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은 믿는 것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를 수긍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일관성, 논증적 힘, 그리고 세상을 밝혀준다고 주장하는 거짓 명제들과 우리가 사실로 여기고 싶은 것의 우연한 일치다. 이러한 거짓 명제들이 드러내는 것 우리의 합리성이 지닌 어두운 면모다. (33-34 페이지) 

역사는 인간의 지식이 가속도로 팽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세기 전에는 높은 지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당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식을 섭렵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어졌지만 현대에는 방대한 규모로 인해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현존하는 지식의 극히 일부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나름 지능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 타인의 것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가 원활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타자 간의 신뢰가 전제되었다. 자신의 지식이 자신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짐으로 인해 개인의 내면은 취약해지고 이 틈을 파고드는 각종 음모론에 쉽게 이끌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의심하는 것은 인류 발전에 필수적 요소지만 근거가 빈약한 의심과 특정 목적을 가진 의심은 사회전반에 불신을 퍼트려 건전한 사회에 혼란을 불러온다.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위기를 겪는 것이다. 의심론자들은 의심할 권리를 주장하며 몇몇 그럴싸한 이유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상대에게 납득할만한 해명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막상 의심에 대해 반박하는 요소들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내보인다 할지라도 이들의 의심은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곤 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음모론자들의 의심에 대한 많은 것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지 못하는 이유인데 이 점이 의심론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 된다.


근현대를 거치며 인쇄기, 전보, 라디오, 텔레비젼, 인터넷 등 대중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의(인지적) 공급 혁명을 불러왔고 이를 사회학자 도미니크 카르동은 '공적 발언권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는 한편, 사적 대화의 일부가 공적 공간에 뒤섞이는 행태를 보인다'고 표현했다.


인터넷은 인지적 자유주의를 불러왔지만 광대한 정보 공급에 따른 부작용도 초래한다. 보통 지식(사실)은 이해가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불편한 반면, 신념은 쉽게 동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 정보가 혼재한 상태에서 개인은 진실을 찾기위한 어려움을 마주하기보다는 자신이 믿고자 하는 혹은 믿고 있는 것에 부합되는 정보에 쉽게 다가서는 경향을 보이고 이것이 확증 편향을 부추긴다.


인터넷 상의 정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정보를 취하는 대중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터넷에 올려진 방대한 정보는 실상 전문가에 의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진 신봉자의 적극적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신봉자가 잘못된(틀린) 신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의견에 논리적 반박을 제시할 수 있는 진정한 전문가들은 인터넷 상의 정보 교정에 관심이 없거나 냉소적인 경우가 많아 쉽게 정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빈약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를 대량으로 끌어와 사용한다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대중은 쉽게 선동당하고 선동된 대중의 증가는 인터넷 공간에 부질없는 의심과 그릇된 정보를 더 쌓아나간다. 이 과정이 견고해지면 '진짜 전문가'가 등장해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자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가 어떤 주제를 검색할 때 첫 화면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옳고 그름의 척도가 아닌 신념의 강도에 좌우되게 된다.


2003년 툴루즈 사건(어떤 매춘 남성이 자신이 마이클 잭슨의 친자이며 프랑스 고위 권력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고위 권력자들이 중범죄자를 비호해주고 있다고 주장한 사건)처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저명한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기도 한다. 정보의 공급에 대한 치열한 경쟁은 경쟁사를 앞서기 위한 과열된 시도로 이어진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서두르다보면 정보에 대한 검증 시간이 줄고 결과적으로 정보의 진실성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툴루즈 사건은 공영 방송이 저지른 실수라는 점에서 더 관심과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아주 많다. 사르코지 대통령 부부의 불륜설, 카마르그 해변의 방사능 오염 사건, 프랑스 텔레콤의 연쇄 자살 등 인지 공급에서 우위를 점하고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자 검증되지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은 것처럼 제공함으로써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혼란과 피해를 야기했다. 안타깝게도 정보 공급의 우선권을 유지하고 싶거나 키우고 싶은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제공하는 것의 진위여부가 아닌 그것을 공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파급력과 관심이 돼가고 있다. 정통미디어보다 인터넷 공간에 이런 종류의 실수(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가 더 흔하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각종 오류로 범벅돼 있지만 (미심쩍지만 그럴듯한) 다수의 근거로 무장하고 있어 일반 대중이 해당 문제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거나 논리적 비판을 제시하기 어렵게 됐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급되는 물량은 과거 정통미디어를 통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공급되는 정보의 질은 천태만상을 띤다. 


