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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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방금 주인 양반 댁에 다녀왔다. 이제 그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유일한 이웃이다. 경치 좋은 시골인 것이다! 영국 땅을 전부 뒤져본들, 이다지도 완벽하게 세속잡사에서 동떨어진 곳이 어디 있으랴. 더할 나위 없는 염세가의 천국이로구나. 적막강산을 반씩 나누어 가질 히스클리 씨와 나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대단한 친구다! 내가 말을 세우자 의심이 가득한 그의 검은 눈은 눈썹 뒤편으로 움푹 들어가고, 내가 이름을 댔는데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그의 손은 조끼 안쪽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니, 그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적잖이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경치좋은 시골, 동떨어진, 염세가, 적막강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손... 히스클리프... <폭풍의 언덕>은 첫 장, 첫 문장부터 내 마음에 쏘옥 들었다. 도시 한복판에 살고있는 나이건만, 유독 동떨어진 시골의 은둔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매혹하곤 한다.

 

사시사철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튼튼한 저택인 wuthering heights에는 당당한 자세와 잘생긴 외모(13쪽)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을 꾸미고 내보이는 짓, 곧 상호 간 호의의 표명을 혐오하는 데서(13쪽) 오는 무뚝뚝함이 뚝뚝 묻어나는 한 남자가 살고있다. 그의 이름은 히스클리프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 일대의 주인이다.

소설은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세내려는 런던의 부유한 신사 록우드가 히스클리프를 만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런던의 부유한 신사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록우드가 본 히스클리프는  무뚝뚝하고 냉담하지만, 감정을 잘 절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나름의 신사였다. 록우드는 처음부터 히스클리프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다.

히스클리프의 이웃이 된 록우드는 폭설이 쏟아지던 날 두번째로 폭풍의 언덕을 방문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를 비롯한 폭풍의 언덕 사람들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들의 새로운 이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묘령의 히스클리프 부인, 늙은 하인 조지프, 예사롭지 않은 촌뜨기 헤어턴과 그들이 기르는 개들로 부터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록우드는 하녀의 권유로 폭풍의 언덕에서 폭설이 몰아치는 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유령 아닌 유령 캐서린.

공포와 혼돈의 밤을 보내고 '티티새 지나는 농원'으로 돌아와 몸살을 앓는 록우드는 하녀장 딘 부인에게 '폭풍의 언덕'에 얽힌 그간의 내력을 듣는다.

 

딘 부인이 그리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힌들러, 에드거, 이사벨라, 그리고 꼬마 캐시와 린턴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다소 비뚤어진 인물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보살핌을 받아 온 이들은 처음부터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그랬고, 그 반대로 보살핌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보상심리로 부터 자유롭지 못해 그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만 있고, 상대에 대한 생각은 없는 그들은, 오히려 상대로부터 끝없는 배려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만한 사람들은 없는 슬픔까지 만들어내거든.(91쪽)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만든 슬픔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전부 쏟는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도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여타의 인간들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이사벨라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폭언은 비단 그녀의 짝사랑에 대한 것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습성에 대한 놀랄만한 통찰이다.  나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상상하고, 내가 기사도를 발휘해 무한히 헌신해주기를 기대했던 거야... 저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나라는 존재에 대해 소설 같은 상상을 펼치면서, 애초에 자기가 품었던 잘못된 인상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 여자는 내가 자기한테 다정한 척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걸. 진실이 밝혀지면 허영에 상처가 나겠지.(237쪽)

