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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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이 책 안읽었으면 주시겠다고 해서 "아 안읽었어요" 하고 넙죽 받았다. 알라딘 대문에서 한참동안 봤던 책.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매우 낯익은 책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못했는데 책이 안겨졌으니 읽어봐야지. 1권은 틈틈이 읽었고 2권은 토요일에 읽었다.

명성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내 읽기 수준이 이제 어린이, 청소년에게 맞춰져서 그런 걸수도 있다. 소설을 즐겨 읽지 않기도 하고.

재일조선인 가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라 하겠다.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문제라, 일단 새로운 공감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작가 또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의 가족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가족들의 삶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작가가 이런 어려운 소재를 선택한 데에는 본인의 배경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부터 재일동포, 재일동포 많이 듣기는 했는데 그들의 삶에 이렇게 원천적인 한계가 가로막혀 있고 실존적 문제까지 드리워져 있을거란 생각은 잘 못했다. 무식해서기도 하지만 남의 삶에 관심이 없으니까. 문학의 역할이 이러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이들은 평생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으며 이곳이 내 터전이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공교로운 상황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들이 떠날땐 하나였던 고국이 돌아가고자 할땐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선택에는 이념이 끼어들었을테고 나라도 귀향을 포기하고 머물렀을 것 같다. 하지만 머무르기엔 그곳도 나를 달가워하는 곳이 아니었으니.... 선자-아들-손자에 이르는 3대에 걸쳐서까지도 말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선자의 장남 노아의 자살. 가장 반듯했고 똑똑했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려고 했던, 와세다대학교까지 들어가고 집안의 자랑이 될 것 같았던 노아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알게되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잠적해 버렸다. 이주민의 멍에는 노력과 성실로 극복하려 했지만 출생의 비밀까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난 솔직히 마지막을 알리는 문장에 헉, 하고 놀라면서도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다. 아니 살육자 전두환의 손자도 사죄하려 애쓰며 살아가는데 야쿠자가 뭐 죽기까지 할 일이야? 남은 이들은 어쩌라고? 잔인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절망이 있었던 것이겠지 라는 생각을 (억지로) 해본다. 남의 아픔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으니까. 이러한 일을 겪으며 이국땅에서 유년을 뺀 평생을 살아가야 했던 선자의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그시대 처녀로 노아를 임신한 선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와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준 남편 백이삭은 선자 옆에 오래 있어주지 못했다. 마지막장에서 선자는 남편의 묘를 찾는데, 거기에서 죽은 노아가 출생의 비밀을 안 후에도 죽기 전까지 이삭의 묘를 찾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삭의 비석 아래 노아의 사진을 묻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나는 선자. 삶이란 이렇게 힘겹게 버텨야하는 것인지, 그저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인지. 제법 살았는데도 잘 모르겠다.

작가의 시각은 조선인들의 고난을 그리되, 일본인들의 악함을 부각시키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어디에나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 선자의 손자(둘째아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가 미국에서 공부했음에도 연인과 이별하면서까지 미국행을 선택하지 않은 걸 봐도 그렇다. 그리고 제목인 파친코. 재일한국인과 파친코가 이렇게 연관이 있는지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나는 있던 곳에 계속 있으려는 경향이 강해서 이주민으로 살 생각은 절대 없고, 어울리는 사람과만 어울리려는 경향도 강해서 내 주변에 이주민이 있는 것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이주민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평화로운 어울림을 고민해야만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픔을 겪고 나서야 돌아보지 말고. 하지만 인간은 기어이 아픔을 자초하는 존재라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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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해방일지 - 우리 내면의 빛을 깨워줄 교사들의 아름다운 성찰일지
권영애.버츄코칭리더교사모임 지음 / 생각의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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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적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감정은 순간적인 것인데, 그 흔적이 남는게 싫기 때문이다.

또 내 감정이 이용되고, 속된 말로 호구가 될까봐서 그런 것도 있다.

나는 성격이 강하지 못해서 그럴 위험성이 높고, 살면서 크게는 아니지만 살짝씩 낌새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순간을 나는 후회한다. 더이상 사랑 타령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이후 내가 교사로서 조금은 더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그런 내게 가슴을 부여잡고 감정의 격동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내어주고, 그게 상처로 돌아올지라도 감수하는 모습. 아 이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야.... 수없이 실패했던 모습이야....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모습이야....

