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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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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카운티지. 그래서 거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조차 없어.

그래. 그럼 블랙스완그린은 검은 백조로 유명한 거야. 초록 백조로 유명한 거야?

아냐. 흰 백조도 없어.

블랙스완그린에 백조가 없다고?

그래. 그냥 마을의 우스갯소리 비슷한 거야. -327쪽

어느 지방 소도시라도 그러기쉽지만 블랙스완그린 역시 폐쇄적이고 완고하며, 보수적인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들은 외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장미전쟁 때부터 블랙스완그린에서 살아오던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외부인으로 여기는 그런 곳이다. 외부인이라는 것은 '우리'라고 불리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의미인데, 외부와의 경계를 지음으로써 블랙스완그린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어른들과 달리 젊은애들은 어서 빨리 독립해 답답한 작은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전통을 중요시하는 어른들조차 젊었을 때는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다 블랙스완그린을 떠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블랙스완그린을 둥지로 여기며 어른이되고 짐짓 블랙스완그린만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중늙은이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작은마을 블랙스완그린을 영국 전체로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전쟁을 벌였던 1982년으로, 본시 아르헨티나의 영토였던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국인들인 자신들을 선민으로, 뒤늦게 포클랜드를 되찾고자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압제자의 지배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하는 후진국민들 쯤으로 여긴다. 아르헨티나민들의 입장에서는 영국군인들이야 말로 압제자이며 날강도 심보를 가진 외부인들인데 말이다. 여기서 애국심이 조장되고, 전쟁은 3차대전으로 확대될 여지를 품은채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죄없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역시 외부와의 경계짓기를 통해 내부를 돈독히 하자는 수작으로 볼 수 있겠는데, 무릇 이 시기는 영국의 대처수상이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국영기업을 줄여가던 바로 그 시기였으니 말이다.

또한 소년들은 패거리를 짓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왕따인 것이다.

외부와의 경계짓기. 소년이거나 어른이거나 다름없이 어딘가에 포함된 '내'가 되기는 목숨을 걸고 덤벼들만큼 중요한 일이다.

 

패거리 만들기가 잘되려면 피가 필요한 법이다. -388

블랙스완그린에 11년째 살고있는 제이슨 테일러는 열세살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사춘기란 자신이 남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감과 동시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우리나라 소년들 사이에선 삼선 슬리퍼나 노스페이스 등으로 자신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표현하곤 하지않던가).

제이슨 역시 자신이 다른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면서, 자신의 다름을 비극으로 여기며 극도로 회피하고 애써 감추려 한다. 이런 노력은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과 함께 또래들에게 떠받들여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 제이슨에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행맨'으로 표현되는 그것은 말더듬이증이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소망의 결과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눈에 띄고 싶다는 욕망의 결과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제이슨은 간혹 말을 더듬곤 한다. 말더듬이증만 제외한다면 제이슨은 아주 평범한 소년으로 공부도 상급반 수준이며 운동신경도 그리 둔하지 않다. 때문에 또래의 말썽꾸러기들로 부터 낙오되지 않기는 매우 손쉬워 보이지만, 말을 더듬는 제이슨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한편, 제이슨에게는 사물을 보고 흘리지않는 관찰력, 또는 깊은 사고력 따위가 있었는데, 거기에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 종종 시를 쓰곤 한다. 그러나 작은 시골마을의 열세살 소년에게 시적 감수성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로, 마을의 말썽꾸러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제이슨은 그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소설 <블랙스완그린>은 열세살 소년 제이슨이 또래들에게 받아들여지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장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성장소설로만 이해한다면 <블랙스완그린>은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다. 실제로 초입에는 너무나 많은 소년들이 등장해서 누가 누구인지, 이애가 말썽꾸러기인 것인지, 아니면 바보인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거기에 화자가 소년 시인인 만큼 묘사와 은유가 넘쳐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자 은유와 생략이 많은 제이슨의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 있었고, 종종 시인다운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가을은 곰팡내가 나고, 열매들은 어쩐지 지저분해 보이고, 나뭇잎들은 녹슨 것처럼 적갈색으로 변하고, 멀리 날아가는 철새들은 V자 대형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저녁은 연기가 자욱하고, 밤은 싸늘하다. 가을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을이 아픈 줄도 미처 몰랐다. -416쪽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 제이슨은 또래들과의 갈등과 부모님간의 불화 사이에서 점점 짓눌려가지만 바로 그 슬픔때문에 점점 더 내면이 충만해져만 간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른들은 사람은 여든까지 살고, 청소년기의 광란은 고작해야 사년이면 사그라드는 것이니 견디라고 하거나, 주모자의 힘줄을 끊어놓으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충고 밖에 하질 않는다. 견디거나 한명만 죽도록 패주거나 어찌되었든 스스로 이겨내라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나중에 일이 벌어지고 나면, 왜 말 하질 않았느냐고 아이를 질타하는 것은 무책임한 어른들의 특기인 걸까.

