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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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죽음에 응답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회상, 희미한 언덕 능선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는 현재와 연결되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뒷표지 글 중에서)

 

세계2차대전 당시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해 두 도시를 파괴했고, 이로써 일본은 항복했으며 세계대전은 종전을 고했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했지만, 일본이니 미국이니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승리나 패배에 관계없이 실제로 이루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다. 전쟁의 참상은 승전국이나 패전국을 가리지않고 일반 시민을 참혹하게 하지만, 패전국민의 경우 그 고통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리라. 더구나 원폭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었다면 피붙이의 죽음, 쑥대밭이 된 삶터, 그리고 이어지는 공황상태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말없는 몸부림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야기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 중, 아이를 살해하는 여자를 본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살며, 새끼 고양이들에 애착을 품은채로 늘 경계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는 미국인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가고자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녀만의 이상국인 미국에는 결국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를 바라보는 주인공 에츠코는 전후임에도 번듯한 직장에 나가고 있는 남편 그늘에서 오두막의 아이와 엄마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의심이 감돌고, 서로를 믿지못하는 순간순간 섬뜩한 장면이 이어진다.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상은 전쟁 전,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품위있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지만 한마디로 속의 생각을 감추는 음흉함 또한 겸비하고 있다. 그것을 과거 일본의 모습이라고 역자는 후기에 적었지만, 국민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점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바르고, 성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최대 덕목으로 여기며 예의를 갖추는 것. 

일본적인 것의 여러가지를 좋아하는 '나'아지만, 역시 그런 모습은 존경스러운만큼 불편하기도 하다. 오가타상은 아들인 지로에게도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예의를 갖추지만, 그의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아들인 지로도, 며느리인 에츠코도, 그리고 그 자신 오가타도 잘 알고있다. 

 

이야기는 금방이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처럼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지만, 특별한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원자폭탄이라는, 너무도 엄청난 재앙 후의 나가사키에서는 이미 더이상 놀랄 일이 없는 것처럼 재건의 희망에 들떠있지만, 여전히 그속의 개개인은 힘들고, 피로하고, 지쳤으며, 삶이 버겁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전쟁에 고무되었던 과거를 회상하기도(오가타상), 희망의 땅에서 온 미국인을 붙잡기도(사치코),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 일에 매달리기도(지로, 후지와라 부인), 옛것을 추방하고 이제는 새로운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기도(공산당에 입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로의 친구이며, 오가타상의 제자이고, 현재는 교사인 마쓰다 시게오), 전쟁을 딛고 선 땅에 새로이 태어날 아기에게 희망을 걸기도(에츠코) 하는 것이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 역시 끝나지 않는다.

역자는 씌여진 것보다 씌여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너무도 평이하고 잔잔한 이야기지만 그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은 무한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거대한 소설이다. 음, 이렇게도 소설이 씌여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다. 너무도 평이하게, 너무도 잔잔하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순간순간이 긴장되고 때로는 공포스럽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주인공 에츠코 역시 두번째 결혼으로 영국인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첫번째 남편 지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게이코는 오랜 불행 끝에 자살한다. 그녀가 어떻게 불행했는지 작가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를 통해 나는 그녀의 불행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랜 불행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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