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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출판사 소개글에 의하면 이렇다. 사회 비판적 문제에서 SF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 일본 대중 문학의 기수 오쿠다 히데오에 비견되며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작가 장강명의 소설 어쩌구 저쩌구 블라블라.. 다 필요없고!

헐...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다. 제목이... 제목이...

너무 맘에 든다는 거. ㅡ_ㅡ;

 

 

 

 

 

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예담

 

오랫만에 오쿠다 히데오. 쉽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 <방해자>, <꿈의 도시>, <남쪽으로 튀어>는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최악>은 정말 최악이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침묵의 거리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살짝 오버랩되면서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경쾌한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남편을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두 친구 이야기라는 이번 이야기는 어쩐지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풍의 소설은 일찍 찾아온 무더위로 무기력해지는 요즈음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인 것만은 확실하다.

 

 

 

 

트렁크/ 김려령/ 창비

 

트렁크 라는 제목을 보고 대충 두 권의 소설이 떠올랐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와,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 오에의 소설 <익사>에 등장했던 붉은 트렁크는 아버지의 죽음을 타당화해줄 비밀 대신 텅 비어있었고, 백가흠의 트렁크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의 고발이 불쑥 튀어나왔드랬다.

어떤 것이 들어있든 닫혀진, 그리고 이제 막 열리려는 트렁크 안은 궁금하다.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의 <트렁크>에 들어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가방을 열자마자 튀어나올 그것은 고통일까? 뚜껑을 열고도 한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각일까..?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필립 로스의 마지막 선물"

마지막이라는 말은 얼마나 서글픈가. 마지막 기회, 마지막 인사, 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마지막 약속... <네메시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깨어질 가능성 없는 마지막 약속이며 마지막 선물일까? 나이가 얼마이든, 건강상태가 어떻든 작가는 마지막으로 쓰러질 그때까지도 작품을 써야하는 건 아닐까..? 이런 약속은 좀 깨어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선물을 풀어보고 싶다.

음, 메르스로 한참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이때에 뉴어크에도 유행병이 번지고 있다.

 

 

 

 

 

 

맘브루/R.H.모레노두란 지음/송병선옮김/문학동네

 

낯선 콜롬비아 소설. 그러나 낯설지 않은 이야기.

1950년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던 콜롬비아 군인인 아버지 비나스코의 죽음에 얽힌 사실을 밝혀내는 아들 비나스코.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이라크든 모든 전쟁에는 참전 용사가 있고, 참전에 따른 국가적 이익은 반드시 개인의 불행을 기반으로 한다. 아버지 비나스코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파병된 한국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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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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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진실의 입 같은 것이 손을 덥석 무는 정도의 스릴을 기대했으나 구멍 너머는 그저 캔버스 너머의 거리와 동일한 공간일 뿐이다. (94쪽, 관통)

 

생후 9개월 때 15층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엄마를 둔 하이는 건물 45층짜리 아파트의 외벽을 기어오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7쪽,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돈이 없어 낙태수술 대신 결혼을 택하고, 이유식비가 없어 꾸준히 모유만 먹이는 아기 엄마 미온 역시  길거리 전시회 중이던 그래피티 안으로  사라진다(75쪽, 관통).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느닺없이 덩굴식물로 변하는데(211쪽,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그 역시 실제의 삶이 온통 전쟁터같았던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택하는 사라짐과 같은 것이었다.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주인공들은 사라지기거나, 모습이 변하기 전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가야할 까요? 제가 어디까지 가면 될까요.'(270쪽, 어디까지를 묻다) 라고.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74쪽, 관통의 서문).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길' 바란다. 주변에서 흔히 당하는 불행한 사건, 이를테면 일자리를 잃고 농성 천막에 나앉게 되는 일이 나만은 피해가길 바라거나, 온몸이 삭아버리는 비(145쪽, 식우蝕雨)가 나와 내 가족만을 피해가기를 바라거나, 아이를 때리는 몰상식한 부모이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런가 하면 이기와 욕망으로 덧칠되어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간, 그러니까 농성 천막장을 피해 줄곧 땅만 보고 걷는다거나,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식우蝕雨'를 맞고있는 친구를 못본척 하기위해 안고있는 애견을 괜히 한번 쓰다듬어 본다거나하는 그런 무심한 인간으로 보여지기 또한 원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그런 바램조차도 이기나 욕심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본인의 불편과 무고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며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일에 발벗고 나서는 오지라퍼(103쪽, 이창裏窓)라도 되어야 하는 것일까?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는 섬뜩한 오컬트적인 이야기들이다. 도무지 현실에서 일어날 법 하지 않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란 구병모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팔뚝엔 오소소한 소름이 돋는다. 나만은 그런 세상에서도 그다지 불행하지 않거나, 혹은 그만큼 불온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를 끝없이 물으며 돌고 돌 뿐인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보이는 삶을 꿈꾸지만 도토리 키재기,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누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길 바라지만, 그것은 누구나의 삶이다. 또한 그래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루초 폰타나의 작품을 보며 오지라퍼보다는 사라짐을 꿈꾼다. 어쩐지 커팅 자국 넘어서는 '관통'의 주인공 미온이 본 다른 세상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사라짐을 꿈꾸는 자 또한 나만은 아닐것이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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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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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는 오에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조코 코키토가 열 살 무렵에 겪은 아버지의 익사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조코 코키토는 오에 겐자부로의 분신과 같은 인물로,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갑자기 불어난 강에 배를 띄웠다가 익사한 일을 트라우마로 평생 간직해 왔다.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고 여길 만큼 아버지의 죽음은 코키토의 평생을 잠식해 왔다. 코키토는 소설가로서의 마지막 작업을 '익사 소설'로 마무리 하고싶어 한다.

