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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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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토머스 핀천에 대해 아는 것 없고, 이전에 읽은 작품 또한 없음에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읽고 싶었던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지식이든 문학이든 운동이든 하다못해 눈치까지 느리게 배운는 사람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느리게라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이경우는 물론 지식이 아니며 또한 나 자신 까지를 포함해서) 태반인 사회에 살고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편의 단편 중 그 어느 것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달고있지 않다. 그러나 다섯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줄기가 그렇고, 또 여기에 묶인 네편의 글이 토머스 핀천이 대학시절 습작한 작품이라는 점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의미를 가르키고 있다. 작가 자신이 대작가가 되어 미숙한 시절의 작품을 회고하며 생각할 때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란 작가 자신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느리게라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할때 조금씩이라도 나아진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본다.

 

각각의 작품들에 대해서라면 그다지 할 말은 없다. 죽음, 고갈,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의 느낌, 막다른 길에 다다른 현대인의 갈등 등은 내가 좋아하는, 혹은 관심있어하는 주제이건만 작가의 서문과 옮긴이의 작품해설을 읽지않았다면 솔직히 나로서는 작가가 각각의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문학은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하지만, 포스트비트 세대 운운이 게으른 나로서는 다소 귀찮은 느낌이다. 또한 각각의 작품들은 대체로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무엇보다 모호했는데, 바로 그 모호함을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 단편에는 미처 담을 수 없는 방대함으로 산만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처럼 집중하기 힘든 작품들이었는데, 대학시절의 습작이라서라기 보다는 핀천의 글을 쓰는 스타일이 그간 내가 좋아해온 소설들과는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좀 산만·방대 하고, 좋게말하면 박학다식해서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스타일이다. 해서 개인적으로 나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때문에 각각의 이야기들에 대한 요약은 생략하련다.

 

엉뚱하게도 나는 작품들보다는 책의 첫시작을 연 작가의 서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과학의 도움으로 미숙한 시절의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대목에서 나 또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혹은 그것을 핑계 삼아 길을 걷다가 맥주 한잔하며 옛 시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쪽, 작가 서문 중

은둔작가의 서문 치고는 좀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평소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대작가가 되어 대학시절의 습작을 생각하는 서문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호한 시절을 회고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할까.

그는 습작을 할 그 무렵에 그는 일상에서 쓰는 사투리나 발음에 귀가 어두웠다는 것(11쪽)이나, 표현이 갑자기 공상적으로 바뀌어서 읽기가 힘들게 되는 것(13쪽)이나,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 범한 과도한 글쓰기(26쪽) 등에 대한 회고 내지 반성은 그가 느리게 배운 자신을 과감하게 포용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발전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데이터를 반드시 확인하라(27쪽)는 등의 권고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겠지만, 이는 또한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도 해 좋게 생각되었다. 역시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로인해 점차로 나아지는 존재(안타까운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지만)인 것이다.

 

이글에서 나 역시 대학시절 그즈음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그간의 나는 과거의 나를 어리고 서툴러서 미숙하기만 해 부끄럽다라는 식으로는 기억했어도, 서툴어서 힘이 들던 그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토머스 핀천의 회고의 글은  미숙한 시절의 나를 만나 돈을 빌려주거나 맥주 한잔을 나누지 않더라도, 지금의 내가 그시절의 내 어깨를 한번 쓸어주고, 눈 한번 마주쳐 줄 수 있었다면 어린 나는 충분히 위로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도움을 받든 점성술의 도움을 받든 정말로 그럴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만나진 못했지만 대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상상을 해 본다. 단지 제목이 좋아 고른 책을 통해 만난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떻든 너는 느리게라도 배우고 있다고, 느리지만 점차로 나아지고 있다'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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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6-2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어떻게라도 난 느리게 배우고 있다 참 마음에 와닿아요 ㅎ 잘 지내시죠? 소나기 올 때 비의딸님이 생각나더군요 ㅎ 비 좀 왔으면 합니다 ㅋ 저 왔습니다 ㅎ
 
