 "구세주가 된 로봇에 대하여", "별뜨기에 관하여",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이렇게 다섯작품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나마 연작의 성격을 갖고 있는 SF소설들이고, 나머지 다섯 작품인 "나를 보는 눈", "아름다운 전통", "전사의 후예", "SINBIROUN 이야기", "봄이 왔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부터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지라 다양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다양한 스킬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작품집의 모든 작품들이 고르게 높은 수준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페이지에 불과한 엽편도 있고,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는 이영도의 이름값 치고는 평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여전히 수준이 높고, 장르적 문법의 스킬도 무척이나 뛰어나다.



모든 작품의 감상 기록을 적기보다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작품만 추려보겠다.


우선,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를 이해하려면 첫 작품인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통일 직후, 혼란기 한국의 한 언어학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지구를 방문한 범은하 문화교류촉진위원회, 줄여서 '문교촉위'의 외계인들은 인류가 단계적으로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그들은 일단 중개자의 입장에서 인류와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을 정해주고, 서로 '동화' 한 편 씩을 교환하게 한다. 그 첫번째는 "권티다" 라는 문명의 동화였으나 그들의 언어는 복잡한 구조의 화학식이었고, 인류는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도중 단층을 자극할 정도의 폭발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지구에는 외계문명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생겨났고, 문교촉위는 권티다와 인류의 교류를 취소하고, "위탄" 이라는 문명과의 교류를 재추진한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주인공 화자는 한국어로 위탄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마치 [유년기의 끝](아서 클라크) 과 어슐러 르 귄의 "해인 시리즈", 그리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를 비롯한 다양한 SF 걸작들의 오마쥬 같은 작품으로 짧은 호흡 안에 다양한 내러티브를 함축시키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까지 다섯작품은 연작의 형태로, 제목만 봐도 뭔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중,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는 첫 작품에 등장했던 위탄인과 지구인이 동화 교환을 넘어 제법 충분한 교류를 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간대를 다룬다. 어쩌다 보니 거대한 우주 화물선에서 지구인과 위탄인이 동행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문교촉위의 의도대로 인류는 건강하게 성장하여 심우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거대한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들은 모래사장의 모래 한톨 정도였기 때문일까. 문명과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전쟁 같은 일은 이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문교촉위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 결과 엄격하게 문명간의 접촉을 제한하고, 관리하기로 한 것일 터. 위탄인과 인류는 한 우주선에 동승해도 될 정도로 밀접한 사이가 되었지만, 이 두 문명은 너무너무 달랐고, 신체적 특징은 인간쪽이 너무너무 불리했기 때문에 화자인 주인공은 엄청난 불편을 겪게 된다.



이제 막 심우주에 진출하게 된 인류와 이미 어느정도 수준높은 진출을 완성한 위탄인의 티키타카는 시종일관 위트가 넘쳐서 무척 읽는 맛이 좋았다.


그 중, "별뜨기" 는 점성학자에 SF적 상상력을 더한 직업으로, 인류가 심우주에 진출하게 되면서 "자식을 원하는 별자리 밑에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 는 신박한 아이디어로부터 탄생했다.


주인공 화자는 문교촉위의 제안으로 특정한 행성에 사는 한 문명을 위해 "별을 뜨는" 다소 황당한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짧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 신박한 아이디어에 감탄해서 육성으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두세번 더 완독했다.


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위탄인과 반드시 잠을 자야하는 지구인의 동행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 가득한 티키타카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너무나 달랐기에 지구인인 화자를 이해하게 되는 위탄인의 통찰로 매조지된다.



이 짧은 이야기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온 이유다.



인류가 먼우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선도해서 이끌어줄 초월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가설은 수많은 SF작품들이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페르미의 역설' 부터 파생된 대여과기 이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처럼 읽히기도 하는 "문교촉위" 는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마키나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우주.


나는 이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면 공황에 가까운 공포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 이 무한한 공간이 오직 "무無" 로 가득하다면 더더욱 공포스럽다.


지구와 인류는 무한에 가까운 무의미한 공간 안에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 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가.



SF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무한에 가까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상. 상상. 비록 망상에 그칠 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저 발버둥치는 자위행위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이 무한한 우주 속에, 우리처럼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상력을 펼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그 형태가 어떠하건. 바이러스 같은 작은 존재부터, 행성처럼 거대한 존재까지.


무한한 우주에 대해 경외감과 공포를 갖는 또다른 존재들이 있으리라는 상상만 해도, 나는, 이 공황에 가까운 공포를 간신히 극복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