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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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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 중에는 유독 죽음의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스테판 츠바이크, 로맹 가리, 프레모 레비, 다자이 오사무, 버지니아 울프, 미시마 유키오, 헤밍웨이 등 이름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다른 직업군에 비해 그 수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이 작가이기 때문에 자살했다기 보다는 작가는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는 미약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은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낙관보다는 절망적인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더 많을 것이며, 절망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책을 읽다보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 뿐이라는 생각을 가끔, 아주 가끔, 정말 가끔 하는 때가 있다.

 

백인이며, 직업이 교수라고 알려진 한 남자가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인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 든다. 그가 생각할 때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난무하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이고, 이 수용소의 노동자들, 순진해빠진 노동자들은 제비뽑기로 매일 몇 명씩 끌려가 처형을 당한다(118 쪽) 이처럼 교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런저런 좋은 가치들이 사라진 불합리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전망조차도 없는 황량한 곳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인 그로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수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흑인이며, 직업은 목회자로 보이는 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 때 감옥에서 자신을 공격한 상대방을 살인할 뻔한 전력이 있으며, 그 후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어리석음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신앙만이 구원할 수 있다 라고 회심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각자의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나아질 수 있으며, 낙관적인 믿음, 혹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인간에게는 절대자인 신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로 뛰어드는 남자를 구했고, 자살하려는 남자의 마음이 타락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죽음으로 대변되는 어둠으로 부터 그를 구하려고 한다.

 

나는 어둠을 갈망합니다. 죽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진짜 죽음을. 죽은 다음에 내가 살아서 알았던 사람들을 또 만나야 하는 거라면 도무지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최악의 공포가 되겠지요. 최악의 절망이. 만일 내가 어머니를 다시 만나 그 모든 걸 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게다가 이번에는 고대해 마지않는 죽음이라는 전망도 없는 상태라면? 자, 그건 최악의 악몽이 될 겁니다.(131 쪽)

 

스스로 죽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말을 남기고 죽든 그렇지 않고 영원히 침묵하든, 그 모든 죽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살하는 자의 수 만큼 다양할 것이나, 그 중 공통점 하나라면 죽음 다음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어둠이 아니라면 죽음이 간절할 이유가 없을터.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에게 후세는 요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교수의 주장처럼 문명이 더 진화되어 가고, 사람들이 더 교육받을 수록 자살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답은 오래된 미래, 즉 과거로 부터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이다. 갈수록 더 심각하게 개인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유대하는 각 개인'에서 나온다.

 

극형식을 띤 이 소설은 소설이되, 앞 뒤의 그 모든 이야기는 두 남자의 대화만으로 설명되며, 그 나머지 여백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탁구공처럼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죽으려는 이유와 살리려는 이유를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말 역시도 그러한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지나, 그러나 소설 속에 승자는 없다. 죽으려는 자도, 살리려는 자도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절망하지 말고, 유대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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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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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이다.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러시아 정치인이자 작가인 실존 인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인생을 추적한 소설이다. 그러나 카레르가 리모노프를 실제로 인터뷰한 것은 두번뿐이고, 대부분의 내용은 리모노프가 쓴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다. 어쨌든 소설 속의 장면들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이다.

 

1943년 우크라이나의 하급 장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 에두아르드는 어린시절부터 자유롭고 위험한 삶을 동경했다. 폐쇄적이고 허무주의적이지만 요령만 잘 파악한다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구 소련 사회에서 리모노프의 아버지는 평범하고 또 그만큼 어리석은 하급관리였다. 그러나 리모노프는 아버지와 같은 일상적이며 무난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범죄세계에서라도 이왕이면 황제 자리에 등극하고 싶어하는 야심만만한 아이였다.

