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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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 책이 엄청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20대 후반에 처음 접하고, 이 책을 고등학교때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고두고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40을 바라보는 30대 후반에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연장통' 에 대한 부분이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스티븐 킹은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위한 '준비' 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연장통이 바로 그것이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의 기본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최선의 능력' 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장이 필요하고, 연장의 활용법을 충분히 익혀야 하며, 많은 연장을 담을 통과 그 통을 들고 다닐 수 있는 팔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연장통의 맨 위칸에는 '낱말' 이 있다. 그 옆에는 '문법' 이 있고.

적확한 낱말을 간결한 문장 안에 넣는다.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고 믿는다." 와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아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뽑아버리지 않으면~~' 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p.151) 그리고, 관용구를 피하는 방법과 수동태를 자제하고 능동태를 지향하라는 주장이 여러 예문을 통해 쏟아진다.

문장들이 알맞게 모인 "문단"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 그래.

이 부분은 대충 읽었었지. 

스티븐 킹은 수많은 대가들도 잘못된 문법을 사용한 예가 있지만, 탄탄한 문법적 기초 위에서 파생된 것이고, 수동태는 작가의 소심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설파한다. 시종일관 유머러스 한 그의 책은 거의 중반인 이 즈음부터 상당히 진지해진다. 


그 뒤에 등장하는 "창작론" 역시 재미있다.

그는 작가란 "화석을 캐내는 고고학자" 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창작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작론을 진리로 따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각자 자신만의 창작론을 따르라고.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 어떤 인물을 훅 던져 두고, '관찰' 함으로써 이야기를 '발굴' 해낸다고 한다.

작가의 역할은 그 이야기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캐내는 것이다. 적절한 연장을 적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붓이나 솔을 사용해야 할 곳에 망치나 끌을 들고 덤비면 큰일이다. 그것이 '연장통' 의 중요성이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작품과 아주 한심한 작품들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쌓아두면 나중에 자기 작품에 그런 단점들이 나타났을 때 얼른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훌륭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과연 이런 작품도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독서는 작가의 창조적인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맞아. 이 뒤에, 어디서든 읽으라, 러닝 머신 위도 좋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그래. 내가 헬스장에 책을 갖고 다니게 된 이유였다. 러닝 머신은 좀 위험하고, 인도어 사이클 위에서 읽는다.  

이 책도 헬스장 러닝 머신 위에서 다 읽었다. 


스티븐 킹은 시종일관 겸손하고, 유머러스하다.

에세이처럼 시작한 이 한권의 작법서는 수많은 '주의사항' 을 설파하고, 수많은 예제를 던져주며 마무리된다.

아마, 이 책을 다 집필하고도, '아 이런 부분이 있었는데,' 한 부분들도 많았겠지.

수많은 '지망생'. 장래의 동료들을 위한 존중과 배려, 따뜻한 시각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아마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선' 을 그리는 것이다. 

아...이제는 컬러로 면을 표현하기가 쉬워진 시대라서 이런 지향점은 고루한 것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선'.


 어린 시절에는 그 선이 도구의 차이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그런 선을 그리는 작가들은 날카로운 쇠붙이에 제도용 잉크를 찍어서 사용하는 원시적인 도구를 벗어어나지 않더라. 가끔 플러스펜이나 제도용 만년필등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을 지닌 필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종이는 뭐, 조금 다르긴 했다. 물론 잉크도 조금 달랐다. '만년필용' 과 '제도용' 은 엄연히 다른 잉크이긴 하다. 

제도용 잉크를 만년필에 넣으면, 그 만년필은 거의 못쓰게 된다. 경유차에 중유나 등유(휘발유도 아니다)를 붓고 시동을 거는 격이랄까.

그러나, 역시 본질적으로 가장 간편하고 구하기 쉬운 도구들이었다.  


조금 지난 뒤엔 작가의 특별한 비법이 있는 줄 알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나? 