[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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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미국에 유학 중이던 중국인 난은 천안문 사태를 접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후 중국 정부에서 지정한 대학원의 정치학 과정을 그만두고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난은 낯선 땅에서의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공장의 야간경비원이 되거나 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요리사가 되어 식당 경영에 매진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중년이 된 난은 식당 경영을 통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민자 대열에 들어선다.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난은 자신이 쏟아부은 각고의 노력은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립하는 개인이 되기 위한 것었다고 말한다.

난은 당으로부터 정치학 공부를 할당받기 이전부터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는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않고, 시상을 떠올리거나 시인들과 교류하고 문학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언제나 시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뒤로 밀어둔다. 그 이유라는 것은 경제적 안정이 주된 것이 였는데, 자유를 찾아 중국이라는 국가 체제를 떠났지만,  자유국가인 미국에서조차도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돈을 벌지 않으면, 패배자이자 하찮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사람의 가치는 소유한 자산과 은행예금에 따라 정해진다.

돈, 돈, 돈. 이곳에서는 돈이 신이었다. -1권, 114쪽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비롯한 모든 개인적 취향과 욕구들을 박탈한 중국을 떠남으로써 비록 공산주의 국가 체제의 억압에서는 벗어나 표면적으로는 자유인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자유국가 미국에서도 난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지 못했다. 자유스러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돈벌이에 목이 매인채로 엉덩이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늘 쫓기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자유지상주의 국가 미국에서의 자유란 재정적 독립을 이룬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난은 돈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며 불안정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생활에 서서히 젖어들게 된다.

매일매일을 하루하루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하며,  시인이 되고싶은 꿈을 미룬채로 경제적인 안정기에 접어든 중년의 난에게 남은 것은 고독이며 외로움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꼭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자유경제주의국가 체제에서의 개인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는 몇 년 동안 모든 에너지와 정열을 식당 일을 빚을 갚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빚이 없어지자 글을 안 쓸 핑계도 사라지고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안 할 핑계도 없어졌다. 그러다가 아내 배 속에 있는 딸 아이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자신의 에너지와 삶을 다른 식으로 소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내 책임을 회피하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2권, 216쪽

어느정도의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나자 난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지만, 시인이 되는데 자신을 오롯이 쏟지 못한 것은 낯선땅에서의 정착을 위한 경제적인 안정도, 가족의 행복도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 난과 마찬가지로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 하진은 작가의 서문에서 <자유로운 삶>을 통해 이민생활의 물질적인 측면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다루고 싶었으며, 자유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값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값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찬사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그렇듯 <자유로운 삶>은 태어난 터전을 떠나 새로운 땅에 둥지를 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지나온 삶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자식에게 열어주기 위해 현재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부모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또한 꿈을 포기하고 현실의 삶에 집착해야 하는 평범한 한 가장의 이야기이며, 크게는 한 개인에게 국가가 갖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이러저러한 이유로 진정한 자기 자신, 즉 자유를 잃어버린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현실의 자기자신에게 충실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난은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자유인일 수 없었다. 난의 이러한 삶을 보면서 아무것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완전한 개인이란 이쪽이든 저쪽이든 이념을 가진 '국가'라는 체제 아래서는 존재하기 힘든 추상적인 관념일 뿐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 대목에서 '모든 권력은 억측가들의 손에 있으며,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라고 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나라없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책이 어디에 있더라.

 

개인에게 국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묶는 관념일 뿐입니다. 만약 나라가 개인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나라가 개인의 삶에 해가 된다면, 개인에게는 국가를 포기하고 국가한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1권, 501쪽

나 역시 내 삶보다는 나은 아이의 삶을 위해 오늘을 살아내지만, 그런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지푸라기 같은 개개인들들의 삶은 드러나지 않고, 그들이 있거나 없거나 국가라는 피상적 존재는 오늘도 그 몸집을 부풀려만 간다.