조폭세계를 동경하는 등의 삐딱한 청소년 시절을 거친 리모노프는 모스크바에서 언더그라운드 시인으로 데뷔한다. 이어 1974년 미국 이민길에 올라 떠돌던 중 여자친구 덕에 억만장자의 집사 노릇을하고, 자신의 인생 역경을 기록해 작가로 데뷔 한다. 그러던 리모노프는 어느날엔가는 느닷없이 사라예보 인종 청소의 주범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사라예보의 전장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후 러시아로 영구 귀국한 리모노프는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해 활동하다 쿠데타 기도 혐의로 체포돼 러시아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고, 현재는 모스크바의 작은 아파트에서 잡지에 글을 기고해 받는 원고료로 근근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의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일대기를 출판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리모노프는 굳이 자신에 대해 책을 쓰고 싶은 이유를 물었다. 카레르는 리모노프의 인생이 흥미진진하며, 아슬아슬하고,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리모노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515쪽)

 

맞다. 카레르가 묘사한 책 속의 리모노프는 그 자신의 말처럼 때때로 개망나니로 여겨질 만큼 충격적이고 도전적이며,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 접이식 칼을 늘 호주머니에 꽂고 다니며 폭력배들과 어울리고,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예술가 집단에 섞이고, 흑인남자들과 상대하고, 뉴욕에서 최고급 파티에 참석하고, A등급의 여자들과 어울리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금지되던 과거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리모노프. 특히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라예보의 언덕에서 포위상태의 도시를 향해 탄창을 비우는 리모노프를 볼 때 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리모노프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며,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사람, 상대가 아프거나 힘들면 옆에서 챙겨 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야기인즉슨, 입으로는 선의와 연민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악인들에 비해 리모노프는 덜 이기적이고  덜 무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리모노프에게서 작가가 말하는 특별난 인간미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아마도 스티븐 갤러웨이의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읽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유고슬라비아로 부터 분리 독립할 당시 무고한 시민들에게 쏟아진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의 무차별 총격에 대해 받은 충격 때문이겠지만, 그토록 무심하게 총을 쏘아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슴 속에 인간을 향한 '연민'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한 개인이 어떤 삶을 살던 그건 그 자신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만 한 삶이라면, 이념이나 가치관, 국가관, 세계관을 떠나 무엇보다 인간을 연민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리모노프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차고 넘쳤다. 도덕군자나 성인이 아닌만큼 인간 전반에 대한 연민이 필요한 이유를 대라고 하면 논리가 빈약하지만, 그러나 리모노프가 사라예보로 달려가 총을 쏴야 할 만한 이유 또한 이 책에서 발견해 내지 못했다.

내 주변 사람이 소중한 만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믿는 나는 리모노프가 경멸해 마지않는 인간박애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는 작가 카레르의 말처럼 입으로는 선의와 연민을 부르짖으면서 행동은 그렇지 못한 악인 조차도 되지 못하는 평범하고 작은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그에 비한다면 리모노프는 체제와 기존의 관습, 혹은 모든 좋은 것에 반항하며 자기 나름의 독특한 인생관을 설계하고 지켜온 풍운인 것 만은 확실하다.

 

어쨌든 그래서 '뭐?'하는 생각이 든다. 리모노프의 삶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이름도 생소한 리모노프라는 한 사람의 인생일 뿐이고, 특별히 그가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산것도 아닌데우리가 리모노프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좀 의아스럽다. 도대체 작가가 리모노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도 말이다. 저명한 러시아계 사학자인 어머니와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외할아버지를 둔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로서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 러시아의 상황을 개괄하는 리모노프의 삶이 의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523쪽) 라고 작가 카레르는 말한다.