종이를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쓰나??

뭔가 특별한 비법이나 수련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무공 비급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 사사받았을법한 드로잉의 비밀 필살기를 업계 스승들로부터 은밀하게 배웠을 것만 같았다. 


최소한의 선으로, 최대한의 것들을 표현한다.


항상 시간의 제약에 쫓기는 만화가는 더더욱 그 경지를 바라본다. 


물론, 여기서 '선' 은 만화 안의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배경에 그어지는 선, 집중선, 컷과 컷을 나누는 컷선. 

심지어 텍스트를 담고 있는 말풍선과 흔히 '효과음' 이라고 부르는 의성어, 의태어까지.

때로는 말풍선 안의 텍스트조차 '선' 으로서 만화 안의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살아있는 선' 이란, 결국 '이야기를 담아내는 선'이고, 오랫동안 변치않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만화의 기본인 '선'이 부족할수록 '장식'에 치중하게 된다. 



아, 나도 빨리 그려야겠다.

나도 빨리 이야기를 캐러 가야겠다.

연장통도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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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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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무엇에 홀린듯 단박에 빠져들었다. 


 화자가 '나' 가 아니라 '당신' 이다. 
그 낯섦에 흠칫 놀라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굳은 마음으로 몇 페이지 더 넘기다보니, 작품 안으로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저자의 의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당신'-그러니까 책을 읽는 나我라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겪는 불안함과 현지의 사정으로 겪게되는 불편에 대한 투덜거림을 '강요'한다. 

 고작 열페이지 남짓한 첫 챕터; '첫번째 바퀴' 를 다 읽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메타소설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독자가 함께 여행을 해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떨어질 수는 있다. 독자를 작품 속 화자로 이입시키려는 작가의 의도 쯤이야, 무시하면 되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당신' 으로 지칭했다고 여기면 된다. 
 나는 작가의 의도에 적극 동조하지 않기로 했다. 저자가 아무리 나를 '당신' 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닌데~!' 하기로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한명 상상했다. 나 역시 저자처럼, '당신' 을 관찰하기로 했다. 


작품의 화자인 '당신'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지 않다. 
'바퀴' 라는 이름이 붙은 열 세 챕터를 통해 수많은 국가를 오가는데, 성별과 직업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각 챕터에 등장하는 모든 '당신' 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일터.
전통적 서사에 맞춰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 직업과 각 챕터의 시간 순서를 맞춰보려던 나는 어느새 그런 시도들을 모두 포기하고 여행담을 즐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도 무너져, 어둑한 야간열차 안에서 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냄새와 텁텁한 공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을 상상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체험감을 높이기 위해 구글링을 해서 각 챕터에 맞는 지명과 야간열차들을 알아보고, 그 지역 사람들이 적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힌 블로그를 보고(구글 번역 만세), 슬라브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 산스크리스트어 등의 포합어의 발음들을 재생시켰다.    
화자가 상상하는 것들을 함께 상상하고, 잠에서 덜 깬 채 요의를 느껴 화장실을 갈까 말까 함께 고민하고, 내 좌석까지 오줌으로 적신 옆자리 꼬마에게 눈을 흘기는 동안 백 몇 페이지가 후딱 지나갔다.
무려 열 세 챕터라지만, 제일 긴 꼭지가 열두페이지 쯤 되고, 대부분 열페이지 안팎이다. 
소설만 따지면 딱 131페이지. 
 
 마음만 먹으면 한두시간이면 읽을 분량이지만, 저자인 다자이 요코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가벼운 에세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자아성찰적인 부분들이 묵직하게 다가오고, 과거와 현재는 기본,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색채까지 갖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만, 자아를 부정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변화를 추앙하는 듯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 것도 같다. 

