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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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 중이었던 1992년 5월27일 사라예보의 한 시장에서 빵을 사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박격포탄이 덮쳤다. 이 포격으로 단순히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22명이 죽었고, 최소 70명이 다쳤다. 이튿날부터 22일 동안,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그날 그 장소에서 죽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리며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다.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의 애도 행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스티븐 갤러웨이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썼다. 그러나 스티븐 갤러웨이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이 책에 등장하는 첼리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1991년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고연방공화국의 밀로셰비치의 도움으로 무장한 보스나이 내 세르비아계 강경 민족주의자들이 분리독립을 저지하겠다고 나서면서 주로 무슬림인 보스니악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이것이 1992년 4월 시작돼 1995년 12월에 종전된 보스니아 내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분리독립을 하기 위해서라면 유고연방과 전쟁을 할 일이지, 보스니아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민족이란 것이 무엇이관대 한 나라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3여년에 걸쳐 지속했단 말인가. 그 속에서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적'은 어떤 것이였던가.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가족과 이웃의 심술맞은 독거노인이 사용할 물을 위해 사흘에 한번씩 죽음이 만연한 길을 왕복해야 하는 케난, 언덕 위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적을 증오해 저격수가 된 애로, 전쟁 초기 아내와 아들을 이탈리아로 보내고 외부세계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이탈리아로 도주할 꿈을 간직한 드라간. 이 세 주인공은 일상이 망가진 전쟁 중일지라도 인간이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을 연주를 멈추지 않는 첼리스트를 통해 깨닫는다.

 

저들이 저 안전한 언덕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이 전쟁이 끝나길 바랄까? 뭔가를 맞히면 행복해 할까? 아니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그들이 살기 위해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로 충분할까? 집에 가서 자기 아이들을 보면 죄책감을 느낄까? 아니면 미래 세대를 위해 대단한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해 할까? -229쪽

도시는 언덕 위의 사람들로 부터 완전히 포위 당했다. 그들은 수시로 아무때고 박격포를 날리고 사격을 가해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물을 구하기 위해 먼길을 걸어야 하고,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며,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 때문에 길조차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사라예보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점점 증오심을 키워간다. 적을 향하던 증오는 점차로 이웃에게로 그 반경을 넓혀간다. 그러나 케난은 심술맞은 이웃을 위한 물 기르기를 포기하지 않고, 애로는 무심한 살인기계로의 전향을 거부하며, 드라간은 자신만 살겠다는 이주를 포기하며 당당히 사라예보 거리를 활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떠밀려서 자신들 삶의 터전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빵을 사려고 줄을 섰던 케난은 22명이 죽어간 장소에서 첼리스트가 22일간 연주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첼리스트의 어이없는 행동은 그저 감상적인 짓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케난이 첼리스트의 연주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그는 첼리스트의 헝클어진 모습이 단정하게 제 모습을 찾고 도시가 스스로 회복되며 케난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행복에 젖는 환상을 본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였다. 실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폭력이 일상이된 전쟁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모두가 제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즉 일상적인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을 때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나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깨닫음이 행동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때 사라예보에 있던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두려움에 떨며 사라예보를 탈출할 기회만을 바라기가 쉽지 않았을까. 이웃에 의해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는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증오에 찬 눈으로 내 몫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존 쿳시의 <추락>에서 루시가 강간과 폭행 속에서도 자신의 농장을 떠나려고 하지 않던 그 장면이 이해되었다. 자신의 터전에서 떠밀려나지는 않겠다는 삶에의 의지, 주체적 인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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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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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Disgrace'치욕은 여운을 남기고자 하는 역자의 의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추락'으로 번역되었다. '치욕'이라는 말보다는 확실히 '추락'이란 단어에서 자의적인 고통의 여운을 느낀다. 치욕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추락은 굳이 타인이 아니여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얀 마텔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읽으며 존 쿳시를 알았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추천한 존 맥스웰 쿠체의 책은 <야만인을 기다리며>였지만, 어쩐일인지 '대출가능'이라고 검색된 그 책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책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돌아 나오기가 아쉬워 존 쿳시의 책을 이것저것 들춰봤다.  얀 마텔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존 쿳시를 꼽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추락>을 골랐다. 표지에 노벨의 금딱지 메달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씌여 있었다. '2003 노벨문학상 수상작'.

