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 - 흔들리는 부모들을 위한 교육학
현병호 지음 / 양철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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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 앞에서, 교육 앞에서 자신만만한 이가 어디 있으랴. 외출타기를 하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같기도 하다. (6쪽)

 

그런데 아닌 것 같다. 교육 앞에서, 삶 앞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나뿐'인 것만 같다. 모두들 저렇게 당당한 얼굴로 자신있게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날마다 흔들리고 매 순간마다 흔들리는 것 같다. 삶 앞에서, 아이의 교육 앞에서는 더더욱...

 

아이가 대안교육을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되었다.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중고등 과정의 대안학교에 진학했다(진학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초등 6년 과정 중, 저학년 3년 동안은 학교 생활에 남들보다 뛰어나게, 혹은 남들만큼 적응시켜보려고 동분서주 했고, 그 후 3년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호시탐탐 대안학교를 넘보게 되었다. 주위에 대안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가 없어 나름 각개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모르니까 일단 규모가 적은 곳은 기피하게 되었다. 이왕이면 대안학교도 이름이 알려진, 나름 탄탄해 뵈는 학교였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탄탄한 대안학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학교는 편입이 쉽지 않았다. 해서 초등기간에 훌쩍 정규 교육을 포기하는 대담함은 감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 집 가까이의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름 큰 모험이었다. 물론 입학하는 순간까지도, 아니 어쩌면 지난 일 년간 내내 제도권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를 고민했다(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어느 중학교 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선택하기 까지 격월간 <민들레>의 힘이 컸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던 무식한 엄마로서는 누군가 바람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대안학교에 대해 알리는 것조차 꺼렸을 것이다. <민들레>를 통해 알게 된 작은 대안학교들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런 학교들이었다. 내 아이의 자유로운 영혼을 있는 그대로 숨쉬게 해줄 바로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지난 일 년간 무수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나태한 모습에 그랬고, 생각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학교 규모 때문에도 그랬고, 운영위원이니 대표니 학교를 이웃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선생님들의 온갖 시중들기를 마다하지 않던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모습에 기가 질렸던 나는 대안학교는 더더군다나 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어서도 그랬다.

 

그런가하면, 입학 전 캠프나 사전 합숙을 통해 대안학교를 체험하고 두말없이 대안학교를 선택했던 아이도 역시 학기 중간 중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고사를 잘 보았냐고 묻는 초등학교 친구의 말에 그랬고, 수학이나 영어의 수준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서도 그랬고,  공강이 있을 때 자기가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럽다고 했다(겨우 열 네살이 된 아이 입에서 자신이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그동안 아이를 많이 닥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선뜻 일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우리 모자는 흔들리면서 첫 대안교육 일 년을 보냈다.

 

흔들렸으면서도, 흔들리면서도 대안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역시 해보니까 알겠다는 거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무익함을, 그 횡포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은 대단한 행운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혹은 아이에게 일조하라는 그런 거창한 포부는 없다. 단지 오늘을 즐기는 아이가 내일도 역시 즐겁게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학력은 부족할 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내는 실력만큼은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더 느린 템포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만큼 신중한 아이인 것이다. 한 때는 그것이 세상살이에 큰 해가 되지싶어 아이를 닥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아이가 달팽이보다 더 천천히 걷는다 해도 그 아이의 걸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정해진 규율대로만 움직이며, 보이는 고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야 그나마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가 제 머리로 생각하고, 가끔 자주 옆길도 흘깃거리며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해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이 책은 격월간 <민들레>의 발행인 현병호 선생님이 지난 10여 년 동안 <민들레>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처음 대안교육을 고민할 때 <민들레>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지난 1년 간의 대안학교 생활을 생각해 보며 2013년 한 해를 정리해 보자는 의미에서 연말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흔들리는 마음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잡을 수 있었고, 역시 우리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학교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대안교육을 선택할 때 바로 이점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기도 하다. 좋은 학교, 좋은 교사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아이가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것이다. 그것이 대안교육 역시 또다른 형태의 교육과잉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현병호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대안교육이 만능은 아닌 것처럼, 이 책 또한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와 교육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이유를 아는 이라면, 그가 부모이든 교사이든 혹은 그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대안교육과는 무관하게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책이니까 말이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교육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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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1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앞으로
늘 느긋하면서 아름답게 하루하루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그동안 비의딸 님도 즐거우면서 느긋한 삶을 함께 누리셔요~