 책을 덮고, 거의 작품의 1/3정도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주제에 더럽게 어려운) 해설에서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니 그러한 성향이 조금은 이이해가 됐다.
이 책의 저자인 다와다 요코는 와세다 대학 어학연구소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문학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의 서적 수출입회사에 입사하면서 독일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서 독일어로 시산문을 출간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뒤로 독일어와 일본어로 양쪽에서 각기 다른 작품들을 내며 양국가에서 여러 문학상들을 쓸어담는다.(헐...ㄷㄷㄷ)
솔직히 나는 소설보다 이 다와다 요코의 약력이 더 픽션같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20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저자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문학상을 받는다?? 번역소설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독일어로 독일에서 데뷔했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은 언어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할 때 즈음 TVN에서 방영되는 "알뜰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균'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에게 '홍길동전' 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작품은 한문으로 쓰인 작품과 한글로 쓰인 작품이 있는데, 두 작품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내용이었다.
패널로 등장하는 김영하 작가님은 "한글이라는 글 안에서 자유롭고 호방한 작가적 기질이 가감없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셨고, 그와 함께 바로 이 작품과 다와다 요코가 떠올랐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는 다와다 요코의 모국어이자, 20대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언어인 일본어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문학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 독일어로 쓰여진 작품은 어떨까?
생활언어로써 '습득'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과, 사교언어로써 '학습'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최근엔 반론도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언어결정론은 정설처럼 퍼졌던 주요한 이론이었다. 정말로 사고思考 와 언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까? 감수성이 특별한 '작가'라면, 시와 산문, 소설에 정통한 예술가라면 그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주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텍스트는 텍스트 안에서 오롯하게 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텍스트 밖의 상황을 대입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개념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과 밟아온 경력을 대입하는 작가주의 비평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만해 한용운의 개인적 삶과, 시를 짓던 당시 시대상황이 '님' 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에 영향을 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다. 내 나름대로 작품 속에 녹아들 1의 여지도 주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고등학교 수업과 수능시험이 싫다. 알퐁스 도데의 '별' 과 황순원의 '소나기' 를 한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고소감 아닌가?! (ㅋㅋ)
비평가의 해설은 읽어도 작가의 인터뷰는 읽지 않고, 독자모임은 찾아가도 작가대담은 찾지 않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만큼은 컨텍스트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영향을 줬다. 
우리는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아니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수백년 더 유지된다면, 인류의 역사기록에 19~22세기는 국가와 민족, 인종과 문화의 경계가 (격렬하게)허물어지는 시기였다고 기록 될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완벽히 허물어지기 직전에 그 모든 경계들이 수면 위로 부상한 시기라고 여기고 있다. 모든 탐욕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이 정점에 다가서고 있다. 모든 민족과 인종들은 서로에게서 각자의 벽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이 정점에서 인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각 국가의 정치 상황들을 보니 지난 세기처럼 쉽사리 화마속으로 던져넣지는 않을 것 같다. 브렉시트 이후 언듯 우경화의 일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의미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우파일색이던 일본도 도쿄지방선거부터 무너져가고 있다. 아시아의 화약고인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극보수주의자가 집권하자, 세계 각지가 진보의 길을 택했다. 불과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전 세계의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도 빠르게 보수화, 폐쇄화를 택했을터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발달은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내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의 경계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하는 장면을 100년 전에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니, 다 떠나서,
백인과 흑인이 결혼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과 버스좌석도 나눈다는 '법'이 실제로 미국에 있었던 시기다!!!
그 뿐 아니다.
남녀는? 동등한 직업선택의 권리와 참정권은 요원한 시기였다. 여자가 남성에게 종속되던 시기였다.
간신히 폐기된 대한민국의 '호주제'는 실제로 10대 꼬마에게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법적으로 경제권이 종속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다. 특히 이슬람국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당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재도약하던 시기의 독일에 이주한 극동아시아 여성의 작품이라고 설명해야 옳을까? 
그런 여성을 문단에 데뷔시켜주고 상까지 준 독일 문단의 열린 마음(?)을 극찬해야 옳을까? 
아니면, '고작 컨텍스트'라고 해놓고 그런걸 상상하는 내 상상력의 편협함을 욕해야 맞을까? 

