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아스트로룸 - 인류가 여행한 1천억분의 8
오노 마사히로 지음, 이인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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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억 광년.
빛의 속도로 200억년을 달려야 한다.
우주의 끝에 도달하려면 말이다. 우주는 아직도 팽창하고 있으므로, 빛의 속도로 200억년 달려가도, 200억년동안 팽창한 만큼 더 달려가야 할 것이다. 사실, '광년' 이라는 단위가 '천문단위(1.496*108km)' 가 쓰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배우던 시절엔 '광년' 을 많이 써서, 아직 그게 익숙하다. (다행히 이 책에도 광년이 쓰인다.)
200억 광년이라니...
너무 까마득하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 안으로 좁혀보자.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해왕성까지가 약 100광년이다. 물론, 우리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은 태양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고, 그 궤도는 매번 약간씩 변화하는 타원이기 때문에 거리를 아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공학적인 계산을 통해 어느정도 유추할 뿐이다. 빛의 속도도 사실 크게 와닿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태양계 안 행성들을 시속 300킬로미터의 고속열차로 소개하고 있다.
지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달까지는 53일 걸린다. 금성까지는 16년, 화성까지는 28년, 수성까지는 35년, 태양까지는 57년, 목성까지는 240년, 토성까지는 480년, 천왕성까지는 1000년, 해왕성까지는 1700년....
태양과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켄타우리까지는 1500만 년이 걸린다. " (p.093)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지구 밖 행성에 내딛은 인류의 첫발.

이제 막 인류의 유년기가 시작됐다.


'과학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으로 운을 띄운 이 책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로켓 개발을 주도했던 독일의 과학자 헤르만 오베르트를 시작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인공위성과 달 착륙선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폰 브라운,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에 인공위성을 안착시킨 소련의 코롤료프와 존 후볼트와 마거릿 해밀턴을 비롯한 수많은 나사 직원들을 거쳐 달에 첫 발을 내딛으며 도입부를 마무리한다.
달로 유인 로켓을 보내는 것은 1972년으로 끝나게 된 이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시도되는 수많은 무인 탐사선들과 냉전기의 종막과 함께 사그라든 우주 개발 프로젝트,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가 밝혀낸 태양계 행성들의 정체, 나아가 이제 막 눈뜬 우주의 신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 약 2천억개의 행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우리는 미생물에 가까울 정도로 작고 미미하다.
하지만, 이 작고 미미한 존재가 우주의 크기를 알고있다. 우주에 행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있다. 
그게 뭐? 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터다.
우주에 나간다고 우리에게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우주에 수천억달러짜리 인공물을 날려보내고,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 오직 한번의 삽질을 위한 수조달러짜리 자동 삽질 기계를 보낸다. 진짜 삽질이다. 오직 단 한번의 삽질.

얼마전, 일본은 혜성에 인공물을 안착시켰다.(https://blog.naver.com/hellodd11/221472586708) 이는 날아가는 탁구공 위에 파리를 앉히는 것만큼 정밀하고 어려운 기술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엄청난 국가예산을 투입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찾기 위한 연구와 궤를 함께 한다.


'그래서 뭐? 그게 뭐? 알면 뭐???' 라고 되묻는 사람들도 많다.
한쪽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이게 무슨 개똥같은 짓일까?
냉전기,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은 사상대결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쓰였으나, 이제 그마저도 끝났다.
우주개발은 천문학적인 돈이 들고, 국가 사업으로서 예산을 따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최저임금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예산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정도니, 만약 혜성의 얼음조각을 채취하는 기술 개발을 위한 예산이 통과될 리 만무하다.
이건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화성에 끊임없이 탐사 로봇을 보냈다. 유인 실험은 지구 궤도에 떠있는 우주정거장에서만 하고 있지만, 지금 화성의 대지 위에는 총 네기의 로봇이 꿈틀꿈틀 돌아다니고 있다. 작은 구멍을 뚫고, 돌과 모래따위를 채취하고, 염소나 황산 따위를 뿌려보고 있다.


행성을 세어보기 위한 방법들도 고안중이다. 2017년 케플러 우주망원경이 찾은 행성은 2526개라고 한다. 이것은 백조자리 일부만을 관측한 숫자고,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은하에는 수천억개의 행성이 있다고 한다. 

근데, 이건 우리의 은하에 불과하고,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수천억개가 있다고 한다.
수천억개의 수천억배의 행성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이다. 


역시, 또, 그래서? 근데? 그게 뭐??? 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터다.

근데, 그래서 뭐? 


