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 - 책덕후가 책을 사랑하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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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게을리 할 때는 책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 없었지만 독서가 주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면 깊은 향수가 생겨 한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책을 잘 읽지 않던 시기에도 가방에는 항상 한두 권의 책을 챙겨 다니다 어떤 계기로 다시 책을 손에 잡게 되면 또 금새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곤 했다.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의 저자 데비 텅은 만화의 주인공을 통해 책을 대하는 자세, 책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 책을 사랑하는 마음, 책이 주는 지식의 습득, 독서를 하는 습관, 독서를 위한 환경과 장소 등을 알려주고 있다. 독서에 깊이 빠져 일상에서 멀어지는 듯한 몇몇 장면을 포함해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덕후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장면은 비오는 날 책을 챙기는 모습이나 항상 책을 휴대하는 모습 그리고 독서하는 사람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는 등이었다. 


데비 텅이 <딱 하나만 선택하면, 책>의 중반에 게제한 '내가 뽑은 걸작선'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의 독서 취향과 내 독서 취향은 다르다는 점을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마음은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데비 텅처럼 책에 대한 큰 사랑을 품지는 못하지만 여생의 마지막까지도 책과 함께 하고픈 마음은 늘 품고 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는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바다. 독서에 좋고 나쁨이 없으며 어떤 분야의 책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독서의 폭을 넓히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읽은 책이 많아질수록 읽고 싶은 책 또한 많아지게 된다. 이미 세상에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검증받은 수많은 명저들이 존재하고 독서를 통해 책에 담긴 지식, 교훈, 그리고 감동을 얻는 것은 삶에 활력을 주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내가 독서의 재미를 느끼고 항상 책을 소지하고 다닌 것은 30대에 이르러서였는데, 40대 중반을 사는 지금은 조금 더 일찍 독서의 재미를 깨우쳤더라면 더 많은 책을 읽고 삶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독서에 관심을 갖고 책이 주는 혜택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에 담긴 데비 텅의 말 가운데 "모든 날이 책 읽기 좋은 날이다."와 "어디에도 책만 한 세상은 없다."가 가장 와닿았으며 지당한 말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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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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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해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많은 독자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인류가 지나온 길을 대략적으로라도 추적하고픈 욕심을 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 어디인지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더라도 대략 3천 년(기원전 1천 년부터) 정도의 세월을 거치며 인간이 행하고 이룩한 굵직굵직한 발자취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인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반복되는 역사의 오점들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지성들이 언급했다시피 우리가 읽는 역사는 승자 중심의 기록이며 권력자와 역사가의 입김이 가미된 가공품이다. 축적된 기록이 방대할수록 여기서 파생되는 저작 또한 증대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서양을 대표하는 로마사와 동양을 대표하는 중국사가 가장 많이 연구되고 다양한 저작이 쏟아져 나오는 듯 보인다. 반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세계사의 변방으로 취급되고 자주 언급되는 순간조차 로마사와 중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로 한정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중앙아시아사>에서 언급되는 중앙아시아는 몽골 초원과 만주에서부터 볼가강에 이른는 지역이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만나 교차하는 가교 역활을 수행했고 로마, 페르시아, 그리고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역이다. 그럼에도 내 독서와 공부의 부족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관한 개괄적 이해가 크게 부족했는데  <중앙아시아사>라는 책을 접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 것을 좋은 기회이자 행운이라 생각한다. 


<중앙아시아사>는 총 9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목민의 기원에서부터 현재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를 축약해 다루고 있다.


