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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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무엇에 홀린듯 단박에 빠져들었다. 


 화자가 '나' 가 아니라 '당신' 이다. 
그 낯섦에 흠칫 놀라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굳은 마음으로 몇 페이지 더 넘기다보니, 작품 안으로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저자의 의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당신'-그러니까 책을 읽는 나我라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겪는 불안함과 현지의 사정으로 겪게되는 불편에 대한 투덜거림을 '강요'한다. 

 고작 열페이지 남짓한 첫 챕터; '첫번째 바퀴' 를 다 읽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메타소설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독자가 함께 여행을 해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떨어질 수는 있다. 독자를 작품 속 화자로 이입시키려는 작가의 의도 쯤이야, 무시하면 되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당신' 으로 지칭했다고 여기면 된다. 
 나는 작가의 의도에 적극 동조하지 않기로 했다. 저자가 아무리 나를 '당신' 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닌데~!' 하기로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한명 상상했다. 나 역시 저자처럼, '당신' 을 관찰하기로 했다. 


작품의 화자인 '당신'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지 않다. 
'바퀴' 라는 이름이 붙은 열 세 챕터를 통해 수많은 국가를 오가는데, 성별과 직업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각 챕터에 등장하는 모든 '당신' 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일터.
전통적 서사에 맞춰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 직업과 각 챕터의 시간 순서를 맞춰보려던 나는 어느새 그런 시도들을 모두 포기하고 여행담을 즐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도 무너져, 어둑한 야간열차 안에서 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냄새와 텁텁한 공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을 상상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체험감을 높이기 위해 구글링을 해서 각 챕터에 맞는 지명과 야간열차들을 알아보고, 그 지역 사람들이 적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힌 블로그를 보고(구글 번역 만세), 슬라브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 산스크리스트어 등의 포합어의 발음들을 재생시켰다.    
화자가 상상하는 것들을 함께 상상하고, 잠에서 덜 깬 채 요의를 느껴 화장실을 갈까 말까 함께 고민하고, 내 좌석까지 오줌으로 적신 옆자리 꼬마에게 눈을 흘기는 동안 백 몇 페이지가 후딱 지나갔다.
무려 열 세 챕터라지만, 제일 긴 꼭지가 열두페이지 쯤 되고, 대부분 열페이지 안팎이다. 
소설만 따지면 딱 131페이지. 
 
 마음만 먹으면 한두시간이면 읽을 분량이지만, 저자인 다자이 요코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가벼운 에세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자아성찰적인 부분들이 묵직하게 다가오고, 과거와 현재는 기본,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색채까지 갖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만, 자아를 부정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변화를 추앙하는 듯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 것도 같다. 

 책을 덮고, 거의 작품의 1/3정도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주제에 더럽게 어려운) 해설에서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니 그러한 성향이 조금은 이이해가 됐다.
이 책의 저자인 다와다 요코는 와세다 대학 어학연구소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문학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의 서적 수출입회사에 입사하면서 독일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서 독일어로 시산문을 출간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뒤로 독일어와 일본어로 양쪽에서 각기 다른 작품들을 내며 양국가에서 여러 문학상들을 쓸어담는다.(헐...ㄷㄷㄷ)
솔직히 나는 소설보다 이 다와다 요코의 약력이 더 픽션같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20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저자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문학상을 받는다?? 번역소설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독일어로 독일에서 데뷔했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은 언어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할 때 즈음 TVN에서 방영되는 "알뜰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균'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에게 '홍길동전' 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작품은 한문으로 쓰인 작품과 한글로 쓰인 작품이 있는데, 두 작품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내용이었다.
패널로 등장하는 김영하 작가님은 "한글이라는 글 안에서 자유롭고 호방한 작가적 기질이 가감없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셨고, 그와 함께 바로 이 작품과 다와다 요코가 떠올랐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는 다와다 요코의 모국어이자, 20대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언어인 일본어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문학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 독일어로 쓰여진 작품은 어떨까?
생활언어로써 '습득'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과, 사교언어로써 '학습'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최근엔 반론도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언어결정론은 정설처럼 퍼졌던 주요한 이론이었다. 정말로 사고思考 와 언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까? 감수성이 특별한 '작가'라면, 시와 산문, 소설에 정통한 예술가라면 그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주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텍스트는 텍스트 안에서 오롯하게 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텍스트 밖의 상황을 대입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개념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과 밟아온 경력을 대입하는 작가주의 비평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만해 한용운의 개인적 삶과, 시를 짓던 당시 시대상황이 '님' 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에 영향을 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다. 내 나름대로 작품 속에 녹아들 1의 여지도 주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고등학교 수업과 수능시험이 싫다. 알퐁스 도데의 '별' 과 황순원의 '소나기' 를 한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고소감 아닌가?! (ㅋㅋ)
비평가의 해설은 읽어도 작가의 인터뷰는 읽지 않고, 독자모임은 찾아가도 작가대담은 찾지 않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만큼은 컨텍스트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영향을 줬다. 
우리는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아니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수백년 더 유지된다면, 인류의 역사기록에 19~22세기는 국가와 민족, 인종과 문화의 경계가 (격렬하게)허물어지는 시기였다고 기록 될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완벽히 허물어지기 직전에 그 모든 경계들이 수면 위로 부상한 시기라고 여기고 있다. 모든 탐욕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이 정점에 다가서고 있다. 모든 민족과 인종들은 서로에게서 각자의 벽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이 정점에서 인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각 국가의 정치 상황들을 보니 지난 세기처럼 쉽사리 화마속으로 던져넣지는 않을 것 같다. 브렉시트 이후 언듯 우경화의 일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의미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우파일색이던 일본도 도쿄지방선거부터 무너져가고 있다. 아시아의 화약고인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극보수주의자가 집권하자, 세계 각지가 진보의 길을 택했다. 불과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전 세계의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도 빠르게 보수화, 폐쇄화를 택했을터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발달은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내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의 경계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하는 장면을 100년 전에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니, 다 떠나서,
백인과 흑인이 결혼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과 버스좌석도 나눈다는 '법'이 실제로 미국에 있었던 시기다!!!
그 뿐 아니다.
남녀는? 동등한 직업선택의 권리와 참정권은 요원한 시기였다. 여자가 남성에게 종속되던 시기였다.
간신히 폐기된 대한민국의 '호주제'는 실제로 10대 꼬마에게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법적으로 경제권이 종속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다. 특히 이슬람국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당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재도약하던 시기의 독일에 이주한 극동아시아 여성의 작품이라고 설명해야 옳을까? 
그런 여성을 문단에 데뷔시켜주고 상까지 준 독일 문단의 열린 마음(?)을 극찬해야 옳을까? 
아니면, '고작 컨텍스트'라고 해놓고 그런걸 상상하는 내 상상력의 편협함을 욕해야 맞을까? 