 

 

경험상 보자면 다른 상은 몰라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그다지 즐겁게 읽지 못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나 같은 보통의 독자를 겨냥한 작품은 아닌 것인지 끝까지 읽은 책을 손꼽을 정도로 지루하고, 잔뜩 무게를 잡은 자의로 뒤덮여 있기 십상이다. 그런 이유로 살짝 망설이기는 했지만,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이혼까지 한, 쉰 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

쉰 둘의 남자도 성욕때문에 인생을 망치기도 하나? 물론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씩 사회면을 뒤덮는 신문기사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싶다. 실제 삶 속의 그들은 원시적인 욕망 때문에 쉰 두해 동안 쌓아온 것들을 망치거나 하기에는 욕망에 관해서나 삶에 관해서나 이미 너무 많이 알고있는 나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쉰 둘의 그 남자는 바로 그 문제때문에 '추락'으로 접어든다. 나는 치욕보다는 추락이 더 자의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쉰 둘의 그는 남들은 '추락'이라고 보는 그 상황을 추락으로도 치욕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이용해 그를 조롱하고 굴복시키려는 자들을 경계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한편 그의 추락에 관한 이야기는 서막에 불과하다. 그의 딸이 걷는 치욕의 길에 비한다면.

그러나 그의 딸 루시는 치욕을 겪었을 망정 추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에서 '떠남'이 어째서 그녀에게는 명예에 관한 일이 되는 것일까,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계속 '치욕' 속에 머물기를 원하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거부하거나 예속하려는 아프리카의 농경지 외에서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단 말인가.

 

이 책을 이해하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백 년에 걸친 백인 식민사회를 이해해야 하고, 그 후 백인 정권이 종식되고 흑인에게 정권이 이양된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그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낳으며 역사는 되풀이 된다. 루시의 아이는 또 어떤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까.

 

얀 마텔은 문학을 읽으면 '정적감'을 느낄 수 있다 라고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정적감'을 위한 책이다.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치욕과 추락에 관해서.

치욕적일 수 있으나 추락하지는 않는 루시의 삶에 관해서.

존 쿳시를 얀 마텔처럼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일단은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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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05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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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의 지은이 얀 마텔이 자국인 캐다나 수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일방적인 독서클럽을 열어 책과 편지를 보낸 것을 묶은 책,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요>를 읽다가 충동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요>에서 권유된 책의 순서상으로는 세번째였는데, 책과 함께 수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얀 마텔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중 좋아하지 않을 만한 게 없으며, 그녀의 소설들은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을 준다고 썼다.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이라니, 혼자서만 불안해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일까.

얼마 전에 읽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지은이도 애거서 크리스티를 극찬했더랬는데,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집에 푹 빠졌으며, 그녀의 추리소설을 찾아 차비도 없이 걸어서 헌책방을 순례하곤 했다고 했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하지만 추리 소설은 아니였다. 그것이 애거서 크리스티든, 셜록 홈즈든, '사건' 더욱이 '살인 사건'을 다룬다는 면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누구도 추리 소설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어른들은 추리 소설을 읽어야 명석해진다고 추천하곤 했는데도, 나는 아마도 도덕적 자기정체성이 무척이나 강했던 아이였던가 보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겁이 많았거나.

아무튼 얀 마텔의 권유에 휘둘려 수상도 아니면서 충동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게 된 것이다. 때마침 서점의 커피숍에서 얀 마텔의 책을 읽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너시간을 들여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은 소감은, 역시 나는 책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을 덮고나자 갑자기 찾아든 무력감과 함께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집을 읽기 전엔 다른 책에 흥미를 느낄 수 없겠다는 극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아주 사소하고 관련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켜 사건을 해결하는 작달막한 사내 푸아로라니.

반전, 허를 찌르는, 만으로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짜릿함을 맛 본 것이다. '살인'은 '이기'에 도취된 누구나가 저지를 수 있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내가 그때 교과서 사이에 숨켜 보았던 그 책이 '할리퀸'시리즈가 아닌 '애거서 전집'이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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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학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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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인 네흘류도프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빠져 토지의 사유는 죄악이라고 여겨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소유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청년이였다. 그러나 그후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진보적 자유사상은 옅어지고, 점차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안락과 쾌락을 쫓아 생활하게 되면서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어머니가 보내주는 돈이 농민들을 착취해서 얻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와 동시에 순수함를 사랑하던 본성도 옅어져 첫사랑의 이미지로 곱게 남겨두었던 하녀 카튜샤를 범하고, 버리게 된다. 그후 카튜샤는 임신한 상태로 네흘류도프의 고모네 집에서 쫓겨나고, 이곳저곳에서 하녀 생활을 전전하다가 윤락녀로 전락한다.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기구하게도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카튜샤는 살해범으로,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타락한 카튜샤를 한 눈에 알아보고, 자신이 그녀를 농락하고 버린 과거가 알려질 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그러한 불안은 점차로 죄책감으로 번져가고 죄책감은 네흘류도프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튜샤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한편 카튜샤는 윤락녀로서의 삶에 잠식당한 채 큰불만없이  생활하던 중 느닺없는 사건에 말려들고, 그녀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그런 와중에 만난 네흘류도프를 그녀는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고, 이후에도 감옥으로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 네흘류도프를 믿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고, 십년 전처럼 네흘류도프에게 점차로 의지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를 다시는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녀만 원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히고, 실제로 어머니와 고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하거나 싼 값에 대여하고 카튜샤의 시베리아 유형길에 따라나선다.