유목민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 간 의견이 분분하고 그 시기 또한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략 기원전 4000년경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상당수의 유목민이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목민은 주로 씨족이나 부족단위로 구성되어 말과 양 같은 가축을 거느리고 계절과 환경에 따라 이동했다. 본래 식용으로 사육되던 말이 이동수단과 전투수단으로 발전하면서 유목민의 기마술은 크게 발전했다. 한정된 초지를 두고 유목민 집단 사이의 갈등에서 밀리거나 유목생활을 더이상 영위할 수 없는 부족은 오아시스 주변 등에 발전한 도시에 정주하게 됐다. 유목민과 정주민은 교역을 통해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도 했지만 서로를 침략하는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들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의 영향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뛰어난 기마술을 갖춘 유능한 전사집단이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키루스와 그의 후손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중앙아시아의 서부 지역을 복속시키기도 했지만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기원전 3세기에 몽골에서 출현한 흉노는 주변의 유목민들을 병합하거나 몰아내고 중국제국과 대치했다. 흉노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한 유목민족은 이후 유라시아의 전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흉노는 지속적인 정복활동을 통해 지배영역을 넓혀 나갔지만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이르자 강력한 중앙 행정체제가 부재한 느슨한 부족연맹 형태로 존속하던 흉노 제국은 한제국과의 끊임없는 분쟁과 내부분열로 세력이 약화되고 분열되었다. 결과적으로 흉노의 흥망은 몽골과 중국 변경 지역의 유목민들을 서쪽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흉노에서 파생됐다 여겨지는 훈족이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의 서방 유목민족인 고트족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했고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기여한다(저자 피터 B 골든은 훈족이 여느 저서에 쓰인 것과 달리 그리 흉폭하지도 않았고 로마제국의 쇠망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한제국과 흉노의 쇠망 후 흉노가 지배하던 지역에 북위, 유연, 헤프탈이 등장해 세를 과시했으나 6세기 중엽 등장한 돌궐(Turk, 투르크)에 의해 패망한다. 돌궐은 만주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으며 최초로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라시아 횡단국가를 건설했다. 돌궐 제국이 팽창해 유럽에 가까워지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며 이 세 제국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였다. 돌궐 제국이 장악한 광대한 영토는 수많은 부족 집단의 연맹체제로 유지됐는데 부족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공물과 전리품이 필요했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었다. 돌궐 제국의 성근 부족연맹은 내분이 심했고 7세기 당나라의 부상으로 돌궐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돌궐 제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7세기 말 돌궐 제2제국이 힘을 얻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8세기 중엽 위구르인에 의해 패망하였다. 위구르 제국은 약 1세기 가량(7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까지) 돌궐의 영역을 통치하며 쇠약해진 당나라를 수탈했는데 9세기 중엽 키르키즈인에 의해 멸망했다. 


7세기 무함마드가 전파한 이슬람교는 급격히 세를 확산해 중동을 넘어 중앙아시아로까지 전파되었는데 9세기에 등장한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의 학문과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서돌궐이 장악하던 지역까지 지배력을 획득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이슬람교가 널리 성행하며 중앙아시아는 투르크계와 이란계(페르시아계)가 뒤섞여 다양한 문화를 창출해 냈다. 


돌궐의 영역이였던 지역은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다양한 세력(국가)이 등장하고 사라졌는데 사만 왕조가 몰락하자 셀주크 제국이 뒤를 이었고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이 멸망하자 화라즘이 융성했다. 화라즘과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의 중부는 거란 족의 유민들이 세운 카라 키타이가 장악하고 있었고 보다 동쪽의 만주와 몽골 지역은 금나라가 위치했다.


11세기 몽골은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 느슨한 부족 연맹으로 구성된 유목민 집단이었다. 칭기스 칸(테무진)은 1160년대에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징기스 칸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해 용맹한 전사로 성장한 칭기스 칸의 주변으로 그를 따르는 젊은 용사들이 모였고 징기스 칸은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묶고 씨족 부족 사회의 전통을 없애고 자신에게 복종할 군대를 양성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3세기에 이르자 몽골의 세력은 거대해졌고 칭기스 칸은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해 동쪽으로 고려에서 서쪽의 화라즘까지 진출하였다. 1227년 칭기스 칸이 죽은 후에도 그의 뒤를 이은 칭기스 칸의 아들들은 정복전쟁을 지속해 유럽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서아시아로는 시리아에 이르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중국까지 평정하며 원나라를 세웠다. 


몽골 제국의 팽창은 인재와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으며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꾸준하게 이어진 후계자들의 권력 다툼과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 간의 반목으로 인해 전성기의 힘을 잃고 쇠퇴해 여러개의 국가로 쪼개진다. 화약의 발달은 활과 화살에 의존하는 유목민들의 위상을 끌어 내렸다. 신무기(총)를 도입하려고 시도한 유목인들에게는 그런 류의 무기를 제조할 역량이 부족했고 구매할 여력도 없어 군비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16세기 러시아 제국이 등장해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하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자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서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됐고 17세기 만주족이 중국에 청 제국을 세워 세를 키워나감에 따라 동쪽으로부터의 압박도 받게 되었다. 쇠퇴했거나 분열돼 있던 중앙 아시아의 국가(부족)은 두 제국의 확장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제국과 청 제국이 각각 서와 동에서 팽창해 서로 조우하게 되는데 제국의 국경은 네르친스크조약(1689)과 캬흐타조약(1727)으로 확정된다.