바야흐로 '월드 와이드'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견고해졌다.
누군가는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아직도 '피하는' 인종이다.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어떤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국의 역사와 영토를 물고 늘어지며 그 안에서 보호무역과 민족주의는 외려 강해지고 있다. 사실 이럴바엔 중국이 공정을 펴는대로 중국의 일원이거나, 뉴라이트 어거지들이 지껄이는대로 일본의 식민지로 쭉 남았으면 마음만은 얼마나 편했을까, 싶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정서의 경계는 강해지는 것 같다. 인터넷은 '월드 와이드' 의 시대를 열었다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뚜렷한 경계를 직시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러한 경계선을 견지하는 화자의 정신을 경험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즐겁기 짝이 없었지만, 이야기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의 '경계선' 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기차' 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지만, 안에 있는 승객들에겐 밀폐된 공간이다.
게다가 야간 열차 안에는 마치 관과도 같은 침대들이 꽉 차있고, 승객들은 유사 죽음과도 같은 잠에 깊이 빠져있다. 
그 사이에 관과 시신을 실은 거대한 강철상자는 엄청난 속도로 국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간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나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드글그글한 동네에 동그마니 떨어진다.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 '국가, 민족, 모국어' 등이 송곳처럼 툭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그렇다.
'정체성'. 화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성별, 직업, 모국. 아무것도 적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언제나 두루뭉술, 모호하게 풀어낸다. 나의 근원적 불편함은 거기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당신' 이라는 인칭은 '나' 보다 훨씬 더 경계를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 챕터를 읽어 나가면서, 진짜 '나' 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 떠올리게 됐다. 
옛 슬라브 지역에 동그마니 떨어져 낯선 언어들의 틈바구니에서,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몇박의 지루한 여행에서, 낯선 향신료의 냄새가 섞인 사람들의 냄새 속에서, 낯선 언어, 낯선 얼굴이지만, 어디에서나 보았음직한 행동들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 호기심의 눈초리, 불쾌의 눈초리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나' 란 과연 어떤 '나' 일까? 
저자는 '당신' 이란 호칭을 통해 독자인 '나' 와 명백한 선긋기를 시도한다.
이 독특한 체험이 '독서' 라는 간접체험의 '체험'을 보다 농밀한 경지로 밀어올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을 오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날카로운 손발톱도, 질긴 털가죽도 없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해야 한다. 심지어 넓은 시각과 깊은 후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와야 그나마 피아식별 정도를 할 수 있다. 빠르게 판단해서, 빠르게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상대방이 먼저 밝은 낯으로 빈 손을 내밀면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다. '적은 아니구나,' 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극도로 제한적인 시간 안에서, 극도로 제한된 정보를 통해, 극도로 제한된 판단을 내린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터득한 오랜 경험이다. 쉽게 다가가지 말고, 쉽게 손 내밀지 말고. 상대방의 '정체' 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야간열차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검고 긴 줄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일터.
단단하고 두꺼운 철판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싣고 빠르게 질주한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하나의 길고 검은 덩어리. 너무 빨라 창문이 몇개인지, 객실이 몇개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굳이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아라는 것은 그리 단순화, 간략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고. 찾으려 애쓰지도 말라고.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p.140

그리고, '당신' 의 정체를 단단한 외피속에 굳이 가둬두지 말라고.
그게 인종이든, 성별이든, 나이든, 국가든, 언어든, 그 어떤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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