사랑이란 무엇일까. 1년을 넘기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랑의 불신자(100쪽)록우드는 시골 사람들은 좀 더 진지하며, 도시 사람들보다 좀더 자기 자신으로 살고 표면적인 변화나 피상적인 것에 좌우되는 면이 덜 할 것(100쪽)이므로 그들은 사랑에 더 진지하며, 사랑 앞에 더 진실되게 행동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 진지와 진실이 문제로, 모든 것을 건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집착이며, 변질된 자기애일 뿐이다. 뿐만아니라 때때로 그것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가난한 시골 목사의 딸로 태어나 결핵으로 30세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황량한 자연환경과 목사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고독한 사색을 하던 에밀리 브론테는 히스클리프라는 희대의 악인을 창조해 냈다. 그러나 나는 살짝 궁금하다. 딘 부인이 그린 히스클리프의 모습은 정말 히스클리프 그대로의 모습이였을까. 등장인물 모두를 짜증날만큼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린 딘 부인이야 말로 사실은 극단적으로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을까.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러와 동갑이면서도 쉰을 바라볼 때까지 결혼은 물론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이 오로지 주인집에 대한 봉사만을 해온 것으로 비춰지는 딘 부인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말을 옮기고, 그로 인한 현상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폭풍같은 삶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녀 아니였을까. 소설 말미에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 딘 부인은 딘 마님으로 탈바꿈 한다.

 

과연 딘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흥거리로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그것은 슬프고도 괴기스러운 사랑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다가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세우는 사랑이라니.

그러나 <폭풍의 언덕>은 이후 19세기 최고의 러브스토리라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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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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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만을 등지고 있는 조용한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번진다. 그로 인해 오랑은 프랑스로부터 고립된다. 오랑에 있는 그 누구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도시 밖에 있는 그 누구도 오랑으로 들어올 수 없다. 만일을 위해 편지조차 금지되며, 도시 밖과 안은 오로지 전보로만 송수신될 뿐이다.

 

취재를 위해 오랑에 잠시 머무르던 기자 랑베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오랑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간 두번의 탈출 시도 후, 마지막 순간에 랑베르는 스스로 탈출을 포기한다.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던 오랑의 페스트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273쪽)

 

반면 역시 타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타루는 랑베르와 다르게 자신은 오랑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페스트에 맞설 궁리를 한다. 왜냐면 그에게 페스트는 한낱 유행병이 아닌 삶에서 만나는 온갖 부조리한 것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주어진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타루는 믿기 때문이다.

서술자이며, 주인공이기도 한 의사 리유 역시 랑베르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며, 페스트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리유는 타루와 같이 적극적으로 삶에 맞서는 부류의 사람으로,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책임감 외에도 주어지는 삶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투지가 있었다.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169쪽)

 

한편 오랑의 종교지도자인 파늘루 신부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유행병이 '신의 뜻' 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재앙 속에서 오히려 신이 바라는 인간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때문에 생기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 해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91쪽)

 

그러나 파늘루는 페스트가 죄를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주저하는 빛을 띤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페스트를 '그들의 일'이라고 여겼다면,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페스트를 파늘루 자신의 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후, 파늘루 신부 역시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의 병명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카뮈는 파늘루 신부의 죽음이 정확히 신의 뜻이었다고는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궁금하다. 파늘루는 마음 속으로부터 자신이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던 '신의 뜻'을 의심했던 것일까? 그래서 신은 그를 친 것일까? 까뮈가 의도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파늘루의 죽음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유행병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그리하여 인간이 개종되길 신이 원했건 아니건, 까뮈가 <페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 의지로 정해진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반항이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나 유행병으로 인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립되거나, 혹은 재판정에서 결정되는 범죄자의 처우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카뮈는 <이방인>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 재판은 나의 것입니다. 나는 피고인 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빼고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까.'

페스트로 인한 강제적 고립이라는 부당한 현실을 들어 카뮈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었다. 

 

결국 죽는 거면서, 남보다 고통을 더 많이 겪는 셈이지. (280쪽)

그러나 반항하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끝내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사가 시작되고, 생과 사는 늘 언제나 한결같이 내 뜻이 아니다.  스스로의 바램으로 태어나지 않았듯, 죽음조차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어떨까.

