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 콘의 춤
로맹 가리 지음, 김병욱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는 일천구백육십육년, 22년 전인 1944년에 신의 가호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모이셰 콘, 별명은 징키스 콘인 폴란드 출신 유대인 희극배우가 지금은 독일 리히트에서 일급 경찰서장으로 활동 중인 샤츠헨(귀여운 보물)이 이끄는 SS분견대에 잡혀 총살당했다. 징기스 콘은 유대 귀신이 되어, 지난 22년 동안 샤츠헨에게 늘러 붙어 살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희귀한 스토리로 시작되는 로맹 가리의 소설 <징기스 콘의 춤>은 망상적 매력을 발산한다.

 

콘과 같이 사로잡힌 다른 유대인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걸출한 희극배우는 절대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SS 총살대에게 감자를 먹이고 엉덩이를 까보이며 마지막으로 유대식 유머의 정수를 선사해 주었다. 참, 다시 현대로 돌아와 잘 나가는 경찰서장 샤츠헨은 지금 자신이 관할하는 가이스트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 해결에 몰두하고 있다. 자그마치 22명이나 되는 이들이 뒤에서 백스탭(back stab)으로 심장이 찔려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지상 최고의 황홀경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살인사건에 대한 미스터리만큼이나 과연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유대 귀신과 연쇄살인사건을 <징기스 콘의 춤> 속 내러티브의 두 축으로 삼았단 말이지.

 

디부크(Dybbuk)라는 이디시 어로 사악한 악령이 되어 샤츠의 곁에 머물러 있는 존재 징기스 콘은 로맹 가리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 중의 하나인 유대인 특유의 자기파멸적 유머를 상징한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유럽 유대인의 절멸 가운데 일정 정도는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부분도 소설에 등장한다. 대가는 소설적 장치로 샤츠의 알코올성 섬망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전개를 반복한다. 연쇄살인의 범인은 귀족 부인 릴리와 바람이 나서 가이스트 숲으로 튄 사냥터지기 플로리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가가 특이한 존재다. 파리며 나비 같은 벌레들이 가까이에만 가도 바로 죽는 게 아닌가. 독자는 <징기스 콘의 춤>(유대 민족의 호라 춤을 의미한다)을 읽으면서 플로리앙이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사신(死神)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릴리는 그의 도구로 이용되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해야 할까. 하나 같이 바지를 벗고, 천상의 무언가를 본 표정으로 심장에 칼을 맞고 죽은 남자들. 뒷마무리는 당연히 사신이 맡았다.

 

그나마 첫 번째 장인 <디부크>의 내러티브는 따라갈 수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가 구사하는 망상을 넘어선 섬망에 가까운 스토리텔링은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든다. 사신 플로리앙은 이디시 사람들 600만, 스탈린그라드 30만 같은 숫자로 지난 세기 전 세계를 휩쓴 자신의 활동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한편, 아름다운 릴리가 모나리자를 필두로 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예술 작품으로 변주되는 장면, 2000년 전에 이미 획기적인 죽음으로 종교(기독교)가 탄생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신성모독(blasphemy)에 가까운 구성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이스트 숲에서>는 샤츠를 따라 다니던 징기스 콘이 플로리앙/릴리 커플에 빙의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바르샤바 게토 출신 몽상가이자 냉소주의자로 분장한 이디시 희극배우의 변신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수난 대신 지상의 낙원 타히티로 간다고 했던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가의 좌충우돌 내러티브에 혼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 디부크가 쓰인 것인가.

 

로맹 가리가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자기파괴적인 유머를 차용했다면 격렬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맹 가리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에 프랑스의 영토해방을 위해 싸운 레종도뇌르 3급 훈장에 빛나는 전쟁영웅이 아니었던가. 소설이 쓰이던 1966년은 패전국 독일이 마셜 플랜의 세례와 소련의 서진에 맞선 서구진영의 최전선에서 이른바 강력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탈나치즘 이후 처음으로 극우정당이 등장하기도 했다. 로맹 가리가 소설의 곳곳에서 지적하듯이, 홀로코스트라는 문명 유럽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가는 경찰서장 샤츠가 전후 프랑스 외인부대로 활동하면서 신분세탁에 성공했듯이 독일의 유대화 혹은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동시에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유대인 배척주의도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되었다. 로맹 가리의 조국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겪지 않은 신세대들이 유대인을 배척하는 풍토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디부크 징기스 콘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죽음에 몰어 넣은 샤츠와 공존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처럼 유럽에서의 정치경제적 상황 역시 스키조프레닉했던 게 아니었을까. 로맹 가리가 구사한 문학적 전개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멸절계획의 책임전가 같이 예민한 이슈에 대한 작가의 사유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과 샤츠가 그렇게 두려워한 비누가 과거의 문제였다면, 현재의 문제는 베트남전쟁이었다. 희극배우 징기스 콘은 연쇄살인의 현장 가이스트 숲에서 느닷없이, 백인과 흑인 그리고 멕시코인들이 투입되어 베트남 인민들과 무력투쟁을 벌인 베트남의 정글로 공간이동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좀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는 나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사신의 활약은 오라두르쉬르글란, 리디체, 트레블링카 그리고 미라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 재래식 학살이 주를 이루었다면 현대전쟁에서는 핵폭탄과 수소폭탄까지 동원한 그야말로 절멸이 현실화되지 않았던가. 7억 중국인들과 전쟁이 멀지 않았다는 종래의 구태의연한 황화론에 대한 불안감과 작가의 인종주의적 시선이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점들도 눈에 띄었다. 그냥 로맹 가리식 자기파멸적 유머로 퉁치기엔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이런 정신분열적 책을 완독해낸 내가 다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초반은 흥미진진하고 재밌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좌표를 잃은 양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꾸역꾸역 읽다 보니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게 로맹 가리식 블랙유머라고 한다면,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7권 남았다. 나의 로맹 가리 읽기는 계속된다.

