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 흑선의 내항으로 개항을 시작하여 근대적 개혁을 이루기까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나카 아키라 지음, 김정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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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력이 높아진 열강은 재료의 수급과 생산품의 판매를 위해 앞다투어 식민지 공략에 나섰다.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에 나타나 개항요구를 했을 때, 에도시대를 겪고 있던(서구 열강에 비해 산업화가 덜 돼 있던) 일본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고 1858년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일부 항구를 개방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영사재판권(치외법권), 관세자주권의 결여, 최혜국조관 등 일본측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였으나 당시 중국이 두 차례 아편전쟁을 겪으며 영국에 수모를 당하는 모습은 일본의 조인을 강요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의해 체결되긴 했지만, 조약으로 개항된 3개 항구(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는 수출입이 급격히 증가해 가파른 성장을 보였다. 무역의 발달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신흥거대상인이 등장해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부루주아적 경제가 성장하고 막부 중심의 경제 체제는 힘을 잃었다.


자본주의의 쇄도는 계층의 변화와 분화를 불러왔고 빈부격차를 증대시켜 민중의 반발을 야기했다.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으며 두 세기 넘게 유지돼 온 막부체제를 흔들었다. 기존의 막번체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이 더 주목을 받았다. 천황은 존왕양이 사상의 중심으로 외압의 위기극복을 위한 민족적 상징으로 여겨졌다. 


존왕양이 체제(천황을 표면에 내세우고 외세에 맞서고자 했던)는 조정과 막부의 관계를 재구성했다. 조정과 막부, 조정과 웅번(비유적으로 소출량이 만 석 이상인 막부를 일컫는 말로 세력이 큰 막부를 의미)의 세력이 생겨나고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다. 대외적 기치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은 천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와 이득을 채우려 했다.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존양파와 천황을 상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공무합체파 사이의 대립도 정국 혼란에 기여했다.


1867년 쇼군인 요시노부가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의 '대정봉환 '이 일어난다. 막번제는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나라를 통치한다는 이념으로 정당성을 확보했는데 이 전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줌으로써 막부제의 약화와 혼란스런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 실제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진심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요시노부는 권력을 재탈환하지 못했고 천황 중심의 체제가 더 힘을 받게 됐다.


1868(메이지원)년 메이지정부 수립과 함께 5개조의 서약문을 발표한다.

하나, 널리 회의를 부흥시켜 정치상의 중요한 일을 공론으로 결정한다

하나, 위 아래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활발하게 경륜을 행해야 한다. 

하나, 문무백관이 한결같이,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뜻을 이루고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하의 공도를 따른다. 

하나, 세계에서 지식을 구하고 천황이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이 서약문은 얼핏보면 막번체제를 뒤로하고 민주주의에 다가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막부의 그림자를 청산하고 신정부의 권력 집중(천황의 권위 강화)을 위해 널리 활용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지만 제도가 정립되지 않아 갈피를 못잡는 사이 피폐해진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켰고 막번제의 잔존세력은 신정부와의 전쟁을 도모했다. 보신전쟁(신정부와 막번의 전쟁)은 막부의 경제부담을 가중시켜 번체제의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통해 신정부의 중앙집권력은 강화된다. 


1871(메이지4)년 신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임무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그동안 외국과 맺은 조약의 개정에 대한 예비 교섭을 하고 근대 국가의 선진문물을 조사 연구하는 것이었다. 선진국과 동등한 관계에서 교섭을 진행하고 이들의 발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국제공법(국제법)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제도, 재정, 경제, 산업, 군사, 사회, 교육 등 국가 전반에 걸친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신정부는 알고 있었다.   