언젠가 우주에 나가서, 우주적 인간, 즉 '호모 아스트로룸' 으로 진화한다 해도 그건 수천년 후 미래의 일일 것이다.
지금 여기 사는 우리는 도무지 경험해볼 수 없는 미래다.
그 전에 지구가,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터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영원히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와 또 '어디로 가는가?' 와 맥이 닿아있는 질문이다.
그게 밝혀진다고 우리의 삶이 변하지는 않는다.
이건 '알고보니 우리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야?'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기원과 종말과 맞닿아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수천억개의 행성, 수천억년을 가도 갈 수 없는 어딘가.
그리고 그 곳에 있을 지 모르는 생명들, 혹은 그 정도로 고독할 지 모르는 인류.


 인류가 기원전부터 만여년간 1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변한건 있다.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심지어 예수와 석가모니, 공자와 맹자, 아인슈타인도 페가수스자리 51b 행성이 항성을 4.2일 주기로 공전한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이 행성은 목성만큼 거대한데,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4.2일이 걸린다!! 1년이 4.2일인 것이다.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은 약 1400광년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지름은 지구의 1.6배, 1년은 385일이다. 태양과 아주 비슷한 항성 주위를 돌고 있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는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이다. 이 단단한 얼음 아래 물이 있다. '갈릴레오 궤도선' 이 관측한 결과다.

지금은 이 수십킬로의 얼음을 뚫고 그 거대한 바다로 들어갈 방법을 고안하는 중이다.(위에 언급한 엄청나게 비싼 삽질이 그것이다.)


2012년 보이저 1호는 35년만에 태양계의 경계선을 넘어 성간 우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별과 별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보이저1호는 약 4만년 간 이 암흑공간을 지나야 다음 별 ; 'AC+79 3888' 이라는 이름이 붙은 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4만년... 

42012년에 보이저 1호는 그 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전송할 터다.

그 전파가 도착하기까지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런 상상을 하면 정말로 아득해진다.
왜 나는 이런걸 궁금해할까? 왜 우주로 나가보고 싶을까?
공기원근이 없는 세계. 영원히, 영원히 유영해도 닿을 수 없는 그 언저리를 왜 보고 싶을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거라고.
그게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아니,
내 삶이 뭐라고.
내 존재가 뭐라고.
'내' 가 뭐라고. 


우리 어머니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지만, 이 영혼이 우주를 유영할 수 있을거라고 믿으신다. 


기독교인도 아니고 영혼의 존재도 거의 믿지 않는 나도 ,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조금 덧붙였다.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암흑물질들이 사실은 온갖 생명체들의 영혼들이었으면 좋겠다.

우주가 자꾸자꾸 팽창하는게, 영혼들이 자꾸자꾸 우주에 나가서였으면 좋겠다.

맨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죽은 것 같은 이천억개의 행성들에 다종다양한 생명의 영혼들이 바글바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육신을 버리면 그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으면. 우주의 끝까지, 이백억년간 유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아득함을 털어내기 위해, 나는 헬스장으로 가련다.
하찮은 몸뚱이 안에, 티끌보다 작은 근세포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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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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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출판사는 매년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에게 이 상을 안긴다. 2010년, 처음 신설되었을 때는 김중혁, 편혜영,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 되었고, 이장욱 같이 새내기 작가는 이후로도 여러번 이 수상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기를 통해 어떤 작가분은 일종의 '장학금' 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기 전, 많은 위안과 응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과 취지에 걸맞게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은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한다. 나도 한 3~4회정도 이 작품집을 읽은 것 같은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게 '젊은작가상' 은 일종의 아방가르드와 같다. 최전방에서 앞만보고 질주하는 전위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을 일격에 때려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돌격, 또 돌격하는 선봉대. 때문에, 젊은작가상 수상작을 펼칠 때엔 조금은 다른 기대를 갖는다. 이번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쳐줄까? 

맨 앞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의 감상만 옮겨보겠다.


여느 수상작품집들이 그렇듯, 첫 작품이 대상 작품이다.

다만, 젊은작가상은 모든 상의 상금이 같기에, 대상은 오직 대표성을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대표'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시각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방가르드한 이 수상 작품집의 맨 앞자리에 선 작품의 첫인상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그 제목부터 너무 참신하고 전위적이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분량은 꽤 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지만, 중편이라 하기엔 단편에 가깝다. 딱 그 중간 쯤의 분량. 

