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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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캐나다 출신 시인이자 소설가, 고대 그리스어 전문가 기타 등등의 타이틀을 지닌 앤 카슨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집의 책탑에서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작가의 책을 찾기 시작한다. 오래 전에 어디선가 수배해 두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신 경기도서관 구독형 이북으로 읽기 시작했다. 정말 편한 세상이다. 이제는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지 않고서도 집에서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는 세상에 되었다.

 

기원전 7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가 남긴 <게리오네이스>가 <빨강의 자서전>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어 전문가인 작가는 해당 작품을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해서 새롭게 재창작했고, 가상의 인터뷰까지 책에 실었다. 어쩌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원의 변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면에서는 매들린 밀러라는 작가가 비슷한 결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앤 카슨의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진입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소위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으로 알려진 에피소드다. 헤라의 미움을 받은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업을 부여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서쪽 끝 에리테이아 섬에 멋진 소떼를 가지고 있는 게리온에게서 소떼를 훔쳐 오라는 헤라의 명령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소몰이꾼 안타이오스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오르트로스를 이기고, 세 사람의 몸뚱이를 지닌 게리온과 정면대결을 벌이고 마침내 히드라의 독을 바른 화살로 그를 처치하고 소떼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귀환 길에 헤라의 방해로 소들이 모두 도망가 버리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앤 카슨이 “로맨스”라고 명명한 소설의 주인공은 게리온이다. 어려서 형에게 성적으로 시달린 게리온은 자신에 대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14살에 된 게리온은 헤라클레스를 만나 묘한 관계에 빠지게 된다. 둘은 헤라클레스의 고향이라는 소도시 하데스(HADES)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하데스는 명계 또는 음부를 지칭하지 않는가. 동시에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스가 그곳 출신이라는 점은, 스테시코로스의 작품에서처럼 헤라클레스의 출현이 게리온에게는 죽음을 상징한다는 뜻일까.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함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서사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곳에서 헤라클레스의 할머니는 1923년 화산폭발 사건과 유일하게 생존한 용암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를 뒤덮은 화산폭발로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감옥에 갇혀 있던 재소자 한 명만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그는 순회 서커스단에 들어가 자신의 운을 이용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던가. 그것은 마치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가 12가지 과업이라는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미션들을 해치우는 과업이 서커스라는 암시였을까. 신이 점지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 한계에 대한 일종의 냉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 게리온은 꾸준하게 카메라로 기억을 기록하고, 시간을 포착한다. 이제 22세가 된 게리온은 시간과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DX100 컬러 필름 6통을 들고, 철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독일 철학을 3년 동안 공부한 게리온은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그간 체득한 사유들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인가? 그리고 무감정이라 불리는 ‘아타락시아’ 따위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같은 이야기도 등장한다. 문득 앎이나 지식에 대한 갈망 그리고 궁극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선가 읽은 바에 의하면, 시간은 현대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모든 시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필멸로 귀결된다. 고대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무한이었다면, 모든 것이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현대의 시간은 일종의 압박이자 강박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해진 시간에 수행해야 하는 노동은 소득자본으로 환산되고, 그렇게 벌어들인 소득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데 소진된다. 켜켜이 쌓인 인간관계 역시 시간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차를 뛰어 넘은 시간은, 낯선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헤라클레스와의 재회라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소환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게리온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체험에서 빠질 수 없는 탱고 바 방문도 빼먹지 않는다. 바에는 피아노, 기타 그리고 아코디언으로 구성된 밴드가 있었다고 했던가. 난 이 부분에서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가 생각나서 너튜브로 검색해 본다. 그리고 반도네온의 대가 아티스트 고상지 연주에 잠시 넋이 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나의 독서 여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오락가락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자신이 빨강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어지는 탱고 여가수의 기습 질문.