1873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10월의 정변'을 통해 당시 일본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후 자본주의의 육성과 보호, 산업화, 치안의 강화, 교육제도 개편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의 서구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느 정도 내치가 진행되자 시선을 조선으로 돌렸다. 1875년 일본의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를 침범한 것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분쟁이 시작됐고 조선으로부터 조일수호조약을 조인받았다. 이는 과거 페리 함대가 일본에서 미일통상수호조약을 받은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이후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을 겪으며 조선은 지배체계와 국정운영은 혼란을 겪게 되고 결국 일본과 청나라 뿐 아닌 서구 열강들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 영국과 같은 대국 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소국(네델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을 둘러보며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유신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이들이 나아가고자 한 방향은 천왕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로,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의 승리가 지렛대가 되어 유신정부의 제국주의로 부추기게 된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국내의 소요를 잠재우는 점에서도 이득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얻는 혜택 또한 컸기 때문에 제국주의/군국주의는 지속된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인권과 자유를 강조하며 흘러나왔지만 강력히 탄압되었으며 인권과 자유가 중심이 된 새로운 체제는 1945년 패전을 기점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구 열강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급속도로 적용해 20세기 초반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나라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쇄국을 고집하거나 열강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의지를 불태울 때 세계사적 흐름에 동조하여 국가를 개혁하고 발전시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이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담당한 것이 '메이지 유신(명치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을 읽기 전 막연히 예상하기를, 일본은 19세기 중엽 흑선을 보고 반강제적으로 개국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열강으로 성장해 결국 제국주의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담긴 내용을 보니 메이지 유신 또한 격동의 시기에 굉장히 많은 잡음과 혼란을 뚫고 이루어진 혁명적 과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은 우리와 밀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사에 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함을 느꼈다. 전체적인 역사적 흐름에 대한 무지와 함께 일본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나 지명 그리고 용어조차 낯설게만 느껴져 <메이지 유신>을 읽으면서도 다른 역사서와 달리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기회를 잡아 일본사 전반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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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우주를 알아야 할 시간
이광식 지음 / 메이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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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볼 때면, 내게 초능력이 있어 몇 광년의 거리를 단숨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도 생존가능하다면 어떨까하는 공상을 한다. 아직도 이런 상상에 빠지는가 하고 피식하게 되지만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은 끊임없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간을 매혹하는 것 같다. 이미 입시를 치른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요즘도 가끔 '수학의 정석'이나 물리의 '하이탑'을 들여다본다. 그런 지식들이 내 삶에 어떤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논리를 키우고 다른 과학서적을 읽을 때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도구로써 수학과 물리를 공부하게 된다. 


과학분야의 신간이 출판되었을 때 읽지 못하더라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함이다. 전공이 자연과학 분야와 거리가 있는데다 나이가 들수록 지적 수행 능력이 떨어져 깊이 있는 이론과 설명은 이해불가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명칭 정도는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50, 우주를 알아야 할 시간>의 저자소개와 책소개를 접하며 끌림이 있었는데, 이 책이 나와 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능한 한 쉽게 씌여졌으며 특정 지식을 깊이있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관심이 가는 분야의 심오한 지식으로 다가설 때 디딤돌 역활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 때문이다. 마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소개를 접한 기분이었다. 




인간은 보통 2미터가 안되는 신장에 100 년에 못미치는 평균수명을 지닌다. 7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름이 대략 13,000 km에 46억 년을 살고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지구는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오래됐지만 이는 지구에 발을 디딘 지 수십만 년에 불과한 인간의 척도일 따름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고 태양계는 우리 은하에 있는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 은하와 같은 여러 은하가 모여 은하군을 형성하고 이런 은하군들이 모이고 모여 초은하단을 형성한다. 우주는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공간이고 개념이다. 


