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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토니 모리슨/문학동네

 

<가장 푸른 눈>, <빌러비드>의 작가이며,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이 쓴 두번째 소설이다. 앞의 두 책도 그렇지만,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고통을 마주할 마음이 없다면 읽을 수 없다.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지만(소설이 아니어도 주변의 차고넘치는 슬픔을 견디기가 너무 버거워!) 그러나 바로 이 글 때문에 토니 모리슨의 책을 고르고 만다. 어떤 감정들은 견뎌내야만 했으니까. 그들은 하고픈 말이 넘쳤고 말해야 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했다.(99쪽)

어떤 감정들은 쏟아내지 않으면 곧 죽음이 되곤 했으니까...

 

 

 

 

 

파묻힌 거인/가즈오 이시구로/시공사

 

오잉? 이전에 이시구로 작품들은 모두 민음사에서 출판된 것으로 기억되는데, 느닺없는 시공사. 음,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만 좋아하면 되는 것일까, 아주 잠깐 고민하고. 그래도 이시구로니까 은근슬쩍 담을 타 넘는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자란 이 남자는 기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쓴다. 이번 책 역시 다르지 않은데, 판타지 모험담의 틀을 빌렸다는데서 약간 흥미가 떨어진다.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 손이 가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였다고 기억한다.

 

 

 

 

 

발신자/카린 포숨/은행나무

 

스릴러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왠지 손이 간다. 작가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스릴러의 여왕이기 때문도, 스티븐 킹이 그해 최고의 소설로 인정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나는 한 사람의 무정 냉담한 행위들이 어떻게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지, 또한 그것들이 무고한 타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 지은이가 내놓은 반 페이지 분량의 소름 돋는 결말이 궁금하다. 범죄자도 피해자도 모두 사람이며, 사람처럼 무서운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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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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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가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증권 중개인이었다가 화가가 되었다는 것과, 물질 문명에 염증을 느낀 그가 가족을 버리고 남태평양의 타이티로 가서 광적으로 그림을 그려대다가 가난과 병에 허덕이며 죽어갔다는 큰 줄기 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고갱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재의 그것으로 부각시키고자, 피도 눈물도 감정도 양심도 없는 인물로 재창조해 내었다.

 

프랑스인인 고갱과 다르게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인이었다(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이 전혀 예술적으로 들리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스트릭랜드는 마흔 즈음의 어느날 갑자기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가족으로 부터 증발했다. 아내와 주변인들은 스트릭랜드가 여자와 줄행랑을 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예상과 달리 화가가 되기 위해 안락한 삶과 가족을 헌식짝 버리듯 던져 버린 것인데,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조차 그간 그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에 반해 고갱은 이십대 후반부터 줄곧 화실을 다녔고,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면서도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아마추어 화가로서 활동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삼십 오세 무렵에 증권거래소를 그만둔 고갱은 전문적인 화가가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고갱도 스트릭랜드도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한편 스트릭랜드와 고갱이 말년을 보낸 타이티는 스트릭랜드에게는 낙원과 같은 곳으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원시적인 낭만 속에서 그림에 전념한다. 그 시기는 스트릭랜드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몇년 간으로 소설 속 화자에 의해 추측되며, 병고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던 때조차도 천재 화가 스트릭랜드에게는 축복였던 것으로 그려진다. 스트릭랜드는 죽음을 앞두고 장님이 된 후에도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열망을 전부 쏟아낸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와는 달리 타이티에서도 역시 가난과 빈곤, 고독을 못견뎌 하던 고갱은 1893년 가족이 있는 프랑스로 돌아가 타이티에서 완성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연다. 그러나 전시회는 실패하고, 타이티에서 영주할 생각으로 머물던 고갱은 문둥병으로 살이 썪어가는 중에도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쏟아내던 스트릭랜드와 달리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후 고갱은 매독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5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그 누구의 평이나 인정을 원하지 않은 것과 달리(그는 자신이 죽기전 집의 천장과 벽에 완성한 대작을 태워버릴 것을 유언한다) 고갱은 생애동안 화가로서 인정받기를 바랬다. 제목인 달과 6펜스는 정신의 열망과 현실의 삶을 의미한다. 또 정신적인 열망은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현실의 삶은 돈과 물질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스트릭랜드가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해 비인간적일 만큼 초연했다면, 고갱은 좀더 인간적인 고뇌에 시달렸다.