 

예상하지 못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헤라클레스와의 재회에는 방해꾼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앙카시. 헤라클레스의 새로운 남자친구란다. 굳이 말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들의 정체성이 어떤지 이제는 알겠지. 그는 에밀리 디킨슨 다큐멘터리에 필요한 화산 소리를 녹음하는 이른바 소리수집가다. 그의 이름은 앙카시(anqash)는 케추아어로 “가벼운”이라는 뜻이라고.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의 관계에 비하면 앙카시는 그런 가벼운 존재라는 뜻일까. 그들의 대화에서 다시 한 번 지나간 관계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더께들을 현재의 시간이 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뭉친 이 기묘한 삼총사들은 진짜 화산의 소리를 기계 장치에 담기 위해 페루의 리마로 달려간다. 이번에 그동안 대충 페루의 수도 리마가 고산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태평양 연안에 면한 항구도시였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그전에 그들은 해롯 백화점에서 테스카, 호랑이 모형을 훔쳐 앙카시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소동을 벌였던가. 책을 대하는 나의 의식만큼이나 주인공들의 좌충우돌식 모험도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마가 끝이냐고? 천만에 앙카시는 어머니의 고향 우아라스 북쪽 주쿠라는 마을에 화산을 신으로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산 내부에서 온 사람들을 케추아말로 일명 ‘야스콜 야스카마크(Yazcol Yazcamac)’, 줄여서 야스카마크라고 하는데 ‘가서 보고 돌아온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말에 게리온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앙카시의 설명에 따르면 야스카마크는 화산이라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인간의 유한성까지 포함한 모든 약점을 소멸한 “날개 달린 빨간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심지어 안데스 산맥이라도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로맨스 소설을 천명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점점 더 인간의 본연적인 그리고 철학적 주제들에 서슴지 않고 이렇게 도전장을 들이민다.

 

게리온은 카메라를 들고 “시간의 기원”에 도전한다. 짧은 시간 동안 다 읽어냈지만, 소설의 엔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만난 이칸티카(Icchantika:일천제)야말로 소설 <빨강의 자서전>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불가에서는 이칸티카를 아무리 수행해도 깨달음을 없을 수 없는 자라고 규정한다. 한편, 고대 인도에서는 쾌락주의자를 의미한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깨달음에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쾌락주의자가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캐나다 작가의 소설에서 내가 나의 페르소나 같은 이칸티카의 개념과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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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10-10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시인이 상을 타서, 외국시를 전혀 읽지 않는 제 입장에서는 상을 탔네 해서 굳이 찾아 읽을 책이 없어 좋습니다. ^^;;

레삭매냐 2026-10-10 08:49   좋아요 2 | URL
저도 시는 잘 몰라서...
그래서 소설을 골라서 읽어
봤습니다.
 
미스 론리하츠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7
너새니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빛소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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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 필적한 만한 미국 산문계의 대가가 너새니얼 웨스트라고 했던가. 37세의 이른 요절한 한 너새니얼 웨스트의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책이 발표된 해는 1933년 그러니까 1919년부터 시행되던 금주법이 폐지된 해다. 그런데 책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에 가서 술을 한 잔 걸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점이 좀 궁금했다. 이미 그 당시에 금주법은 유명무실한 그런 법이었었나 하고.

 

미스 론리하트는 신문사에서 구독자들의 고민들을 상담해주는 칼럼니스트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는 그런 삶과는 많이 다르지만. 참고로 '미스'라는 말이 빚어내는 오해와 달리 그는 남자다. 그리고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베티라는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또 딱히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하여튼 간에 미스 론리하트란 인간은 정의하기 힘든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발표되던 1933년은 미국에서 대공황이 한참이던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들의 삶은 하나 같이 고통과 가난 그리고 다양한 고민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문사에서는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이 돈벌이가 될 거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통해, 나는 이 정도라면 행복하지 뭐 그런 심산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자기만족적 글쓰기랄까.

 

베티는 그런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 쓰기가 못마땅해 그만 두라고 종용하지만, 이미 자신의 일에 중독된 미스 론리하트는 사실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도 애인을 설득하기 위해 광고대행 일을 찾아보겠다고 공수표를 날린다.

 

침례교 출신 목사님의 자녀답게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지만, 또 현실에서는 그만큼 타락한 인간이 없다. 술집에 가서 한 잔 걸치다가, 싸움이 붙어서 이가 다 흔들릴 정도로 얻어터지고 또 의자에 맞는 봉변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도일 여사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잘 나가는 것 같았던 미스 론리하트 삶의 작은 균열이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하나의 결정적 탄환이 되었다.