우주는 약 138억 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 빅뱅 이론에 의하면 약 138억 년 전 엄청난(상상이 안되는 크기의) 에너지를 가진 것이 폭발하면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시작되었으며 이 폭발에서 발생한 물질들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 처음의 폭발력이 너무 커서 우주 공간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했기 때문에 현재 우주의 크기는 930억 광년의 공간에 2조 개 이상의 은하를 담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게다가 아직까지 우주는 팽창 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의 크기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인간의 삶에서 실측할 수 없어 가늠조차 힘든 단위가 사용되어야 비로소 우주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광대한 우주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염원이었지만 위대한 천재들조차 우주의 신비를 깨우치지는 못했다. 다만 그들의 업적이 쌓이고 쌓여 우주의 신비에 다가설 힌트를 제공했고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조금씩 우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인간이 우주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겸손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까지 지배적 사조였던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등장함으로써 지구 중심적 사고에 이변이 생겼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에 태양계가 있을 것이란 믿음과 달리 태양계의 우리 은하의 변방에 치우쳐 있음이 밝혀졌다. 우리 은하가 곧 우주일 것이라는 가정은 다른 은하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수정돼야 했고 우리 은하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을까하는 희망 또한 과학적 데이터에 의해 부서졌다. 모든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곳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거대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우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해변가의 모래 한 알 보다 작은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빅뱅 이후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 전체적 우주는 가속팽창하며 공간을 키우고 있으며 행성은 항성을 중심으로, 항성은 은하를 중심으로, 은하는 우주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갈릴레이의 상대성 이론'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지구 자전은 매 초당 350m를 이동하고 있으며  지구는 태양 주위를 초속 30km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핵을 중심으로 초속 200km로 공전하고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에 이끌려 초속 600km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우주의 광대함을 상상해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이 사는 지구라는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가늠할 수 조차 없는 거대한 우주에 아직까지 지구와 같은 골디락스 존은 발견된 적이 없다. 태양과 같은 별의 곁에 적절한 거리로 위치하며 위성으로써 달을 가져 안정성을 높이고 물과 대기가 풍부해 생명을 부양할 수 있는 지구가 만들어진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지구에서 수십억 년의 시간의 허락을 받아 인간이 탄생하고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이룩한 것 또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어쩌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책일 읽고 리뷰를 쓰다보니 우주에 대한 정보를 주로 적게 됐지만 실제 <50, 우주를 알아야 할 시간>의 전체적 흐름은 우주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고 해당 지식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에피소드를 전달함과 동시에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견지하고 있다. 우주의 신비를 풀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과 업적이 쌓이고 쌓여 업그레이드 되면서 우주는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음을 전해 준다. 그리고 인간이 생을 영위하는 터전인 우주를 바라보며 배울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겸손과 자애로움 소중함 등을 일깨워 준다.



PS) 

<50, 우주를 알아야 할 시간>은 깊이 있는 지식의 전달보다는 일반인들이 알아뒀으면 좋을법한 우주에 관한 상식을 전달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같은 일반인도 편히 읽을 수 있으며 중간에 관심 가는 주제나 이해가 부족한 부분은 구글링을 통해 약간 정보를 보태면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작성된 듯 하다. 칼 세이건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과학도서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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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폭력 - 운명이라는 환영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2
아마티아 센 지음, 김지현.이상환 옮김 / 바이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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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이슈, Issues of Our Times'는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W.W. 노턴 출판사에서 제작한 시리즈로써 선도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을 선보이고 독자들의 사고를 독력한다. <정체성과 폭력>은 '우리시대의 이슈'의 두 번째 작품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유명한 '아마르티아 센'의 저작이다.   


제목에 사용된 '정체성'과 '폭력'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최근 읽었던 '마크 모펫'의 <인간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어떻게 사회 형성에 기여하고 정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 재앙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는 '나와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종, 민족, 언어, 종교 등 개인을 구성하는 수많은 '정체성'의 차이는 개인 간의 혹은 사회 간의 분쟁의 소지가 되곤 한다. 때문에 <정체성과 폭력>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가 진지하고 흥미롭게 다가왔고 저자가 정체성과 폭력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지에 대한 궁금해졌다.




모든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 하에 살아간다. 인종, 민족, 국가, 종교, 취미, 사회적 지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들로 인간의 정체성이 표현될 수 있다. 정체성의 다양성이 파괴되거나 무시되어 호전적인 정체성이 강조될 때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잘못 기술하고 그들을 유일한 정체성 만으로 평가해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t), 인도의 힌두/무슬림 폭동 등은 단일한 정체성 만을 강조할 때 드러날 수 있는 폭력의 예시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정체성이란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정체성이란 선택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인종이나 민족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지만 종교, 취미,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은 개인의 기호와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정체성이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한계 내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끊임없이 선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어느 것도 그 사람을 판단하는 유일한 정체성이 될 수 없다. 


개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분류 기준에 따라 능동적으로(직업 등) 정체성을 획득하거나 수동적으로(민족 등) 얻기도 한다. 소속된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은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경험이 그 사람의 충성심이나 가치관을 변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이러한 경험을 '충성도 필터(loyalty filter)'라고 칭했고 정체성의 선택과 우선순위의 부여도 충성도 필터에 영향을 받아 바뀔 수 있다. 정체성은 제한된 범주 내에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정체성을 획일적이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편협하고 위험한 접근 방식이다.