조국 중국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주인공 난의 깊은 절망에 반하는 굳은 의지 따위에 나는 목이 메이도록 공감할 수 있었는데, 그 어느때보다 이민에 대한 생각이 간절한 요즘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만을 배우고 자란 나로서는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지 않았다고 꼼꼼히 따지는 일에 게으름을 부린다. 그래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커트 보네거트는 역시 <나라없는 사람>에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니, 부디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하는 생각만 간절하다. 한편으론 어떤 순간에도 국가에 절망하지 않는 메이 홍과 같은 국가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 또는 국수주의자(?)들의 끝 모를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차라리 디아스포라이고 싶다.

 

<자유로운 삶>은 나고자란 땅과는 모든 것이 다른 생소한 땅에서의 정착을 위한 이민자의 어려움,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그 역시 두려움이나 게으름 따위에 대한 변명일 수 있겠지만)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인간적인 고뇌 외에도 국가와 개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책이였던 반면, 유명 출판사와 유명 번역자의 작품임에도  2권의 196쪽에서 9월이면 핑핑이 임신 3개월째 되는 때라고 했다가,  200쪽에서는 6월 말이 되자 핑핑이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는 식의 오류와 잦은 오타가 다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던 걸까. 좋은 책은 좀더 시간을 두고 꼼꼼히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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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오랫만에 아이 학교에 갔다가 아이 친구로부터 '아줌마 얼굴이 삭았다'라는 인사를 들었다. 얼굴이 삭았다는 아이 친구의 걱정이 걱정으로 들려 고마운 한편으로 삭았다는 직접적인 표현에 매우 당황했다. 웃을수도 울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비가 온다. 이렇게 조용히. 창문을 닫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비가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만큼 조용히. 화려한 꽃무늬의 비옷을 입고 보라색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 삭은 얼굴을 화려한 치장으로 감춰보려는 나름의 몸부림인 것이다. 

비 때문인지 오늘은 허리가 무척 아프다.

어떻게 해도 이전의 열정을 되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여전히 나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를 다그치지는 않겠다. 스스로 기운을 차릴때까지 내가 나를 기다리련다.

그다지 읽고싶지 않은 책들 더미 사이로 몇 권의 신간을 골라본다.

 

 

 

 

 

2007년에 출간되었던 노란표지의 구판을 팔아버렸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하는 기억마저도...

 

삶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그 누구보다 바로 내 이야기가 아닌가.

 

 

 

 

 

 

 

<휴먼스테인><에브리맨>을 사다만 놓고 아직 읽지도 못했는데..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목가>를 먼저 읽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본문 중>

 

자신의 경험치를 오롯이 글로 적어낼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이들이냐...

 

 

6월에는 이 두 권의 책을 꼭 읽고싶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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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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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그리고 인류 전체의) 불행과 비참함에 관해서라면 파울은 항상 그날 트라운 호숫가에서처럼 사태의 표면만을 볼 줄 알았지 단 한 번도 나처럼 전체를 조망하는 법이 없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도 전체적인 실상을 보기를 거부했고, 그런 거부의 태도를 일생 내내 유지해 온 듯하다. 그런 비참한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피상적인 관찰로 만족해 버린 이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리라. -37쪽

 

몸이 아팠다. 그저 그냥 지나가는 감기나 몸살 정도가 아니라 난생 처음 수술이라는 것도 해 보았고, 얼마간의 병원생활도 했다. 그후로도 오랜 재활기간이 필요하다.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의 위중한 병은 아니지만, 지금껏의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링거를 확인하거나 혈압을 재러 오는 간호사의 작은 움직임에 잠이 깨고, 입맛없는 입에 밥을 우겨넣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멍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날들이 길어지자 문득 인생에 별로 중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은 물론이고 평범한 내 일상을 조금은 색다르게 채워주던 책 읽기도, 나를 새록새록 발견하게 해주던 리뷰 쓰기도, 하다못해 얼굴에 로션 하나 바르는 것조차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그간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파리 목숨만큼이나 가벼운 목숨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 어느때고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자각한 것이다.