바야흐로 '월드 와이드'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견고해졌다.
누군가는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아직도 '피하는' 인종이다.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어떤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국의 역사와 영토를 물고 늘어지며 그 안에서 보호무역과 민족주의는 외려 강해지고 있다. 사실 이럴바엔 중국이 공정을 펴는대로 중국의 일원이거나, 뉴라이트 어거지들이 지껄이는대로 일본의 식민지로 쭉 남았으면 마음만은 얼마나 편했을까, 싶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정서의 경계는 강해지는 것 같다. 인터넷은 '월드 와이드' 의 시대를 열었다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뚜렷한 경계를 직시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러한 경계선을 견지하는 화자의 정신을 경험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즐겁기 짝이 없었지만, 이야기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의 '경계선' 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기차' 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지만, 안에 있는 승객들에겐 밀폐된 공간이다.
게다가 야간 열차 안에는 마치 관과도 같은 침대들이 꽉 차있고, 승객들은 유사 죽음과도 같은 잠에 깊이 빠져있다. 
그 사이에 관과 시신을 실은 거대한 강철상자는 엄청난 속도로 국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간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나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드글그글한 동네에 동그마니 떨어진다.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 '국가, 민족, 모국어' 등이 송곳처럼 툭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그렇다.
'정체성'. 화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성별, 직업, 모국. 아무것도 적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언제나 두루뭉술, 모호하게 풀어낸다. 나의 근원적 불편함은 거기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당신' 이라는 인칭은 '나' 보다 훨씬 더 경계를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 챕터를 읽어 나가면서, 진짜 '나' 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 떠올리게 됐다. 
옛 슬라브 지역에 동그마니 떨어져 낯선 언어들의 틈바구니에서,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몇박의 지루한 여행에서, 낯선 향신료의 냄새가 섞인 사람들의 냄새 속에서, 낯선 언어, 낯선 얼굴이지만, 어디에서나 보았음직한 행동들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 호기심의 눈초리, 불쾌의 눈초리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나' 란 과연 어떤 '나' 일까? 
저자는 '당신' 이란 호칭을 통해 독자인 '나' 와 명백한 선긋기를 시도한다.
이 독특한 체험이 '독서' 라는 간접체험의 '체험'을 보다 농밀한 경지로 밀어올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을 오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날카로운 손발톱도, 질긴 털가죽도 없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해야 한다. 심지어 넓은 시각과 깊은 후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와야 그나마 피아식별 정도를 할 수 있다. 빠르게 판단해서, 빠르게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상대방이 먼저 밝은 낯으로 빈 손을 내밀면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다. '적은 아니구나,' 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극도로 제한적인 시간 안에서, 극도로 제한된 정보를 통해, 극도로 제한된 판단을 내린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터득한 오랜 경험이다. 쉽게 다가가지 말고, 쉽게 손 내밀지 말고. 상대방의 '정체' 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야간열차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검고 긴 줄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일터.
단단하고 두꺼운 철판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싣고 빠르게 질주한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하나의 길고 검은 덩어리. 너무 빨라 창문이 몇개인지, 객실이 몇개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굳이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아라는 것은 그리 단순화, 간략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고. 찾으려 애쓰지도 말라고.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p.140

그리고, '당신' 의 정체를 단단한 외피속에 굳이 가둬두지 말라고.
그게 인종이든, 성별이든, 나이든, 국가든, 언어든, 그 어떤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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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난 만화매니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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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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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도 모니터 요원에 당첨되어 출간 전 가제본을 미리 받아 읽었다.

 4부와 5부 사이에 살짝 생략된 부분이 있다. 