 

미스 론리하트가 구축한 질서는 완벽해 보인다. 애인 베티와의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긴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신문사에서 구독자들이 보내는 편지에 대한 고민 해결사이자 그리스도의 사제로서의 임무도 나쁘지 않다. 다만 삶이 태생적으로 지닌 가역적 유동성은 미스 론리하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벽해 보이는 질서 역시 결국 무질서로 향하게 된다는 단순하지만 불변의 메시지를 너새니얼 웨스트는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의 분량은 짧았고, 파국적 엔딩으로 치닫는 진행 속도를 따라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스 론리하트>가 나에게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 같은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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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 (모노 에디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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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항상 우연이라는 생각이다. 이번 여름 지독히도 책을 읽지 않았다. 이제 날도 선선해지고 그랬으니 책 좀 읽어볼까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무려 14년 전에 사두었던,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버전으로 읽게 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었다. 무려 14년이나 걸렸지만, 읽는 데는 달랑 이틀이 걸렸다. 다시 독서력에 발동이 걸리는 걸까.

 

소설의 대가라고 알려진 헤밍웨이의 장편소설이 5권 뿐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1929년 9월 27일에 발표된 <무기여 잘 있거라>는 30세의 헤밍웨이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1차세계대전 당시 이손초 강 유역의 카포레토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발칸반도를 집어 삼키려고 섣불리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던 이탈리아의 무모한 도전이 오스트리아-독일 동맹군의 공격 앞에 무너지는 과정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미국 출신 프레더릭 헨리다. 이탈리아 전우들에게 그는 종종 페데리코 엔리코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나는 그를 페데리코라고 부르기로 했다. 때는 1915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우디네 부근의 최전선에 배치된 페데리코는 앰뷸런스 운전을 맡은 중위로 참전했다. 콜레라가 유행해서 7천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다는 이이야기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런데 미국 출신의 페데리코는 아직 미국이 전쟁에 정식으로 참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탈리아군에 가담하고 전투에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한 미국에서 삶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젊은 미국 청년은 오로지 동료이자 외과 의사인 리날디와 사제 그리고 몇몇 이탈리아 전우들과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순간의 단순한 쾌락을 추구하는 그런 청춘으로 소개된다.

 

그러던 중에, 리날디를 통해 알게 된 스코틀랜드 출신 금발의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면서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미국인답게 금세 사랑에 빠지고, 또 격정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키스를 시도하다가, 바클리 양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봉변을 당한다. 이런 게 전형적인 미국식 연애방식이었나. 연애를 일종의 브리지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화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페데리코가 바클리 양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관계가 시작된 건 아니었다. 무려 8년이나 만난 약혼자를 솜므 전투에서 잃은 바클리 양의 사연에 서글퍼졌다. 처음부터 왠지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예언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헤밍웨이가 구사하는 강력한 서사의 힘은, 마치 하드보일드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세한 사항이나 미묘한 감정에 대한 묘사 없이 격렬한 사랑으로 폭풍처럼 페데리코와 캐서린을 몰고 들어간다.

 

페데리코와 캐서린의 사랑이 깊어 갈수록, 이손초 전선에서 맞붙은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의 전투 역시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었다. 공격에 나선 이탈리아군은 19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잃고 위기에 봉착했다. 사람들은 이런 추세라면, 이탈리아가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전망까지 할 정도였다. 이탈리아군은 잡다한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보다, 훈족의 후예라며 두려워하는 독일군의 공세를 더 두려워했다. 소설에서 헤밍웨이는 독일군 15개 사단이 훗날 이어질 카포레토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독일군 6개 사단과 오스트리아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동맹군 15개 사단이 이탈리아군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훗날 사막의 여우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에르빈 롬멜이 카포레토 전투에 등장했다.

 

한편, 전선에서 페데리코가 마네라와 파시니 그리고 가부치들과 전쟁에 대한 신랄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헤밍웨이의 반전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누구도 손해를 보면서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인간들의 탐욕도 제어할 수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적의 박격포탄 공격이 시작된다. 다리 부상을 당한 파시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페데리코는 참호용 박격 포탄을 맞아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고 후방 밀라노로 후송된다. 그 결과, 은성 훈장을 받게 되는데 전장에서의 눈부신 무공을 세훈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헤밍웨이는 콕 집어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캐서린과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하게 된다.