 

하지만 생각한다. 케이트 디카밀로 작가가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에서 이렇게 말했지. 사랑 없이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겠냐고. 그리고 비어트리스의 예언에서도 말한다. 사랑, 그리고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사들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어버린 일이 아닐까. 사랑의 열정보다는 자기방어를 하게 만든 풍토. 나도 그런 쪽이라 볼 수 있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살아야 사랑도 뭣도 할 수 있지. 그러니 사랑도 냉정하게 해야 돼. 안 그러면 죽으니까. 일단 살아야 해. 이 사이클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나는 감정을 갈수록 깊은 서랍에 넣고 있을 뿐 사랑 자체를 잃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상당한 호의가 있고, 학생들도 내게 그런 편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것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도 나름대로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만의 단 한 사람이 되어주려고 가슴이 깨지는 아픔도 마다하지 않는 이 모임의 선생님들이 추구하는 사랑과는 상당한 수준차이가 있다. 이 수준과 그 수준 사이에는 상당히 넓고 깊은 강이 있다. 나는 차마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저자샘들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과 그것을 정말 솔직하게 표현하셨다는 점이다. 그것이 부족한 독자샘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같은 약점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으면서도, 거기서 마음을 다잡고 한발 더 나아가는 저자샘들을 존경하게 된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힘들지만 한 발 더 가보자고, 지금까지 온 길에서 수없이 발을 삐었더라도 헛되지 않았다고.

 

나의 해방일지드라마를 좋아했던 나는 이 책에 해방일지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를 가늠해본다. 염미정과 구씨는 서로를 추앙하며 해방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을 묶고 짓누르는 것들을 떨쳐낼 힘을 끌어모았다. 우리 교사들도 어쩌면 지금이 그럴 때인 것일까. 서로를 추앙해서라도 이 진창같은 현실에서 꽃을 피울 힘을 얻는 것. 그게 우리를 구원하고 아이들을 구원하는 길은 아닐까. 이 책이 진정한 해방일지가 되길 응원하며 특히 나보다 많이 어린 후배 선생님들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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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마트 - 2024 경남독서한마당 추천도서 바람그림책 137
김유 지음, 소복이 그림 / 천개의바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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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합은 무조건 찬성이다. 김유 작가님의 글과 소복이 작가님의 그림.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글과 그림에는 디테일과 유머가 잔뜩 들어가 있어 보고 또 봐도 재밌다.

 

전작인 마음버스에 정류장 이름으로 살짝 등장했던 사자마트. 이번 책에는 제목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사자는 으르렁 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인 동화인가? 그런데 아니었다. 사자, 팔자 할 때의 그 사자였고, 주인장 이름이 또한 사자 씨였다.

 

사자마트는 아파트 입구 건물에 있다. 마트를 개업하며 사자라는 이름을 붙일 때부터 사자 씨는 애를 많이 썼겠지? 쓸고 닦고 정리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덩치 크고 덥수룩한 그의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는 놀라 달아나 버렸다. 놀라서 뛰어나온 사자 씨는 더욱 사자 같아 보였다. 그리고,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자 씨는 변함없이 하루 일과를 유지했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쓸고 닦고 정돈하고, 밤에 가게 문을 닫으면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그러는 와중에 사자마트 주인장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살이 붙으며 퍼져갔다. 이 부분 <그 소문 들었어?> 책과 비슷한 점이 있다. “주인이 사자처럼 생겼더라고요.”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격이 고약해 보이던데요.” “어휴, 무섭네요.”로 진행되는 것은 소문의 공식.


그러던 어느날 아파트에 작은 사고가 생겼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의미. 하여간에 그 바람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자마트를 찾게 되었는데, 으응? 이게 어찌된 일이지? 사자 씨는 무섭고 고약하기는커녕 어찌나 따뜻하고 친절하며 배려가 넘치는지..... 그제서야 아파트 사람들은 사자 씨를 제대로 보게 된다. 아이가 별사탕 봉지에 있는 글귀를 읽으면서 했던 말처럼 말이다.

자세히 보니까 잘 보여요.”

 

우리는 많이’ 하려고 하다가 자세히를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욕심을 부리면 허투루 하게 된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마음이 들어가는 일이니. 한눈에 보고 한번에 판단하는 것도 능력이겠지. 하지만 그 사이에 선입견들은 돌아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딱딱하게 고착된다. 이 책의 그 작은 존재들이 일으켰던 맹랑한 사고와 같은 기회가 없었다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선입견이겠지. 우리 사회에 이런 선입견은 얼마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면서도 자세히, 찬찬히 보는 것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수업시간도 날마다 쫒긴다. 할 것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 그냥 하루하루 클리어, 클리어에 집착하며 넘어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그저 ‘해 치우는일과. 거기엔 무엇이 남았을까.