 견고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삼두연합은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균열이 생기지만, 카이사르가 미리 내다보고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삼두연합을 통해 정치적인 방어막을 마련한 카이사르는 장발의 갈리아족 속주와 브리타니아 속주를 평정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부와 명예를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내가 로마에 대한 관심을 최초로 가졌던 BBC의 역사 드라마 'ROME' 에서 '시저(카이사르의 영어식 발음)'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보에누스' 와 '풀로' 가 전공을 본격적으로 쌓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군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자연스럽게 십인장 - 백인장이 된다. 이 당시의 로마군은 생존이 곧 실력이었다. 

 여하튼, 드디어 나도 조금은 아는 내용과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당연히 보에누스와 풀로는 안나온다.^^;;)

 때문에,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벌써 5부니까, 이 시리즈를 이미 12권이나 읽었고, 13권째를 다 읽은 참이다.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일히 신경쓰다가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맥을 놓치기 십상이다. 콜린 매컬로는 친절하게도 주요 인물들은 등장할 때 마다 중요한 사건들을 되짚어준다.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팁이라면, 팁!!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관계인지 일단은 기억하려 애쓸 필요 없다는 뜻이다. 

 5부 [카이사르]의 1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클라우디오' 라는 인물이다. 남매간인 '클라우디아' 와 그렇고 그런 근친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고, 여인들의 신인 '보나 데아' 에게 바치는 축제를 망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이 친절하게 소개된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질투심과 시기심도 강할 뿐더러 원한도 결코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보나 데아의 신관 한명을 곯려주려다 오히려 크게 창피를 당하고, 그걸 복수하겠다고 남자들은 결코 참여해서는 안되는 여신의 축제에 여장을 하고 들어가 신을 모욕했다는 악평을 들은 인물. 

 

  카이사르의 삶은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두 여인의 죽음과 함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에서 딸 율리아와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비로소 카이사르에겐 로마에 직계 가족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이로써,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로마' 라는 공간과 심적으로 완벽하게 동떨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훗날 카이사르가 로마를 향해 군대를 진군시키는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사르의 삶에서도, 로마 공화정 말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포인트인 '클라우디오의 죽음' 은 장인과 사위로 이어졌던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율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삐걱대면서 시작된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가 쌓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곁에 율리아가 있었던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로마의 일인자라는 자긍심과 군인으로서의 전투본능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 누구보다 강대한 적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로마 정계를 한손에 넣기 위해 임기가 다해가는 집정관직을 유지해야 했다.

 마침, 클라우디오가 발의할 법안은 로마 정계에 큰 논쟁거리였으며, 다음 집정관이 유력한 밀로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선거가 치러지는 것 자체를 막아야 했다. 그는 밀로와 클라우디오를 배제시킬 거미줄을 자아내기 시작하고, 밀로를 이용해 클라우디오를 죽음으로 이끌면서 로마에 거대한 혼란을 촉발시킨다.  카이사르에게 오랜 원한을 품고 있는 보니파의 카토와 비불루스는 기회를 틈타 폼페이우스를 자기들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모략을 짜내기 시작하고, 카이사르의 정부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자 카토의 조카인 브루투스도 속주에서 충분히 경력을 쌓고 로마로 복귀해 원로원에 입성한다.  


 로마 역사를 간략하게 읽다보면 당대 최강의 권력자였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반목하게 된 계기가 단순히 혈연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기 쉬운데, 당시의 권력구조와 캐릭터를 섬세하게 다룬 이 책을 읽다보니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 같다.

 폼페이우스는 여러모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닮아있는 인물이다.

전쟁의 천재였지만, 로마 중심에서 벗어난 변방 출신으로 혈통상 집정관에 오르기 힘든 존재였다. 사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침공이 아니었으면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젊은 시절부터 술라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고, 마리우스의 게르만족 퇴치만큼 큰 업적을 쌓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갔다. 모든 로마인들이 칭송하는 와중에도 고귀한 파트리키 혈통의 아내를 얻어서 혈통의 정당성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자긍심이 큰 만큼 혈통에 대한 열등감도 컸다.