학자들은 종종 세계를 문명에 따라 선을 그어 분류하고 문명 간의 차이와 충동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범주화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행위이며 부당하고 잘못된 토대 위에 탑을 쌓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명론적 접근법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방대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과 현대의 기준에 비춰 평범하지 않은 사례들이 주는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을 모순없이 지닐 수 있다. 소속된 다양한 집단과 관련된 상이한 정체성들은 무수히 존재하고 공존할 수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문명론적 접근법의 편협한 분할은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상호작용을 무시함으로써 좁고 굴절된 시야를 제공하게 된다.


정체성의 다양성을 도외시 한 해석은 비단 문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교 영역에서도 억지로 분할해 나눔으로써 정체성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외면해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특정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부과된 선입견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해요소로 작동하며 종교적 정체성을 지나치게 부각해 더 중요할 수 있는 요인들(정체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낳는다. 

종교적 정체성을 악용해 폭력을 용인하도록 조장하기도 하는데, 이런 행위는 혼란을 불러와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고착화시킨다. 분명한 것은 같은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개인의 우선순위와 선택은 상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20세기 중반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을 끼쳤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피지배자는 서양 제국주의에 반발하고 자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반발적 자아 인식(reactive self-perception)'을 낳았다. 서구적인 것이라 주장되는 것들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으로 비서구적인 것을 자국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유'와 '개인주의'가 서양에서 비롯됐다는 것에 대한 반발로 동아시아는 '수양'과 '도리'를 강조하는 식이다. 비교적 최근의 세계사가 유럽 주도로 이뤄진 것은 맞지만 문명의 장구한 역사는 과학이나 사상의 발전은 전 세계에 걸쳐 이뤄진 성과의 결집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서양에서 제기된 주장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현대 과학과 사상을 서구적인 것으로 인지하는 실수를 범하고, 비서구 지역은 마땅히 주장했어야 할 역사적 기여를 뒤로한 채 반서구적 성질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서구적인 것들에 비해 비서구적인 것들이 미개한 것 같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기도 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정체성이 올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이 아닌 내생적, 외생적 정체성을 모두 수용해 다원적 정체성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탈식민화는 고립된 정체성과 우선순위로부터 해방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문화는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상호작용한다. 문화적 운명의 환영은 자칫 숙명론에 빠져 체념하고, 정체되고, 퇴행하는 사회를 야기할 수 있다. 문화적 자유란 우선순위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자유를 의미한다. 문화는 정체성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문화가 가변적인 것처럼 정체성도 가변적이며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듯 다양한 정체성 또한 존재한다.


세계는 눈부시게 풍족하면서도 동시에 참혹하게 피폐하다. 세계화를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심화된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손꼽히는 화두로 남았다. 전체적 부는 증가했음에도 세계의 약자들이 누릴 수 있는 몫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아 이들로 하여금 상대적 빈곤, 소외, 박탈, 무시, 굴욕을 느끼게 한다. 위의 부정적 감정들은 우위를 차지한 세력에 대한 불만을 낳고 격화되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빈부에 따라 사회를 가르는 정체성의 첨예한 대립을 막기 위해서는 (인도주의적인 접근이든 평화를 위해서든)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필요하고 이는 공정한 배분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세계화는 물리적 거리와 국경의 중요성을 낮추었다. 이주의 물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주민들이 한 공간(나라)에 모이게 됐다. 상이한 관습과 전통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원만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크고 작은 갈등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다문화주의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다원적 단일문화주의(plural monoculturalism)와는 구별되는데 다문화주의가 문화적 자유를 수반하는 반면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는 종교적 분리주의를 수반하고 있다.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각자의 신앙적 정체성에 지나치게 고양된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자행되는 폭력의 근저에는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적 혼동이 있으며 이 개념적 혼동은 다차원의 인간을 일차원적으로 바꿔 버린다. 폭력을 획책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럴싸하게 포장된 단일 정체성의 환영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가치들(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피아로 구분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 몰두해 편협한 시각을 갖는다면 사람과 사회를 온전히 볼 수 없으므로 정체성의 다원성을 함양하고 존중해야 한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많아 신중히 읽게된다.