19세기에 들어 청 제국이 내부적 혼란과 실정으로 힘을 잃어간 반면, 러시아 제국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는 카자흐, 키르기즈, 투르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을 침공해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엄청난 영토를 속국으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1917년 두 차례의 혁명을 거쳐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관활하던 수많은 속국(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1991년 해체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중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사>는 3천 년 이상의 중앙아시아 역사를 3백 페이지 가량의 한정된 공간에 축약하고 있고, 어족에 따른 분류나 명칭이 익숙치 않아 기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가 어떤 과정으로 성장하고 변모하였는가의 골자를 접하게 된 점은 '중앙아시아사' 자체 뿐 아니라 이후 세계사를 읽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럽의 역사(로마사 등)와 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중앙아시아사가 필요하듯 중앙아시아사를 이해하는 데 주변 지역의 역사의 이해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중앙아시아사>를 읽으며 단절된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듯 했고 그동안 여러 역사서를 접하면서도 뭔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유럽과 동아시의 역사가 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흘러왔음을 살피게 되었다. 


PS) 글을 읽고 아주 간략하게 리뷰를 작성하는 것조차 버거울정도로 광대한 역사적 사실이 산재해 있는 곳이 중앙아시아라는 점을 알았다. 책의 후반부에 나열된 수많은 참고문헌과 색인으로 이 300페이지 분량에 책에 얼마나 많은 연구가 담겨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사>를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던 이번 기회가 나중에 세계사를 읽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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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
알리스터 맥그래스 엮음,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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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도가 아니다. 종교라는 측면에서 나를 돌아볼 때 똑 부러지는 어떤 신념을 가졌다기보다 불가지론자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라는 책에 관심을 두고 읽어보게 된 것은 세계사를 공부하며 접하게 된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구분이 주어졌고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역사에 기독교가 아주 깊숙이 개입하게 됐음을 알게 됐다. 때때로 교리의 차이에 바탕을 둔 기독교도들 간의 대립은 로마제국을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천 년에 가까운 중세를 거치는 사이 유럽 대륙은 기독교로 뒤덮였으며 철학과 예술을 비롯한 모든 영역은 기독교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신의 뜻에 따른다는 허명아래 자행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은 동서의 갈등을 부추겼고 나중에는 원정의 의미조차 불분명해져 애궂은 희생자 수만 증가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종교적 타락에 대한 반동으로 루터나 칼뱅이 등장해 종교 개혁을 부르짖었고 인쇄술의 진보는 성서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증대시켜 교단과 사제가 장악하고 있던 신의 말씀에 일반인이 다가설 수 있는 활로가 마련됐다. 성서를 해석하는 견해의 차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다양한 종파가 파생되었고 결국 서로의 신념을 유일한 신의 가르침이라 주장하는 교파들 간에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기독교 세력은 원주민들과 그들의 삶(터전, 문화, 종교 등)을 파괴하고 기독교라는 피의 성전을 고착시켰다. 현재까지도 종교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국제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주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같은 뿌리에서 발생된 종교들 간에 더욱 극명한 혐오를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르는 사람보다 변심한 연인을 더욱 증오하는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돌아보면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 이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독교가 세계사를 움직이는 주인공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주워들은 몇몇 단어를 넘어서지 못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어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를 통해 지식을 넓히고 세계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은 간략한 기독교 역사를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 하나님, 예수, 구원, 교회, 그리고 기독교의 소망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 하나님, 예수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모든 글의 저변에 흐르는 '믿음'이라는 측면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됐다. 


리뷰의 첫머리에 언급했다시피 난 기독교도가 아니기에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회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마치 과학자들이 빅뱅이론 이전을 설명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듯(범인의 기준으로는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또한 유일신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지 못하지만 '일단 있다고 믿고' 시작한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인론적 증명 등은 유명하지만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점은 기독교인들조차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지적설계 논증 등) 이론들이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을 읽으며 더 깊이 인식하게 됐다. 


소위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사람들은 현재의 지식으로 밝히지 못하는 어떤 것들, 존재하는 지식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현재의 과학과 지식의 한계로 인해 봉착한 문제임을 인정하고 다가올 미래의 어느 순간에 과학과 지식이 더 발전되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추정한다. 즉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지적 역량의 부족에 말미암은 것이라 간주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대체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양측 모두 근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양측 모두 상대방의 믿음을 인정하기 어려워 한다. 