 

부상에서 치유 중인 페데리코는 찾아온 사제는 이제 전쟁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지에서 벗어난 페데리코가 전쟁을 혐오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왜 페데리코가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과 직접적 관계도 없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찌만, 헤밍웨이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본질적 문제들을 회피한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밀라노에서 무릎 부상을 치료한 페데리코는 카포레토 전투가 벌어질 전장으로 복귀한다. 1917년 10월 24일 독일-오스트리아의 대공세 앞에, 이탈리아군 전선은 붕괴되고 대규모 퇴각에 나선다. 페데리코 역시 적군의 파상공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담당한 앰뷸런스를 상실하고 동료들과 후퇴길에 나선다. 미국 출신 장교라는 정체성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탈영병으로 간주되어 총살당할 위기에서 탈리아멘토강에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한다.

 

구사일생으로 익사의 위기에서 벗어난 페데리코는 추위와 허기 그리고 고통에 시달리면서 캐서린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힘으로 밀라노에 도착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캐서린이 스트레사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스트레사에서 캐서린과 재회한 페데리코는 다시 안식을 찾아 스위스까지 보트로 탈출하게 된다. 영구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은 잠시 뿐, 결국 소설은 비극적 엔딩으로 치닫는다.

 

헤밍웨이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이라는 전통적 테마를 중심에 두고,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전장을 배경으로 반전 메시지를 가득 담아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결 같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캐서린은 자신이 사랑하던 약혼자를 솜므 전투에서 잃었다.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제는 물론이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소시민과 일반 병사들 역시 전쟁의 무용성을 설파하고, 어떻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결국 자신만의 종전 선언을 한 페데리코야말로 소설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랑하는 캐서린과 꼬마 캐서린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점층적으로 생산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이 발표된 뒤, 3년 후에 만들어진 게리 쿠퍼 주연의 동명 영화는 원작 소설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설의 엔딩은 1918년 3월경인데, 영화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고 이탈리아가 승리했다는 부분이 등장한다. 캐서린이 난산 끝에 죽는 장면도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처리됐다면, 드라마성을 강조하는 영화는 좀 더 애절하고 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여담으로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가 발표될 당시에는 소설의 몇몇 부분들이 검열되기도 했다고 한다. 2025년 판본에는 헤밍웨이가 수정한 부분들이 검열 이전의 상태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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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6-09-25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추석 잘 보내셨나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남은 연휴 편안하고 좋은 시간 되세요.^^
 
오디세이 각본집 ㅣ 영화 오디세이를 책으로 만나다
크리스토퍼 놀란 지음, 김은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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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관람의 여운이 가시기 않은 상태에서 <오디세이 각본집>을 만나게 됐다. 주말 행사처럼 된 도서관 방문을 했다가 신간코너에서 <오디세이 각본집>이 들어와 있는 걸 봤다. 바로 빌려서 바람처럼 읽기 시작했다. 뭐랄까 영화를 복기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호메로스의 고전 <오디세이아>를 원전으로 삼아 21세기 <오디세이>를 새롭게 창조해냈다. 원작의 얼개는 그대로 갖추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담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도 당시에 떠돌던 마법이 지배하던 시대의 구전 전승 설화들을 집대성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오디세이아>를 만들지 않았을까.

 

호메로스가 인간의 기억력에 기반해서 서사를 구축했다면, 놀란 감독은 새로운 세기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를 동원했다. 귀로 듣는 서사보다, 눈으로 보는 서사의 힘이 전세계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 잡아 버렸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고대 서사는 외눈박이 괴물 사이클롭스, 무자비한 거인족,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마녀 키르케 그리고 바다에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동원해서 일련의 고정된 이미지들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바로 주인공 오디시어스다. 장장 10년에 걸친 불가능해 보이는 트로이 전쟁을 지략으로 승리로 이끈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영웅의 귀환 서사는 다만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문제는 그의 귀환이 무기한 지연되면서, 이타카 왕국의 질서는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왕비 페넬로페의 힘만으로는 당장 눈앞에 닥친 바다민족의 침공이라는 대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오디시어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방문한 스파르타의 국왕이자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시어스의 전우였던 메넬라오스는 바다민족과 싸우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헬라인들의 청동기 문명은 어디서 왔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되어 있는 바다민족의 침공으로 이후 400년간의 암흑 시기를 맞이하게 됐다. 어쩌면 신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대가를 오디시어스가 치른 것처럼, 헬라 민족도 비슷한 궤도를 겪게 된 게 아닐까.

