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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평점 :
하다못해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반품하는데도 법을 떠나서는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생활이건만, 그렇더라도 법에 관한 것이라면 일단 그 법률용어들의 나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고, 평생 '법원'과는 인연없이 그렇게 무난히 살고 싶은 나에게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는 썩 즐겁게 받아든 책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스믈여섯의 나이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된 법학자인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쉬운 법문장 운동을 주창하고 이끌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또한 이 책이 법률가를 위한 책은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지은이는 법이 만인에게 유용한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1939년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을 1957년 재판을 내면서 쓴 지은이의 서문이 무척이나 재기발랄해서 한번 읽어볼 만 하겠다라는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원문을 고수하는 만큼,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 관해 그동안 무수히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조금은 도전적인, 답변을 하려 한다. "충격적 효과를 노리고 과장을 한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법이 나쁘다고 진실로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음과 같은 답변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14쪽
1957년 재출간시, 서문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미국의 법학자이며 법관이었던 제롬 프랭크 판사는 법이 쉬운 영어로 쓰여야 하며, 법관들이 법률을 복잡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법절차를 단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1776년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을 프레드 로델과 비교하며, 로델의 책이 법조계와 일반 대중들에게 법의 현실에 관한한 새로운 각성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법관도 법원도 없애자는 과격한 로델의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보았다. 또한 재출간의 즈음에서 로델이 자신의 처음 주장을 조금쯤은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 보였지만, 이에 대해 로델은 이렇게 답한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나의 친구 제롬이여,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네.'
처음 출간된 그대로 개정이나 재구성없이 다시 출간된 이 책에서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걱정한 것처럼 그가 완고하거나 교만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조금 걱정은 된다. 법관도 법원도 없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맞는 주장을 펼쳐 마치 심판없는 경기장에서 처럼, 힘 없고 목소리 작은 자들만 곤란하게 되는 그런 현실이 더 강화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정의란 어차피 서는 쪽에 달라지는 것이 맞고보면, 이쪽도 저쩍도 아닌 심판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항상 저쪽 편에 있다는 것, 저편이란 기득권자 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업가가 우리의 경제체제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법률가의 일이다. 법률가는 매번 회사가 설립되고, 주식이나 채권이 발행되고, 물품이 인도되거나 상품이 판매되고, 거래가 성사될 때마다 자문과 지시를 한다. 정교하게 짜인 산업과 금융의 모든 체계는 법률가들이 만든 저택이다. …… 사적인 삶에서조차 법률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서는 집을 사거나 아파트를 빌릴 수 없고, 결혼이나 이혼도 할 수 없으며,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길 수도 없다. 법률가들이 만든 미궁과도 같이 복잡한 의례와 형식을 통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22쪽
그렇다. 법을 떠나서는 운영되기 힘든 것이 문명 사회이며, 문명 사회 속의 개인의 삶이다. 하다못해 물건을 사더라도 그러할진데, 살다가 소송이라도 걸어야 할 판이 되면 일반인들은 어려운 법 용어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법문장과 위엄을 갖춘 검은 법복의 법관 앞에서 지레 수그려들며 옳고 그름의 판가름마저 모호한 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프레드 로델은 법이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부족 시대에 주술사가 있었고,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던 것처럼 법률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세상을 요리하는 사기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이처럼 강경하게 법이 속임수임을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논리적인만큼 교묘한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지 않으며, 법을 집행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고 법이 다름아닌 언어를 다루는 사업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길고 공허하며 복잡한 언어를 다루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고 법률 언어의 대부분은 길고 공허하며 복잡하다. 길고 공허하며 흐릿한 언어를 사회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법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80쪽
일련의 법체계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대기업과 권력을 보호하고, 힘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압제하는 도구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는데, 그러한 사실에 관해서라면 일반 대중들 역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해도 무법천지의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법원과 법관이 제시하는 '정의'를 그런대로 믿을만한 것으로, 그나마 믿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이 없다해서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높은 곳에 앉아 권위의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이 없다면, 요소요소에서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상관없이 치우치지 않는 판결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법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현재의 방법을 버리자는 것인데 그것이 법원과 법조인인 것이다.
법 앞에 무시되는 형평성에 관해 토로하는 책은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이 부조리하게 악용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법을 그나마라도 정의롭도록 여겨지게 만들자는 주장에 불가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그저 법의 불공함을 알리는 것에 있지 않다라고 로델은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이 책의 목적은 그보다는 법이라고 하는 사이비 과학 전체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속임수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법은 리처드 휘트니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속임수이고, 한 덩이의 빵을 훔친 배고픈 남자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소작인을 옹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이자 생활자를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시민의 자유를 보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지주회사의 이익을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234쪽
검사, 변호사를 거쳐 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법학계의 이단아로 불리우는 김두식은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우리 법조계의 부조리와 뒤틀린 사법시스템을 낱낱이 고발하고, 시민들이 나서서 법조인들과 소통하며 사법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39년 미국의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을 아예 없애야만 사법개혁이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1957년 재출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2014년 오늘에 이르러서도 역시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달라졌다면 멀리 이국땅인 이곳에서 재출간되는 일조차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사업, 정부, 심지어 사적인 삶마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모순적이며, 부조리한 추상적 원칙의 감독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할 것인가? 답은 하나다. 그 답은 법률가를 제거하고, 법을 우리의 법체계로부터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요술쟁이와 그들의 요술을 함께 폐기 처분하고 우리의 문명을 보통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정의와 공평함에 봉사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알기 쉬운 규범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255쪽
모든 거래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뭉치지 않은 다음에야 약자편을 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법을 쉬운 용어로 풀어 써, 누구라도 법전을 읽고 자신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에 나는 적극 찬성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성문법을 일반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재편성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 노동법 하위의 임금채권보장법은 경기의 변동 및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사업의 계속이 불가능하거나 기업의 경영이 불안정하여 임금 등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퇴직한 근로자에게 그 지급을 보장하는 조치를 강구하는 법률이다. 노동법에 이러한 조항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최근에 알았으며, 이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주변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사실에 대해 나는 매우 놀랐는데, 살면서 꼭 필요한 살아있는 지식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는 대다수가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함에도 교과 과정 중 노동법의 항목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사회인이 되고서도 노동자로서 노동법을 들먹이면 마치 회사를 말아먹을 노조나 결성하려드는 불량인자로 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반인들에게 법은 더욱 멀다. 법이 만인에게 유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쉬운 언어로 풀어쓴 '법'을 교육과정 중에 반드시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법원이나 법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법조인들을 없애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이 과격하지만 옳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지 개혁해야 할 것이 사법체계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세상을 운영하는 기존의 시스템을 모두 바꿔야 가능할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점만을 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