비의딸 2014-01-14 10:1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란 말이 참 좋아요.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 된 걸까요.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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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책에 자기 이름을 넣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작가들이 가명으로 책을 내는 것은 어째서일까. 작가에게 실제의 삶이 과연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쩌면 즐겨 볼 만한 -내게 일종의 비밀 신분을 만들어 줌으로써-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에 그처럼 마음이 끌리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266쪽)

 

이상한 일이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얽히고 설킨 세 편의 이야기 중, 앞의 두 편 <유리 도시>와 <유령들>을 읽는 동안 도대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하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책을 재미있게 읽고, 더구나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잠겨있는 방>까지 세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자, 아.. 하는 '도'트는 소리와 함께 '어쩌면..'하는 나만의 추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옮긴이도 밝히고 있지만, 세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긴밀하게 얽혀있고, 한 편을 읽으므로써 다음 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본의 아니게 탐정 역할을 떠맡은 탐정소설가, 자신이 감시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감시받는 자로 드러난 탐정, 천재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친구의 작품들과 그의 삶의 나머지들을 어느날 그야말로 느닷없이 관리하게 된,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작가가 되지 못한 화자. 이들은 누군가의 괘적을 쫓는 동안 쫓기자와 동화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고, 정작 자신이 하려던 일과 했던 일들, 혹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밀려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

 

뉴욕 3부작이라는 전체 제목은 세 편의 단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이 이야기들과 뉴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감시하고 감시받는 일이 뉴욕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련만. 감시자가 감시받는 자를 쫓으며, 뉴욕의 구석들을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뉴욕이라고는 가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곳이 어디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 이름에 걸맞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역할을 포기하는 자와 스스로 이탈한 자를 찾아 제 역할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쫓는 자 그 조차도 결국엔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

 

어느날 느닷없이 실종된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세상을 향해 자발적 탈락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관심, 칭찬, 사랑.. 혹은 비웃음이나, 미움까지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기대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받게되는 그 모든 것들로 부터 탈출을 시도한 사람의 이야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인에 의해서만 드러나지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떠났을 때 나는 과연 '나' 일 수 있을까.

 

세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 <잠겨 있는 방>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사라진 친구의 작품 관리자가 되고(사실은 남겨진 그의 삶을 관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의 흔적을 쫓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화자의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것은 사라진 작가 팬쇼의 과거 행적이 작가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과 동일하더란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글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기에 단기 선원이 되어 잡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를 했고, 또 언제인가는 순전히 돈을 위해 영화 대본을 요약했던 그러다가 영화 제작자로부터 영화에 데뷔하라는 러브콜을 받기도 했던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을 고스란히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펜쇼의 기행은 폴 오스터의 그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오스터는 펜쇼와 같이 잠적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만의 생>을 출판했던 로맹 가리가 생각난다. 그는 두 번은 받을 수 없다는 콩쿠르 상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두 번 수상했는데, 그가 권총을 물고 자살 한 후에야 대중은 그가 그 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쟁취한 뒤, 작가는 대중으로부터 잠적을 꾀한다. 알려진 자기로써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그 역시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가 아닐까.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홀로 죽어가는 펜쇼 역시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립을 통하여 그가 정말 자유로워 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죽음이 아니고서는(결국 펜쇼는 죽음을 택하지만)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 이며 삶인데, 그는 고작 뿌리뽑힌 존재로 그렇게 고독하게 죽어가는 길을 택했을 뿐은 아니였는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타인에 의하지 않고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길 바란다는 것은 현실성 없게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망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걸까. 해마다 초파일이면 거리에 내걸리는 연등처럼 혹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처럼 얽히고 설켜 줄줄이 엮여있는 것이 삶이다. 누구든 한 사람의 지난 괘적을 쫓자면 그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줄줄히 불을 켜듯 밝혀질 것이다. 또한 그들에 의해 정작 그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정체성이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납득하려면 역시 거울처럼 나를 비쳐주는 다른 존재들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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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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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가 좋았다기 보다는 제목이 너무 좋아서 고른 책이다. 글을 쓰는 일로 먹고산다는 말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할 수 있을까. 