 

'다른'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차별하는 모든 심리가 바로 이러 할 것인데, 결국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위로받고 싶은 것일테지만, 그 무엇보다 천박한 것은 바로 그것으로 내 존재의 증명을 위해 누군가를 차별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사춘기 시인 제이슨의 눈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제이슨이 성장기에 겪은 고통을 이겨내거나 그렇지못하거나 어떻든 삶은 계속될 것이고, 삶이 계속되는 동안 차별하거나 차별받는 일들 역시 계속될 것이다. 한 번은 즐겁게, 또 한 번은 서럽게...

 

<블랙스완그린>에서 아주 매혹적인 인물을 만났는데,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인물이다. 벨기에인인 에바 크롬린크 부인이 바로 그러한데, 그녀는 기품있는 노부인으로 제이슨이 야만인과 같은 사춘기 소년의 무리 속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아름다움의 추상성에 관해 제이슨에게 가르치며, 제이슨이 시인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인생에 몇 안되는 귀중한 스승을 만나는 행운을 잡은 제이슨은 안타깝게도 막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는 찰라, 그녀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좀 더 오래 제이슨과 함께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때문에 내 마음이 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 삶 속에 그녀와 같은 존재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그런기회를 놓쳤던 기억으로 마음이 아리다.

옮긴이의 글을 보니, 에바 크롬린크는 데이비드 미첼의 전작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등장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아, 에바 크롬린크를 따라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건너가야 할까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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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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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작들은 읽기 쉽지 않다는 통념을 깼으며, 소설의 종말을 말하는 서구 작가들의 기우를 무너뜨린 작품이라는 평을받는 <백년의 고독>을 읽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종말 씩이나 말하는 서구의 도도함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위대한 작품을 알아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만큼, 나로서는 이 소설이 그만큼이나 훌륭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재미'라는 코드로 이 책을 이해할 때 과연 '썩' 재미있었다 라고 말 할 수는 있겠다.

일상과 환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마구 얽혀들어가 버무려져 시간순으로 배열되지 않은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과도한 몰입이 필요했던 것과, 가문의 긴 역사를 통해 똑같은 이름이 되풀이 됨으로써, 호세 아르까디오가 할아버지 아르까디오인지 손자의 손자 아르까디오를 말하는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음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또한 번역서가 가진 일반적 문제와 함께, 워낙의 작품이 뭐가 뭔지 헛갈리는 마술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옴이 더해져 하여튼 읽기 쉽지 않은 책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앞장에서는 분명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고, 멀쩡한 여인이 대낮에 담요를 타고 승천하고, 흙이나 석회를 긁어먹고 사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끓고있는 우유가 구더기 더미로 변한다던가, 나비를 몰고 다니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고,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는 백 살이 넘은 우르술라와 백 사십 살이 넘어 더 이상의 나이 세기가 무의미해진 빨라르 떼르네라가 있다. 수의를 다 완성하는 날 해질 무렵에 고통도 두려움도 비통함도 느끼지 않고 죽게될 것이라고 아마란따에게 알려주는 죽음의 사신이 등장하기도 하며, 환상의 도시 '마꼰도'의 번영을 앗아갈 비는 사년 십 일 개월 이틀동안 내리며, 급기야는 근친상간의 결과로 우르술라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돼지꼬리를 단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축축하고 고요한 낙원인 '마꼰도'의 브엔디아 가문은 막을 내린다.

브엔디아 가문의 백년 간의 일상 속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야만 하는 일' 들로, 집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럼으로 브엔디아 가문의 몰락도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간이란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닌 먼지와 같은 존재이며, 인생이란 찬라와 같다는 오랜 경구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콜롬비아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라고 하더라만, 나로서는 환상문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사문학도 아니며, 근친상간이 주제인 에로문학도 아닌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문의 몰락 과정을 다루는 여러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단순한 '재미'만을 추종하며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아, 나는 이 책에서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동종교배는 열등한 자손을 낳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고 감상을 적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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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14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즐겁게 읽으셨나 봐요.
즐겁게 읽으셨기에 별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가만히 마음속으로 되새기셨겠지요.