 

여지껏 읽고 감명받았던 책들도 정체성의 측면을 작위적으로 단일화하거나 중요한 정체성의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문명과 전쟁사를 다룬 몇몇 저작은 분명 정체성의 측면을 획일적 분류로 강하게 규정하고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 기억났다. 솔직히 내가 읽은 대부분의 문명과 사회와 관련된 서적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맹점을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아무 것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위험하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는데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없고 자신의 주장에 알맞은 정체성을 끌어와 사용하는 것이 글을 매끄럽게 이어주고 논거의 일관성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공부하는 자)는 어떤 책을 읽으며 논거로 언급되는 것들이 정당한지, 논리적 모순은 없는지, 다른 요소에 의한 영향은 어떠할지 등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도 저자의 관점에 따라 상이하게 보일 수 있음을 상기하고 여러 관점을 아우르는 독서습관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처럼 문화적 자유를 증대시키고 정체성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만 현실적 제약을 감안해 보면 타자(otherness)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은 상호적이여야 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 부분인데, 개인과 정부 나아가 세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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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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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쓰네카와 고타로'는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2005년 <야시>를 통해 데뷔했다. 그 후로 많은 작품을 집필했고 <야시>, <천둥의 계절>, <금색기계>, <멸망의 정원> 등의 자품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가을의 감옥>은 2007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며 2008년 한국에서 발간됐다 절판된 후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재발간된 작품이다.  


<가을의 감옥>은 세 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가을의 감옥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채널을 본다. 같은 대목에서 웃고 똑같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운명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기계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백만 번이나 반복 상영되는 영화,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엑스트라. (41 페이지, 주인공의 독백)

11월 7일에 갇혀버린 사람들, 감옥이란 말로 표현된 정해진 기간을 반복하는 사람들인 리플레이어가 사는 세상을 그린 소설이다. 만약 내 삶이 이런 반복이라면 나는 어떤 느낌이 들까. 소설에는 11월 7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만약 내 인생 자체가 갇힌 감옥처럼 반복되는 것이라면 또 어떨 것인가. 윤회사상에 등장하는 반복은 같은 시대를 다른 인간 혹은 생물의 몸을 빌어 사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전진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지는 생사의 고뇌인가. 우리가 사는 인생이 니체가 말한 영혼회귀라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떤 이는 더 열심히, 어떤 이는 초연하게 살아간다. 만약 내 삶이 무한히 반복되는 중인데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칫 허무주의로 빠져들 수 있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는 장점을 빌어 더 열심히 살아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의집


세계로부터 독립된 공간을 점유하는 집, 공간을 초월해 한 곳에 2ㅡ3일 머문 후 전혀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집. 일 년이면 백 곳이 넘는 정해진 위치를 순회하는 집. 소수의 사람들만 그 집을 볼 수 있으며 들어갈 수 있다. 그 집이 점유한 공간은 적어도 한 사람은 남기를 허용한다. 그 집에 남은 마지막 사람은 외부를 지각할 수 있지만 외부로 넘어갈 수  없다. 자신이 탈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집으로 불러들인 후 자신이 먼저 빠져나가야 한다. 이런 집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 집의 주인공이라면 어떨까.


무고한 누군가를 유혹해 나의 자리를 대신할 희생양으로 삼게 될까 아니라면 운명으로 여겨 겸허히 받아들일까. 만약 그 시간이 일 년 가량으로 정해져 있고 바통을 받아 줄 후보자가 기다리고 있다면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그동안 미뤄왔던 책들을 싸들고 들어가 읽고 싶다. 



환상은 밤에 자란다

그건 아주 중요한 점이야. 본인만 보느냐 남들도 보느냐 하는 것은. (177페이지, 주인공의 친구가)

그는 죽을 때까지 그의 독방에 같히고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독방에 갇혀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한심한 대사를 뱉어낼 수 있는 것이다. (206페이지, 과거 연인의 고민을 듣고)

초능력이라고 표현해야 할 남다른 능력을 가진 소녀, 리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창조해 보여줄 수 있다. 단지 보여주는 것일 뿐 물체의 성질을 실재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가 바꿔 보여준 것들에 두려워하고 행복해하고 위안을 얻기도 한다. 리오는 자신의 능력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그녀의 능력을 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잠시 인생을 생각해보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였고 현재 나와 무엇을 주고받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철학자들의 깊은 고뇌를 따르지 못하지만 플라톤이 남긴 '동굴의 우상'은 우리가 삶을 관조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보편하게 실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만든 현상에 불과한가. 내가 진실이라 믿는 바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 또한 항시 주어지는 것 같다.  