한편 극단 '혈거인'은 코키토의 필생의 작업인 '익사 소설'이 씌여지는 과정을 연극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 중심에는 여배우 우나이코가 있다. 우나이코는 열일곱살 때 큰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큰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낙태 한 경험이 있다. 코키토와 우나이코는 각각 소설과 연극을 도구삼아 과거 아버지와 큰아버지로 표현되는 커다란 권위 즉 국가로 부터 비롯된 상처를 해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코키토는 아버지의 죽음은 천황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인간신을 세우고자 했던 패망 당시 군 장교들의 농담에 휘둘린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좌절되고, 오히려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어느만큼이나 열망했는가를 깨닫게 된다. 코키토의 이런 열망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 큰아들 아카리에게 이어지고, 죽음을 앞둔 노년의 코키토는 역시 신체적 노화로 둔화되가는 아카리를 향한 책임에 고민한다. 아들로서의 마지막을 다하기해 '익사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아버지로서의 마지막은 장애를 갖은 아들 아카리의 죽음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 자신의 죽음을 위한 첫번째 준비는 아카리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라는 것이 어머니가 이 글에 담은 메시지죠.(36쪽)

친족으로 부터의 강간이라는 상처를 지니고 이십년을 살아온 우나이코는 자신이 당했던 일을 시대극에 비춰 무대에 올리고자 하지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한 우파의 계략에 의해 ​그 역시 좌절된다. 그러나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우나이코의 시도는 오히려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우나이코의 상처를 치유한다. 우나이코의 상처를 보듬고, 장애와 노화로 일상 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아카리를 돕는 것은 역시 권위로 뭉친 국가 이전의 공동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결말이다.

한편 ​식민지를 만들고 더 넓은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과거 전범국으로서 일본의 그림자는 소설 속에서 과거에만 국한 되어 있지 않다. 전형적인 천황주의자 였던 코키토의 아버지 조코를 스승으로 여기는 다이오는 육십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조코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 과거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이 명예를 위해 택했다는 할복을 닮은 조코의 익사 장면조차도 다이오는 재현하려는 것이다.

꿈속의 기억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두 개의 한자어다. 끊임없이 쏟아진 폭우는 엄청난 양의 물로 활엽수림을 채웠다. 그 물줄기는 ​숲을 울창하게森森 채우고 아득히淼淼 깊게 만들 터였다. 칠흑 같은 한밤중, 거친 바람에 미끄러져 쓰러진 자가 제 몸을 다시 일으킬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익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427쪽)

작가는 제 의지를 갖지 않은 자들이 전체주의라는 폭우에 휩쓸릴 때 ​또다른 조코와 다이오가 익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와 같지만 글쓰기의 방식이 전혀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식이여서 무척 읽기 힘든 책이었다. ​소설인지 다큐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의 보고 형식으로 쓰였는데, 해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을 이나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작가이며,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을 위해 단식을 했고,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수호하기 위한 '9조회'에 참여하는 등의 반전 반핵을 위해 행동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컷지만, 이전에 읽었던 <개인적인 체험>에 비해 <익사>는 공감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간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책이 어수선하다고 느껴졌는데 일본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범국가로서 과거 일본을 수면에 끌어올리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문제 안에 응축된 소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읽기 어려운 소설이 이해마저 불가한 것은 아니다. 오에가 이 소설을 통해 일본의 천황주의와 남성주의문화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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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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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살이 넘어서는

발길 닿는 데까지 달아나 보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늉도 실컷 했다.

세상의 밑바닥이 궁금하다며, 궁금해야 한다며

멋 부리며 어설프게 굴러다니기도 해 봤지만...

 

돌이켜보니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도, 도무지 자유롭질 않아서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유.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간절한 법'인가 하다가,

가슴 아래에 '작지만 무거운'

돌멩이 같은 것 하나가 콕 박혀있어

내가 아무리 달리고, 날고, 굴러도

나를 가볍게 하지 않았구나 싶은 것이었다.

가족이 언제나 돌멩이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롭고 싶다.