이미 암투병 전력이 있었던 엄마의 암 재발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었다. 그와 오버랩되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도, 꽤나 상투적이었다. 거의 띠동갑 정도 나는 연인과의 연애이야기. 화자는 회사를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의 병수발을 하는데, 동시에 과거의 연인에게서 몇년만에 연락이 오는 전개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엄마와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연인과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엄마와의 일화는 화자가 섭섭했던 일들과 괴로웠던 일들, 고통의 기억만이 가득하고, 연인과의 일화는 '우럭 한 점' 처럼, 섭섭했던 일들을 사랑으로 꾹꾹 눌러낸 기억들이 가득하다. 대사나 문장들이 감정에 따라 생생하게 요동친다.

화자가 엄마에게 갖고 있는 미움은 미성년때, 유일한 가족이자 온 세상과 같은 엄마의 행위를 통해 받은 것이고, 화자가 연인에게 받은 감정들은 성인이 된 후,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두 과거가 오버랩 되는데, 정서가 같을 순 없다. 작가는 그 지점을 명확히 판단하고, 밀도 높고 무거운 두 정서를 능숙하게 분리해냈다. 이는 세 덩어리의 시간대가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과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서를 분리시키고, 그걸 문장을 통해 명확히 표현해냈다. 소설적 장치뿐 아니라 문장 가득한 정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작가의 기술과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재가 너무 진부한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에 동의한다.

다만,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꿰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압축해서 보면, 모두 다 진부해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란 결국,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니까. 

진부한 이야기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물들이고,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 또한 그곳이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던 순간, 엄마는 화자를 방학동안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연인 '형' 은 화자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되묻는다.  낳아준 엄마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거부당하는 관계. 우리 사회의 관념상 동성애는 없는 개념이기에, 이론적으로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않는다. 감정은 그 사람 자체이다. 끊임없이 감정을 거부당하는 삶. 존재를 부정당하는 삶. 하지만, 삶의 주인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부정의 증거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삭혀야 한다. 그 와중에 정신은 물러지고, 곪아터진다.

가장 사랑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한 삶의 편린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BL에서나 보던 '퀴어' 가 순문학의 세계,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진보한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모든 부정.

취업, 직장 상사와의 소통,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 연인과 나누는 대화, 주고받는 손길, 타액, 감정, 오해, 갈등, 편견. 그리고 또 편견. 또, 또 편견, 편견, 그리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고정관념. 


엄마의 암 투병에 10살 정도 연상의 래디컬한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는다- 연인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게이를 끼얹은 이야기. 엄마의 일방적인 애착관계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짜증나는 법이고, 꼰대는 게이라도 그 근성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나쁜남(여)자에게 끌리는 취향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지라 이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신선했고, 신선했지만 짜증났으며, 짜증났지만 읽는걸 멈출 수는 없었다.


현재에 있어 과거란 결코 벗어낼 수 없는 굴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저당잡혀 오늘을 사는 법이다. 과거를 벗겨내는 일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그 갈망에 대한 모든 실패는 회한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화자인 '영' 역시, 어머니의 병과 함께 과거의 상처들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자가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망각이나 용서라는 개념과는 이미 멀어졌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선택에 회한이 따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체념, 밖에 없는 것일까? 

상처만 주었고, 용서할 수도 없는 엄마지만, 화자는 엄마에 대한 미련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놓아버릴 수 없다.

'용서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것만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은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이다. 

이 작품은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스페이스 오페라' 등과 함께 서브 장르로 자리매김한 '대체 역사물'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장르는 '팩션' 보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역사의 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뒤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전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장르다.     

이야기는 1882년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한 영국함의 수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축구공을 통통 튕기며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국의 산업 전반을 강타한 아동노동착취와 세계 축구인들과 스포츠인들을 경악시킨 현대의 동남아 아동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인들의 미래상에 대한 충격을 몰고온 인공지능 무인화 공장까지 짚어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현실웃음을 빵빵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포레스트 검프' 처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교묘하게 비트는 작가의 패기 넘치는 '뻥'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와 축구게임도 즐기는 나로서는 축구공의 역사와 디자인이 작품 안에서 언급될 때 마다, 머릿속에 공의 디자인들이 되살아나서 제법 풍성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었었다. 무엇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특징인 매 작품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노트와 해설까지도 작품의 일부처럼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뻥' 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픽션' 의 정의 자체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내 기준으로 훌륭한 작가는 독자를 잘 속여야 한다. 그런 내게 있어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 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신나는 소설이었다. 