근현대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모든 종교적 영역은 과학이 대체할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지식의 영역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됐지만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난제에 봉착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으며 과학의 빛에 가려 사라질 것으로 보이던 종교는 여전히 굳건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점을 아는 믿음.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고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영역과 기독교를 설명하는 용어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평상시에 잘못알고 있거나 애매하게 알고 있던 용어들의 정리는 앞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자주 들어본 단어인 삼위일체설은 대략적으로나마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을 읽다보니 오히려 어려워진 부분이다. 글로써는 이해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려운 철학적 주제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을 읽다보면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깊이를 더해주고자 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에 상관없이 기독교가 세계사에 기여한 바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이어지는 독서와 세계사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인문서적으로서나 교양서적으로서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싶어한다. 안타깝게도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보이는 것이 진실된 것이라 믿는 것은 착각이란 사실이다. 보이지 않지만 있으리라는 믿음,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보게(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통해 과학과 신앙은 발전해 왔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어느 위치에 서있는 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가에 따른 것이다. 아마 인간은 언제까지고 과학과 종교로 대립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상대가 그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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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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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은 믿는 것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를 수긍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일관성, 논증적 힘, 그리고 세상을 밝혀준다고 주장하는 거짓 명제들과 우리가 사실로 여기고 싶은 것의 우연한 일치다. 이러한 거짓 명제들이 드러내는 것 우리의 합리성이 지닌 어두운 면모다. (33-34 페이지) 

역사는 인간의 지식이 가속도로 팽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세기 전에는 높은 지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당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식을 섭렵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어졌지만 현대에는 방대한 규모로 인해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현존하는 지식의 극히 일부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나름 지능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 타인의 것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가 원활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타자 간의 신뢰가 전제되었다. 자신의 지식이 자신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짐으로 인해 개인의 내면은 취약해지고 이 틈을 파고드는 각종 음모론에 쉽게 이끌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의심하는 것은 인류 발전에 필수적 요소지만 근거가 빈약한 의심과 특정 목적을 가진 의심은 사회전반에 불신을 퍼트려 건전한 사회에 혼란을 불러온다.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위기를 겪는 것이다. 의심론자들은 의심할 권리를 주장하며 몇몇 그럴싸한 이유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상대에게 납득할만한 해명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막상 의심에 대해 반박하는 요소들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내보인다 할지라도 이들의 의심은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곤 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음모론자들의 의심에 대한 많은 것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지 못하는 이유인데 이 점이 의심론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 된다.


근현대를 거치며 인쇄기, 전보, 라디오, 텔레비젼, 인터넷 등 대중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의(인지적) 공급 혁명을 불러왔고 이를 사회학자 도미니크 카르동은 '공적 발언권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는 한편, 사적 대화의 일부가 공적 공간에 뒤섞이는 행태를 보인다'고 표현했다.


인터넷은 인지적 자유주의를 불러왔지만 광대한 정보 공급에 따른 부작용도 초래한다. 보통 지식(사실)은 이해가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불편한 반면, 신념은 쉽게 동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 정보가 혼재한 상태에서 개인은 진실을 찾기위한 어려움을 마주하기보다는 자신이 믿고자 하는 혹은 믿고 있는 것에 부합되는 정보에 쉽게 다가서는 경향을 보이고 이것이 확증 편향을 부추긴다.


인터넷 상의 정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정보를 취하는 대중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터넷에 올려진 방대한 정보는 실상 전문가에 의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진 신봉자의 적극적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신봉자가 잘못된(틀린) 신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의견에 논리적 반박을 제시할 수 있는 진정한 전문가들은 인터넷 상의 정보 교정에 관심이 없거나 냉소적인 경우가 많아 쉽게 정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빈약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를 대량으로 끌어와 사용한다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대중은 쉽게 선동당하고 선동된 대중의 증가는 인터넷 공간에 부질없는 의심과 그릇된 정보를 더 쌓아나간다. 이 과정이 견고해지면 '진짜 전문가'가 등장해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자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가 어떤 주제를 검색할 때 첫 화면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옳고 그름의 척도가 아닌 신념의 강도에 좌우되게 된다.