 

오디시어스는 트로이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과연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고뇌하고 번민하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고대인이라기 보다, 현대인의 가까운 모습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헬라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제우스의 법을 지키라는 명제를 트로이 목사 사건으로 깨부순 사람이 바로 오디시어스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그들이 신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헬라 문명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바다민족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지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트로이 마지막 날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당하게 될 대재앙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오디시어스가 귀환길에서, 자신의 함대에게 공급할 식량과 보급품을 위해 가는 곳마다 거래와 협박 그리고 약탈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에게 현지인들은 협력의 대상이 아닌 오직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말을 할 수 있었던 사이클롭스에게 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느냐는 부하의 말에 개미와 말하는 걸 봤느냐며 핀잔을 주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이 연상됐다. 자신의 섬을 침략한 오디시어스와 그의 부하들은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에게 그저 한끼 식량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의 분노와 싸우며 고향 이타카로 가기 우해 고군분투하던 오디시어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방문한 섬의 현지인들에게는 모두 믿을 수 없는 이방인이자 약탈자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라이스트리고네스 섬의 거인족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헬라 이방인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해서 그들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몰살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은 아무도 없다는 말에 무모하게 도전에 나서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만용에 가깝다. 신이 정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는 오디시어스. 가장 갈망하는 것들은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신탁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태양신의 신성한 소들을 잡아먹고 하데스로 향하게 되는 오디시어스 부하들의 모습에서 결국 다시 한 번 필멸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디세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한 번 각본집을 읽으면서 고대 역사를 다시 한 번 현실에 적용시켜 보게 되었다. 한 때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이 트로이 전쟁으로 정점을 찍고 결국 하강곡선을 타고, 암흑기를 거쳐 훗날 지중해의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는 로마에게 정복되었다. 19세기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며, 팍스 브리타니카를 구축했던 대영제국도 역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몰락하고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게 패권을 내주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도 이제 저물고 있다는 시그널을 사방에서 볼 수가 있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트로이 함락을 지켜보던 고대 전사 오디시어스의 모습이 세계 경찰국가의 위상을 잃고, 하루가 다르게 몰락하는 과거 거인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

 

무려 3천 년 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내러티브가 또 새로운 천년에도 이렇게 위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창조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서사가 가진 힘의 본질이 아닐까.


[뱀다리]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창조(re-creation)의 묘미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타카 전사 시논의 캐릭터 추가보다 기존의 것에 대한 생략이 아니었을까. 사이클롭스 폴리페모스 에피소드에서 그 유명한 오디시어스의 “노바디(우티스)” 서사는 이번 영화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다.

 

결국 에우마이오스가 말한 대로, 오디시어스의 영민함이 언젠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 예언은 폴리페모스 에피소드를 통해 구현된다. 신의 분노 앞에,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부정(노바디:우티스)하면서 오디시어스는 사이클롭스를 농락한다. 그리고 폴리페모스를 공격하고 나서, 기지를 발휘해서 동굴을 탈출하면서 사이클롭스에게 화살 한 대를 날리는 장면으로 놀란 감독은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퉁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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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봤다. 정말 대단했다. 무려 3천년이나 된 이야기를 21세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이야기의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배경이 되는 시절이 분명한 마법(apparent magic)의 시대였다고 명토박는다. 그러니 외눈박이 괴물이며, 뱃사람들을 홀리는 사이렌, 인간을 돼지로 바꿔 버리는 키르케와 거인족들의 등장이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아, 그리고 오디시어스의 영민함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말했던가.

 

영화는 오디시어스의 고향은 그리스 서부의 이타카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오디시어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는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 또 언제 귀향하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타카의 왕비 페넬로페와 재혼하려는 숱한 구혼자들이 '제우스의 법'에 따라 이타카의 궁정에서 매일 같이 파티를 벌이고 이타카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는 중이다.

 

오디시어스가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푸는 방식으로 오디시어스의 귀환을 기다리면 자신의 재혼을 미뤘다. 그동안 아들 텔레마코스는 성인에 근접했지만, 여전히 왕국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미흡하다. 이런 위기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의 구혼자들에게 당하는 치욕 속에서 텔레마코스는 직접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같이 참전했던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를 찾아나선다. 영화에서 메넬라오스 역은 텔레마코스 역의 톰 홀랜드와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퍼니셔" 존 번설이 맡았다.