책의 말미에 나란히 실려있는 김봉곤 작가의 [데이 포 나이트]와 이미상 작가의 [하긴]은 [우럭 한 점~] 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을 잘 섞으면 [우럭 한 점~] 의 등장인물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작품의 나열을 누가 했는지,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고, 매우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 는 퀴어 커플의 자기파괴적인 연애담이다. 다만, 이 작품은 보다 '감정' 에 집중했다. 육체는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은 어떻게 육체를 제어하며,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뭉뚱그리는가. 그리고, 작가는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담아내는가. 기억들 안에서 시간별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나씩 분리해서,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우럭 한 점~] 과 통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회한으로 가득한 과거의 연애담을 넘어, 창작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긴]은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 부모의 이야기다. 

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이 이름을, 화자인 '나' 는 반대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였다. 그렇듯, 딸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아내에게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길에 동참했다. 보미나래는 발달이 더뎠다. 화자와 화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딸의 대학진학에 모든걸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득하게도, 혼혈 손주였다. 


나는 작품집 전체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의미심장하며, 가장 단호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맥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김중혁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쓸까, 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을 쓰지 말까, 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1인칭은 아내의 일생과 딸인 보미나래의 일생 전체를 뒤에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작가가 쓰지 않은 것, '여백' 으로 남는다. 나는 이 탁월한 여백들을 무수한 상상들로 채워갔는데, 어쩌면, [우럭 한 점~] 이 이 여백들 중 한 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바라보고, 여백들을 상상하고, 또 문장들을 바라보고, 또 여백들을 상상했다. 

아내의 여백, 보미나래의 여백, 샘의 여백, 화자인 나의 여백. 




+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살짝씩 되새기자면,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 은 일상의 무료함과 결혼과 육아의 무의미함, 무상함을 되새기게 만들었고, 이주란 작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 의 다른 버전, 또는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영수 작가의 [우리들] 은 대담한 불륜 커플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의 한국버전처럼 느껴졌는데, 파격적인 소재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안온한 엔딩이 조금 아쉬웠다.


++

재미있는 부분은 일곱 작품 중 네작품의 화자들이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었고, 여섯 작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사소설의 형식을 띈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차례대로 경험하는 일들처럼 읽히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두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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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불과 피 세트 - 전2권 - 얼음과 불의 노래 외전 얼음과 불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지음, 김영하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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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테로스 타르가르옌 왕조의 역사'
 '얼음과 불의 노래' 의 원작의 대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끝이 났다.
마틴옹은 본편을 이어나가기보다, 드라마의 팬들을 위해 세계관을 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이 시점에 대체 왜??' 라고 생각했으나, 막 드라마판 '얼음과 불의 노래' 인 [왕좌의 게임] 8시즌 6화를 보고 나니, 마틴옹의 기획이 대단히 탁월했음을 알게됐다.
마틴옹은 아마 8시즌의 프리프로덕션부터 지켜봤을 것이다.
아니, 마지막까지 검수에는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대본을 미리 받아봤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는 시즌6 후반부부터 원작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8시즌에서 마무리가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 제작사는 7,8 시즌을 독자적으로 끌고가기로 결정했고, 그에 동의한 마틴옹은 아무리 원작자라도 드라마 작가들이 만들어놓은 디테일을 일일히 간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7,8 시즌은 앞 시즌들에 비해 내러티브가 상당히 부족하다.
부족한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개연성의 부족으로 귀결됐다. 훌륭한 캐릭터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린다. 대너리스의 선택도 내러티브만 충분했으면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많은 부분들을 지나치게 생략했다.
8시즌의 호흡을 생각하면, 7시즌의 홧수들이 아까울 정도다. 

에소스 대륙에 있던 발리리아의 파멸과 함께 웨스테로스로 날아온 드래곤의 혈통 타르가르옌 가문과 그 기수가문이었던 바라테온 가문은 드래곤 스톤에 자리를 잡았다. '드래곤의 군주' 혈족이었던 아에곤 타르가르옌은 비세니아와 라에니스,두 누이와 함께였는데, 이 말인 즉슨 드래곤 세마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의미. 혈통이 중요한 타르가르옌은 근친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에곤의 두 누이는 두 아내이기도 했다. 발리리아산 강철로 만든 검과 드래곤을 앞세운 침략자들은 주변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간다. 
 [불과 피]는 이렇게 웨스테로스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정복자' 아에곤 1세부터 '미친왕' 아에리스 2세까지 약 280여년의 타르가르옌 통치기를 다룬다.
재미있는 점은 각 권 말미에 타르가르옌 가문의 연보가 실려있는데, 아에곤1세를 끝으로 '드래곤 왕가의 계보는 끊겼다' 고 단언한 점이다. 이는 마침 드라마의 엔딩과도 어느정도 접점이 있어서, 이 기획이 드라마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면 흥미로울 부분이 무척 많고, 드라마의 팬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부분들이 있다.
  