까뮈는 리유와 타루를 통해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반항이 아니다. 진정한 반항은 현실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페스트로 대변되는 삶의 부조리를 넘어서 이겨내는 것이다.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이곳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란 얘기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항상 빠져나가려고 했어요.(319쪽)

 

끌려가지 않고 최선의 반항으로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타루는 페스트가 물러가던 그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고, 그를 보는 의사 리유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존주의자인 까뮈의 <페스트>를 읽은 나는 자못 허무주의자가 된다.

부당한 현실에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아 반항하고자 했던 까뮈도 47세의 젊은 나이에 느닺없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 삶은 이처럼 부조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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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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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인사 방장 스님으로 머물던 경허는 한 겨울에 길에 쓰러져있는 여인을 업어다가 기사회생 시킨 후 열흘 가량을 한 방에 머물렀다. 이를 본 경허의 제자 만공은 경허가 방에 여인을 숨겨두고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해인사 경내로 퍼져나갈까봐 전전긍긍하다가 여인을 그만 돌려보낼 것을 스승에게 종용한다. 이때 만공이 본 여인은 얼굴이 코와 눈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뭉개지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한센병 환자였다.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의 이야기로 첫장을 시작하며, '너는 그러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온 몸에서 썩는 냄새를 풍기며, 정신마저도 온전치 못한 거렁뱅이 여인을 업어다가 체온으로 몸을 녹여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며 함께 밥을 나눠먹고, 고름이 흘러내리는 몸에 살을 맞대고 한 방에서 머물수 있겠는가.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이 첫 일화를 읽은 나는 좀 황당했다. 길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살려준 것 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과 몸이 모두 온전치 못한 여자와 굳이 열흘씩이나 한 방에서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더군다나 안팍으로 존경받는 큰 스님의 신분으로.

 

불교도도 아니고, 불교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읽기에는 좀 당황스러운 이러한 일화는 경허뿐만 아니라 그의 수법제자라는 수월, 혜월, 만공 스님의 일화에서도 종종 소개된다.  기괴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스님들의 행적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냥그냥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그 모든 것이 허울이라는 것이다.

 

겉모습에 혹은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현상에만 미혹된 나는 경허라는 중이 정신과 몸이 온전치 못한 여자와 열흘을 한 방에서 지냈다는 사실에 걸려 그 의미를 읽지 못한 것이다. 큰 스님이라는 사람이 술과 고기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승려로서의 직분마저 팽개쳐 버리고 저잣거리의 중생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에 취해 정작 경허가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무애인無碍人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경허를 거치고 수월, 혜월을 지나 만공의 일화에 등장하는 화두 '고목선枯木禪'에 이르자, 경허가 품에 안았던 것은 문둥병에 걸린 미친여자가 아니라 불쌍한 영혼을 담고있는 한 중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목선에 담긴 일화는 이러하다. 한 노파가 조그만 암자 토굴에 공부하는 스님을 모셨는데, 수행을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후 스님의 깨닫음의 정도를 가늠하고자 절세의 미인인 자신의 딸에게 스님을 유혹하게 한다. 그러나 스님은 대수롭지않게 여인을 거절하는데, 이를 들은 노파는 대노하여 스님을 쫓아내고 토굴에 불을 질렀다 한다. 이유인즉, 스님이 수행은 철저히 했으면서도 존엄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대할 자비심은 익히지 못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여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과 여인에게 빠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파는 20년 동안 자신이 부처가 되기를 소원한 선객이 비록 도는 이루었지만 그 도가 메마른 고목처럼 인정없고, 낱낱이 규율이나 따지고 율법이나 헤아리는 죽어 있는 도임을 깨닫고 암자를 태워버린 것이었다.(264쪽)' 

 

가톨릭 신자인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을 통해 '내 안의 부처'를 강조하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의미는 율법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경허는 조선 말기 국운이 스러져 갈 무렵의 선사로, 꺼져가는 불법의 불씨를 살려낸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선구자다. 그러나 그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율법과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선각자였다.

