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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여름방학 ㅣ 보름달문고 97
이퐁 지음, 오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어린 시절 누구나 환상적인 생각의 조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겠다. 우리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이 있다가 스스르 녹아 없어졌느냐, 용케 남아서 조각들이 튼튼하게 연결되어 구성되었느냐의 차이 아닐까. 작가님들은 후자이겠다. 나는 당연히 전자고. 그래서 나같은 독자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 아련한 추억같은... (마치 전생의 기억 같기도 한) 느낌을 갖게된다. 생각이 날듯말듯한 오래된 꿈 같기도 한.
다섯 편의 단편 중 두 번째 [왼쪽 세상에 가본 적 있어]가 특히 그랬다. 이 이야기는 ‘크라메싫어’ 라는 닉네임의 작성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이야기와 그 댓글들로 구성된다. 게시판 분류를 보니 [살다보면>이것좀봐줘]로 되어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것좀봐줘’ 라는 게시판의 익명 독자들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왼쪽 세상과 오른쪽 세상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게 부모님을 매우 걱정시켰다는 것도.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그곳이 왼쪽 세상에는 크라메라는 식인물고기가 우글우글한 강이었다) 그래서 유치원도 다니지 못하며 혼자 컸지만, 왼쪽 세상 덕에 혼자가 아니었다. 특히 거기서 만난 특별한 친구 덕분에. 하지만 지금 아이는 왼쪽 세상을 보지 못한다고 썼다. 왼쪽 눈에 사시 같은 증상 때문에 부모님 걱정이 컸는데, 그걸 교정하는 안경을 쓰자 왼쪽 세상도 사라졌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련하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다일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첫 번째 작품 [인터스텔라 여름방학]이 표제작이다. 우주여행을 하는 진짜 SF이면서 예상 외의 황당한 줄거리인 점이 마음에 든다. 명왕성 여행이 가능해진 미래인데, 자식을 최고 클라스로 만들려고 최고급 과외를 시키는 것은 여전하다고? 그것도 명왕성 행 우주선에서? 하지만 엄마는 속았다. 그 우주선은 명왕성으로 향하지 않았고, 루하에겐 지구를 변호해야 할 책임이 난데없이 주어진다. 과연 루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 번째 [돔돔세 견문록]은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부터. ‘쳇2153’이라는 이 지적존재는 고유의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 어떤 로봇에든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OP404라는, 오퍼튜니티의 후손 격인 구식 로봇의 몸에 들어가 임무수행을 하다가 어느 외딴돔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 사는 로봇들의 이름에서 유머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빙고, 옥산나, 유남생, 옥토팔 등. (이들은 번호로 부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망각의 전자기폭풍이 휩쓸어 방대한 데이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고, 넝마같이 남아있는 데이터로 이런저런 유추를 하며 살아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하긴 그렇네. 우린 왜 데이터는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나. 이런 시대에 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은 낡은 공책에 남겨진 손편지 한 장.... 이 미래의 미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을 보면 작가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다고? 어쨌든 다정하니 좋다.
[그날, 사비가 물었어]는 잘 뜯어보면 정말 슬픈 이야긴데.... 세상 막다른 곳에 몰린 아이가 초공간 차원 이동 파견 여행자에게 발견되어 함께 떠나는 이야기다. 지구 기준으로 말한다면 참혹한 결말이지만 ‘초공간 차원 이동 수기 공모전’에 낼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는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 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휴. 그래,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근데 그래도 되나.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내가 뭘 알겠어. 다만 이렇게 막다른 곳에 몰리는 아이들을 지구인들도 발견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로맨스로 마무리? 제목은 [한여름의 랑데부]다. 여름이와 산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근데 뭐, 이런 말이 있잖아. 사랑이 별거냐.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여기서는 그게 몽에뚜와르들의 동족 상봉을 위한 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해석해서 너무 웃겼는데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호르몬 어쩌구 하는 것보다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이냐. 그들의 랑데부를 그들은 개인사라고 생각했겠지만 몽에뚜와르들 입장에선 역사적 장면이었다니. 뭐 어떻게 생각하든 어떠랴. 인간의 눈에 안보이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야기들이 요즘 다 그게 그거 같다고 느끼는, 권태기(?)에 들어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겠다. 색다른 느낌과 상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익숙하고 편안한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색달라서 ‘??’와 ‘ㅋㅋ’의 느낌으로 보게 되는 작품들도 가끔 읽어주면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