 

섣불리 보지 말고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보자. 속도 사회에서는 안맞는 방법이지만. 속도 사회 자체에 제동을 걸 때도 되었으니. 이미 브레이크가 파열되었는지도 모르지만.ㅠㅠ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거나, 작은 것들에까지 친절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겠다. 하늘에는 별사탕(같은) 별이 빛나고, 그 하늘 아래를 걸어가는 두 까만 존재의 발자국에 빛이 난다. 이런 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면 뭘까. 어둠 속을 밝히는 작은 불빛같은 아름다움이 이 책 곳곳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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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소녀 바일라 17
장미 지음 / 서유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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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새롭고 특별한 느낌의 청소년 소설을 만났다. 굳이 청소년 소설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청소년이긴 하지만, 청소년의 세계에 한정된 서사도 아니고 화자도 여러 명이며 세대도 다양하다.

 

인간의 가당치 않은 차별의식은 뜻있는 작가들에 의해서 자주 지적되곤 한다. 현실적인 서사로, 때로는 비유나 상징으로.... 이 책에서는 새로운 상상이다. 하이브리드 인간. 외계인과 지구인의 혼종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차별로 가는 길은 자명하다. 그들은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지목받고, 그들 중 일부가 저지른 잘못은 전체의 정체성이 되어 비난받는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혐오하며,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누군가는 복수심에 그들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서 당사자들, 태어나보니 하이브리드인 사람들, 꿈에도 모른 채 살다가 갑자기 알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따돌리고, 괴롭히고, 심하면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하는 등의 사회적 문제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개인 서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게 오히려 더 문제의식을 가깝게 느끼게 한다. 중심 화자는 반은하라는 17세 여학생.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부모님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고, 특히 엄마는 비범하게 소멸(죽음)을 맞았다. 이제 은하는 엄마를 잃은 평범치 않은 소녀가 되었다. 게다가 별 생각 없이 했던 DNA 검사에서 하이브리드라는 충격적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 검사가 보내준 정보는 그뿐이 아니었다. 본인의 유전자와 일치하는 사람이 강원도에, 아빠의 유전자와 일치하는 사람이 독일에 살고 있다는..... 이 사연들에는 어찌보면 막장드라마의 단골 소재 같은 출생의 비밀들이 등장하지만....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관점이 들어있어 괜찮았다고 할까. 이들 모두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데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다 공감이 간다. 독일에 있는 에마 슈미트 양은 이렇게 말한다.

DNA로만 따지면 나는 미카엘이나 콜리보다 반진택, 반은하와 더 가까운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초파리를 두고 사촌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결국 DNA라는 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론 절대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

 

굉장히 스케일이 큰 소재에 비해서 사건의 방향은 파국으로 치닫거나 대단한 반전을 보이지는 않았다. 상당히 순한 맛 버전으로 내게는 느껴졌는데 그건 내 취향이기도 하다.^^;;; 하이브리드 소녀, 반은하는 결국 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적응해 가는데, 그곳에서 민박을 운영하며 은하를 돌봐주는 어른은 이 책의 작가. 그 작가는 하이브리드 소녀를 보며 이렇게 쓴다.

하이브리드건 뭐건 모든 존재는 각기 다른 특징과 개성이 있고, 그것들은 그 존재의 장점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신의 손바닥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소풍온 듯 살고 있는 나에게 지구 위 각 존재의 히스토리는 흥미로우면서도 어렵게 지어진 책 한 권과 같다. 하이브리드를 포함하여 모든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 흥하고 망하는 문제는 창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할 수 있는 한 이웃에게 친절하며, 베풀 수 있는 대로 베풀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도 행복한 일 아닐까.

 

작가가 작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작가의 육성을 그대로 들려주어도 되는 것일까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이 말에는 지극히 공감한다. 모든 이들을 나를 속이려는, 나를 해하려는 존재로 가정하고 한치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머리싸움을 하는 세상이 너무 피곤하다. 눈치와 판단력이 부족해 손해보고 당한다는 자책을 하고 난 후에는 경계심과 견제로 나를 무장해야 한다. 이걸 던져버리고 살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할까.

 

그래서일까. 은하는 안티 하이브리드임을 속이고 자신에게 접근했던 수정 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받는 수정은 어떤 마음일까. 어떤 말을 할까.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게 비웃음이거나 냉소이거나 아무 감정 없는 쓰레기통행이라면, 은하는 바보짓을 한 걸까. 모르겠다.

 

요즘 들어 아이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무장해제를 한 것을 후회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몰라도 학부모에게는 웬만해서는 무장해제 자체를 잘 안 한다. 신뢰가 아닌 감시나 트집, 시비가 기본인 사람들에게 무장해제를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렇지만 안보여서 그렇지 선의와 신뢰를 보내주는 분들이 훨씬 많잖아? 그렇다면 나의 무장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ㅠㅠ

 

은하는 그 시골학교에서 코미디 동아리에 들어가는데, ”코미디야말로 최고의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잘 모르는 분야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미디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라면, 적어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재물을 불리느라 좀비처럼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있겠지. ‘작가는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웃음과 사랑이 부족한 지구인, 이기적이고 독한 기운만을 내뿜는 지구인이 사라지면 코미디의 가치를 아는 하이브리드가 지구를 지켜나갈 것이다.