하렌홀이 드라마상에서 거대한 폐허와도 같은 모습인 이유, 협해에 위치한 요새인 드래곤 스톤의 홀에 있던 웨스테로스의 지도가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한 테이블인 '채색 탁자'의 유래, 바라테온이 스톰스엔드를 근거지로 삼게된 과정, 도르네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마르텔 가문이 왕가에 복속되지 않았던 과정, 왕의 직속 보좌관을 '핸드' 라고 칭하게 된 계기, 강철군도의 '그레이 조이' 가문이 스타크가문의 기수가 된 역사, 킹스랜딩에 레드킵이 건설되는 과정, 일곱개의 얼굴이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단의 위세, 그리고 정복전쟁중에 입수한 적의 칼을 녹여 만들어진 철왕좌. 

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 시리즈를 팔로우하고 있던 오랜 팬으로써 너무너무 의미가 깊은 책이었다.
다만, 팬이 아니라면, 서술 형식이 실제 역사학자의 그것처럼 왕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라, 소설처럼 강력한 흡인력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너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드래곤의 파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와는 달리, 드래곤을 앞세워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아에곤의 행보는 지나치게 판타지스러워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드라마판 얼불노,[왕좌의 게임] 은 8시즌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나 역시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큰 실망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책 [불과 피] 가 부족한 개연성에 어느정도 땜질을 해줄 수 있었지만, 원작 팬들이 이십년간 기다렸던 '겨울' 과 백귀들의 침탈, 서세이와의 갈등, 대너리스와 존의 결말을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서는 안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5분의 장면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시리즈의 완결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들었다.)

[불과 피] 마지막권의 역자의 말을 보니, HBO는 이미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프리퀄 드라마 제작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 세계관의 단편집인 '세븐킹덤의 기사' 에 나온 내용들이나 '불과 피' 의 내용은 물론, 더 과거의 역사까지 폭넓게 접근하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발리리아 왕국의 최초의 드래곤 군주들의 이야기나, 웨스테로스의 처음 터를 잡은 '퍼스트맨' 들의 이야기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원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시, 역자의 말을 빌려보면, 2016년 마틴옹은 [겨울의 바람]이 큰 난관에 봉착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이 2019년이지만, 아직도 출간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난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수도.... 
  
[불과 피] 는 원작 팬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다만, 이제 막 얼음과 불의 노래에 입문한 독자들이라면, 가급적 한참 뒤에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적어도, 드라마 정도는 마지막편까지 정주행 하고 시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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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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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 

p.7


첫 문장이 아주 강렬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발랄하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황을 '까는' 이 문장에 실제로 소리내서 웃으며 크게 공감했다. '벤야멘타 학원' 자리에, 내가 나온 학교들을 넣어도 될 것 같았다. 거의 10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주 재미난 풍자소설임을 짐작케 했다. 원 제목이자 작중 화자인'야콥 폰 군텐'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다. 대대로 공직을 맡아온 귀족 가문 태생이다. 하지만, 야콥은 큰 돈을 내면서 '하인학교' 에 입학했다. 벤야멘타 남매가 운영하는 이 하인학교는 원생 수도 얼마 없는데다가 가르치는 것도 거의 없는, 직업 훈련소라고 부르기에도 미미한 학교다. 


비교적 흥미로운 도입부와는 달리, 읽을수록 지쳐갔다. 하인학교의 동료들인 하인리히, 샤흐트, 크라우스와 학교의 원장인 미스터 엔 미스 벤야멘타에 관한 다소 장황한 인평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자의 심리가 두서없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도 없고, 일관되기 주지되는 메시지도 없다.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랄까. 중심된 이야기가 없이, 화자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큰 흐름 없이 시종일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주변인물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일기와도 같다. 

주인공의 심리는 일관성 없이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에 개연성이란 없다.