그 자각이 얼마나 날카롭고도 매서웠는지 나는 몹시 놀라고 말았다. 그후로도 한 달 반의 시간을 여전히 멍한 머리로 헤매고 있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에 안은채로.

 

일도, 책 읽기도 모두 다 하찮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시간이다. 그 한달 간 나만큼이나 목숨이 가볍던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걸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들다. 어린 목숨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이 얼마나 하잘것 없는 것이지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아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만큼 무력한 내가 미안하다. 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특별한 관심도 없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읽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자의 모드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에 목말랐기 때문이다. 다시금 내 안을 지펴줄 어떤 불쏘시개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까. 질병과 고립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베른하르트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면서 삶을 지펴줄 불쏘시개를 발견하게 된 것처럼 나 역시도 파울을 통해 자꾸만 가라앉는 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처음에는 네다섯 발자국을 걷는다. 그다음에는 열이나 열한 발자국, 그러고 나서 열세 발자국이나 열네 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환자란 그렇게 움직여야 하지 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 막 걸어 버리면 대개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병실에 갇혀지냈던 환자는 그동안 몹시도 바깥을 그리워했으므로, 마침내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그 순간 도저히 더는 참기가 어렵다. - 16쪽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몇달씩이나 병실에 갇혀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퇴원을 하고도 한참을 누워지냈던 나는 제법 걸을 수 있게되자 정해진 산책 시간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나서 평상시에는 차를 타고 가던 곳까지 멀리 나가곤 했다. 그것이 오히려 몸을 망치는 '독'인지도 모르고. 그렇더라도 삶에의 의지란 것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는 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병원 모습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베른하르트의 독백은 나의 투병생활과 맞물려 몹시 흥미로웠다. 또한 베른하르트가 묘사한 정신병원에 수감된 파울의 모습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를 떠올리기도 했다. 파울도 맥머피처럼 체제에 불응하거나 혹은 기준에 맞춰 행동하지 않은 대가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전기치료를 받고 점점 더 정신이 피폐해졌다거나 하는 장면에서 였다. 물론 파울이 정신병동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 맥머피와 같은 악동노릇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울은 정신병동을 들락거리며 오히려 더 황폐해지고,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병원을 나올 수 있게되곤 하면서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베른하르트와는 반대로 파울은 정신병동에서 퇴원할 때마다 점점 더 피폐해졌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앓고있던 폐병이나 파울의 정신병은 매 한가지로 모두 자제력을 잃었기 때문에 발병하게 된 것이고,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폐병 환자로 살았듯이 파울 역시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로 살아왔으며, 그것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은 폐병환자의 역할을, 파울은 정신병자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친구와 함께 나탈의 뜰 담장에 기대앉아, 칠십 년 이상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생의 초반에는 소위 영화가 끝이 없다고 하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유함을 향유하며 훌륭한 보호 아래서 자랐고, 당연히 유명한 테레지아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의식이 이끄는 대로 가족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갔고,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표면적 가치였던 것들, 즉 부유함과 풍족함,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렸다. 정신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89쪽

 