이처럼 드러나보이는 큰 줄거리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귀공자 네흘류도프와 하녀 카튜샤의 사랑이야기이다. 처음 <부활>을 읽었을 당시만해도 나 역시도 네흘류도프의 카튜샤에 대한 희생적 사랑과 불행한 삶으로 부터 구원받는 카튜샤의 이야기로 이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당시의 귀족청년이 쉽게 저지르곤 했던 실수를 실수로 치부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살인범이 된 카튜샤를 따라가고 원한다면 결혼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귀공자라니, 영 억지스럽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진부한 사랑이야기라니. 아무리 150년도 더 된 사랑 이야기라지만 말이다. 아니, 150년 전 귀족청년과 하녀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 안된다고 여겼다. 때문에 카튜샤가 의심하듯 네흘류도프의 희생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천국행을 위해 또다시 카튜샤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나 역시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활>을 좀 다르게 읽었다. <부활>은 사랑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되,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 관한 이야기이며, 율법에 잠식당한 신과 선에 관한 이야기이고, 부조리한 사회의 계급구조에 대한 고발이며,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살야 하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인생 강좌인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가 감금되어 있는 감옥에 드나들면서,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뇌한다. 어떤 인간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을 판단하고 벌을 줄 수가 있으며, 때로는 목숨을 빼앗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떤 인간들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금하며 때로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또한 그러한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죄책감이 없으며, 오히려 꼭 해야만 하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지, 귀족이라는 무위 속의 인간들은 무슨 권리로 땅을 차지하고, 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온갖 사치를 누리며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제도를 만들어낸 사람들, 그리고 이 규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러한 무서운 상태, 인간 감정에 대한 이와같은 조롱에 대해서 아무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데 대해 그는 매우 놀랐다. 호위병도, 소장도, 면회인도, 죄수와 모두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인정하고 또 이행하고 있었다. -1권, 236쪽

그야말로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부활이라 할 수 있는데, 한 때 그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추종했던 순수한 영혼의 청년이었으나, 이후에는 온갖 향락에 그 자신도 도취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각성을 '부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가 윤락녀가 되고, 종래에는 범죄자가 된 근원에 네흘류도프 자신이 있었음을 자각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누려온 모든 기득권이 민중의 희생을 딛고서야 가능했다는 뉘우침을 카튜샤를 통해 새로이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의, 선, 법률, 신에 관한 모든 행위와 말들이 기존질서를 위한 요설에 지나지 않으며, 야비하고 탐욕스러우며 잔인성마저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부활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예순 한 살 때로,  인생의 온갖 경험을 다지나친 톨스토이의 인생관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 <부활>인 것이다. 그는 도덕주의자로 불리운 만큼, 노년에는 19세기 러시아 문명의 암흑과 비인도주의적인 사회상에 대한 고발에 두려움 없이 덤벼들 수가 있었다. 따라서 톨스토이의 기독교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부활>며, 그의 이런 사상은 네흘류도프의 정신적인 부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2권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 진리가 있다라고 주장해 미치광이로 취급받는 노인이 사실은 현자라는 암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닦은 특수한 지식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직업적 속임수가 문외한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기고, 당대의 문명사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운영하던,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재가 존재했다.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를 운영하는 이들은 바로 법률가들이다.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21쪽

미국의 법학자이며, 형식주의 법학의 추상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쉬운 법문장 운동을 이끌고 있는 프레드 로델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법률가와 법원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옹호하기 위한 고도의 사기집단이며, 때문에 법관과 법원을 없애고 모든 이가 실생활에 필요한 법을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법률 용어와 법 절차가 단순화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프레드 로델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읽은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의 재판 절차와 법률가들의 모습에 주목했는데, 세상의 질서를 위한 종교와 법률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행해지는 온갖 부정과 죄악이 계급적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일어난 일로만 치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프레드 로델은 이러한 부조리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야기가 아닌 <부활>은 때때로 좀 지루하다.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네흘류도프의 자각이나 다짐이 자못 설교조여서 종종 지루해지곤 했다. 아마도 이래서 톨스토이는 '도덕주의자'라고 불렸을 것이다.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옳은 일에 대한 권고는 여전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활>은 읽혀져야만 하는 필독서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 세상의 이치라고 알려진 기존의 질서에 순화되어가는 무력하고 나태한 내 정신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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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3-23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활은 제 인생의 한권의 책입니다 ㅎ
 
[천국보다 낯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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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린 공포 소설이며...'