서머셋 몸은 예술가로서의 열망은 세속적인 삶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몸은 소설 속 나래이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한다.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7쪽)  그러나 예술가도 사람이고 보면 영혼과 관능과 열정만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고갱도 서머셋 몸 그자신도 살아내지 못한 불가능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범인인 내가 보기에 스트릭랜드는 비정상적인 예술충동에 사로잡힌 기인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그는 서머셋 몸이 다다르고 싶었던 경지가 아니었을까. 사사로운 정이나, 또는 인간적 욕망과 인습과 규약 따위로 얽어맬 수 없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갱이 죽기 약 6년 전에 완성한 <우리는 어디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스트릭랜드가 문둥병에 걸린후 죽기 전까지 집안 천장과 벽에 그린 그림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색채는 좀더 진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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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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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한 가문의 딸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동생 스텔라가 살고 있는 극락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스텔라는 가난한 폴란드 이민자 스탠리와 결혼해 지내고 있었고,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다.

첫눈에 스탠리와 블랑쉬는 서로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만, 둘은 사실 같은 종류의 사람들로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구보다 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동물적 육감이 뛰어난 스탠리는 화려한 치장 뒤에 숨긴 블랑쉬의 욕망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를 제압하려 하고 블랑쉬는 블랑쉬대로 이민자 스탠리를 무시하거나 깔봄으로서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려고 한다.

블랑쉬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격분한 스탠리는 블랑쉬의 뒷조사를 하고, 그녀에게 떳떳치 못한 과거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는 블랑쉬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 미치와 스텔라에게 블랑쉬의 과거를 폭로한다. 이로인해 블랑쉬의 생일 파티는 엉망이 되고, 미치는 블랑쉬를 떠난다. 스탠리는 스텔라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간 사이 엉망으로 취한 블랑쉬를 겁탈한다. 그후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블랑쉬는 병원으로 끌려가고 스탠리와 스텔라는 그들만의 평화를 찾는 것처럼 보이며 막이 내린다.

 

허영에 빠진 블랑시와 짐승남 스탠리, 그리고 방관자인 스텔라

말하자면, 블랑시의 욕망은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거다. 부유한 성장과정을 거친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줄곧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모조품으로라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어 한다. 또 그녀는 슬픔이나 고통을 이기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애정을 요구한다. 그것이 비록 마음이 담기지 않은 육욕뿐일지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빈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164쪽)

 

스탠리의 욕망은 권력욕이라고 하겠다. 그는 우두머리로 군림하길 좋아하며, 힘에 논리에 충실한사람이다. 또한 그는 자기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도 강한데, 자기 눈에 틀려보이는 것을 바로잡는 것을 중요하게생각하며, 그것이 바로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다.

 

한편 스텔라에게는 안정하고픈 욕망이 있다. 블랑쉬와 마찬가지로 부유하게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며, 분란을 싫어하고 자신을 양보해서라도 주변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그녀의 욕망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건강해 보이지만, 자칫 방관자가 되기 쉽다. 그녀는 블랑쉬와 스탠리의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언니 블랑쉬를 겁탈한 스탠리조차도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중 가장 건강하지 못한 욕망을 지닌 사람은 스탠리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주변인물들을 심판하길 좋아하고, 그를 위해 힘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에서는 바로 그점이 남자다운 젊은 혈기로 표출되고, 미남배우가 연기를 한다면 더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여질테지만  현실의 남자라면 망설이지 않고 데이트폭력을 구사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연극도 영화도 탐날 만큼 재미있다

책을 펼친 순간부터 순식간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블랑쉬와 스탠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에 희곡임에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한호흡으로 읽었지만, 책을 덮고서는 '이건 뭐지?' 싶었다. 허영에 빠진 여자가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도취되어 있다가 힘센 남자를 만나 겁탈당하고 그만 정신병원 행이라니..? 정신못차리면 이렇게될 수 있다는 경고인가? 욕망에 휘둘리며 살다간 극락이 아니라 그나마의 현실도 놓칠 수 있다는 엄포인가?

워낙 유명한 작품임에도 의미를 읽어내지 못해 당혹스럽고, 작가와 작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이해력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재미와 이해는 분명 다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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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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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희번득거리는 눈동자, 웃고있는 건지 울고있는 건지 표정이 분명치 않은 세일즈맨 윌리는 자동차 핸들을 꽉 쥔채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건 팔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116쪽) 36년 경력의 세일즈맨인 그는 이제 육십 세가 되었고, 그에게는 더 이상 팔아먹을 것은 남지 않았다. 어느덧 사는 것보다 죽는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된(117쪽) 것이다.

