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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
탁동철 지음, 나오미양 그림 / 양철북 / 2025년 1월
평점 :
여기 내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같은 교사라고 해도 이 책의 담임선생님과 나는 전혀 다른 경험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이 30센티 안쪽 오그린 세계에 갇힌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나도 사실 그 부류에 속한다. 이렇게 더운 날엔 에어컨 없는 곳에 한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하는, 자연은 그저 '거기 잘 있기만' 하면 좋겠는 부류. 이 책도 에어컨 빵빵한 까페에 와서 읽었다.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 "책을 읽는 여러분도 장호와 친구들처럼 30센티 너머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자기 말과 감각을 되찾고,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자라나는 자연의 아이가 되기를." 이 바람이 나에게 적용되기는 영 틀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라도 느껴보는 것이 아예 모르는 것 보다는 낫다. 작가님의 바람처럼 아이들이 이 세계에 대한 감각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거기 잘 있기만' 할 리도 없고.
산골 마을 중에서도 더 깊이 들어가 홀로 있는 집에 장호 할아버지 댁이 있다. 택배도 닿지 않아 이웃집에 내려와서 찾아야 하는 곳이다.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하루도 못버티고 도시의 문명에 목말라 칭얼대겠지. 하지만 장호는 절대 다른 곳에 가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아주 어릴때도 여기 맡겨져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체득한 자연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장호가 너무나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만신창이가 된 짐승처럼.
부모의 불화와 폭력, 헤어짐의 추한 과정은 장호의 마음에 불에 데인 상처처럼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뿐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악랄하게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고, 참았던 분노가 터져나온 날, 감쪽같이 구도가 바뀌어 있었다. 흔한 일이다. 평상시 가해자는 이럴 때 피해자 코스프레를 오지게 한다. 장호는 한순간에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실제로 안해야 하는 행동을 한꺼번에 많이도 했다.ㅠ 사지에 몰린 장호를 할아버지가 다시 데려갔다. 주변인들은 마음의 병, 대인기피증, 분노조절 장애, 치료 등등을 언급했지만 할아버지는 귀를 닫았다. 몇달간 등교거부도 용인하고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학년이 올라가는 3월, "할아버지랑 계속 살려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선포하셨고 장호는 코뚜레 꿰인듯이 괴로워하며 학교에 간다. 다니던 도시 학교와는 딴판인 산골 학교로.
그곳의 담임 선생님은 아마도 작가님인 듯. 그리고 작가님 또한 산골 태생으로 자연과 어울려 자라신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아이들은 억세고 선생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 않고 능숙하게 받아쳐가며 지도하시는 작가님은 보통 고수가 아니시네. 언뜻언뜻 보이는 수업장면도 그렇고 텃밭이든, 사육이든, 바깥 활동 모든 것이 나로선 엄두를 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때로 만용을 부려 엄청난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곤 했는데, 내가 알았다면 결사적으로 말릴 위험한 일들이었지만 이 동네 교사나 어른들은 적당히 눈감아 주다가 어떤 때는 나타나서 도와주시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아예 접해본 적도 없는 나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뿐.
이곳에서 사계절을 지내며 꾹 닫았던 입을 열고, 마음이 열리고, 장점을 발휘하며 인정도 받고, 꽤 멋진 처신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장호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아주 은근한 담임의 배려도 잘 보면 보이고, 다들 허술하지만 함께 성장하는 조연 어린이들의 캐릭터도 각각 재미있다. 마지막 썰매 장면에선 가슴이 활짝 펴진 장호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억지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잘 표현되었다.
교사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아이가 마음을 여는 이 지난한 과정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며 어떻게 인내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이 책보다도 훨씬 어려울 테니까. 아이들이 읽는다면 장호가 일깨우는 자연의 감각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게 있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두 가지가 필수구나. 하나는 자연이고 또하나는 함께하는 친구. 갈수록 둘 중 하나도 가질 수 없도록 아이들을 몰아대는 시대이니 어찌 위기라 하지 않을까.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