비의딸 2014-02-17 12:22   좋아요 0 | URL
모든 책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책이란 물건이 즐거워요.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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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반품하는데도 법을 떠나서는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생활이건만, 그렇더라도 법에 관한 것이라면 일단  그 법률용어들의 나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고, 평생 '법원'과는 인연없이 그렇게 무난히 살고 싶은 나에게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는 썩 즐겁게 받아든 책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스믈여섯의 나이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된 법학자인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쉬운 법문장 운동을 주창하고 이끌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또한 이 책이 법률가를 위한 책은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지은이는 법이 만인에게 유용한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1939년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을 1957년 재판을 내면서 쓴 지은이의 서문이 무척이나 재기발랄해서 한번 읽어볼 만 하겠다라는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원문을 고수하는 만큼,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 관해 그동안 무수히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조금은 도전적인, 답변을 하려 한다. "충격적 효과를 노리고 과장을 한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법이 나쁘다고 진실로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음과 같은 답변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14쪽

1957년 재출간시, 서문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미국의 법학자이며 법관이었던 제롬 프랭크 판사는 법이 쉬운 영어로 쓰여야 하며, 법관들이 법률을 복잡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법절차를 단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1776년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을 프레드 로델과 비교하며, 로델의 책이 법조계와 일반 대중들에게 법의 현실에 관한한 새로운 각성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법관도 법원도 없애자는 과격한 로델의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보았다. 또한 재출간의 즈음에서 로델이 자신의 처음 주장을 조금쯤은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 보였지만, 이에 대해 로델은 이렇게 답한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나의 친구 제롬이여,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네.'

처음 출간된 그대로 개정이나 재구성없이 다시 출간된 이 책에서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걱정한 것처럼 그가 완고하거나 교만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조금 걱정은 된다. 법관도 법원도 없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맞는 주장을 펼쳐 마치 심판없는 경기장에서 처럼, 힘 없고 목소리 작은 자들만 곤란하게 되는 그런 현실이 더 강화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정의란 어차피 서는 쪽에 달라지는 것이 맞고보면, 이쪽도 저쩍도 아닌 심판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항상 저쪽 편에 있다는 것, 저편이란 기득권자 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업가가 우리의 경제체제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법률가의 일이다. 법률가는 매번 회사가 설립되고, 주식이나 채권이 발행되고, 물품이 인도되거나 상품이 판매되고, 거래가 성사될 때마다 자문과 지시를 한다. 정교하게 짜인 산업과 금융의 모든 체계는 법률가들이 만든 저택이다. …… 사적인 삶에서조차 법률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서는 집을 사거나 아파트를 빌릴 수 없고, 결혼이나 이혼도 할 수 없으며,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길 수도 없다. 법률가들이 만든 미궁과도 같이 복잡한 의례와 형식을 통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22쪽

그렇다. 법을 떠나서는 운영되기 힘든 것이 문명 사회이며, 문명 사회 속의 개인의 삶이다. 하다못해 물건을 사더라도 그러할진데, 살다가 소송이라도 걸어야 할 판이 되면 일반인들은 어려운 법 용어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법문장과 위엄을 갖춘 검은 법복의 법관 앞에서 지레 수그려들며 옳고 그름의 판가름마저 모호한 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프레드 로델은 법이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부족 시대에 주술사가 있었고,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던 것처럼 법률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세상을 요리하는 사기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이처럼 강경하게 법이 속임수임을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논리적인만큼 교묘한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지 않으며, 법을 집행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고 법이 다름아닌 언어를 다루는 사업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길고 공허하며 복잡한 언어를 다루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고 법률 언어의 대부분은 길고 공허하며 복잡하다. 길고 공허하며 흐릿한 언어를 사회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법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80쪽

일련의 법체계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대기업과 권력을 보호하고, 힘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압제하는 도구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는데, 그러한 사실에 관해서라면 일반 대중들 역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해도 무법천지의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법원과 법관이 제시하는 '정의'를 그런대로 믿을만한 것으로, 그나마 믿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이 없다해서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높은 곳에 앉아 권위의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이 없다면, 요소요소에서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상관없이 치우치지 않는 판결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법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현재의 방법을 버리자는 것인데 그것이 법원과 법조인인 것이다.