 

스스로의 마음의 거름망만 걷어낼 수 있다면 수행의 반은 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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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는 광대
베페 그릴로 지음, 임지영 옮김 / 호미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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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싸웠다는 것은 꽤 멋진 경험이다. 지든 이기든 시도해보았다는 감각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작가 서문 중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불황, 부패한 고위관리와 무능한 정부, 정경유착, 상상을 초월하는 빈부의 격차, 그에 따른 서민들의 생활고, 청년 실업 문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그리하여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등등. 

이것은 한국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를 비롯해 관광산업만으로도 전국민이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의 이야기다. 아니, 아름다운 나라 이탈리아가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였어?

 

작가 베페 그릴로는 TV에서 총리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당한 코미디언 이다. 이후는 그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거리 공연과 강연을 통해 자국의 불합리한 정치상황과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토로한다. 정의 실현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며 늘 대중과 소통하고, 진실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대중으로부터 대통령보다도 더 떠받들어지는 존재라고.

 

여섯개의 장으로 쓰여진 이 에세이들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쓰였다. 변화와 기적의 정치를 갈망하라/상식과 도덕을 지키는 기업을 갈망하라/진실을 말하는 언론을 갈망하라/아름다운 지구를 갈망하라/노동자가 당당해지는 현실을 갈망하라/함께 사는 사람다운 미래를 갈망하라

 

신들이 살 것만 같은, 누구나 한번쯤은 여행을 꿈꾸는 이탈리아의 현실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각 장들에 실린 소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탈리아가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 없는 나라였어! '라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범죄자들의 천국, 끔찍한 정치사면

우파? 좌파? 모두가 같은 놈들

그들만의 리그, 정경유착의 은밀한 속삭임

유령 미디어, 국영방송사의 실체

현대의 노예들

노동자들의 죽음

가진 자들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현실

우리는 모두 장님이다

 

그런데, 그래서? 진실을 말한 들 무엇이 달라지는데?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원한 사람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해야는 건데?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과연 침묵과 방관을 통해 현재의 내 삶에만 만족하며 그나마의 것들에 감사해야 하느냐, 이따위것도 기득권이냐며 떨치고 일어나야 하느냐...

글쎄, 그렇다해도 달라지는 것이 많지 않다니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는 현대판 노예일뿐, 더도 덜도 아니게 된다. 외면하는 진실은 불공평한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므로.

자꾸 말하고, 자주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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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지으면서
기존 권력이나 사회 틀에 휘둘리지 않는
참으로 자유로운 숨결이 될 때에
무엇이든 다 바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이를테면, 노동자가 파업만 하지 말고,
도시를 모두 떠나서
한가위나 설날 명절처럼
연휴도 아닌 때에 100만 명쯤
서울을 떠나서 시골에서 일손도 거들고
품앗이도 하고 즐겁게 놀면서 어울려 지낸다면,
이렇게 한 달만 도시 노동자가 시골내기로
바꾼 삶을 보내려 한다면,
그야말로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바뀌겠지요...

비의딸 2015-08-27 10:48   좋아요 0 | URL
우와.. 쇼킹쇼킹..
100만 명쯤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한달..
가슴이 벌떡벌떡 하네요..
 
