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학부시절에 도련님이나 고양이로소이다는 왠지 구태의연해보여 읽지 않았는데 우연히 알지도 못했던 '그 후'를 읽고서 소세키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신처럼 모시는 작가라면 김승옥과 존 파울즈 정도인데 이제 나쓰메 소세키까지 삼(三)신으로 모셔야 할 듯. 그 중에서도 서열을 정하자면 김승옥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으로 발을 적시고 필력을 키운 아들신 쯤으로. 김승옥을 읽을 때면 60년대에 이 모던함은 무엇이냐며 어찌 20대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썼을까, 도저히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며 흥분했었는데 나쓰메 소세키는 1907년에 이런 문장을 쓴다.
...다이스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감히 서로에게 접촉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양상을 20세기의 타락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이타로는 올봄부터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제 한 두 해가 지나면 목소리도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성장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운명에 봉착할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는 조용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거지처럼 뭔가를 찾으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서성일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소세키 특유의 고뇌하는 지식인이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서사이다.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 그에 걸맞는 날선 신경까지 갖춘 주인공 다이스케는 생계를 위한 노동은 저열하다는 인식에 기반하여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순간 인간은 끝장'이라 믿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꽤 자신이 있기에 서른이 되도록 직업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와 형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며 자신의 고상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그러던 중 친구의 아내이자 지금은 죽은 옛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그의 확고하던 세상과 한량질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나에겐 세상 최고의 사랑이야기. 평론가들은 지식인의 내면이 어쩌구 운운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이건 단순한 지식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식인의 러브 스토리'이다. 물론 일반적인 로맨스와는 구조도 흐름도 다르지만 바로 그렇게 '지식인'의 '러브 스토리'로 두 축에 힘을 적절히 나누어 싣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는 힘이 바로 소세키의 천재성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보고나니 제인 오스틴 류의 연애담은 미개인과 원시인의 이야기로 느껴질 뿐. 이 책에는 달달한 고백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기승전결 독자의 가슴을 지지고 볶는 장치도 전혀 없다. 단지 사랑의 열정을 식히려 수반에 물을 붓고 불안을 잠재우려 정원에 꽃을 흩뿌리고 예민한 신경을 누그러뜨리려 배갯잎에 고급 향수를 뿌리는 다이스케의 서성거림이 있을 뿐.
다이스케와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나는 식당 도우미로 일해서 그를 먹여 살리는 가시밭길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균적인 삶을 보장하는 봉급봉투를 매달 가져다 주는 보통남자 100명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다이스케 같은 남자 단 한 명의 사랑을 받고싶다. 그는 한량질을 하던 그 모습과 그 논리 그대로 사랑꾼으로 변모하여 자기 스스로의 알을 깨고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그에게 전혀 모순은 없었다. 그렇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러브 스토리. 지식인의 러브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