 

리모노프의 굴곡진 삶이나 리모노프를 영웅시하는 작가 카레르나 도통 이해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라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알게되었다. 러시아에선 반체제 인사들과 정적에 대한 암살의 역사가 뿌리 깊다는 것과, 2000년 푸틴 집권 후에도 그 상황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인 2월 27일에는 푸틴의 정적인 넴초프가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암살 되었다. 지난 8일 넴초프의 암살 혐의자들로 러시아 당국이 발표한 이들은 모두 체첸공화국 출신이며, 이는 이전 암살 사건들에서 처럼 러시아 당국이 체첸계 이슬람주의에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는 러시아 야권과 서방의 의혹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의혹들은 지금까지 배후가 드러난 적은 한번도 없다고. 이런 사실들에 대해 소설<리모노프>는 르포로 봐도 좋을만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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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열정적으로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그때만큼 좋아할 수는 없다. 순수한만큼 서툴렀고, 두려운 게 없었으며 늘 무언가를 갈구했던 때였다. 이제 '관조'를 아는 나이가 되고보니, 무라카미 류의 작품 스타일도 많이 차분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의 4050세대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파리, 외과의사 라비크와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으로 이십대의 한 때를 가슴떨려 했었다. 이름도 매혹적인 '칼바도스'를 처음 안 것도 <개선문>을 통해서였다.

이 봄에 다시 읽는 개선문.

그리고 칼바도스 한 잔?!!

 

 

 

 

 

 

 

2월에 새로 발간된 소설이 많지 않은 것인지, 나의 책 읽기가 게을러진 것인지 손이 가는 책이 별로 없다. 무라카미 류와 레마르크를 사랑했던 지난 추억이 없었더라면 이나마도 고르지 못했을 것 같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출판사나 서점 사정들은 좀 나아졌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독자인 나로서는 책 한 권 사는 일이 전만큼 녹록하지 못하다.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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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3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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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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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을, 이름 없는 얼굴들을,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을'로 시작되는 <지평>은 육십대의 소설가 보스망스가 사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사람들을, 정확히는 스무 살 무렵 짧게 스쳐지나온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사십여 년의 공백 동안 보스망스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로 성장하는 한편으로, 일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조로운 흐름의 시간을 지내왔다. 그런데 문득 떠올리는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니. 문제는 기억을 단순히 추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추억 속의 그녀,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왜, 어째서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을 지내고서야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 것일까.

 

사십 년 전, 시위로 어수선한 거리에서 보스망스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보스망스는 차분한 음성과 느린 걸음걸이, 시위대에 휩쓸리다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마르가레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르가레트에게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외로움과 고독 따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고무친의 보스망스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학대를 받고 자란 탓에 체념이 성격이 되어 삶과 사람에게 늘 관조적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보스망스와​ 어머니와 절연하고 한 남자의 추적에 시달리는 마르가레트(189쪽)는 이유없는 죄책감과 오랜 학대로 인한 자괴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 따위를 감추고 있음을 서로에게서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 스며들지만,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던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마르가레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보스망스를 떠난다. 그들은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에서 살게 된것이다. 서로의 생사도 모른채.

그렇게 사십 여 년이 지난 후, 보스망스는 불현듯 그녀를 찾아나선다. 스물 몇편의 책을 출판할 정도로 안정적인 작가가 되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보스망스에게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영원히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을 무렵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간 시절의 사랑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작가는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새로운 만남에 여지를 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첫만남이 상처였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이어갈 만남이 치유의 시간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만남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분명 하찮았을 작은 만남'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김춘수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이제야 말로 꽃이 되려는 몸짓을 시작하는 희망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정말 꽃이 되었을지는 온전히 독자의 상상에 맡긴채로.

 

왜 나는 그때 마르가레트를 만나지 못했던가? 왜 몇 달 뒤에야 만났던가? 우리는 분명히 이 길에서, 아니면 저 모퉁이 카페에서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92쪽)