 그렇게 보면 카이사르는 술라와 닮아있다. 매력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훗날 카이사르는 술라처럼 군홧발로 로마 시내를 짓밟을것이고, 술라가 자신에게 한 것 처럼 유능한 재능을 유피테르 대신관으로 묶어 놓을터다. 

 폼페이우스보다 조금 늦게 경력을 시작했지만, 카이사르는 순식간에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따라잡았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에게 사로잡혀 잘 보지 못했지만, 몇 년 사이에 로마인들이 칭송하는 대상은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카이사르는 수부라지구의 하층민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았다. 현명한 어머니 덕에 카이사르가 수부라지구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떠한 열등감도 없이 자라났다. 자기보다 혈통이 비천한 자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얻어내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으며 늙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수발을 들며 전쟁에 관한 수많은 노하우들을 익혔고, 그 모든 것들을 실전에서 통달해 나갔다. 

 율리아의 죽음과 함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라는 거대한 위협을 목도한다. 

작품 안에서 아티쿠스는 "폼페이우스는 누구를 속이려 할 때 스스로 거미줄 속에 뒤엉키네. 그래, 그가 거미줄들을 잘 다루기는 하지. 그래도 거미줄은 거미줄이야. 그에 반해 카이사르는 태피스트리를 짜지." (p. 350) 라고 평한다. 

폼페이우스가 드디어 카이사르를 옭아맬 거미줄을 쳤다. 

우리가 잘 알듯이 칼과 피로 마감되는 그 거미줄이다.

과연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킨 거미줄이 어떤 무늬의 태피스트리와 만날까. 

그리고 카이사르는 어떤 과정 속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될까.

다음권이 엄청나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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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꾸준하게 읽으신 모양입니다.

전 읽다 말다 거듭해서 매 시리즈마다 첫번째
권만 읽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번에야말로 완독에 도전을 해야 싶네요.

열혈명호 2017-06-07 19:00   좋아요 0 | URL
넵. 저는 이렇게 긴 장편은 모아놓으면 읽을 확률이 낮아서, 가급적 나오는 족족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리뷰를 쓰는 이유도 사실 까먹지 않기 위해서죠!! ㅋㅋㅋㅋㅋㅋ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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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대하소설만 좋아하던 내가 단편의 세례를 받은지 꽤 되었다. 

나도 다른 여러 사람들처럼 끝난 듯 끝나지 않은 듯, 마치 응가하다가 중간에 끊고 나온 것 같은, 애매하고 모호한 결말이나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서사, 무엇보다 단편의 소재로 쓰이는 대부분의 것들은 불편하거나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것들 투성이라서 정말 싫어했다. 물론 아름다운 단편들도 있긴 있지만, 대부분 수능 모의고사에서 봤던 것들이라 괴로운 기억의 촉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알퐁스 도데의 '별' 은 너무 아름답지만, 빨리 읽고 문제 풀어야 할 것 같지. '소나기' 나 '동백꽃'도 마찬가지.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 고통이나 괴로움이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서사로 끝난 듯 끝나지 않게 끝나서 마음 속 어딘가를 쟁쟁 을러댄다. 

 대하서사물은 언제나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면 카타르시스가 온다. 주인공은 반드시 성장하고, 언젠가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뤄낸다. 

 하지만 단편은 -어떤 단편들은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다. 



 뚜렷한 계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좋아졌다. (나...나이 먹어,서? ㅋㅋ)

어쩌면 '문학은 답을 주지 않는다' 는 명제를 받아들인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주지 않으며, 괴로움을 해갈시켜주지도 않는다. 카타르시스나 열망을 주는 것도 아니며, 위로나 안정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 벼락처럼, 어느순간 갑자기 나는 문학의 역할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여기게됐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단편의 세례' 라고 적은 것이다.  