오래전 '로빈 쿡' 소설을 한창 읽던 때가 생각났다. 매니아라고 말하긴 부족하지만 나 또한 '로빈 쿡'의 팬이었다. 흥미를 갖고 수십 편의 '로빈 쿡'을 읽었는데 그의 작품들에 담긴 공통된 성질, 객관적이며 전문적이고 개연성이 훌륭한, 그리고 대부분 죄인의 전모가 밝혀지는 투명한 결론 등이 나를 자극했다고 생각한다.


<가을의 감옥>에 담긴 저자의 성향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매혹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겨우 세 편을 접했을 뿐이지만 공통적으로 구체적 상상력의 구현, 거리감을 둔 성실한 묘사, 그리고 주인공에 나를 이입하는 가정(만약 나라면)의 개입 등이 존재한다. '쓰네카와 고타로'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런 공통된 감흥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이 감흥은 나를 비롯힐 많은 사람들에게 몰입된 상상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 예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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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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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부분의 선진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세계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했다는데 이견을 달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부유한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의 방향에 대한 비평의 목소리가 나오고 과연 민주주의가 기존의 방침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의 의견을 디딤돌 삼아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10% 적은 민주주의>를 읽게 됐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가 국부를 증대시키고 정부가 주도하는 대량학살의 위험을 감소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자마다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기준이 통일돼 있지 않고 민주주의의 정도를 평가하는데 이견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저자 '가렛 존스'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민주주의와 경제의 상관관계는 유의미하지 않지만 민주주의와 평화의 관계는 연관성을 띤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렛 존스'는 민주주의를 정의함에 있어 로버트 달(Robert Dahl) 교수의 의견을 따른다. 민주주의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한다.

정치과정에 대한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공공의 이익과 합치되는 계몽화된 이해를 얻는 것
의제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기(예: 투표)
거의 모든 성인을 포함하기 

위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현대 민주주의에 어떤 유형의 속박이 가해질 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경제학자 아트 래퍼(Art Laffer)가 고안한 래퍼곡선은 세율이 0에서 100으로 향할 때 세수는 뒤집어진 U자 형태를 보인다. 세율이 일정 지점을 넘는 경우 세수는 오히려 감소하다 세율이 100에 이르면 세수는 0에 수렴한다. 래퍼곡선의 가로축을 민주주의의 수준으로 삼고 세로축을 결과의 질로 대체하면 세율과 세수의 관계와 유사한 경향을 띠는 그래프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저자의 주장의 요체이다.

저자가 차용한 '민주주의 래퍼곡선'에 따르자면 민주주의가 일정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시민의 이익을 증대시키지만 특정 지점을 지나게 되면 오히려 경제성장률과 시민의 이익은 저하된다. 민주주의도 한계효용의 법칙을 따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시키고자 할 때 소모되는 비용은 커지는 반면 효용가치가 저하된다.


정치인들이 공공의 선(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착각은 순진한 기대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재선에 성공하여 자신의 지위를 이어가는데 있다. 연구들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정책을 지지하던 정치가들도 선거 직전에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6년 임기의 상원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처음 4년은 자유무역을 옹호하는데 표를 행사했지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후기 2년 동안은 보호무역을 옹호했다. 정치가들은 선거가 임박할수록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 번영을 생각하는 정책보다 장기적으로 무익하거나 해가 될 수 있을지라도 선거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지지한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노동 시장의 자유와 규제, 환율 정책 등 대부분의 정책이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인들의 보여주기식 태도와 표를 좇는 정책의 추진은 정치인의 임기와 연관이 깊고 정치인의 임기를 4년이나 6년 이상으로 연장하는 것이 발의된 정책의 질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유익한 정책의 추진을 독려할 수 있다.(저자가 미국인이고 미하원의원의 임기는 2년이다.)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부여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유통하거나 금리의 변화를 통해 국가가 낮은 인플레이션의 안정된 경제상태를 유지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중앙은행이 정부에 의존하는 형태는 정부지도자들의 입맛에 맞는 경제정책을 따라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중앙은행의 장과 구성원들이 민주주의적 선출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에 의해 구속되지 않으며 긴 임기가 보장되는 전문가로 구성될 때 효율적으로 가동되어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다. 


