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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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라의 죽음을 표지그림으로 한 1996년 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에게 첫사랑과 같은 책이다. 1996년 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다섯 번 이상 읽었다.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할 당시 나는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정해진 규율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던 나였기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매번 읽을때마다 새로운 구절, 새로운 감동으로 밀려왔으며, 지금까지도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과 같은 책으로 남아있다. 그랬기에 그후 김영하의 신간이 나오면 매번 놓치지 않고 찾아 읽게 되었다. <호출>이 그랬고,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랄랄라 하우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영하의 책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된 <퀴즈쇼>까지.
그후로 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만큼의 감동을  김영하의 다른 책에서는 느끼지지 못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김영하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작가이기 때문에.
 
오랫만에 출간하는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구매를 하고 기다린지 일주일만에 친필 사인본을 받았다. 직접 사인했을 것이 분명한 친필 사인본임에도 나는 받아들자마자 바로 실망하고 만 <보다>.
일단 책이 너무 가벼웠다. 책이라는 물체로서의 무게도 가벼웠지만, 그냥 휘리릭 넘겨본 책에 대한 첫느낌이 그랬다. 책에 영혼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선물꾸러미와 함께 돌아온 김영하의 산문집은 그렇게 가볍게 휘리릭 넘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휘리릭 넘겨읽어야만 하는 그런 정도의 책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는 소설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메세지를 전하면 그뿐인 것인 줄 알았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변했고, 제대로 된 메세지를 송출하기 위해 이제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탐침을 깊숙히 찔러 넣으려 한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에서 그의 그런 다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어 나는 실망했다. 그는 여전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쓸 무렵의 불손한 아웃사이더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의 그런 파괴적인 본능이 나에게 썩 매력적이였지만, 그래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지금도 여전히 첫사랑과 같은 책으로 남겨두고있지만,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나 송출하는 방관자 아니라, 오히려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대한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김영하는 전혀 우리 사회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 그 스스로 그 자신은 무엇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 유순한 인간이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점에서 언제라도 그가 담근 발을 쑥 뽑아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을 나는 <보다>를 통해 느낀다. 또한 그것이 김영하라는 작가에게 내가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이십대에 만났던 관상쟁이가 그에게 말과 글로 먹고 살 대운이라고 했다는데, 좀 솔직해보자. 먹고살 문제를 고민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버렸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절의 김영하를 넘어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가. 좀더 심하게는, 먹고살 걱정이 없는데 이렇게 피상적인  글로 김영하 라는 이름을 팔아먹다니! 라고 비약하고 싶어진다.
 
<보다>는 <읽다>와 <말하다>로 곧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읽다>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작가가 읽은 독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약간 끌린다는 것 외에, 이어질 두권에 대해 별다른 기대는 없다. <보다>의 다른편일 뿐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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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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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대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47쪽
신중하지만 치밀하지는 못한 편이라는 평을 아내로 부터 듣는 Y는 자신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신중한 사람이기 때문인데, 그가 신중한 이유는 주위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신중하다는 의미는 자신이 선택한 것, 또는 자신이 주장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주변과의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Y 는 오랜 꿈인 전원주택을 경기도 양평에 지어두고도 아내와 딸의 반대로 전원주택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그는 원하지 않는 해외파견 근무를 아내와 딸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전원주택은 이웃남자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매달 얼마간의 관리비를 송금하기로 한다. 3년후,  Y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혼자 귀국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아내와 딸이  Y가 나이지리아에 근무하는 대가로 머물렀던 영국에 잔류할 것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Y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아내와 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중함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는  Y의 신중함이 남편이나 아버지로써 마땅히 가족을 생각해 보일 수 있는 신중함, 혹은 양보로 이해되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혼자 돌아온 Y는 이번에는 걸릴 것 없이 양평으로 향하지만, Y가 짓고 가꾸고 다듬었던  꿈의 전원주택은 재투성이 시골농가로 변해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에는 낯선 부부가 둥지를 틀고 그곳은 자기들이 사들인 자신들의 집이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른다.

한때는 이웃이었던 관리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Y가 보인 신중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결과로 더해질 낯선 사람과의 불편함을 미리 예견하고, 그를 피하기 위한 신중함을 여기서도 다시한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다.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겪지 않고 산 것은 아니지만, 겪을 때만다 거북하고 못 견뎌 했다. 못 견뎌 하면서도 견뎌낸 것은 견뎌내지 않을 때 닥쳐올 또 다른,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이, 꺼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식이 이래서 성립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혹시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끔찍해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움보다 자기가 만들지도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을 한층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7쪽
신중한 Y는 자신의 삶을 점령한 먼지투성이고, 안하문인이며, 철면피한 타액과도 같은 타인을 견뎌내는 것으로 갈피를 정하고, 그대신 자신의 몸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Y가 택한 신중한 결정은 바로 '적응'이었는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이나 싸움보다는 그 자신을 상황에 적응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덮어두고자 한 것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로 인한 주변과의 걸끄러운 상황을 못견디는 나 역시 신중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러나 Y의 행동은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Y의 소심증은 이미 신중함을 넘어선 '병적인 나약함' 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승우 소설집 <신중한 사람>에는 여덟편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두번째 이야기인 '신중한 사람'과 같은 신중한 이들이 각각의 단편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중함을 펼치며 인생을 재지만, 그들이 펼친 신중함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 
외향적인 사람이 이러저러한 불만을 밖으로만 혹은 타인의 탓으로만 표출하는 것처럼, 내향적인 신중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야기되는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아내는 대신, 자신과는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참아내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못마땅해 한다.
 