인생은 타이밍의 총합이다. 만남과 헤어짐, 첫눈에 반함, 행운이나 불운한 사고에 따른 부상과 죽음까지도, 적절한 타이밍을 필요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찰라적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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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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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것은 없다는'는 말을 좋아하는 호프웰 부인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많은 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밥 벌이를 하며 살고 있으니만큼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된다라고 믿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농장을 경영하며, 열 살에 총기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서른 두살의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철학 박사를 비롯한 기타의 여러 학위를 가진 딸은 시골 농장의 어머니나 주변인물들의 안일한 모습을 보며 삶은 기본적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만큼은 무의미한 일상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호프웰 부인이 한쪽 다리를 잃은 자신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대하며 보호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그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 '조이'를 버리고, '헐가'라는 흉칙한 이름으로 개명하는 등의 소극적인 반항을 한다. 조이는 많이 배웠지만 거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 용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과 여타의 사람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감상적인 태도가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같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장에 성경을 팔겠다는 열아홉 살의 청년이 찾아오고, 타인에 대한 친절을 미덕으로 삼는 호프웰 부인은 청년을 거절하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한다. 호프웰 부인은 그 청년을 순진하고 진실한 좋은 시골 사람으로 여겼다. 타인에 대해 그런식의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조이는, 능청맞게 식사를 하고 앉은 청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바로 그날 어머니 몰래 청년과 만날 약속을 한다.

다음날 청년을 다시 만난 조이는 투정하듯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는 청년에게서 '진정한 순수함'을 본다. 그녀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닫았던 마음을 열고, 비틀어진 내면의 근원인 의족을 내보인다. 바로 그 다음 순간, 순수함의 탈을 벗어던진 청년은 조이를 모욕하며 의족을 들고 달아난다. 

황급히 달아나는 청년을 멀리서 바라 본 호프웰 부인은 청년이 성경을 팔러 다른 마을로 가고 있다 라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저쪽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394쪽)

 

이 책에 실린 플래너리 오코너의 31편의 단편 중 하나인 「좋은 시골 사람들」을 읽고,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호프웰 부인이, 딸 조이가 겪은 일을 알고 난 후에도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으며, 그렇기때문에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라는 말로 청년의 악행을 이해하게 될지 궁금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상황을 맞딱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다르지 않은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코너의 작품을 읽고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불행을 직접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얼마든지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러나 오코너는 너그러움이나 낙관적인 태도 역시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좋은 시골 사람들」처럼 오코너의 단편들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을 맺는데, 이러한 결말은 느닷없고 당혹스러우며, 자못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호프웰 부인의 지론은 자기만족에 빠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추측은 언제고 빗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숲의 전망」에 등장하는 자만심 가득한 노인은 자신을 꼭 닮은 아홉살 손녀에게 말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네가 무얼 잃어버릴지 늘 유념하렴.'(456쪽) 자신이 무엇을 잃게될지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였던 노인은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손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에서는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불량소년이 된 소년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이타주의자 셰퍼드가 등장한다. 자신을 믿지않으며 도움을 거부하는 소년을 향해 셰퍼드는 '선의는 이기는 법이야.' 라고 하자, 소년은 '틀렸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638쪽) 라고 대답한다. 셰퍼드는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아이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오만한 의지나 이기적인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며, 삶이라는 것이 오코너가 이 단편소설집을 통해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플래너리 오코너는 25세에 루푸스 병의 발병으로 고향인 미국 남부지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 교육받은 병약한 젊은이가 농장을 경영하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모습은 어쩌면 오코너 자신의 모습이다. '저는 상상력이 없어요. 재능이 없어요. 저는 창조할 수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뿐이에요. 왜 그것도 죽이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왜 내 날개를 꺾었나요?'(488쪽, 깊은 오한) 그러나 오코너의 이런 외침은 어머니에 대한 어떤 원망보다는 투병에 따른 심리적 불안이나 건강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만을 어머니 라는 대상을 두고 쏟아 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농장이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게하고 그녀의 생명 또한 앗아갈 '병'이 아니었을까.

오코너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그녀가 태어난 미국 남부와 가톨릭, 루프스 병이 꼽히지만, 내가 이해한 그녀는 그 모두것을 떠나 '어머니로 대변되는 죽음의 권위로 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병약한 오코너 ' 이다. 모두가 그렇듯 그녀 역시 죽고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럼에도 죽음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순순히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그녀만의 반항이 바로 이 단편들이었다 라고 이해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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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2-12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아래 당연한 것은 오로지 죽음 뿐....
매혹적인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