2003년 툴루즈 사건(어떤 매춘 남성이 자신이 마이클 잭슨의 친자이며 프랑스 고위 권력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고위 권력자들이 중범죄자를 비호해주고 있다고 주장한 사건)처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저명한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기도 한다. 정보의 공급에 대한 치열한 경쟁은 경쟁사를 앞서기 위한 과열된 시도로 이어진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서두르다보면 정보에 대한 검증 시간이 줄고 결과적으로 정보의 진실성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툴루즈 사건은 공영 방송이 저지른 실수라는 점에서 더 관심과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아주 많다. 사르코지 대통령 부부의 불륜설, 카마르그 해변의 방사능 오염 사건, 프랑스 텔레콤의 연쇄 자살 등 인지 공급에서 우위를 점하고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자 검증되지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은 것처럼 제공함으로써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혼란과 피해를 야기했다. 안타깝게도 정보 공급의 우선권을 유지하고 싶거나 키우고 싶은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제공하는 것의 진위여부가 아닌 그것을 공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파급력과 관심이 돼가고 있다. 정통미디어보다 인터넷 공간에 이런 종류의 실수(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가 더 흔하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각종 오류로 범벅돼 있지만 (미심쩍지만 그럴듯한) 다수의 근거로 무장하고 있어 일반 대중이 해당 문제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거나 논리적 비판을 제시하기 어렵게 됐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급되는 물량은 과거 정통미디어를 통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공급되는 정보의 질은 천태만상을 띤다. 


민주주의의 발달 과정에 시민이 권력주체를 감시할 수 있는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공권력 및 행정의 투명성이 강조되었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라 할지라도 시민의 감시가 덧붙었고 정치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를 필수재로 인식하게 됐다. 투명한 정치/행정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세마리 말(알 권리, 말할 권리, 결정할 권리) 가운데 알 권리가 주어진 것이며 그에 대해 말할 권리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결정할 권리는 다른 말로 참여할 권리를 의미하는 데 이 권리 또한 국정에 관한 시민 대표의 참여로 어느정도 확보된 상태이다. 민주주의의 세마리 말이 모두 원활히 작동한다는 점이 가진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부작용 또한 존재한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알 권리와 말할 권리가 지나치게 오용되기도 한다. 정보 공급자가 정치/행정의 부정을 폭로하는 긍정적 작용도 있지만 지엽적인 혹은 우연히 발생한 사소한 문제를 모아 그럴싸한 스토리를 제공함으로써 언뜻 논리적으로 보이는 음모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편적인 사건만을 나열할 때는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단편들을 연결시켜주는 시나리오를 첨가하게 되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은 '그럴 수도 있겠다.' 라든지 '제시된 것들이 다 틀리지는 않겠지.'라고 착각하게 된다.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의 목소리도 부작용을 지닌다. 기술자나 과학자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조차 시민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감으로써 필요한 대책이 연기되거나 사라지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신념에 쉽게 빠져들거나 다수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포퓰리즘에 빠진다. 그리고 대중들의 이런 성향을 이용해 선동하는 무리가 나타난다. 선동가들은 내실은 포퓰리즘인 어떤 주제를 포퓰리즘이 아닌 숭고한 어떤 것으로 포장해 시민의 눈을 속이고 자신들이 의도한 선동으로 이끈다. 이런 방법으로 외국인 혐오를 유발하거나, 부자를 혐오하도록 유도하거나, 정책을 불신하도록 조장하거나, 권력자를 비방하게끔 한다. 선동에 취약한 시민이 많아지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증가하고 종국에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일에 치중하게 되고 사회발전은 저해받는다. 


다수가 믿는 것이 선(옳음)은 아니기 때문에 정보 과잉 사회를 사는 우리는 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그럴싸한 근거들로 무장했다는 이유로 신념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에서 '지식의 민주주의'로 옮겨가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교육을 통해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면 과학적 사고로 이어지고 지식의 민주주의를 야기할 것이라 추측하지만 이를 반증하는 연구결과는 이미 많이 제시돼 있다. 고학력자일수록 신념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에 대해 저자 제랄드 브로네르는 고학력자들이 습득한 지식으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어떤 신념을 믿을 만한 이유(이성이 아니라 이유다)를 쉽게 발견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이미 갖고 있던 지식이 어떤 일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유도하는 것이다.