신중한 것과 치밀한 것은 다르고, 대부분의 신중함은 다가올 미래에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불편함을 예견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이며, 만일 미처 예기치 못한 불편함이 야기되었을 경우라도 신중한 사람은 그것에 그만 적응해 버린다는 것이 소설집 <신중한 사람>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은 어찌보면 낙관주의자 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들의 강령은 이런 것이다. 되도록 주변과의 말썽을 피할 것! 나를 주장하는 대신 주변에 적응해 버릴 것!
하, 이보다 더 낙관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작가가 사용한 '신중함'은 낙관과는 거리가 먼 다소 부정적인 의미의 신중함이 되겠는데, 사실 일상 속에서 예견되는 불편함을 덮어두기 위해 부당함을 견뎌내고, 적응해버리는 신중한 사람들은 우리 대다수의 소시민을 가르키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어쩌면 다소 병적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이  '신중하다'는 것 일지라도 인류는 대부분 신중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신중한 사람들만 있었다면 인류는 진보하지 못한채로 유인원과 같은 존재로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하게된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으로 예견될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부당한 현실에 용감하게 맞선 것으로 보이는 배우 김부선에게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는 함부로 날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니,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를 함부로 날릴 수 있는 것도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기는 하다. 그로인해 야기될 비아냥이나 비난들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저 멍청한 것일뿐 아니겠는가.
따라서 신중한 사람은 멍청한 것과도 거리가 멀다. 어쩌면 결과를 예측하는 영특함과,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싶은대로만 듣는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명민함을 갖춘 존재가 바로 신중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중한 사람들이여 위축되지 말지어다. 그대들의 신중함은 때로 민망하고 한심스럽지만, 제 한 몸 보신하는데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을터이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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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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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하찮은 농담 한마디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쿤데라는 <농담>에서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나쁘게도 만든다고 말한다.
<무의미의 축제>에 등장인물인 다르델로는 자신이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마주친 옛동료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고, 곧 죽을 운명이라고 가볍게 이야기 한다. 그것을 자신이 중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함으로써, 마치 새생명을 얻은듯한 남자의 농담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다르델로의 농담을 과연 타인을 속일 목적으로 행한 나쁜 의도로 봐야할까.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행위로 야기된 결과일 것이다. 다르델로의 농담은 라몽으로 하여금 죽음을 앞둔 다르델로의 차분함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은 새 삶을 얻음으로써 죽음과는 다소간 멀어졌다고 믿는 다르델로의 기쁨을 배가 되게 했다.
 
그가 의아했던 것은 그 거짓말을 왜 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보통 누구를 속이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생기지도 않은 암을 꾸며 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19쪽
그런가 하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는 어느 누가 들어도 농담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지만, 스탈린이라는 독재자를 둔 주변의 협력자들에게 그것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독재자 앞에서 스탈린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웃지 않았을 뿐더러,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비난도 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시대는 농담이 진실 또는 거짓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농담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농담이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진실이며 거짓인 것이다. 그것은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독재자를 빚댄 쿤데라의 농담인 것이다.
 
'욕실에서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댔다.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거짓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1쪽
<농담>은 쿤데라의 첫번째 소설이고, 현재 나이 85세인 그를 생각해 볼 때, <무의미의 축제>는 어쩌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국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는 명작가로써 여러 작품을 써왔는데, 그의 작품의 줄기를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관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희안하게도 쿤데라의 소설에서 시간은 평행선이다. <농담>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시간의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는데, 이번 작품은 더더욱 그러해 마치 앞뒤 맥락없는 단막극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무언극을 본 것만 같다. 그러나 이토록 대사가 많은 무언극이라니. '그가 배꼽의 신비에 처음 사로잡힌 것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이다'와 같은 긴 제목을 달고 있는 각각의 단락들을 순서에 상관없이 뒤섞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만 같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시간은 그만큼이나 소용이 없는 것인데,  불쑥 끼어든 과거의 사건은(한여자의 살해 장면 같은) 그것이 과거에 벌어진 일이라거나, 혹은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한참 뒤에 알게되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무의미의 축제>가 대가의 말장난이거나 다소 성의없는 무의미한 글쓰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무의미의 축제>의 각 단락들은 뜬금없고, 그 결말은 더더욱 황당하다. 나 역시 소설을 덮으며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무의미의 축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의미없음'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
 