법 앞에 무시되는 형평성에 관해 토로하는 책은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이 부조리하게 악용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법을 그나마라도 정의롭도록 여겨지게 만들자는 주장에 불가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그저 법의 불공함을 알리는 것에 있지 않다라고 로델은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이 책의 목적은 그보다는 법이라고 하는 사이비 과학 전체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속임수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법은 리처드 휘트니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속임수이고, 한 덩이의 빵을 훔친 배고픈 남자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소작인을 옹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이자 생활자를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시민의 자유를 보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지주회사의 이익을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234쪽

검사, 변호사를 거쳐 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법학계의 이단아로 불리우는 김두식은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우리 법조계의 부조리와 뒤틀린 사법시스템을 낱낱이 고발하고, 시민들이 나서서 법조인들과 소통하며 사법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39년 미국의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을 아예 없애야만 사법개혁이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1957년 재출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2014년 오늘에 이르러서도 역시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달라졌다면 멀리 이국땅인 이곳에서 재출간되는 일조차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사업, 정부, 심지어 사적인 삶마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모순적이며, 부조리한 추상적 원칙의 감독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할 것인가? 답은 하나다. 그 답은 법률가를 제거하고, 법을 우리의 법체계로부터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요술쟁이와 그들의 요술을 함께 폐기 처분하고 우리의 문명을 보통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정의와 공평함에 봉사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알기 쉬운 규범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255쪽

모든 거래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뭉치지 않은 다음에야 약자편을 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법을 쉬운 용어로 풀어 써, 누구라도 법전을 읽고 자신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에 나는 적극 찬성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성문법을 일반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재편성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 노동법 하위의 임금채권보장법은 경기의 변동 및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사업의 계속이 불가능하거나 기업의 경영이 불안정하여 임금 등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퇴직한 근로자에게 그 지급을 보장하는 조치를 강구하는 법률이다. 노동법에 이러한 조항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최근에 알았으며, 이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주변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사실에 대해 나는 매우 놀랐는데, 살면서 꼭 필요한 살아있는 지식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는 대다수가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함에도 교과 과정 중 노동법의 항목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사회인이 되고서도 노동자로서 노동법을 들먹이면 마치 회사를 말아먹을 노조나 결성하려드는 불량인자로 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반인들에게 법은 더욱 멀다. 법이 만인에게 유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쉬운 언어로 풀어쓴 '법'을 교육과정 중에 반드시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법원이나 법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법조인들을 없애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이 과격하지만 옳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지 개혁해야 할 것이 사법체계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세상을 운영하는 기존의 시스템을 모두 바꿔야 가능할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점만을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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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어느 지하생활자의 행복한 책일기 1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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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상한 나라는 멈추지 말고, 돌아보거나 기웃거리지도 말고 앞으로 가라고만 한다. 저 앞의 신호등이 켜지면 무시하거나 욕을 한다. 손가락질한다. 세계화 시대에, 무한 경쟁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자기 성찰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한다. -246쪽

이상한 나라가 바로 여기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나 친절한 설명을 읽은 후에야 이해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막연히 상상하고, '이상한 나라'가 가르키는 방향이 응암동 골목 지하 공간을 향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헌책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헌책만 파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가치를 팔고, 서로의 마음을 팔고, 책에 대한 사랑을 파는 이 헌책방은 돈에 대한 무한사랑으로 무장하고, 경쟁을 통해서만 자기 몫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인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상하지 않은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일일히 설명해줘야 이해할 수 있는 이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물론 다른 전통적인 헌책방하고는 겉모습이 좀 다르지만 세무서에 헌책방으로 신고를 했고 실제로 중고 책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곳이다. (140쪽)

'2009 헌책축제'(이런 축제가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고,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축제가 영 성의없었다는 몇몇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과연 그러했던지 2009년 이후에 서울 헌책축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무척 아쉽다.) 후, 헌책 계통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쓴 글 중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도 아닌데 왜 초청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읽고, 주인장은 서운한 마음에 답글을 달았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다른 유명 헌책방들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것도 켜켜히 숨어있는 많은 헌책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또한 청소년 문화 행사를 열고, 가끔은 노래도 하고 연주하며, 전시를 열기도 하지만 그러나 헌책방이 맞다. 뿐만 아니라 지역민을 위한 책읽기 모임을 열기도 하고, 자신의 책을 가져다놓고 그 책이 팔리면 포인트를 적립을 받아 다른 책으로 바꿔볼 수 있는 순환도서를 운영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장소를 대여하기도 하는 이곳은그러나 근본적으로 중고도서를 사고파는 헌책방이 맞다.