사람의 감정은 불안정하다. 인간이 사고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안정함은 즉 감정의 동요, 이것은 종교와 예술의 기반이 된다. 때문에, 시시각각 이유없이 변화하는 화자 야콥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캐릭터지만, '소설의 화자' 로서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작품을 읽다보면 수많은 '왜?? ' '읭?!' 같은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데, 이 작품은 수많은 '왜?' 를 던져주지만, 그 대답은 '그게 왜 궁금해?' 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읭?!' 하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 독서는 일종의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간접경험' 이라는 용어로 종종 표현되어 왔는데, 글자를 읽으며 펑펑 울고, 크게 웃는다면 이미 그것은 '간접' 보다는 더 직접적인, 체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게 꽤나 신선한,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야콥이 학교 안에서 만나는 주변 인물들;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와 몇분의 선생님들,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의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인 형 요한- 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이야기에 대한 야콥의 심상들이 장황하게 나열된다.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야콥이 주변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비록 통찰력은 느껴지지만- 통일성도, 일관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소한' 이야기들. 그러다 갑자기 벤야멘타양과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현실인지 몽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겪게 되고, 학교의 부원장인 벤탸멘타 양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학교가 사실상 폐쇄되고,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과 사막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끝나버린다.


 이렇게 한번 읽고 나서부터 이 책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당대를 주름잡던 모든 주류를 비트는 소설이다.

과거엔 지주였고, 현재엔 시의원을 지낸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야콥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가장 '미미한 존재' 가 되고자 하인학교에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하인' 의 일을 '배우는' 학교라는 장소부터가 지독한 역설이다. 유럽사회에서 학교는 크게 두 부류였다. 지금도 그런식으로 운영되는데, 한 갈래는 학문을 위한 기초를 닦는 방향이고, 다른 한 방향은 직업 기술을 익히는 방향이다. 애초에 학교라는 것이 국가의 공공정책으로 발전하기 전,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순종적으로 반복노동을 하는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장에 딸린 기숙식 고등학교가 많았던 이유다. 책의 첫 문장에 쓰인것처럼 학교에서 행하는 교육이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 맞는 역할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생에 따라 가늠되는 전통적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명징하고, 거기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분-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까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적응해서 어떻게든 살아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체념과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기. 


 야콥이 원했던 '미미한 존재' 는 사실 그 사회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사회라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스템의 보호에서 가장 먼 계층이기도 하다. 야콥은 어머니와 하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기화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은 마치 번개처럼, 번득하는 순간이었다. 왕자였던 싯달타가 그 이후 가장 낮은 자들 사이에서 고행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 열반에 올랐듯, 예수가 문둥병자와 교회 밖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듯, 야콥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사실 그 이후 야콥의 생활은 싯달타나 예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 저자인 로베르트 발저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야콥을 당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치환시켰던 듯 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알아챘으나, 깨달음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 

그럼에도 야콥은 그의 형인 요한에 비해 '행동하는' 사람이긴 했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생인 야콥에게는 제법 훌륭하게 들리는 조언을 건넨다. 예술과 대중, 부유함과 근검함, 자유와 자본주의에 대해. 요한의 말은 마치 중근세의 귀족층들이, 나아가 근현대 부르주아들이 서발턴(어제 배운 단어를 이렇게 써먹어본다)에게 강요했던 의식들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그들을 '제어' 하고 '다스리기' 위한 공허한 가치들. 


 이 작품 전체를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저항했던, 일종의 '반감' 을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글이라고 이해하면 작품 전반에 느껴지는 유머러스함과 다소 히스테릭한 감정변화가 어느정도 이해된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의 연보를 읽고 나니, 조금 더 이해되는 면이 있다.)

마치 매일매일의 일기 같은 형식의 짧은 내러티브들이 정신없이 나열된다. 

때로는 시간을 넘나들고,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기때문에,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원장, 부원장과 여러 친구들이 혹시 발터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닐까? 아니면,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아니라, 사실은 벤야멘타 정신병원은 아닐까?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는 의사들, 여러 친구들은 발터와 함께 입원한 환자들은 아니었을까?


 매일매일의 감정과 일과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생을 이룬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태어난 혈통과 교육받은것들로부터 골격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오직 그것만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차별된다. 혈통은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지만,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아들이었던 발터는 과연 하인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아니, 아마도 발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 위해 하인학교에 갔을터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 위해 사막으로 떠났을터다.

삶은 그저, 매일매일이 모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 대단한 것도,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대단할 이유도, 의미있을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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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한국 건축 - 프랑스 건축가 25인의 한국 현대건축 여행
강민희 지음, 안청 그림 / 아트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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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중인 저자가 '일드프랑스 건축협회' 라는 곳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건축답사를 떠나는 내용의 책이다. 대상자가 현대의 건축가들이라 전통 양식의 건물들은 가급적 배제하고, 현대 건축가들의 건물들을 주요 답사지로 선정했다.