파울과 베른하르트의 병원생활 다음으로 가장 주의깊게 읽었던 것은 파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동안의 고독이었다. 파울이 죽어가는 12년의 과정을 적은 책이니만큼 어쩌면 내가 집중했던 것이 파울의 죽음이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한때  뛰어난 요트선수였고, 자동차경주에 나가기도 했으며, 유럽 최고의 바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쌓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 오스트리아 빈 의 최고 신사 중 하나였던 파울의 최후 몇년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 중에 목련이 있다. 목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꽃이기도 한데, 싸늘한 공기를 뚫고 나와 봄을 알리는 진주빛이 도는 매혹적인 자태는 몹시 아름답지만, 그 마지막은 비참하다 못해 추하기까지 하다.  깨끗이 떨어져 버리면 좋을 것을 목련은 백옥처럼 고았던 꽃잎을 지저분하게 태우며 사그라든다. 나는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파울의 마지막 몇년간이 꼭 목련의 최후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누구인들 생의 마지막을 목련의 최후처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날 느닺없이 닥친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 인생의 절정기를 황홀하게 보냈던 파울의 전성기에는 그토록 다정했던 친구들은 죽음을 앞둔 파울을 피한다. 파울에게 기대할 것은 죽음 뿐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죽음을 앞둔 파울은 모두로 부터 외면당했다. 그의 친구 베른하르트에게 조차도 그러했는데, 글을 쓰기 위해 떠나있었다고는 하나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파울 생전에 베른하르트는 그의 장례식에서 연설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카뮈는 말했다. 죽음만이 감정을 일깨운다고, 막 사별한 친구들을 우리가 얼마나 애달파하느냐고, 입에 흙이 가득차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그들을 우리는 존경하기까지 하지 않느냐고.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를 위한 이 한편의 장송곡이 죽음이 일깨운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친구의 몸에서 나오는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을 나 혼자서 고스란히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상태가 피폐해져 갈수록, 그는 더더욱 우아하게 옷을 차려 입었다 -129쪽

 

파울은 베른하르트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며, 베른하르트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자살을 꿈꿀 때, 베른하르트 자신을 되찾도록 도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내인생의 사람'외에 소중했던 친구가 파울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죽음에 임박한 파울을 마주 보려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앞둔 파울과의 마지막 온정의 시간을 거부한다.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눈 앞에 닥친 친구와의 이별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믿고싶다.

베른하르트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몹시 증오해 자신의 작품이 오스트리아에서 출판되는 것을 금지하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조국에 대한 그의 증오 역시 조국으로부터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였나 나는 생각한다.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역시 파울은 베른하르트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 맞다. 파울로 인해 생을 다시 살 힘을 얻었던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통해 어떻게 죽어야 할 지, 혹은 어떻게 죽지말아야 할지 또한 배웠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뭔가 희망적인 메세지를 발견하길 바랬는데, 내 심리상태가 그렇질 못해서인지 외려 죽음에 한 발 더 다가선 기분이 든다.  

베른하르트가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내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는 알 것 같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겠다.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않고... 이만하면 희망적인 메세지를 본 듯도 하고.

누군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를 되뇔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 그렇듯 코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면 외려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증오해서도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제목에서 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였는지는 모르겠다. 파울이 루트비히의 조카였다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닌데 말이다. 루트비히로 인해 파울이 어떤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별적 인간 파울에 관해서인데 말이다. 역시 판매량을 위해서였을까? 죽음을 앞둔 파울에게 보여준 베른하르트의 냉담함이 내 마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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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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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몸에 매스란걸 대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국가적 재앙 때문이기도 했다. 나 역시 언제 어느때고 그야말로 느닺없이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끼는 요즘이다.

그렇게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나 죽고난 자리에 슬픔이나 애통함 말고는 다른 어떤 감정도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되면서, 내가 살았던 흔적을 곱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추하게는 남기고 싶지 않다는 다소 엉뚱한 욕심이 들었다. 그것을 욕심이라 표현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미 죽고 없는데, 주변의 평판이나 감상이 무예 그리 중요할까 싶은 생각에서다. 그렇다. 이미 죽고 없는 판에 평판이나 뒷말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나 죽고 없을 때 남아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나만의 비밀이 있었던가...