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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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이전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185224세의 나이에 <유년시절>로 데뷔한 톨스토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크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감각적인 기질로 인해 육체적 쾌락을 쫓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던 톨스토이는 186234세에,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데, 불화의 시작은 톨스토이가 방탕했던 시절의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거짓과 기만이었으며,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거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화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를 키티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재현되며,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만이 진실이며 정의라고 믿었던 톨스토이의 생각은 안나가 자신의 불륜을 감추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첫 구절 중 하나라고 알려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이 이야기가 가정의 모습을 소재로 할 것임을 암시한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평정을 유지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723장(3권)에서는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가정에 대해서 말한다.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3, 396)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가정을 생기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하며, 침묵과 방관으로 유지하며 평화 혹은 행복을 가장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완벽하게 불화해 해체하는 것이 더 낫다. 바로 이 행동을 위해 안나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데, 가정교사와의 불륜이 발각됨으로써 위기에 빠진 오빠의 가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는 경박하고 즉각적인 만족과 쾌락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방탕하고 무책임하며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남자의 바람기는 건강의 증표라고 생각하는데,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내에게 발각되자, 잘못을 뉘우치거나 죄책감을 갖기 보다는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이후에도 아내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한편 장녀로 태어나 사려 깊은 진지한 태도가 몸에 밴 스티바의 아내 돌리는 남편의 바람기와 가정생활에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다섯 아이들과 자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결혼생활의 고통을 감내한다.

톨스토이가 말하듯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면 이들 부부에게는 바로 그것,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당시의 관습에 젖은 가장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 카레닌과 결혼하고 결혼생활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안나는 오빠 스티바와 돌리의 중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러나 도덕관념이 확실했던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브론스키를 피해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으로써 브론스키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믿지만, 역으로 마중 나온 남편 카레닌의 귀 모양이 해괴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을 만족시키던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그가 신앙심이 두텁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을 보지 못해. 그들은 그가 지난 8년 동안 내 삶을 얼마나 숨 막히게 했는지, 내 안에 살아 있던 모든 것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몰라. 그들은 몰라. 그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 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2, 122)

 

이후 브론스키의 구애를 받아들인 안나는 상류사회에 만연한 비밀 연애를 거부하며 브론스키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건다. 매순간의 삶에 충실한 그녀로서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잘못보다 그를 숨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실리적 성격의 카레닌은 정의로우나 감정이 부족하고, 경직되어 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한편으로 때때로 감정에 휘둘려 선행을 베풀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고위 관리인 자신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청원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그랬음으로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다가 죽을 지경이 된 안나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안나가 살아나고 브론스키와 떠나고 나자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한다. 실리적인 카네닌이 볼 때 이혼은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죄인이지 자신 언제까지고 피해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난 결코 불행해질 수 없어. 하지만 그녀도, 그도 행복해져서는 안 돼.(2, 101)

톨스토이는 카레닌의 이런 태도를 기만적이고 위선적이며, 독재적으로 묘사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한 카레닌의 고집불통인 태도가 나름 이해된다.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하나 카레닌 역시도 인간이며, 인간은 때때로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쭉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을 카레닌의 가정 또한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이 결여된 채 사회관습에 충실한 가정 있었다.

 

10개월에 걸쳐 끈질기게 안나를 유혹한 브론스키는 무책임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쫓는다는 점에서는 스티바와 같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술수조차도 마다않는 스티바와 다르게 장교인 브론스키는 언제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 당당하며, 거리낌이 없는만큼 타협을 모른다. 안나를 얻기 위해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그는 때때로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존재마저도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브론스키는 안나가 자신의 딸을 낳고 사경을 헤맬 때, 카레닌이 안나와 자신을 용서하자 수치심으로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을 떠난 안나가 자신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가 사교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브론스키는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며 다시 사교계를 들락거린다. 그는 그야말로 남의 아내를 꼬여낸 파렴치한 이였음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사회 생할에서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고, 그 스스로도 남자이기에 자신에게는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안나는 그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뭐든지 내어 줄 수 있지만 나의 남자로서의 독립만은 줄 수 없어. (3, 202)

 

사교계의 일반적인 관행이 그렇듯 불륜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요령껏 숨기는 대신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안나는, 아들인 세료자 마저 버리고 오로지 사랑만을 택했지만 브론스키의 마음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뿐만 아니라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는 자각에 이른다.

