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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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출판사는 매년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에게 이 상을 안긴다. 2010년, 처음 신설되었을 때는 김중혁, 편혜영,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 되었고, 이장욱 같이 새내기 작가는 이후로도 여러번 이 수상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기를 통해 어떤 작가분은 일종의 '장학금' 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기 전, 많은 위안과 응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과 취지에 걸맞게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은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한다. 나도 한 3~4회정도 이 작품집을 읽은 것 같은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게 '젊은작가상' 은 일종의 아방가르드와 같다. 최전방에서 앞만보고 질주하는 전위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을 일격에 때려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돌격, 또 돌격하는 선봉대. 때문에, 젊은작가상 수상작을 펼칠 때엔 조금은 다른 기대를 갖는다. 이번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쳐줄까? 

맨 앞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의 감상만 옮겨보겠다.


여느 수상작품집들이 그렇듯, 첫 작품이 대상 작품이다.

다만, 젊은작가상은 모든 상의 상금이 같기에, 대상은 오직 대표성을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대표'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시각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방가르드한 이 수상 작품집의 맨 앞자리에 선 작품의 첫인상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그 제목부터 너무 참신하고 전위적이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분량은 꽤 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지만, 중편이라 하기엔 단편에 가깝다. 딱 그 중간 쯤의 분량. 

이미 암투병 전력이 있었던 엄마의 암 재발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었다. 그와 오버랩되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도, 꽤나 상투적이었다. 거의 띠동갑 정도 나는 연인과의 연애이야기. 화자는 회사를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의 병수발을 하는데, 동시에 과거의 연인에게서 몇년만에 연락이 오는 전개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엄마와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연인과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엄마와의 일화는 화자가 섭섭했던 일들과 괴로웠던 일들, 고통의 기억만이 가득하고, 연인과의 일화는 '우럭 한 점' 처럼, 섭섭했던 일들을 사랑으로 꾹꾹 눌러낸 기억들이 가득하다. 대사나 문장들이 감정에 따라 생생하게 요동친다.

화자가 엄마에게 갖고 있는 미움은 미성년때, 유일한 가족이자 온 세상과 같은 엄마의 행위를 통해 받은 것이고, 화자가 연인에게 받은 감정들은 성인이 된 후,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두 과거가 오버랩 되는데, 정서가 같을 순 없다. 작가는 그 지점을 명확히 판단하고, 밀도 높고 무거운 두 정서를 능숙하게 분리해냈다. 이는 세 덩어리의 시간대가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과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서를 분리시키고, 그걸 문장을 통해 명확히 표현해냈다. 소설적 장치뿐 아니라 문장 가득한 정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작가의 기술과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재가 너무 진부한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에 동의한다.

다만,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꿰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압축해서 보면, 모두 다 진부해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란 결국,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니까. 

진부한 이야기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물들이고,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 또한 그곳이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던 순간, 엄마는 화자를 방학동안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연인 '형' 은 화자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되묻는다.  낳아준 엄마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거부당하는 관계. 우리 사회의 관념상 동성애는 없는 개념이기에, 이론적으로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않는다. 감정은 그 사람 자체이다. 끊임없이 감정을 거부당하는 삶. 존재를 부정당하는 삶. 하지만, 삶의 주인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부정의 증거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삭혀야 한다. 그 와중에 정신은 물러지고, 곪아터진다.

가장 사랑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한 삶의 편린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BL에서나 보던 '퀴어' 가 순문학의 세계,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진보한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모든 부정.

취업, 직장 상사와의 소통,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 연인과 나누는 대화, 주고받는 손길, 타액, 감정, 오해, 갈등, 편견. 그리고 또 편견. 또, 또 편견, 편견, 그리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고정관념. 


엄마의 암 투병에 10살 정도 연상의 래디컬한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는다- 연인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게이를 끼얹은 이야기. 엄마의 일방적인 애착관계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짜증나는 법이고, 꼰대는 게이라도 그 근성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나쁜남(여)자에게 끌리는 취향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지라 이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신선했고, 신선했지만 짜증났으며, 짜증났지만 읽는걸 멈출 수는 없었다.