 

매주 외근 다니는 내가 새삼스레 그 경치를 바라보았다니 상상이나 가? 그런데 린다, 거긴 아주 아름다웠어. 나무는 무성하고 태양은 따뜻하고. 나는 앞 창을 열고 따뜻한 바람에 내 온몸을 맡겼지. 그런데 갑자기 길가로 빠지고 있는 거야! (13쪽)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일즈는 '꽃'이라고 불린다. 1920년대 대공항 전의 미국은 그야말로 세일즈의 천국이었고, 때를 놓치지 않고 잘나가던 세일즈맨 윌리 로먼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그들은 윌리에게 기쁨이었으며, 자랑이었다. 그런만큼 자식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러나 비프와 해피는 윌리의 기대에 못미치고, 어느덧 예순이 넘은 윌리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수명을 다한다. 회사는 그런 그를 여지없이 해고시키고, 경제적 자립에 실패한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보험금뿐인 그가 갈 곳은 한 곳 뿐이었다. 그의 맨 모습을 이해하는 세상의 단 한 사람 아내 린다를 뒤로하고.

 

그에게 성마른 기질과 성질, 황당한 꿈과 자잘한 심술궃음이 있다해도 그것이 남편의 내면에 있는 격한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 바람은 린다의 마음에도 있는 것이지만 감히 입 밖에 꺼내거나 대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11쪽)

 

감히 입 밖에 꺼내거나 대놓고 추구하지 못한 린다와 윌리의 꿈은 꽃을 심을 마당을 갖는 것이였으리라. 매달 갚아야 할 대출금에 허덕이지 않는 삶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다.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있는 희곡 중 하나가 <세일즈맨의 죽음>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74쪽의 짧은 대본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큰 틀에서 보면 자본주의 사회 속의 한 개인이 자본에 죽도록 봉사하다 정말 죽어버리는 이야기지만, 그의 죽음 뒤에는 가족간의 해묵은 갈등이 있다. 물론 그 갈등 역시도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 신화'에 코가 낀 윌리가 자초한 불행이다. 그러나 누가 윌리를 비난할 수 있을까. 부모는 자식이 좀더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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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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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괴테 나이 스물셋, 청년 괴테는 샤로테를 사랑했다. 그러나 샤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괴테는 샤로테와 더불어 그녀의 약혼자와도 친분을 나누었지만, 샤로테를 향한 열정을 버리기 힘들었다. 한번은 약혼자가 없는 틈을 타 샤로테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16세의 샤로테는 괴테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라는 자못 어른스러운 충고를 한다. 이후 괴테는 샤로테와 그녀의 약혼자에게 편지를 남기고 도망치듯 그들을 떠나버린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괴테도 알고있는 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비관해 권총 자살하였다. 괴테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지만, 베르테르의 자살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많아 일부 지역에서는 발간이 금지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명인의 자살을 흉내내어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일컫는 '베르테르 효과'는 이렇게 유래되었다.

 

학창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분명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읽어보니, 이는 삶의 공허에 일찍이 절망한 조로 청년의 자살기다.

이제 막 자신을 펼치며 세상을 살아보려는 젊은이치고 베르테르는 좀 많이 늙은 정신력의 소유자이다(그렇기때문에 괴테는 제목에 유독 '젊은 베르테르'라고 강조한 것이리라!). 그에게는 신나는 일도 재미있는 일도 없으며, 미치게 즐거울 때도 없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을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는 일과 같다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과 어린이가 있는 천국같은 작은 고장에서 고독을 벗삼아 사색하며,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여신 로테. (베르테르의 정신이 조로증을 앓긴했어도, 그의 육체는 아직 피끓는 청춘이였던 거다!)

로테는 일찍 병사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여덟 동생을 돌보는 천사다. 그녀는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순진하고, 그렇게 꿋꿋하면서도 그같이 마음씨 곱고, 착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정말로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 (32쪽)

 

모든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이 그렇듯 베르테르 역시 로테의 참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에 로테를 투영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현실적인 삶을 두 다리로 버티기 보다 순수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그와다르지 않은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며,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인 것이다.

<그곳>이 <이곳>으로 변해 버리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은 전과 마찬가지가 되고 말아. 우리는 여전히 가난과 궁색에 얽매인 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잃어버린 청량제를 찾아서 허덕이는 것이다.(48쪽) 이루어지는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끝이다. '그곳'은 절대 '이곳'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그곳'을 '이곳'으로 받아들 수 있었던 괴테는 샤로테를 떠나 괴테로써의 삶을 살수 있었다. 베르테르 역시 로테를 떠나 현실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했지만, 세속적인 일에 능하지 못한 베르테르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시 로테에게로 되돌아가 사랑을 구걸한다.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현실 도피처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이상주의자이지만, 거칠게 말해 현실도피자 또는 사회부적응자, 즉 루저의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로테가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까? 물론 죽지 않았을 것이다. 로테가 현실이 되는 순간 또다른 이상을 찾아야 했을테니까 말이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아니라 이상의 완성을 위해 자살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늘 궁금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 죽을만큼 힘들었을까.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추측. '그만한 일로 죽을꺼라면 나도 진작에 죽었다! '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듯, 죽음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질투의 말 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평범한 나같은 사람에게도 일정부분 '매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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