아무래도, 나 역시 만화를 하는 사람으로 무협,사극에 대한 꿈이 있는지라 한국의 전통 가옥이나 건물에 대한 책들은 화집으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현대 건축물만을 찾아다녔다는 점이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사실 건축이라는 장르에 문외한이라 안도 다다오나 DDP로 처음 알게 된 자하 하디드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이 꽤 있다는 사실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떤 작품들은 제주도의 모 리조트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고, 서울 중심부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상상 초월의 공법을 사용해 만든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고, 가끔 파주 출판단지에 가면 신기하게 바라보는 미메시스 아트뮤지엄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다 처음 알았다. @.@ 

그리고, 국내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가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건물은 단지 우리가 몸을 누이고 잠자는 공간이 아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삶의 99.999999%를 건축물에 둘러쌓인 채 살다 죽을 것이다.

그 규모나 재료가 뭐든간에, 네모난 공간에서, 네모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동하는 길이나 지하도도 모두 건축의 일부분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현대인들 만의 것은 아니다.

이미 수세기 전, 기원전 시대의 사람들조차 그 사실을 알고, 인지했다.

습기와 병충해, 맹수들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인간의 삶이 바뀌었다.

'생존하는 삶' 에서 안락함을 '누리는 삶' 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생존은 기본이고, 생존의 내용이 중요해진 것이다.

나아가, 건축물은 인간보다 오랜 시간을 이겨내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획득한다.

게다가 2020년이 코앞인 현대에는 도시 '생태계' 를 이루는 나무나 산과 같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를 철칙처럼 믿으며 자연과 병존하는 건축을 추구했다. 외려 근현대에 접어들어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건축을 추구했다가, 요즘은 다시 자연과 병존하는 방식을 고민중이다. 도시는 더이상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책 안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건물들을 답사한 건축가들의 감상이 적혀있다.

특히 DDP를 다룬 대목이 눈에 간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갔는지 확실히 기억한다.

정쟁의 요소로 쓰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국 건축가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답사 목록에 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MA(일드프랑스 건축협회)와 프로그램을 상의할 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열이면 열 고궁이나 절 등 좀더 한국적인 건축물을 답사 프로그램에 넣고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더 많이 소개하라는 얘기를 했다. 그 점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


 사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외국 건축가들을 한국에 초청해서, 왜 그 나라 건축가들의 작품을 보여줘?? 

외국인들이 한국의 절과 고궁을 보면서, '우와 조선 쩔어, 고려 쩔어' 하는거 보고싶어!!! 


"어떤 이가 설계를 했는지 상관없이 지금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현대 건축물 중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이 여행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지, 어차피 이 사람들은 건축을 '업' 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활발히'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현대' 의 환경 안에서 현대의 건축물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건축엔 국적도, 인종도, 성별도 없다.


"파리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L.M 페이가 설계했고, 퐁피두 센터는 영국과 이탈리아 건축가의 합작품이다.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덴마크의 건축가 요한 오토 폰 스프레켈센이 디자인했다. 다른 나라 출신의 건축가들이 작업을 이끌었지만, 이것들은 엄연히 파리의 것이며 파리 시민의 자산이다."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무엇이 어떻게 뒤섞일지 알 수 없는 용광로다. 

설계자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서울의 건축이 서울의 것이 아니라는 시선은 버려야 한다.

DDP도 마찬가지다. 이 낯선 공간도 결국 우리의 것이란 이야기다."

 p. 107  



문득, 어떤 건축가분이 조선총독부를 헐어버린 일을 아쉬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민족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도시의 중요한 역사 하나를 없애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나는 조선 총독부 건물이 국립 중앙 박물관이던 시절 정말 많이 갔었고, 아주 많이 봤더랬지만,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그런 건축물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민족적 자긍심은 그런 것으로 쉽게 무너지지도, 세워지지도 않는 것인데.


이 책은 DDP가 완공되기 전, 천문학적 건설비용과 그 기묘한 외관에 비판적인 기사들이 매우 많은 시기에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그런 반발들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했다. 그 와중에도, DDP안에 유적들을 보존하려는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본 외국 동료들의 이야기를 싣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가깝게는 인사동 쌈지길과 복개된 청계천, 이화여대 서울캠퍼스부터 멀게는 한탄강 전곡선사박물관과 바다건너 제주도 돌 박물관까지 수많은 현대적인 건축들이 우리 땅 위에서 살아 움트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땅 위에서, 내 땅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진 건축물조차도 외국인이 설계한 건물, 한국인이 설계한 건물을 나누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외국 설계사가 설계했다고, 그걸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뚝딱뚝딱 망치질 하는게 아니다.

외국 건축 사무소와 국내 건축 사무소가 긴밀한 파트너쉽 아래서 작업을 한다.