헌책방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책을 팔아 돈을 벌기 보다는 책을 통해 사람사는 세상다운 가치를 공유하고 싶다는 주인장의 독특한 세계관, 인생관 때문이다. 그는 동네마다 이러한 책방 하나쯤 갖춘 그런 나라가 이상하지 않은 나라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헌책방 주인이 우리동네에 없다는 것이 한참이나 억울했다. 앗, 그렇다면 내가 이런 헌책방 주인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다.

 

책방은 주인 혼자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가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 가치는 책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동네 한구석에서 연기처럼 피어나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 고향 동네에서는 밥 먹을 때가 되면 온 동네에 밥 냄새가 난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동네 골목 곳곳에 들어선 작고 소박한 책방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바로 구수한 밥 냄새가 되어 사람들을 배부르게 만들고, 배고픈 사람에게 원 없이 뜨끈한 밥을 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작은 책방이, 그 책방을 들고 나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281쪽)

진실로 진실로 우리동네에 이런 책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퇴근길이던 저녁을 먹고난 후의 산책길이던 친구집을 들르듯, 무심결에 편안한 마음으로 습관처럼 들러 책을 고르고,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작은 책방 하나씩 동네마다 품을 수 있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이토록 강팍하게 여겨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또한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피시방엘 가노라는 말은 안하는 이상하지 않은 동네가 될 것도 같다. 억지로 독서토론 학원에 등떠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이런 공간 하나쯤 동네에 있어도 좋지않겠나. 아니 하나쯤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나.

 

책방에서 책만 팔면 그건 책이 아니라 책처럼 생긴 물건을 파는 거나 같다. 책을 파는 책방이라면 책 안에 있는 가치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가치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다. 그러니까 책만 팔아서는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가치를 만드는 건 누구 한 사람이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만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철학하고, 그걸 그러모아 계획해야 하는 일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말 그대로 이상한 나라에 있는 헌책방이다. 나는 여기서 착한 일을 많이 만들고 싶다. 돈은 조금만 벌고 남은 건 다 착한 일 하는 데 쓰고 싶다. 착한 사람들 모이는 책방이 여기저기 동네마다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가난한 동네에도 책방이 생기고 부자 동네에도 책방이 생겨서 그 많은 책방들이 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로 가득 넘치면 좋겠다.(284쪽)

주인장의 이런 생각들을 읽으며, 이런 책방 하나 없는 우리동네가 갑자기 시큰둥하게 여겨졌다. 불과 1년전, 베란다 앞쪽에 산이 보이고, 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와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난 후, 얼마나 행복했던지를 까막득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없는 것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나'라도, 다만 '우리아이'라도 책을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다독여야 겠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이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며, '우리아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기에 말이다.

살아가는 동안 5,000권 쯤의 책을 더 읽고, 감상을 쓰고싶다는 꿈 외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좋은 책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치를 나눌 수 있는 이런 소박한 책방 하나, 나도 꾸리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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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1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샵은 '중고샵'이나 '중고서점'이지 '헌책방'이 아닙니다.
이분이 하는 곳도 '복합문화공간'이나 다른 차원 책방이지 '헌책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헌책방은 '헌책을 파는 곳'이 헌책방이니까요.
예스24나 다른 인터넷책방에서 '중고 서적'을 판대서
이곳이 '헌책방'이 되지 않아요.

여러 문화활동을 하면서 '중고 책'을 판대서 헌책방이 되지 않습니다.
헌책을 파는 가게로 있어야 헌책방이고,
헌책방으로 있으면서 문화활동을 할 수도 있을 뿐입니다.

'전통적인 헌책방'이란 따로 없습니다.
'전통적인 옷가게'나 '전통적인 극장'이 따로 없고,
'전통적인 논'이나 '전통적인 시골'이 따로 있지도 않아요.