일을 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쟁취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에로틱함에 취하고, 성에 집착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에 다가서기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행위일 뿐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럼으로 삶에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아포리즘이 아닌가 나름 짐작해 본다. 그러니까 죽음을 앞둔 삶은 축제이다.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해야만 삶이 즐거움이며 기쁨일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57쪽
<무의미의 축제>를 소개한 글에는 무의미한 에로틱함으로 배꼽에 대한 의미가 많이 해석되어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배꼽의 의미보다는 죄책감에 대한 알랭의 견해가 인상적이다.
나역시 알랭과 마찬가지로 틈만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과쟁이'이기 때문에 알랭에게 몹시 공감했는데, 고작 다른 사람의 환심이나 사자고 매사에 죄인인 양 행동하는 것이라는 샤를의 견해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지 못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이해받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가 '사과쟁이'로 표현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인데, '태생이 잘못이지만,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슬픈 고백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무의미의 축제>를 읽기전 책 제목을 보고, 의미가 없기로는 '삶'만 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았다는 것에 어느 정도 나도 삶에 도통한 나이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 싶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이미 의미가 없다라는 것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앞서 <무의미의 축제>는 쿤데라의 첫소설<농담>과 한 줄기라고 했지만, '삶의 무의미'에 관해서라면 쿤데라를 더더욱 유명하게 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도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혹은 기다리고 기대하는 모든 삶은 결국 축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논하기 전에 오늘을 느껴라. 유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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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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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일까? 만일 삶에 무게가 있다면 무게있는 삶이 좋은 것일까, 가벼운 삶이 좋은 삶일까?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은 긍적적이고, 무거운 것은 부정적이라고 했으며,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고전주의 작곡가 베토벤은 무거움을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라고, 이 소설은 시작된다.

체코의 프라하에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까지 토마시는 의사였다.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나가는 바람둥이 외과 의사였고, 토마시의 표현대로라면 여자를 통해 인간이라는 공통의 의미 속에서 100만분의 1의 상이점을 찾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였다. 그런 그에게 한 시골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테레자로, 시골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면서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토마시는 그녀를 여섯번의 우연을 거쳐 자신에게로 떠내려온 바구니 속의 아기로 여겼다.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닿기까지의 과정은 우연이였지만, 우연은 곧 필연이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의미로 토마시에게 새겨지며, 테레자에게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둔다는 것은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자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더더욱 큰 의미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64쪽)

 

사랑의 역사는 '꼭 그래야만 했다'이라기 보다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 때문에 모든 필연은 사랑에 혹은 자신의 운명에 경도된 이들의 의미두기의 과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필연이거나 우연이거나 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두기의 하나일 뿐이며, 단지 우리에게는 순차적인 순간, 즉 평행상의 사간차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의 시간차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스쳐가기도, 혹은 사랑이라는 의미를 새기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토마시가 테레자가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던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해서 테레자가 그를 필연으로 마음에 새길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에 보다 많은 순간이 얽혀있다면, 어쩌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이름지워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토마시가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여자들에게서 100만분의 1의 상이점을 찾는 작업을 멈춘 것은 아니였다. 토마시에게 사랑과 섹스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물론 사랑과 섹스는 같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섹스를 하려면 최소한 상대를 경멸하지는 않아야 하며,지독한 친밀감도 쾌락이 '주'가 되는 섹스에는 좋지 않다. 토마시는 경멸과 지나친 친밀을 배제한 채로 얼마든지 많은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었다. 토마시의 그녀들 중, 화가 사비나가 있다. 그녀는 육체를 통해 자기를 보려고 노력했으며, 전체 속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구분해 낼 줄 아는 사람이였다. 때문에 토마시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삶에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사람이였다. 토마시나 사비나가 질러대는 광란의 쾌락을 나로서는 절대 이해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쾌락을 쫓는 이유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였다고.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는 소설은, 시간의 뒤섞임 속에서 네 명의 주인공인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뒤죽박죽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은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살피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다만 사비나와 프란츠의 길고 지루한 외도 끝에 느닺없이 날아든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은 다소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죽을 당시 토마시는 그 자신의 삶에 의미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학자이자 의사인 직업을 버리고 트럭 운전사가 되어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죽음도 다소 희극적이였다. 나는 그들의 죽음뒤에 모종의 음모가 있으리라고 예감했지만, 밀란 쿤데라는 나의 기대를 보기좋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애견 카레닌의 죽음을 거쳐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흔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랑 이야기로 표현되지만, 나에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배신에 관한 이야기,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로 부터 명예로운 탈출에 관한 이야기다. 사비나는 아버지와 아버지로 표현되는 조국을 배신하고, 프란츠는 삶의 연속과 스스로의 도덕관을 배신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근본인 어머니를 배신하고, 자신의 육체를 배신한다.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는 내면의 명령,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배신한다. 그들 모두가 배신을 통해 찾고자 한 것은 자아 였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므로 삶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변화무쌍한 유기물인 것이다.