 

자 그러면, 현재 오디시어스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의 마지막인 오기기아 섬에서 님프 칼립소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귀향 중에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사이클롭스 폴리메모스의 눈을 찌르고 도주하다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된 오디시어스는 휘하의 부하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 오기기아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오디시어스는 칼립소가 주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들어주는 로터스 꽃을 먹고 과거를 모두 잊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를 규정하는 과거는 오디시어스에게 조금씩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일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주었다.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대표하는 미케네 왕국의 왕 아가멤논은 아우 메넬라오스의 마누라 헬레네의 납치로 트로이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지중해에서 무역 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오디시어스는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리스의 제국가들이 트로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아가멤논의 분노가 당장 이타카에 미칠 것이라고 오디시어스는 출전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말한다.

 

트로이 원정을 앞두고, 어마무시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아가멤논은 출전에 앞서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치면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사게 됐다. 이 이야기는 훗날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된다.

 

다시 트로이 전쟁으로 돌아가, 엄청난 군세를 자랑하는 함대를 조직해서 트로이 공략에 나섰지만 10년이 넘도록 헬라 원정대는 강대한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영민한 꾀쟁이 오디시어스의 이른바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단숨에 트로이를 함락시켜 버렸다. 이타카에서 안티노오스 대신 징병된 시논의 죽음으로 거의 물에 잠기다시피 했던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목마는 트로이 성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바닷가에 버려진 목마의 이미지는 왠지 모르게, <혹성탈출> 엔딩신에 등장한 자유의 여신상을 연상시킨다. 놀란 감독의 해당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봐야 할까. 곧 불타고 파괴될 트로이 문명에 대한 연출자의 계시였는지도 모르겠다. 목마에 갇힌 이들 가운데 두 명이 익사하는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버틴 헬라 특공대들은 결국 트로이 성내로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오디시어스와 메넬라오스가 주축이 된 비밀 특공대들은 성벽의 파수를 보던 트로이 병사들을 해치우고, 성벽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가멤논의 군대들을 성으로 불러 들이는데 성공한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패배한 헬라 군대의 공물이라는 목마는 트로이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된 셈이었다. 어쩌면 헬라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제우스의 법'의 붕괴가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후, 이타카 페넬로페와 메넬라오스가 걱정하던 이른바 바다민족(people from sea)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들이 등장해서 찬란했던 미케네 문명을 끝장내고, 동방의 힛타이트까지 아우리는 청동기 시대(Bronze Age)를 종식하고 400년 간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불타던 트로이로 돌아와, 장장 10년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분노에 차 있던 헬라 원정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슬로우컷으로 잡은 신전 앞에서 무력하게 불타 오르던 트로이와 마구잡이로 트로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던 장면을 바라보던 오디시어스의 공허한 눈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트리오 낙성에 앞서, 가장 먼저 성으로 진입한 이가 압도적 존재감의 아가멤논이었다. 헬라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진두 지휘를 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만큼 존재감도 막강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오랜 원정을 마친 헬라 원정대는 이제 고향에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는 자, 오디시어스의 귀향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미션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러티브는 어쩌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서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어떤 갈등의 발생과 미션의 해결 그리고 엔딩은 결국 귀향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말이다. 일이 끝났다면, 집으로 돌아가라. 호메로스는 3천 년의 서사시에서 그 원형을 제공한다.

 

오디시어스가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시련은 사이클롭스 폴리메모스와의 조우였다. 이타카 원정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과 식량 같은 보급품이었다. 오디시어스는 필요하면 빌리거나 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빼앗았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그는 남쪽으로 가면 무서운 것을 만나게 될 거라는 촌로의 말을 들었다.

 

어느 외딴 섬에서 양치는 괴물 폴리메모스를 만나 동료들을 잃은 오디시어스는 기지를 발휘해서, 폴리메모스의 눈을 찌르고 갇혀 있던 동굴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동료들을 두 명씩 잡아 먹은 다음에야, 숙면을 취하는 괴물이라니. 나중에 아이아이에 섬에서 만나게 되는 키르케가 오디시어스에게 한 말처럼 현지인의 눈에 오디시어스의 병사들은 친절한 나그네가 아니라, 약탈자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생각하던 헬라인들이 생존을 위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폴리메모스와 다를 게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화살 한 대 정도를 날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원전에서는 자신을 노바디(우티스)라며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오디시어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바람에 분노한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트로이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이타카로 바로 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에 걸친 방랑길에 내몰리게 된다. 결국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기 꾀에 넘어간 셈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스트리고네스 섬에서는 거인족들을 만나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결굴 3척의 배 가운데, 2척이 파괴되고 오디시어스 일행만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한다. 부하들은 오디시어스의 지도력에 반감을 품기 시작하고, 거의 반란 직전까지 내몰린다.