현재에 있어 과거란 결코 벗어낼 수 없는 굴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저당잡혀 오늘을 사는 법이다. 과거를 벗겨내는 일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그 갈망에 대한 모든 실패는 회한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화자인 '영' 역시, 어머니의 병과 함께 과거의 상처들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자가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망각이나 용서라는 개념과는 이미 멀어졌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선택에 회한이 따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체념, 밖에 없는 것일까? 

상처만 주었고, 용서할 수도 없는 엄마지만, 화자는 엄마에 대한 미련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놓아버릴 수 없다.

'용서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것만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은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이다. 

이 작품은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스페이스 오페라' 등과 함께 서브 장르로 자리매김한 '대체 역사물'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장르는 '팩션' 보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역사의 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뒤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전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장르다.     

이야기는 1882년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한 영국함의 수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축구공을 통통 튕기며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국의 산업 전반을 강타한 아동노동착취와 세계 축구인들과 스포츠인들을 경악시킨 현대의 동남아 아동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인들의 미래상에 대한 충격을 몰고온 인공지능 무인화 공장까지 짚어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현실웃음을 빵빵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포레스트 검프' 처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교묘하게 비트는 작가의 패기 넘치는 '뻥'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와 축구게임도 즐기는 나로서는 축구공의 역사와 디자인이 작품 안에서 언급될 때 마다, 머릿속에 공의 디자인들이 되살아나서 제법 풍성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었었다. 무엇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특징인 매 작품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노트와 해설까지도 작품의 일부처럼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뻥' 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픽션' 의 정의 자체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내 기준으로 훌륭한 작가는 독자를 잘 속여야 한다. 그런 내게 있어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 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신나는 소설이었다. 



책의 말미에 나란히 실려있는 김봉곤 작가의 [데이 포 나이트]와 이미상 작가의 [하긴]은 [우럭 한 점~] 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을 잘 섞으면 [우럭 한 점~] 의 등장인물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작품의 나열을 누가 했는지,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고, 매우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 는 퀴어 커플의 자기파괴적인 연애담이다. 다만, 이 작품은 보다 '감정' 에 집중했다. 육체는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은 어떻게 육체를 제어하며,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뭉뚱그리는가. 그리고, 작가는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담아내는가. 기억들 안에서 시간별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나씩 분리해서,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우럭 한 점~] 과 통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회한으로 가득한 과거의 연애담을 넘어, 창작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긴]은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 부모의 이야기다. 

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이 이름을, 화자인 '나' 는 반대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였다. 그렇듯, 딸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아내에게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길에 동참했다. 보미나래는 발달이 더뎠다. 화자와 화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딸의 대학진학에 모든걸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득하게도, 혼혈 손주였다. 


나는 작품집 전체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의미심장하며, 가장 단호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맥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김중혁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쓸까, 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을 쓰지 말까, 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1인칭은 아내의 일생과 딸인 보미나래의 일생 전체를 뒤에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작가가 쓰지 않은 것, '여백' 으로 남는다. 나는 이 탁월한 여백들을 무수한 상상들로 채워갔는데, 어쩌면, [우럭 한 점~] 이 이 여백들 중 한 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바라보고, 여백들을 상상하고, 또 문장들을 바라보고, 또 여백들을 상상했다. 

아내의 여백, 보미나래의 여백, 샘의 여백, 화자인 나의 여백. 




+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살짝씩 되새기자면,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 은 일상의 무료함과 결혼과 육아의 무의미함, 무상함을 되새기게 만들었고, 이주란 작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 의 다른 버전, 또는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영수 작가의 [우리들] 은 대담한 불륜 커플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의 한국버전처럼 느껴졌는데, 파격적인 소재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안온한 엔딩이 조금 아쉬웠다.


++

재미있는 부분은 일곱 작품 중 네작품의 화자들이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었고, 여섯 작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사소설의 형식을 띈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차례대로 경험하는 일들처럼 읽히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두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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