토질, 주변환경, 재료수급 등 실제로 '짓는'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부 한명까지 다 우리나라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리고 누가와서 누가 지었던들.

그 곳에 살고 있는 내가 주인이고, 내 삶의 공간인데.

이미 만들고 떠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알게 뭐람!!!

게다가 수년, 수십년 전 사람인데!!! 


다만, 이 집을 지은 사람의 마음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방향에 창을 냈고, 어떤 마음으로 이 기둥을 세웠고, 어떤 마음으로 이벽을 발랐을지.

그 어떤 창보다 많은 햇살이 들어오길, 그 어떤 기둥보다 튼튼하길, 그 어떤 벽보다 단단하게 버텨주길. 

건축들은 그래서, 우리 삶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생태계보다, 도시 생태계가 우리와 밀접한 이유다.


[휴먼 에이지] 에서 저자인 다이앤 애커먼은 '인류세'  인류sms '도시종' 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인류의 절반이 넘는 35억명이 도시에 몰려 있다. 2050년이면 도시가 세계 인구의 70퍼센트를 홀리리라고 내다본다. 이 추세는 밤하늘의 달처럼 엄연하고 산사태처럼 막기 힘들다. 2005년에서 2013년 사이에 중국의 도시 인구는 13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치솟았다.(...) 이 추세라면 2030년에는 중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살 것이다. 

(...) 

영국은 1950년 무렵에는 바둑판처럼 배열된 도시들이 인구의 79퍼센트를 품게 되었다. 도시 거주자 비율이 92퍼센트에 달할 2030년이면 영국은 진정한 도시형 국가가 되어, 그보다 할 발 앞서 그렇게 변한 다른 나라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고, 독일은 88퍼센트가, 프랑스는 78퍼센트가,'


이 줄줄이 통계의 바로 다음에 한국이 나온다.


'한국은 80퍼센트가 그렇다.' 

([휴먼 에이지] p.105)


우리나라는 이미 80퍼센트가 도시에 산다!!

이제 지구는 오직 자연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자연 생태계 뿐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생활권 안으로 끌어들인 도시와 병존하고있다. 바야흐로 도시 생태계의 정착이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건축이 있다. 건물이 있다.

이러한 고민은 문명을 선도하는 소위 '선진국' 에서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전용되고 있다.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운동에너지)과 발산하는 열에너지로부터 전기를 생산하는 건물이 있고, 그 어떤 에어 컨디셔너 없이 오직 건물의 구조만으로 공기의 흐름을 조정해서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건물들도 있다. 건물의 외장재 대신 거대한 수풀을 옷처럼 둘러입은 건물들은 도시 생태계의 중요한 테마다. 태양에너지와 바람에너지는 이미 정착되어 있는 발상이다! 

건축가들은 오직 예술적인, 또는 기능적인 면만 보지 않는다.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효율성은 물론, 도시의 역사성과 도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습관은 물론, 도시 생태계의 원활한 사이클을 살핀다. 

 

참 절묘한 타이밍에 두 책이 얽혔다.

거의 두달간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 있는 '휴먼 에이지' 에 끼어든 [봉주르 한국 건축].

[봉주르 한국 건축] 에서 소개하는 우리나라의 건축물 중 한국인이 설계한 건축물은 몇 안된다.

하지만, 모든 건축물은 한국에서 건설되었고, 거의 모든 재료들은 한국에서 나왔고, 거의 모든 건축자들은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거의'의 나머지는 외국인 노동자겠지. 그럼,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높으면, 그건 외국인이 지은 건물일까? 

'쌈지길' 을 품고 있는 인사동 거리 재정비 사업,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 정비 공사, 동대문 운동장 터에 내려앉은 번득이는 곡선의 DDP. 우리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공 건축들은 과연 서울의 도시 생태계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건축물'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만 보아도, 이 거대한 예술품에 정신을 내려놓을 곳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자연을 이기고도 살아남을 우리의 흔적. 문명의 조각. 그 안에 녹여내는 작가의 메시지.


아, 그러고보니, '러브*데스*로봇' 이라는 넷플릭스의 단편 애니메이션 모둠에 비슷한 작품이 있었다.

지구를 넘어 대기권도 넘는 행성급 규모의 설치미술!! 지구만한 캔버스라면, 그것은 회화일까, 건축일까??  


단순히 상상만을 넘어 공학적 설계를 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반드시 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장르.

건축. 


새삼, 건축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더불어, 여행이라곤 1도 관심없는 내가 이 책을 한 권 들고 우리나라 각지를 여행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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