민주주의의 발달 과정에 시민이 권력주체를 감시할 수 있는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공권력 및 행정의 투명성이 강조되었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라 할지라도 시민의 감시가 덧붙었고 정치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를 필수재로 인식하게 됐다. 투명한 정치/행정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세마리 말(알 권리, 말할 권리, 결정할 권리) 가운데 알 권리가 주어진 것이며 그에 대해 말할 권리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결정할 권리는 다른 말로 참여할 권리를 의미하는 데 이 권리 또한 국정에 관한 시민 대표의 참여로 어느정도 확보된 상태이다. 민주주의의 세마리 말이 모두 원활히 작동한다는 점이 가진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부작용 또한 존재한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알 권리와 말할 권리가 지나치게 오용되기도 한다. 정보 공급자가 정치/행정의 부정을 폭로하는 긍정적 작용도 있지만 지엽적인 혹은 우연히 발생한 사소한 문제를 모아 그럴싸한 스토리를 제공함으로써 언뜻 논리적으로 보이는 음모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편적인 사건만을 나열할 때는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단편들을 연결시켜주는 시나리오를 첨가하게 되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은 '그럴 수도 있겠다.' 라든지 '제시된 것들이 다 틀리지는 않겠지.'라고 착각하게 된다.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의 목소리도 부작용을 지닌다. 기술자나 과학자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조차 시민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감으로써 필요한 대책이 연기되거나 사라지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신념에 쉽게 빠져들거나 다수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포퓰리즘에 빠진다. 그리고 대중들의 이런 성향을 이용해 선동하는 무리가 나타난다. 선동가들은 내실은 포퓰리즘인 어떤 주제를 포퓰리즘이 아닌 숭고한 어떤 것으로 포장해 시민의 눈을 속이고 자신들이 의도한 선동으로 이끈다. 이런 방법으로 외국인 혐오를 유발하거나, 부자를 혐오하도록 유도하거나, 정책을 불신하도록 조장하거나, 권력자를 비방하게끔 한다. 선동에 취약한 시민이 많아지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증가하고 종국에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일에 치중하게 되고 사회발전은 저해받는다. 


다수가 믿는 것이 선(옳음)은 아니기 때문에 정보 과잉 사회를 사는 우리는 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그럴싸한 근거들로 무장했다는 이유로 신념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에서 '지식의 민주주의'로 옮겨가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교육을 통해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면 과학적 사고로 이어지고 지식의 민주주의를 야기할 것이라 추측하지만 이를 반증하는 연구결과는 이미 많이 제시돼 있다. 고학력자일수록 신념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에 대해 저자 제랄드 브로네르는 고학력자들이 습득한 지식으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어떤 신념을 믿을 만한 이유(이성이 아니라 이유다)를 쉽게 발견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이미 갖고 있던 지식이 어떤 일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유도하는 것이다.


지식의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는 정보를 수용함에 있어 비판적 사고를 배양해야 한다. 인지적 구두쇠(어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상태)를 벗어나 우리가 가진 편협함으로부터 해방된 사고를 함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육받은 지식을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체계화를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무언가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때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속적인 훈련이 우리를 각종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언론인처럼 정보를 공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화된 교육을 시행하고 실천함으로써 그들이 신념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티니와 네트워크의 활성화도 지식의 민주주의를 향한 거름이 된다. 전문적 지식의 수준을 막론하고 교사, 과학자, 전문가 등이 자신이 가진 과학적 사실을 공급해주는 체계가 활성화돼야 한다. 과학적 사고가 일반화되고 과학적 접근법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환경은 쉽게 믿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지식의 민주주의를 키울 것이다.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이 지지하거나 수적으로 우세한 정보가 검열과정 없이 마치 진실인냥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신념에 기반한 사고가 만연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발전이 더뎌지거나 퇴보할 수도 있음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건전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체계화, 즉 지식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리뷰에 언급한 내용들 뿐 아니라 저자가 다루는 많은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구체제 사례와 학술적 자료를 담고 있다. 각종 시사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별도로 시사상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근래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하는 책들이 자주 발간되는 것 같다. 고난을 거쳐 현재에 이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이전의 사회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맹점, 즉 중우정치에 대한 염려가 없어질 수 없다. 20세기 후반부터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 획득과 제공이 거의 제약없이 이루어지는데 이점은 우리 사회가 선동하는 무리에 이끌려 진흙창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품게 한다. 사회전반적으로 과학적 사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개인적으로는 '쉽게 믿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지식을 쌓고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도야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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