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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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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을, 이름 없는 얼굴들을,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을'로 시작되는 <지평>은 육십대의 소설가 보스망스가 사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사람들을, 정확히는 스무 살 무렵 짧게 스쳐지나온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사십여 년의 공백 동안 보스망스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로 성장하는 한편으로, 일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조로운 흐름의 시간을 지내왔다. 그런데 문득 떠올리는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니. 문제는 기억을 단순히 추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추억 속의 그녀,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왜, 어째서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을 지내고서야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 것일까.

 

사십 년 전, 시위로 어수선한 거리에서 보스망스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보스망스는 차분한 음성과 느린 걸음걸이, 시위대에 휩쓸리다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마르가레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르가레트에게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외로움과 고독 따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고무친의 보스망스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학대를 받고 자란 탓에 체념이 성격이 되어 삶과 사람에게 늘 관조적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보스망스와​ 어머니와 절연하고 한 남자의 추적에 시달리는 마르가레트(189쪽)는 이유없는 죄책감과 오랜 학대로 인한 자괴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 따위를 감추고 있음을 서로에게서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 스며들지만,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던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마르가레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보스망스를 떠난다. 그들은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에서 살게 된것이다. 서로의 생사도 모른채.

그렇게 사십 여 년이 지난 후, 보스망스는 불현듯 그녀를 찾아나선다. 스물 몇편의 책을 출판할 정도로 안정적인 작가가 되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보스망스에게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영원히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을 무렵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간 시절의 사랑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작가는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새로운 만남에 여지를 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첫만남이 상처였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이어갈 만남이 치유의 시간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만남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분명 하찮았을 작은 만남'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김춘수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이제야 말로 꽃이 되려는 몸짓을 시작하는 희망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정말 꽃이 되었을지는 온전히 독자의 상상에 맡긴채로.

 

왜 나는 그때 마르가레트를 만나지 못했던가? 왜 몇 달 뒤에야 만났던가? 우리는 분명히 이 길에서, 아니면 저 모퉁이 카페에서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92쪽)

인생은 타이밍의 총합이다. 만남과 헤어짐, 첫눈에 반함, 행운이나 불운한 사고에 따른 부상과 죽음까지도, 적절한 타이밍을 필요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찰라적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것이 인생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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