또한 모든 우연은 모든 필연을 배신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한 사건이 우연이였는지, 혹은 필연이였는지를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소설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만큼 아름다게 보여주며, 속내에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을 가리는 '키치'에 관한 이야기이며, 실제와는 전혀 다른, 보여지기 위한 해석의 '앙가주망'에 관한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는 배신과, 키치, 앙가주망으로 체코라는 공산 사회와 개인의 삶, 그리고 철학을 잘도 버무려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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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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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세상을 뜬 한 노인이 있다. 그는 광고회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했으며,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다. 따라서 세 명의 전 아내가 있고,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 정감어린 형이 있었고, 긴 직장생활 동안 오랜 우정을 나눠온 동료들이 있었으며,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육체적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비밀의 연인도 있었다. 또한 그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으며,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한 때는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남편이기도 했으며, 딸에게는 죽을 때까지도 둘도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그는 몹시 평범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 그는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끝내기도 했으며, 아내 몰래 여러번의 외도를 했고, 그 사실이 들통나자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할 정도로 도덕적인 면에서 완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를 평범하게 했다. 평범한 사람, 즉 에브리맨인 그가 어느날 죽음을 맞은 것이다.
죽음은 어느 순간 파도가 치듯 갑자기 그를 덮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의 전조가 있었고, 그는 한 순간이라도 죽음을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치료적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죽음을 뒤로 미루기 위한 치료는 불현듯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이 책은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며,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회고를 통해 마무리 된다.
 
출근길에 지나게 되는 요양병원이 있다. 병원이라기 보다는 그냥 요양원라고 보는 것이 맞을 만한 곳으로, 큰 길가에 있다는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만큼 안락해 보이는 곳이다.
그곳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통유리로 된 1층 로비를 바라보곤 하는데, 어느날엔가는 은은한 노란 빛이 감도는 로비에 줄을 맞춰둔 휠체어에 앉은 노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휠체어에 기대 앉은 노인들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 보다는 의무감에 억지로 앉은 듯한 비뚜름하게 늘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을날을 기다리고 있는 멀건 학들처럼 보여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그들은 신의 가호나 은총을 바라기 보다는 어서 빨리 이 지루한 예배를 끝내고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 역역해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피곤한 생을 빨리 끝내고 싶은 기대에서 우러나온 무의식의 표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은 '늙어서 요양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렸든 젊었든 나이가 들었든 모든 인간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산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이 말인 즉 죽지 못해 산다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피사체가 부재한 텅빈 눈과 축 늘어진 모습으로 설교를 듣는 그 늙은이들도 한때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동료들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며, 사소한 도덕쯤은 너끈히 무시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며 살던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까지의 삶에서 날마다의 일상을 열심히 꿰맞춘 덕에 그나마 안락한 요양소에서 생이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있는그들은 내 부모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래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바로 '에브리맨' 아니겠는가.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23쪽
필립 로스가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에브리맨'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에 관한 것이다. 평범했던 비범했던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다 평범하다.

 

로스는 <에브리맨>을 73세에 썼고, 지금 2014년 현재 81세로, 그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여러 권의 작품을 읽고 생각컨데 로스는 몹시 건장한 노인일 것 같다. 몸은 노후했으나 정신력만은 여전히 30대인, 병들고 노후했어도 여전히 자신에게만은 죽음이 비켜갈 것이라고 믿는 그런 꼬장꼬장함을 감추지 않는 노인일 것으로 상상되지만 로스는 <에브리맨>을 통해 그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해도 그 죽음 역시 수천 수만의 다른 죽음들만큼이나 평범할 것이라는 예언하고 있다. 
 
책을 읽기전 살펴본 독자평들 중에는 통찰도 깊이도 없다거나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평들이 많았지만, 내가 보기에 필립 로스는 최고다. 책마다 재탕 삼탕 우려먹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가 유대인을 주요인물로 삼기 때문이며, 배경 역시 미국의 유대인 밀집지역인 뉴워크를 즐겨 사용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 지역, 한 사회, 한 마을, 한 학교, 한 집안 일지라도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고, 그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 역시 무궁무진하다. 로스는 그 다양성을 고루 이용하고 존중하는 작가이다. 나는 바로 그점이 몹시 마음에 든다.
지금껏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들이 다 좋았지만, 그 중 한 권만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에브리맨>을 고르겠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짧지만, 울림은 몹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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