브론스키와 나 사이에 어떤 새로운 감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그저 괴롭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런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우리의 삶은 서로 어긋나게 돌아가고 있어.(3, 447)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안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으로 혼란스러워하다 달려드는 열차에 충동적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불륜을 세상으로부터 숨길 줄 몰랐던 그녀는 브론스키의 변심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브론스키가 고통받기를 바랐고, 한편으로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배신한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불사를 듯 열정적으로 타올랐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는 애정 어린 화합 대신 자신을 채우기 위한 욕망만 그득했다. 그는 내게서 무엇을 찾았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허영심의 충족이었어.(3, 444) 그리고 그 결말은 파괴적이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과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안나의 이야기와 상응해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레빈은 도덕적인 이상과 절대적인 양심을 숭상하는 인물로 톨스토이의 분신과 같다. 농업과 노동의 신성함을 중요시하는 그는 브론스키가 안나를 만나기 전 추파를 던지던 키티와 결혼했다. 키티는 처음에는 브론스키에게 빠져 레빈의 구애를 물리치지만, 이후 열린 파티에서 브론스키의 마음이 안나에게로 향한 것을 눈치챈다.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모스크바를 떠나 요양하던 중 자신이 진정 사랑한 것은 레빈 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빈 역시 키티의 거절에 상처를 받고,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빈이 처음부터 키티를 결혼 상대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며,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그려두고 거기에 맞는 여인을 찾았을 뿐이다. 그 첫 대상은 돌리였으나, 돌리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으므로, 돌리의 동생인 키티에게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아무튼 레빈은 돌리의 중재로 실연한 키티를 다시 만나고, 둘의 사랑을 회복하고 결혼에 이른다.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키티는 사교계의 총아 브론스키의 사랑이 한순간에 변했음을 알고 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를 사랑 했다기 보다는 어머니를 비롯한 사교계의 분위기에 이끌려 마땅히 브론스키와 결혼 할 것으로 기대했을 뿐이다. 이후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레빈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의심없이 그와 결혼했을 것이고, 보통의 상류사회의 부부들이 그렇듯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키티는 상대에 따라 삶의 가치나 중요도가 달라지는 시대가 원하는 가장 일반적인 여인이었다(브론스키로부터 실연하고 외국의 온천에 요양중일 때 만난 바렌카를 닮고 싶어했던 그녀를 떠올려 보라). 거울처럼 상대를 비추며 순응할 수 있는 키티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삶을 구현하며, 가정의 신성함과 자발적 자기 희생, 상호 존중의 의무를 중시하는 레빈과 애정어린 화합의 모습을 보여준다(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는 남편의 정신적인 삶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처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소피야는 정말 악처였을까?).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도 완벽한 불화도 없이 사회적 관습대로 유지되는 스티바와 돌리, 카레닌과 안나의 가정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브론스키와 안나가 꾸민 가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도 아니다. 육체적 욕망이 우선하는 사랑은 유효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톨스토이가 정답으로 제시한 관심과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레빈과 키티의 가정은 이상적이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것 역시 유일한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도만으로는 묶어둘 수는 없는 욕망하는 감정적 동물이기도 하니까.

쉽게 톨스토이의 분신은 레빈으로 이해되지만, 정신적인 레빈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안나는 둘 다 톨스토이의 현현이다. 두사람 모두 거짓과 기만을 싫어한 같은 부류로 톨스토이는 안나를 통해 욕망을 고백하고, 동물적인 본성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레빈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바란 구원은 내세가 아니라, 사는 동안 이룰 수 있는선'에 있었다.

한편, 아내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결혼 후 방탕한 생활을 벗어나 안정을 찾음으로써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쓰게 되었고, 이때 아내 소피야는 톨스토이가 휘갈겨 써놓은 <전쟁과 평화>를 여러번 정서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말년까지도 계속되었고, 1910년 여든이 넘은 나이에 가출 한 그는 어느 작은 기차역에서 객사했다. 톨스토이 역시 가정에서 별다른 행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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