hand to mouth, 빵굽는 타자기. 제목을 참 잘 옮긴 것 같다. 말 그대로 폴 오스터의 타자기는 폴 오스터에게 빵을 만들어주는 기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꼭 오스터에게만 빵을 구워주는 기계였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오스터의 빵기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터가 써낸 글로 빵을 삼은 이들이 있었기에 그의 타자기는 지금껏 오스터를 위한 빵을 구워내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스터는 열여섯 살 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기초적 생계를 위한 시간제 일을 빼면 글을 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번역을 하고, 서평과 시를 쓰고, 더 나중에는 희곡을 썼으며 드디어 소설을 쓰게 되었고, 현재 그의 작품은 세계 20여 나라에서 읽히고 있으며, 특별히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마니아 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전 내가 읽은 폴 오스터의 책은 두 권인데, <달의 궁전>과 <브루클린 풍자극>이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우연'에 얽힌 운명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스터 특유의 요요한 글쓰기 방식으로 획기적이거나 특별한 사연이 모나지 않게 술술 읽히도록 책을 엮어나가는 글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작품이다. <빵굽는 타자기> 에서도 역시 그런 오스터의 식의 서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의 태생이나 어린시절을 비롯한 지난 시절의 개인적 이야기가 재미있고 발랄하게 잘 씌여있다. 

따라서 오스터를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나는, 몹시 사사로운 그의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이기주의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적이며 독립적인 서양인들의 면모가 글로 정리된 오스터의 지난 삶 속에 잘 드러나있고, 때때로 나는 그것이 부럽기도 했다.

오스터의 부모들은 1950년대 후반의 미국 풍토가 그랬듯이 무엇보다 돈을 귀중한 가치로 여기는 평범한 미국민들이 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스터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쓰라는 선동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발견해 내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부터 동류의식을 느꼈다니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질주의적인 부모에게 반항하는 정신주의자 소년이라니. 그러나 어쨌든 이시기에 오스터는 물질만능주의자인 부모들로 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또한 자신은 평생 실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무려 열 살에 말이다.

 

오스터에게 근본적으로 '돈 벌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은 오스터에게도 예외없는 것이여서, 살자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을 위해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시간제 일을 하고, 오로지 돈을 벌기위한 글을 쓰기도 하며 오스터는 진정한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글이 돈을 쫓는 것이 아닌 돈이 글을 쫓는 지경에 드디어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한번 오스터가 부러워 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린 나이부터 알았고, 지금까지의 삶동안 포기하지 않으며 주욱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오스터의 글쓰기 인생에 대한 고백은 무척 재미있었다. 어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거쳐왔기에 '우연'에 관한한 대가가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뒤에 실린 희곡 세편에 대해서라면 글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희곡읽기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역시 나에게 오스터는 소설가로 기억될 것이다.

오스터는 글을 쓰는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글을 읽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책을 읽는다. 그런면에서 나는 폴 오스터와 닮았다고 우긴다면 억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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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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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부분의 삶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이 차츰차츰 사라진다. 발명가는 그의 발명품들로 살아남고 건축가는 그가 지은 건물들로 살아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기념물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업적도 남기지 않는다. 남는 것이라고는 몇 권의 앨범, 5학년 때 성적 통지표, 볼링 경기 트로피,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휴가 마지막 날 아침 플로리다의 어느 호텔 객실에서 슬쩍해 온 재떨이 정도가 고작이다. 몇 가지 물건과 몇 가지 서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평가.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날짜를 뒤섞고 사실을 빼먹고 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죽으면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386쪽)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전기를 쓸 계획을 세우는 네이선 글래스는 신문 귀퉁이에 이름 한 자 남기지 않는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망자들의 부모, 자식, 남편, 형제, 자매도 어떤식으로든 고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을테니, 그런 의미에서 유명하지 않은 이들의 전기도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들을 글로 소생시키고, 그의 이야기들은 평생, 혹은 그들을 기억하고자하는 이들이 죽은 뒤까지도 책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를 쓸 계획이 영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보통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로 하자면 소설로 댓 권은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어느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족이나 몇몇 지인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 사람의 전기라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아이디어 라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글래스는 전직 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이었으며, 현재는 이혼한 60대고, 또한 암으로 부터 회복중인 환자, 사랑하는 딸에게 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언뜻 생각하기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간 브루클린에서 한동안 소식이 끊긴 조카와 조카의 딸을 만나고, 그들로 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간다. 그러던 중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인생은 60부터라고 노래해야 하나. 어쨌든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의 전기를 쓰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인 네이선 글래스의 평범한 전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마약중독, 동성 연애, 광신도, 외도, 그리고 이혼, 따위의 일은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라 딱히 얼이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조차 평이하게 들릴 만큼 폴 오스터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재능이 있다.책을 읽는 동안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몰도바가 귀에 울리는 듯 했다. 즉흥적이면서도 우아한 멜로디의.