뒷표지에 실린 문학평론가의 글에 책을 바로 읽지 못하고 몇 일간 미뤄 두었다. 요사이 기분이 매우 저조한 상태에 있는 나로서는 공포소설을 읽을 기분이 영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읽는 공포소설은 실제의 내용보다 몇 배로 더 부풀려져,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곤 한다. 공포물을 즐길 줄 모르는 나는, 이를테면 이 책의 등장인물 중 되도록이면 삶을 비교적 낙관하며 물처럼 흘러가기를 희망하는 '정'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 

 

토요일 하루는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모처럼 뒹굴거리면서 책만 읽고 싶었고, 이처럼 편안한 주말이라면 공포소설도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소개를 읽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조문가는 세친구에게 죽은 친구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따위의 아주 말초적인 공포를 상상했던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너무 익숙해서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던 것에 대한 느닺없는 공포였다. 누군가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는...

 

죽은 친구 A의 조문을 가는 김, 정, 최는 각각의 장에서 차례로 화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한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임에도 표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다소 의아스러운 동시에 공포스럽기까지 했는데, 어떤 대화에 대한 입장이나 정밀한 장면에 대해서라면 보거나 듣는 시각에 따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모순들이 의외의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세 사람의 귀에 모두 다르게 들렸다는 것인데, 정은 한국계 싱어송라이터의 나른한 음색으로, 김은 일본계 미국가수가 부르는 이별의 노래로, 최는 싱가포르계 가수의 사랑찬미가로 들었다거나, 혹은 차 사고로 죽은 친구A의 차를 누군가는 빨간 마티즈로, 또 다른 누군가는 푸른 아토즈로 기억하는 식이였다. 또, A에 대한 기억조차도 각각 표나게 차이를 보였다. 김은 A가 빛나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고 기억하지만, 다른 친구는 그녀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였다고 기억한다든가, 최는 그녀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고 기억하는가 하면, 다른 친구는 그녀가 무척이나 활동적이여서 몇년 간 응원단까지 했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여서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자기만의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기만 옳다라고 주장하기는 얼마나 쉽고도 무서운 일인지.

간혹 지나간 어떤 상황에 대해 내 말이 먹혀들지 않을 때, 비디오로 찍어둘 걸이라고 억지아닌 억지를 할 때가 있다. 내 기억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을 하는 것인데, <천국보다 낯선>을 읽으며 '내가 정말 옳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시점에서 각자의 말을 하던 소설은 마지막에는 한 곳의 시점으로 옮아가는데, 저 높은 곳의 전지적 시점인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나의 시점이다. 영화 속의 영화, 소설 속의 소설이 모두 그 작품을 보는 독자에게로 모이듯이.

어쩌면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것인 것 같다. 내 삶도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건 아닐까. 그러니 내가 옳다라고 우겨대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책을 통틀어 가장 공포스러웠던 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였다.

 

넌 신발 끈을 왜 목에 감고 있어?

간혹, 블로그에 올려둔 리뷰를 읽고 스포가 있다고 미리 써두지 않았느냐며 불평하는 댓글을 보곤 한다. 리뷰를 올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그것이 무슨 잘못한 일인양 서둘러 리뷰를 닫곤 했다. 그러나 리뷰를 적는 것이 어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이니 만큼 책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감상을 적을 방법을 모르겠다.

어쨌든 리뷰를 읽는 것은 책을 미리 살펴보겠다는 의도인 만큼, 스포일러쯤이야 각오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쓰는 것이 내 마음이듯, 읽는 것도 그대마음이니 불평은 조금 부당한 것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이.

더군다나 책을 결말을 알기위해서만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잘쓴 리뷰인들, 본 책을 읽는 것만 할까 말이다.

 

작가가 한 작품을 쓰는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작가마다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하루만에 후딱 작품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한 권 읽는데는 하루, 아무리 긴 작품이라도 길게 잡아 일이주면 충분하다. 이렇게 읽어버리고 나면 문득, 작가에게 미안해지곤 한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작품일텐데 이렇게 쉽게 읽어버려 미안해요. 거기다 미주알고주알 이러고저러고 평까지 하고 말이에요... 하는 심정이 된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욕조에 몸을 담구고서도, 머리를 말리면서도 책을 눈에서 떼지 않은 덕에 모처럼의 휴일을 <천국보다 낯선>에 꼬박 바쳤지만, 어쨌든 작가에게 미안하다. 이렇게 빨리 읽어버려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었어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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