그래서 내 가슴 아래에서 신호를 보내면

가족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김수박의 민들레 중 '가족'(2015. 5. 6.일자 한겨레 신문에서)

 

 

짜르르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큼지막한 시계를 차고 가슴에 얹은 그림 속 남자의 손 언저리에서.

남자의 가슴 속에 돌맹이 처럼 자리잡고 있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픔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진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딱 그만큼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내 아픔만이 아닌 내 남편의 아픔이기도 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더더욱 애잔한 마음이 되었다. 그도 나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고통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앓고 있는 것이라고.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새를 닮은 외모 때문에 버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주인공은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은 꿈을 소년시절 부터 간직해왔다. 그렇지만 버드는 결혼을 하고 아내가 출산에 이르도록 아프리카를 향한 꿈을 유예시킨다. 그리고는 이윽고 장애를 갖은 아들이 태어나자 꿈을 이뤄야겠다는 욕구를 불현듯 폭발시킨다. 버드가 꾸었던 꿈은 결국 아프리카가 아닌 현실도피였던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다. 버드와 다른 것이 있다면 특별히 내가 떠나가고 싶었던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막연한 유랑을 그리워했다. 그건 젊은 시절 한 때의 일탈과 같은 방황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후로도 쭉 나는 어딘가를 그리워 한다.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간절한 법이니까.

 

머리에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죽도록 방치하고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세우던 버드는 자신을 덮쳐오는 불행과 정면으로 맞서는 선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의 삶을 살아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274쪽)

 

뇌가 두개골 밖으로 비어져 나온 뇌 헤르니아라는 끔찍한 장애가 아니라 단순한 혹을 달고 태어났을 뿐으로 수술후 어느정도 정상아의 모습을 찾은 버드의 아이와 현실도피를 실현하지 않은 버드의 용기를 칭찬하는 가족들의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스럽다. 차라리 아이를 죽이고 자유를 택했다거나, 또는 아기를 거부하고 싶은 인간에게 손을 빌려 주는 의사(234 쪽)로 부터 아이를 되찾고자 달려가는 버드가 사고사 했더라면 하는 사악한 결말을 생각해 본다.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지독한 에고이겠지만 문학은 실제로는 다다를 수 없는 상상의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실제로 장애아를 둔 오에로서는 희망적인 결말을 말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오에는 지적장애아인 큰아들과 공존함으로써 핵 개발과 사용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구하며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며, 어떤 무력도 지니거나 행사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현행 헌법 9조 2항(289 쪽)을 수호하는 등의 평화적 노력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한편 버드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날 꿈을 꾸던 여자친구 히미코는 다원적 세계에 대해 말하는데, 다원적 세계란 이를테면 현실의 버드가 장애를 가진 아들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공존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또다른 세계의 버드는 아들을 죽이고 아프리카로 자유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의 버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할 뿐이다. 히미코의 이러한 상상은 현실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또다른 세계의 나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다른 경우를 경험할 것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이다. 지금의 나는 일상이라는 현실을 떠나지 못하지만 또다른 세계의 나는 어떠한 당위도 없이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상상일 뿐이지만, 어쩐지 자유롭다.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쪽을 택한 버드나 소중함을 택한 만화가 김수박이 말하는 자유와는 조금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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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고 세살배기 외아들과 터키여행을 떠난 그녀의 용기를 부러워만 하다가, 그해 여름 JB와 동갑내기인 아들과 지리산 여행을 감행했다. 겨우 지리산이었을 뿐인데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여행작가로서 오소희라면 그 내공이 만만찮지만, 소설가로서의 오소희라..? 에세이스트로 출발해 소설가로 성공한 케이스가 쉽게 떠오르지 않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어쨌든 낯설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녀의 첫 소설이.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고 홀로 헤매이는 엄마라니.

 

 

 

 

 

 

<양철북>의 작가 권터 그라스. 얼마전 영면함으로써 그의 책들이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는 듯. 역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작가는 죽어서 작품을 남기는 법. 무릇 영생하고 싶다면 불로초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작가가 될지어다.

 

성공한 유명 사진가 마리가 그의 여덟 아이들의 어린시절과 함께 자신의 유년시절 추억한다는 설정. 마리는 권터 그라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암실'이 가르키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의 저편'쯤이지 않을까. 추측을...

 

 

 

 

 

 

원작 보다 좋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스틸 앨리스>는 영화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심리학 교수 앨리스 하울랜드 역을 맡은 배우  줄리안 무어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와 관계없이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자타공인의 지성인인 앨리스가 정신이 흐려지다 종래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마저 잊어가는 처참한 이야기에 나를 대입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잊지 않고 죽어갈 수 있을까.

 

 

지금은 봄 입니까? 아니, 여름 입니까? 아직은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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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두 권은 5월에 출간된 책들인걸요!

비의딸 2015-05-07 16:41   좋아요 0 | URL
윽.. 그러네요. 그래도 그냥 버티는 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