 

주인공 구동치는 딜리터다. 딜리터란, 자신이 죽은 후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싶은 비밀을 삭제해주는 이른바 뒷처리를 하는 사람인 것인데 처리하고 싶은 그것이 하드 디스크이든, 열쇠이든, 사진 한 장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계약자가 원하는 것을 깨끗이 지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계약자가 죽은 후에라도 감추고 싶은 비밀을 반드시 삭제해주겠다는 계약을 사전에 하고, 그를 실행할 것이라 믿는 일종의 사후 보험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반드시'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구동치는 자신이 나름의 최선을 다할 것이라 믿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로 늘 계약을 성사시키곤 한다.

딜리터라는 말을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 알았다. 실제로 '딜리터'가 존재하는지, 작가 김중혁의 상상일 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있음직한 혹은 있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죽은 후에라도 아니 오히려 죽었기 때문에 알려지기를 원치않는 비밀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때문이다. 나에게는 사후에 감춰졌으면 하는 비밀이 있던가? 굳이 비밀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이를테면 여기저기 걸려있는 인터넷 가입정보라든가, 그동안 적어왔던 리뷰라든가 하는 것들은 좀 지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딜리터 구동치는 업계에서는 제법 유능한 딜리터로 이름을 날리고, 자신의 죽음과 함께 숨겨야 할 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속속 구동치를 찾기에 이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게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구동치는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구동치는 두 개의 세계 모두에서 물건을 없애는 것을 풀 딜리팅 이라 불렀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물건을 옮기는 것을 하프 딜리팅이라 불렀다. 물건을 그저 옮기는 것만으로도 딜리팅이 가능한 것이다. 의로인의 입장에서는 풀 딜리팅이든 하프 딜리팅이든 문제 될 게 없었다. 85쪽

 

반드시 책임지고 비밀을 없애겠다는 구동치의 약속은 엄밀히 말하면 지켜지지 않았고, 구동치는 마땅히 없앴어야 할 물건의 위치를 자신의 캐비넷 안으로 옮기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분을 통해 나름의 합리화를 한다. 내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런 구동치도 결국에는 딜리터를 그만두는 쪽으로 결말을 낸다. 죽음 이후의 비밀까지 책임지겠다는 생각은 한낱 인간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보는데, 어쩌면 구동치 스스로가 비밀을 간직할 명분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밀을 품은 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할 지라도 비밀은 세상에 계속 존재하고, 인간사와 세상의 이치를 쥐락펴락하며 흘러간다. 비밀의 경중은 간혹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누군가의 존재에 위협을 하기도 하지만 죽은자의 억울함을 대변하기도 하고, 잘못된 진실을 바로잡는 경우도 있다. 비밀은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꺼내져야만 그 수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던가. 구동치는 비밀을 감추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비밀의 감춰진 속성, 즉 비밀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딜리터를 그만두게 된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점퍼와 비슷한 점퍼를 바다에 던져버림으로써 생의 미련을 던져 버렸듯이 비밀에 대한 집착을 던져 버린 것은 아니였을까.

제목이 어째서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작가는 죽은자의 비밀을 그림자라고 보았을 것이다. 실체는 사라졌어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가는 그림자는 살아있는 이들을 덮치지만, 밝음 속에 꺼내짐으로써 그 수명을 다 할 비밀을 그림자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주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 328쪽

 

나 역시 어느날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후, 옷장과 서랍, 책꽂이 등 주변의 물건을 돌아보며 내 소유라 이름할 수 있는 것들을 줄여가야 겠다는 다소 청승스러운 생각을 한다. 남겨진 것이 많을 수록 삶에 대한 미련도 많아질 것이며 좋은 평판을 남기고자 하는 추한 욕망도 커질 것임으로.

 

소설은 읽기 수월했고, 영화를 보듯 눈앞에 장면장면이 쉽게 그려졌는데 작가가 영화제작을 염두해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무도인 차철호 만은 누굴 캐스팅하면 어울리지가 딱 떠올랐는데, 그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왔던 최민수의 매제 마동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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