 

아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보통 차로는 단조롭고 고된 일이라는 요소가 없어지는데, 전체적인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거거든요.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느끼게 되는 일말의 해방감과 잠깐 동안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희열.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고통이 없으면 희열도 없는 법이니까요.(44쪽)

 

행복하다는 느낌, 희열이라는 감정을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개망나니 인생을 살았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면, 한때는 착하고 예뻤던 아이로 기억해준다면 그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며, 그다지 나쁜 삶을 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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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2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삶이라는 것이 평범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생기는거죠. 평범한 사람들도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세상은 말이 적다고 없다고 너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건 아닐까요? 원칙도 소통도...눈, 귀 꽉막아버리는 현실이 참 아픕니다. 책 콕!해둡니다.

비의딸 2013-12-25 08:00   좋아요 0 | URL
저는 작품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전작들을 주욱 훑는 버릇이 있어요. 또,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한 작품은 전작들과 작가의 삶이 그물코마냥 얽히고 섥혀 다음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마치 역사가 그런 것 처럼요.
지난날 말못할 고통과 슬픔으로 오늘이 왔고, 오늘의 아픔들이 새로운 내일을 엮어낼 것이라고 일단은 믿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해요. 이런 현실에 무뎌져버릴까봐서. 눈 앞에것들에 만족해 버리면 어쩌나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 더 좋습니다. 눈이 먼 호르헤스의 말년에 책읽어 주기 아르바이트를 한 알베르토 망구엘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아, 저는 알베르토 망구엘을 정말 좋아합니다.

여울 2013-12-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의 궁전]을 다시 읽고 닫는 오후네요. ㅎㅎ 마치지 못해 여운이 남던 소설인데 다시 살펴보니 새롭군요. 책 읽어주기 알바...망구엘을 좋아하시는군요. 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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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극단으로 몰아감으로써 인생을 배워 나가는 세 탐구자들의 초상을 매혹적으로 그린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말하자면,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이며 우리로서는 우연의 끝자락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의 아무일도 하지않는 행위조차도 중요하게 여겨 무의미하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포그와 자발적 은둔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낸 에핑, 그리고 자기 몸을 부풀림으로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솔로몬 바버가 삶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세 주인공들인데, 소설의 말미에 이들은 서로 부자간이며,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로 부터 손자에 이르는 3대기 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기가막힌 우연 앞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소설의 초점은 얼토당토않은 우연에 있지 않다. 이들의 삶은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서 내면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투쟁을 담고 있다. 이들은 몽상가일지 모르나, 적어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시선으로는 이들을 바라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눈이 먼 에핑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로한 포그는(이 장면은 눈이 먼 호르헤스에게 책읽어주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알베르토 망구엘을 떠오르게 했다) 긴 설명으로 듣는 이를 지치게 할 것이 아니라 듣는이 스스로 그 사물들을 그려낼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을 해야한다는 깨닫음을 얻는다. 이는 내게 무척 극적으로 비쳤는데, 눈에 띄는 모든것들을 일반화하면서 세상을 쉽게만 이해하려 했던 지난날의 게으름을 반성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그런 나태가 단박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옮긴이는 이 소설이 은은한 달빛처럼 엮이면서 달의 이미지로 리얼리티를 창조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통합하고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극적인 사건도 없이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에 마주치는 우연이라니.

그들 3대의 삶은 외로움과 고독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포그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대내림을 끊어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할아버지가 사막에서 돌아와 새 삶을 엮어낸 것처럼, 또는 아버지가 비대한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순간 당당해진 것처럼, 걷기를 멈춘 땅끝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맞는다.

 

물에 물감이 풀리듯 온갖 단어들과, 온갖 의미들을 술술 풀어놓은 폴 오스터의 소설은 그 자체로 미묘하고 매혹적이었지만, 왠일인지 자주 눈에 띄는 오타가 책에의 몰입을 방해하였다. 이럴때 마다 느끼는 것, 원서를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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