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릎을 끓은 기억이 있으면 훗날 상대의 머리 위에 다리를 올려놓으려 들기 마련이야. 난 그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지금 받는 존경을 사양하고 싶네. 지금보다 더 비참한 미래를 감내하느니 차라리 외로운 현재를 견디는 게 나아. 우리가 태어난 시대는 자유와 자립 그리고 자아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쓰디쓴 외로움을 견뎌야 하지.-82쪽
논쟁이라면 질색이에요. 남자들은 걸핏하면 논쟁이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내 눈에는 빈 술잔을 지치지도 않고 주고받는 사람들처럼 공허하게 보인답니다.-92쪽
누구라도 대학에 첫발을 내디딜 때는 위대한 포부를 가슴에 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졸업이 가까워지면 자신의 자취를 뒤돌아보고 실망하곤 하지.-395쪽
신체든 정신이든 인간의 모든 능력은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발달하기도 하고 파괴도기도 하지. 하지만 불필요하게 자극의 강도를 높이다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는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위장만큼 약삭빠른 것도 없다고 하네. 부드러운 음식만 먹으면 그 이상 딱딱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하거든. 따라서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먹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러나 이는 그저 익숙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자극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저항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만약 강한 자극 때문에 위장 자체의 기능이 약해진다면 그 자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K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이런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네.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면 그만이라고 단정해버린 것이지. 아픔을 반복해서 견디다 보면 그 공덕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굳게 믿었다네. -403쪽
나는 K 몰래 부인과 딸에게 K에게 자주 말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네. K를 지배해온 침묵이 그를 병들게 했다고 생각했지. 철을 쓰지 않고 방치하면 녹슬듯이 그의 마음에도 잔뜩 녹이 슨 것 같았네. -405쪽
...K가 들어온 후로는 딸이 k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지. 만일 딸의 마음이 K에게 기울었다면 내 사랑은 입에 올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네.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게 싫어서라든가 그런 이야기가 아닐세. 나 혼자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의 마음이 온통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다면 나는 그런 여자와 맺어지고 싶지 않았네. 세상에는 상대의 생각이야 어찌 됐든 자기 마음대로 여자를 맞아들이고 만족해하는 남자도 있다지만, 그런 사람은 나보다 더 세상 이치에 어둡거나 그게 아니면 어지간히 사랑의 심리를 모르는 둔감한 경우라고 치부했네. 일단 결혼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사람드르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내 가슴은 뜨거웠다네. 다시 말해 나는 지극히 고매한 사랑의 이론가였던 것이지. 동시에 가장 빈곤한 사랑의 실천가였네.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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