지식의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는 정보를 수용함에 있어 비판적 사고를 배양해야 한다. 인지적 구두쇠(어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상태)를 벗어나 우리가 가진 편협함으로부터 해방된 사고를 함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육받은 지식을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체계화를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무언가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때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속적인 훈련이 우리를 각종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언론인처럼 정보를 공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화된 교육을 시행하고 실천함으로써 그들이 신념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티니와 네트워크의 활성화도 지식의 민주주의를 향한 거름이 된다. 전문적 지식의 수준을 막론하고 교사, 과학자, 전문가 등이 자신이 가진 과학적 사실을 공급해주는 체계가 활성화돼야 한다. 과학적 사고가 일반화되고 과학적 접근법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환경은 쉽게 믿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지식의 민주주의를 키울 것이다.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이 지지하거나 수적으로 우세한 정보가 검열과정 없이 마치 진실인냥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신념에 기반한 사고가 만연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발전이 더뎌지거나 퇴보할 수도 있음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건전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체계화, 즉 지식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리뷰에 언급한 내용들 뿐 아니라 저자가 다루는 많은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구체제 사례와 학술적 자료를 담고 있다. 각종 시사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별도로 시사상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근래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하는 책들이 자주 발간되는 것 같다. 고난을 거쳐 현재에 이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이전의 사회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맹점, 즉 중우정치에 대한 염려가 없어질 수 없다. 20세기 후반부터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 획득과 제공이 거의 제약없이 이루어지는데 이점은 우리 사회가 선동하는 무리에 이끌려 진흙창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품게 한다. 사회전반적으로 과학적 사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개인적으로는 '쉽게 믿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지식을 쌓고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도야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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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대백과사전 - 시험, 생활, 교양 상식으로 나눠서 배우는
구라모토 다카후미 지음, 린커넥터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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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구라모토 다카후미는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직무에 수학을 사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깨닫게 된 수학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책을 집필했다. 독자층을 교양대상, 실무대상, 시험대상의 집단으로 구분하고 독자에 따라 중요시되는 수학의 분야와 정도가 다름을 언급하며 별표를 사용해 중요도를 표시하고 있다. 

 



<수학 대백과 사전>은 깊이 있는 문제를 다루는 책이라기 보다 수학의 용어에 대한 정의를 알려주고 수학이 다루는 영역을 개략적으로 소개주고 수학이 가진 확장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 수학은 만국 공통어라는 말이 흔히 사용된다. 수학에 사용되는 숫자와 기호가 논리적으로 연결돼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서부터 우리가 이해하기도 버거운 어려운 공식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언어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많다. 


일상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수학공식을 사용할 일은 많지 않지만 수학이 가진 개념과 논리적 전개는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교양의 목적으로든 논리력 향상을 위한 목적으로든 수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수학 대백과 사전>에 수록된 개념은 내가 수험생이던 1990년대 후반 고등과정의 수학(일반수학, 수학 I, 수학 II)이 다루는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개념과 원리에 치중한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이 점은 수학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기본 개념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요즘도 가끔 머리가 산만할 때 방정식을 풀어보곤 하는데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답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자주 겪는다. 하지만 오래전 배웠던 수학의 용어와 개념들을 많이 잊어버려서 방정식에 치중된 수학을 접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수학 대백과 사전>이 다양한 수학적 원리를 환기시켜 주고 방정식 외의 수학 영역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교양, 실용, 시험의 용도를 구분하고 챕터별로 해당 용도에 따른 중요도를 언급해 준다. 독자로서, 일반인으로서, 수학에서 논리를 배우려는 학생으로서의 입장에서 <수학 대백과 사전>에 담긴 모든 영역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사람에 따라 특정 부분에 더 호감이 갈 것이다. 다른 학문처럼 수학의 영역도 상호 연결된 구조이므로 관심이 가는 분야를 진지하게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수학의 다른 영역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수학을 잘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하지는 않는다. 수학 문제가 주는 재미와 집중을 좋아하는 일반적 아저씨로서 수학을 대할 뿐이며 수학을 통해 내가 가진 사고능력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작동하길 원할 뿐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수학 대백과 사전>처럼 수학을 가볍게 만들어 놓은 책은 접근성도 좋고 얻어가는 것도 큰 도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공부라는 것이 한 번 읽고 어느정도 개념을 잡았더라도 다시 또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을 잊어버릴텐데, 그 때도 쉽게 손에 잡고 싶은 책이란 점이 <수학 대백과 사전>의 가장 큰 장점인 듯 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공부하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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