 

그 다음에 아이아이에 섬에서는 전설의 마녀 키르케와 마주하게 된다. 에우릴로코스를 필두로 한 부하들은 오두막에서 음식이 풍부하다는 키르케의 말에 속아 그녀가 내준 음식을 먹다가 그만 모두 돼지로 변해 버렸다. 그전에 보면, 오두막 주변에 병사들의 갑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걸 보고서도 무시했던 걸까. 의심하고 영민한 오디시어스는 키르케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나고 돼지로 변한 부하들도 구할 수가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드를 모두 다루려고 하다가, 순간 지쳐 버렸다. 이제부터는 그냥 내가 느낀 점들을 시간 순서에 상관없이 기록하고 마무리지어야겠다.

 


<일리아스>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오디세이아>는 영웅 오디시어스가 만들어낸 10년 전설로 시작해서, 또다른 10년에 걸친 고난의 방랑길 그리고 귀환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핍박하던 원수들에 대한 복수에 이르는 거의 완벽한 서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법의 시대가 배경이라 많은 신들이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젠데이야가 맡은 신계 보다는 인간계에 보다 더 가까운 인본적인 모습의 아테나 여신의 구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을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이 그 시절에 통용되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신탁에 등장하는 터부(금기)들은 모두 깨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처벌도 피할 길이 없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됐다. 태양신 헬리오스 섬에서 신성한 소들을 잡아 먹지 말라고 오디시어스가 그렇게 신신당부했지만 부하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허기를 못이겨 몰래 소를 잡아 먹었다가 결국 바다에서 모두 망자가 되지 않았던가.

 

오기오기아 섬에서 칼립소와 보낸 7년의 시간에 대한 서사는 왠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탄호이저 행성에서의 전투를 회상하며 쏟아지는 빗속에서 생명의 끝을 다해 가던 로이 배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세상의 번뇌를 잊고, 자신과 영원히 살자는 칼립소의 유혹. 하지만 그동안 숱하게 신의 분노를 경험한 오디시어스는 '영원'은 신의 영역이라며 낮은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구한 난파한 뱃조각들로 만든 뗏목을 타고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참회하며, 운명을 거스른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이번에는 운명에 자신을 내맡긴다. 어쩌면 오기오기아 섬에서 칼립소와 별다른 일 없이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는 것이 오디시어스에게는 행복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내 운명을 거스르던 오디시어스는 귀향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선택지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테이레시아스의 신탁대로, 에우릴로코스를 필두로 한 오디시어스의 모든 동료들은 모두 바다에서 죽었지만 결국 영웅 오디시어스는 살아서 고향 이타카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뗏목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탐 행크스가 떠올랐다.

 

아들 텔레마코스를 암살 위기에서 구해내고,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시어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를 따르던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는 거름더미 위에서 주인의 귀환을 알아보고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며 생을 마친다. 이 에피소드를 회화로 표현한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일전에 우연히 본 것 같은데, 기시감 때문인지 확실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이 되었다.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오디시어스의 분노에 찬 복수극은 트로이 멸망의 정확한 재현이었다. 아울러 당장은 아니지만, 곧 닥쳐올 바다민족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란 감독은 오디시어스가 텔레마코스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고, 아내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트로이 전쟁과 오랜 방랑길에서 저승으로 간 망자들을 위로하러 역시 배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영화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오디세이>를 아이맥스로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되다 보니 돌비시네마 애트모스 관람으로 대신했다. 확실히 평범한 스크린과 차이가 있었고 사운드는 압도적이었다. 12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은 영화에 몰입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오디시어스 일행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바다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좌석이 흔들릴 정도였다. 앞으로 아이맥스가 안되면 최소한 돌비시네마 애트모스로는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류사에 길이 기억될 고전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란 스타일의 재해석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내러티브를 배경으로 유명한 배우들을 기용해서 거하게 벌인 소문난 잔치 속에서 유한한 필멸의 존재인 인간,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가 있었다. 나는 운명에 거스르는 자인가, 아니면 바람 부는대로 순응하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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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30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디세이가 세계 최초로 전체 상영분이 아멕스로 촬영된 영화라고 하더군요.그래선지 아멕스 극장은 매번 매진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좀 지나 열기가 식으면 한번 보러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