헌책방은 헌책방일 뿐이고,
'복합문화공간'은 그저 '복합문화공간'일 뿐이에요.
'헌책방'이라는 공간을 좋아하기에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쓰는 일은 자유이지만,
이 자유를 내세워서,
'헌책방'을 하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eBook]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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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전에 이미 러시아 최고의 작가였다. 평생 대중의 냉대 속에 묻혀 살다가, 죽고 난 후에야 명성과 명예를 얻은 불운의 작가가 아니였음에도 대부분의 경우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안타깝게도 생존을 위해 써야만 했던 당대 러시아 최고의 작가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헉! 소리가 나게 놀랐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벌어 다름아닌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써야했던 대 작가라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장황한 도스토예프스키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겠노라고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 였다.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고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을 번역한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전에 대문호 톨스토이를 근본주의에 미친 노인으로 해석한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뜻 이번 책도 고를 수 있었다. 평생을 돈에 쫓기며, 돈을 쫓아 산 또 한 명의 대 작가라니. 다소 실망스럽지만 이 책에 대해서라면 이번에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친근하게 읽히고 싶어 쓴 책이라는 석영중 교수의 말처럼 이 책과 함께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흔히 말하는 고리타분한 고전작가라기 보다는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처럼 흥미진진할 수 있겠다 싶다.

 

석영중 교수가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의 돈은 자유이며, 시간이고, 인간관계의 기본 고리이다. 또한 돈은 무엇보다 힘이며 권력이다. 이러한 통찰은 늘 돈에 쫓겨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산 경험에 의한 것으로 책상물림에 의한 죽은 지식이 아닌 것이다.

공병학교에 다니던 청년시절에는 과시용 소비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 토스토예프스키의 전생애를 통해 늘 돈이 궁했던 것은 이른바 측은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빈곤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너그러웠던 탓에 늘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죽은 형의 빚을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떠안았고, 형의 남겨진 가족들과 의붓아들에 대한 책임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는 아내 안나에게 선물하는 것 좋아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분수를 넘는 지나친 적선이나 선심이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치나 낭비 때문은 아니였더라도 늘 돈에 쫓긴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번에 큰 돈을 벌기 위해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쓴 작품이 바로 <노름꾼>이다. 이렇듯 돈에 대한 작가의 경험은 여러 작품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돈 때문에 벌어진 살인 사건 아니던가.

어쨌든 도박 때문에라도 돈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 커졌으며, 돈을 쫓고 돈에 쫓기는 악순환의 반복 속에서 매번 책을 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판사로부터 미리 돈을 당겨 쓰거나 지인들에게 애처러운 편지를 써서 빌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돈을 빌린 지인 중 트루게네프가 있는데, 이후 트루게네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행동은 도저히 대작가 답지 못해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또 그도 역시 중년의 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작가라기 보다는 돈에 쫓기던 불쌍한 삶이였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하긴 하다. 이렇듯 돈에 쫓기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빚쟁이 인생은 폐동맥 파열로 60세에 사망하기 얼마 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늘 돈이 부족했던 도스토예프스키임에도 그가 돈을 삶의 전부이며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에 대한 판단보다는 돈의 철학을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며, 돈을 이해한 사람이었다라고 석영중 교수는 말한다. 또, 도스토예프스키는 경제학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숫자를 무엇보다 어려워했고, 때문에 경제에 대해 이론보다는 감성적으로 다가선 사람이라고 했다. 이부분에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다름 아닌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돈을 코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 즐거웠다. 이미 읽었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장면을 기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새롭게 안 사실들에 대해 흥분하기도 했다. 또한 새롭게 안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두 작품을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읽지 않은 <악령>이나 <백치>를 먼저 읽고 싶다.

 

에필로그에서 석영중 교수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라고 했다. 사실 조금 실망이다. 행복을 위해 산다니 너무나 상투적이고 교과서 적이다. 인간은 행복해 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 그야말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돈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듯이 행복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쫓았던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살자면 무언가 눈에 보이는 목적이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때문에 수중에 돈이 들어오더라도 개인적인 사치나 낭비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쓰듯 퍼부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도스토예프스키가 돈에 쫓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대작가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력이 경험을 쫓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는 돈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돈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사랑했다면 쌓아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흐믓해 했을텐데, 그는 늘 돈을 써버리지 못해 안달이였으니 말이다.

이 책으로 삶과 행복에 관한 비밀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숨은 그림은 짜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과 함께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정말 흥미진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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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0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끼 님은 돈에 시달리며 글을 쓴 일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요.
그런데,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즐겁게 가난을 받아들이면서
온갖 경험을 다 하고,
이 경험을 다시 글로 썼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무튼, 도끼 님은
글을 쓰며 누린 고단한 삶을
언제나 즐겁게 맞아들였으리라 생각해요.

비의딸 2014-02-09 16:2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즐겁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어쨌든 보통 사람은 아니였던게 분명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