 

무장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무장을 하려고 용쓰면서 살기 너무 피곤하다, 코 베어갈까봐 눈을 부릅뜨기도 너무 힘든 세상이다. 그 와중에 하이브리드로 살기는 더더욱 힘든 세상. 정말 우리들의 세상이 끝나야 새로운 세상이 올까. 지금 그 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희망을 말하고 있지만. 나도 그 희망을 믿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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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헤어 우주나무 그림책 18
안단테 지음, 윤소진 그림 / 우주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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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노란색 바탕에, 깔끔한 선의 귀여운 그림이 잘 어울린다. 주인공이 아이가 아닌데도. 주인공은 헤어 디자이너 지우 씨다. 지우 헤어는 미용실 이름이고. (단지 미용실 이름만은 아니다. 마지막 장의 자그마한 반전^^)

 

미용 의자도, 샴푸 의자도 하나씩뿐인 자그마한 미용실을 혼자 운영하는 지우 씨. (혼자라기엔 개가 한 마리 있지만) 그에게서 나는 직업인의 태도를 본다. 나도 직업정신이 투철한 편이다. 하지만 지우 씨는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졌다. 그것은 긍정적인 마음과 여유인 것 같다.

 

아침에 미용실 문을 여는 지우 씨. 미용실은 이미 깔끔하다. 앞치마를 두르며 지우 씨가 하는 말. “오늘도 좋은 하루를 만들어보자!” 지금부터 밤까지 달려야 하는 길고 고된 일상. 그래도 지우 씨는 웃으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준비 안 된 채 허둥대는 걸 참을 수 없어서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아이들이 도착할 때 쯤에는 이미 준비가 끝나 있어서 나는 아이들을 관찰한다. 관찰당하는 아이들은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워서인지 우리반의 아침은 차분하다. TV화면에는 책상서랍에 정리해야 할 것들과 제출물, 오늘의 감상음악이 크게 제시되어 있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말이 한마디도 필요없는 우리 교실의 아침 루틴이다. 이정도면 여유를 가질 만도 한데 내 마음 속에는 여유란 게 없다. 전쟁의 시작일 뿐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야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퇴근은 기쁘지만 이미 진을 다 뺀 상태라 즐거움을 도모할 기운은 없다. 물론 지우 씨와 나의 공통점도 있긴 하다. 남의 돈 거저 먹지는 않는다는 것. 받은 만큼 일한다는 것이다. 좀더 좋게 말하면 최선을 다한다고 하겠다.

 

지우 씨와 나의 공통점이 또 있다.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상황과 상태가 다르고,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지우 씨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해낸다. 떼쓰는 꼬마를 달래 반듯한 꼬마신사로 만들고, 대머리 할아버지의 일곱 가닥 머리도 정성껏 만져 이발을 해드린다. 실연당한 아가씨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까탈 부인의 파마도 성공적으로 해낸다.

그렇게 하루가 갔어요.”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어. 그렇지?”

나의 하루도 그렇게 간다. 지우 씨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다만 이런 마음가짐만 더 갖추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어!

 

나는 평소 모든 직업은 전문직이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어느 일이든 내가 잘 모르는 일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편이다. 전문직의 요건에는 자격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가, 얼마나 어려운 훈련과정을 겪었는가도 있을 것이지만 이 그림책에 담겨있는 섬세한 손놀림도 있을 것 같다. ‘손놀림은 꼭 액면 그대로의 놀림만을 말하지는 않는 것. 그러니 모든 직업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이 있다면 그는 전문직이라 인정받아도 될 것이다.

 

지우 씨의 손놀림은 나뭇잎을 흔드는 산들바람 같았어요. 아침 햇빛을 머금은 듯 눈부셨고요.”

지우 씨의 손놀림은 여름의 부푼 숲을 상상하듯 여유롭게 너울거렸어요.”

지우 씨는 해거름 반짝이는 빛깔들을 모으듯 염색을 했지요.”

지우 씨는 악기를 연주하듯 섬세하고 살뜰하게 파마를 했어요.”

 

이런 것을 예술의 경지라고 하던가. 수업을 예술에 비유한 교수님의 책도 있었지. 얼마 안남은 나의 직업생활을 예술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너무 큰 꿈이긴 하지. 하루하루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며 살아가는 처지에.^^

 

모든 직업인들이 자신의 일을 이처럼 소중히 여기며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면 세상이 좀 더 밝고 행복할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무엇이 되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그 일을 어떻게하는지가 중요하다고. 그게 이 사회에서 통할 말인지 생각하면 조금 슬프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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