소설가들은 답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질문을 찾는 사람들이다. 답은 철학자(같은 사람)들의 몫일 터. 어쩌면 과학자도?  

 물론 각자의 해답을 갖고 있고, 그 답을 작품 속에 메시지로 넣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문학은 '주로' 질문자의 역할을 해왔다. 훌륭한 작가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그와 동시에, '이런 건 어떨까?' 정도의 자기 의견을 피력할 뿐, 결코 해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소설을 "일어날 법 한 일" 이라고 일컫지 않았을터다. 소설가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퍼올리는 사람들이다.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처한 인물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들 또한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문에, 소설가에게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며, 문학 안에서 정답을 찾는 일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과 같다. 물론, 우물에서 퍼올린 물로 숭늉을 끓일 수는 있겠지만, 솥과 불을 마련해서 밥을 한차례 잘 지어 먹는 일은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다. 

어떤 솥에, 어떤 곡식으로, 어떻게 밥을 했는지에 따라 숭늉의 맛은 달라질 터다. 

 


 이번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그런 의미론 같은 우물 안에서 얼마나 다른 우물물이 길어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었다. 내가 매년 수많은 수상작품집을 모두 챙겨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이전회의 수상작품집에 비해 다채로움 면에서 즐거움이 덜했던 것은 사실이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타이틀에 붙어있는 '젊은작가' 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신선한 작품들이 많았다. 물론 수상한 작가들이 모두 젊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이번 작품집에서도 무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작가분도 두분이나(!!) 계셨다.ㅋㅋ) 하지만, 이 상에 작가의 연령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 상 안에서 젊음은 '등단시기' 에 가깝다. 때문에 기존의 문학상에서 발탁되기 힘든, 예를 들어, 장르적 요소가 가득한 소설이나 민감한 소재들이 활용된 작품들이 근근히 보였더랬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그런 소설을 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재미있는 형식이나 단편만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플롯, 헉, 소리 나게 만드는 소재들로 가득 차서 거의 쉬지 않고 모든 작품들을 즐겼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 작품집을 다채롭지 않다고 느낀 이유는 모든 작품들이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일들을 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집의 가장 앞에 놓인 임현 작가의 "고두" 는 여고생 소녀가장과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교육 시스템, 나아가 고교 교사와의 육체적 관계와 미혼모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지만, 누구나 거부하고 싶은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최은미 작가의 "눈으로 만든 사람" 은 성조숙증 자녀를 가진 어머니 강윤희와 강윤희의 과거에 있었던 남매간의 성범죄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화자인 강윤희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던 오빠 강중식이 "고두" 의 화자인 윤리 선생님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느껴져서, 완벽하게 다른 정서의 두 작품이 미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김금희 작가의 "문상" 은 제목처럼 썩 내키지 않는 사람이 상주 중 한명으로 있는 장례식장에 문상을 간 남자의 이야기이다. 두 남자는 대화를 하던 도중 동시에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는데, 화자의 전 여자친구와 어떤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든그녀와 얽힌 듯이 보이는 다른 남자의 이야기가 묘한 위화감을 풍겼다. '나와 전 여자친구의 관계' 에 대한 내용이 다른 남자의 입에서 오르내린다는 것 자체가 유쾌한 일은 아닌데, 그녀가 이 남자와 모종의 관계였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수컷들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든다. 

 백수린 작가의 "고요한 사건" 은 한 소년과 두 소녀의 애정의 삼각관계, 그리고 길고양이와 재건축을 둘러싼 동네 주민들의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갈등들을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삼각관계로 치환해 그려내고 있는데, 한 소녀의 짝사랑이 끝나고, 다른 소녀와 소년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동네 주민들의 갈등이 '고양이 살해' 로 폭발하는 플롯이 돋보였다. 