특정 기관이나 부서의 독립성이란 말은 선출직보다 임명직을 옹호하며 정치와 민주주의로부터의 거리를 의미한다.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사법부도 정치(민주주의)로부터 독립적이여야 한다. 사법부를 이끄는 판사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가능한 합법적인 판결을 내려야한다. 여기에 정치나 민주주의가 개입하면 판결은 일관성을 잃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된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경제적 자유(재산권의 안정성, 정부의 가벼운 규제, 적절한 수준의 국가 소유)를 불러와 국가의 번영을 예측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의 시초로 여겨지는 아테네의 참정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참정권은 시민권을 지닌 소수의 성인 남자에게만 주어졌으며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의 지혜를 갖추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으로부터 2세기가 넘게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의 성장은 참정권의 확대와 연결되어 진행됐고 그로인해 현대민주주의 하의 참정권의 범위는 매우 넓어졌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참정권의 평등은 신성불가침의 것인지 의문이 나올 수 있다. 연구들은 학력에 따라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이해수준이 다르다는 것과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전문가의 견해와 반대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이 높음을 보여준다. 몇몇 나라들은 지적장애가 있거나 정신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자들의 투표권을 배제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물론 그 사람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시민은 합당한 권리를 영위하게 해주는 정부를 원한다. 그런 정부를 꾸리기 위해서는 현명한 통치자를 필요로한다. 이것은 유권자에게 현명한 통치자를 선발하기 위한 지적 수준이 필요함을 방증한다. 과거 신문과 텔레비젼에 의존했던 정보의 전달은 온라인 매체로 대체되고 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 등을 통한 무분별한 정보의 방출은 진실과 거짓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 순진한 시민들을 선동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 있다. 정치인들 또한 메신저와 SNS로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하는데 어떤 정보를 맞아 그것의 진위여부와 장단점을 파악하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며 이를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지적 능력이 높아야 한다. 


현대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 민주주의 형태이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이 의회에 모여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한다. 소수의 정치인은 이타적 마음으로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겠지만 다수의 정치인은 자리 보전 혹은 다음 단계로의 승진이 주된 관심사이다. 정치인들은 선심예산(특정 정치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표적 지출을 하는 것)을 써서 로그롤링(logrolling, 의원들이 각자가 지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로 짜고 돕는 것)을 지원한다. 즉 서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치인을 선출한 시민들은 이 사실에 경악할 수 있겠으나 이런 로그롤링을 통해 정치 집단이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되면  오히려 국가에 필요한 중장기적인 정책이 성립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유권자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 정치적 거래가 되려 국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정책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누구나 인정하는 선진국이다. 최저소득, 기대수명, 경제성장 면에서 세계의 선두그룹에 속함에도 민주주의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독특한 국가이다. 정치는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1당 체제와 마찬가지고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민주주의 점수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지만 기근이나 대량 학살을 불러올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 수치로 환산하자면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대략 50%가량 모자란 민주주의 수준을 갖고 있다. 어떻게 싱가포르는 반(半)민주주의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른다. 


상가포르의 부상을 논함에 있어 리관유(Lee Kuan Yew, 1959부터 1990까지 집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리콴유는 '선출된 정부는 이 정부를 선택한 국민만큼만 훌륭할 수 있다'고 말했고 국민의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는 일반적 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기 보다 국민의 수준을 높여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리콴유는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며 싱가포르의 경제수준과 시민들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렸다. 


현재 싱가포르는 국민과 정치인은 똑똑하고 상당히 독립적인 사법체계를 갖고 있으며  중앙은행은 유권자들과 격리돼 있고 엘리트 정치인들의 임기는 상당히 길다. 인민행동당은 현실적으로 효과적인 정치를 지양하는데(보여주기 식의 정치가 아닌),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다른 모습이다.


국가와 사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래퍼 곡선에서 가장 합리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고해서 번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대민주주의를 일부 양보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가렛 존스'는 정치인들의 긴 임기, 중앙은행과 사법기관의 독립성 유지, 그리고 지식이 많은 유권자에게 유권자의 권리를 조금 더 양도함으로써 더 큰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밝힌다.


주권자들에게 최고의 권력을 주는 것보다 그들에게 최상의 성과를 줄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적일 수 있음을 견지해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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