 강화길 작가의 "호수-다른사람" 은 데이트 폭력과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공포에 직면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방식은 마치 의식의 흐름 같기도 하지만, 짧고 명확한 서사를 꽉 붙들고 있다.  화자가 가지고 있는 의심들이 현실로 드러나는 클라이맥스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데, 여러 면에서 "고두"와 함께 읽는 맛이 있는 작품이었다.        

 최은영 작가의 "그 여름" 과 천희란 작가의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는 여성 게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여름" 이 젊은 두 동성 연인간의 연애와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여성 게이의 삶 자체를 담아내고 있다. 

"그 여름" 의 경우에는 화자를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로 치환시켜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얼핏 통속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적인 사랑과 연애 이야기였는데, 이를 통해 오히려 동성연애도 이성연애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환기시켜준다. 특별히 다를 것이 없이, 똑같은 것으로 고민하고, 똑같은 이유로 만나고, 헤어진다는 점. 

반면,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는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각자가 피치 못할 선택을 한 동성연인의 비애가 서간체를 통해 그려진다. 특히 이 작품은 서간문이 갖고 있는 장점이 십분 발휘된 작품인데, 자연스러운 구어체와 행간에 함축된 내용들이 편지를 주고받는 인물들을 풍성하게 만듦과 동시에 독자들이 상상하고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내러티브를 풍성하게 해서 이 작품은 장편으로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일곱작품 모두 재미있었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점들이 많았으며, 계속 읽고 싶은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상상을 하며 읽었던 작품은 역시 강화길 작가의 "호수-다른 사람" 이었다.

 치밀하게, 혹은 본능적으로 계산한 듯한 "여백" 이 특히 많았기에 더욱 그랬는데, 화자인 여성이 호수 바닥에서 '무언가 길쭉한 것' 을 손에 쥐었을 때는 정말이지 엉뚱하고도 다채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아서왕이 죽으면서 호수에 버린 그 엑스칼리버도 떠올랐고, 화자의 손을 잡아끄는 '이한' 이라는 남성이 사실은 처음부터 귀신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실제로 이한을 귀신으로, 주인공 화자를 영매 능력과 같은 신비한 능력이 있는 여인이었다고 생각해도 흐름상 전혀 무리가 없다.(외려 더 재밌- ㅋㅋㅋ그정도로 작품 내외적으로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우리 시대상을 반영했다는 느낌이 드는 소재들이 사용되었다.

나는 이런 수상작의 경우엔 심사경위나 해설을 가장 나중에, 각각의 작품들을 읽고 나름의 독후감까지 마친 뒤에 읽는 편이다. 책을 읽는 순간의 내 감정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인데, 이번 작 역시 그랬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작품집은 심사 경위와 개별 작품에 붙어있는 해설도 굉장히 궁금하다. 

 평론은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예술 장르의 발전에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평론에 비해 문학 평론이 많이 쳐진 감이 있는데, 이는 평단이 문단과 독립되지 못하고 종속되거나 공동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지나치게 고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가까운 과거, 큰 표절 사건을 통해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자정 노력이 있었고, 물갈이를 통해 젊은 평론가들이 중요한 위치에 서면서 변화와 발전의 기로에 접어들었다. 이들이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전철대로 가느냐,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견제와 상생의 길을 개척하느냐는 결국 평론가와 작가들의 '친목질' 에 달려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어디나...그게 문제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은 언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항상 새롭고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쌓인 것보다 쌓아갈 것이 많은 작가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등단후 10년 이내라는 제한을 비춰 볼 때, '10년 이내' 라는 기간이 과연 직업적으로 '젊다고 할 수 있느냐?' 고 묻는다면, 나도 고개를 갸우뚱 할 것 같긴 하지만, 문학의 특성상 10년 동안 딱 한 작품만을 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반박하기도 어렵다.(ㅋㅋ) 

그래,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다. 상이란 것은 작가들의 작품활동을 독려하고, 더 많은 독자들에게 더 다양한 작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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