 

[뱀다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2차세계대전사 <히틀러의 최정예 전차부대, 다스 라이히>에서 다룬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지 못했다면, 프랑스인 로맹 가리가 왜 그렇게 자신의 작품에서 오라두르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리디체는 <새벽의 7인>을 통해 알게 됐다. 이래서 책과 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09-05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레샤매냐님 로맹가리 제자~ㅋ

레삭매냐 2018-09-05 13:53   좋아요 1 | URL
천만의 말씀입니다 :>

우리 열심히 로맹 가리를 읽어 BoA요.
 
일기 감추는 날
황선미 지음, 조미자 그림 / 이마주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알라딘에서 서지정보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황선미 작가의 <일기 감추는 날>이 재출간된 책이라는 걸 모를 뻔 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세상의 빛을 본 책이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일러스트레이터와 작업으로 다시 나온 모양이다.

 

책의 내용이야 당연히 동일하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소윤경 작가에서 조미자 작가로 바뀌면서 톤이 상당히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아마 <암탉>의 대성공으로 해외 진출을 고려해서였을까? 조미자 작가의 그림은 장 자크 상뻬의 그림체처럼 왠지 프랑스 스타일처럼 보였다. 소윤경 작가의 그림은 아무래도 오래 전이라 촌스럽긴 해도, 이야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민이와 경수의 이야기에 좀 더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 감추는 날>은 내레이터 동민이가 말썽쟁이 경수가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는 걸 목격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들은 왜 하지 말라는 건 기를 쓰고 하는 걸까? 울타리를 뛰어 넘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 울타리를 넘지 말라고 하는 건데. 하긴 우리가 언제 부모님 말씀 대로 세상을 살아 왔던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진짜 이야기는 다음이다. 동민이와 경수네 담임 선생님은 일기 쓰기를 정말 강조하신다.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개선하는데 있어 일기 쓰기만한 게 없다는 지론이시다. 이제는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여름 방학 때 그림일기 쓰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으리라. 잘 그리지도 못하는(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그림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림에 일상까지 담으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중에 커서는 쓰지 말라고 해도 일기를 쓰고 했으니까. 문제는 선생님이나 엄마 아빠가 나의 일기를 몰래 볼 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나중에 동민이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처럼, 엄마는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일기장에 아빠와 한 부부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아, 동민이는 벌써부터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일기장에는 있는 그대로를 쓰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일들만 보여 주라는 것이지. 그럼 우리가 매달려 사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와 뭐가 다르다는 거지? 좋은 경치를 자랑하는 여행지, 별미 같아 보이는 음식 사진을 찍기 위해 포크를 들고 달려 드는 대신 에어샷을 찍기 위해 “잠깐!”을 외치는 우리네 모습이 동민이의 고민과 묘하게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어쨌든 경수는 자신이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는 걸 동민이가 일기장을 통해 선생님에게 일러 바쳤다고 생각하고 동민이를 괴롭힌다. 아주 사소한 방법들로. 물론 거친 물리적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녀석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자신에게 닥칠 후과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말이지. 아, 어린이들의 세상도 어른들의 그것 못지 않구나. 동민이는 엄마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데, 엄마는 맞서 싸우라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이 놈의 세상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걸 엄마는 이번 기회를 통해 알려 주려고 하셨나 보다.

 

뭐 예상대로 나름 범생이었던 동민이는 일기를 거르게 되고, 그 벌로 청소도 하고 늦게까지 남아 교실문을 잠그고 열쇠를 선생님에게 전달하는 일도 하게 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은 선생님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이들에게 맡겨도 되는 건지 좀 헷갈리기 시작한다. 15년 전에는 그랬었나. 동민이 역시 울타리를 상처가 나면서 뛰어 넘게 되는데, 좀 힘들긴 했지만 막상 해보니 별 게 아니었더라. 그리고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걸 보고는 경수도 더 이상은 동민이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더라는. 곁에서 수연이란 친구도 동민이를 응원하게 되면서 나름 해피 엔드로 끝난다. 아, 직장을 그만 둔 동민이의 아빠와 엄마의 이어지는 스토리가 궁금한데 그 부분은 생략되었다. 동민이 아빠는 직장을 그만 두고 호구지책으로 공사장에 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나.

 

다시 한 번 선생님이 학생들의 일기를 검사하는 장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학교 선생님이 아이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건가? 알아도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슈퍼히어로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다시 한 번 개입과 중용의 미덕이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해는 가지만 다 수긍할 수도 없는 그런 어쩡정한 관계라고 해야 할까. 아, 그리고 그림은 새로 나온 버전보다 예전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이모 토울스 작가에 관심이 많아 신간 <모스크바의 신사>가 출간되기 전부터 그의 전작 <우아한 연인>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출판사에서 출간 전 연재를 한다는 뉴스를 듣고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이 나온 뒤에 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내 앞으로 다시는 출간 전 연재를 읽지 않기로 했다. 출간 전 연재는 전문게재도 아니고, 요약본 스타일로 나오는데 본 독서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본문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읽은 것 같은 기시감이 특히 문제다. 교훈을 얻었으니 앞으로 읽지 않겠다, 아주 치명적이었다.

 

초반에 144쪽 정도까지 읽다가 로맹 가리 전작도전을 시작하는 바람에 우선순위에서 좀 밀렸다. 소설의 주인공은 알렉산드르(사샤)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시간적 배경은 1922년, 볼셰비키 혁명 5년이 지난 모스크바다.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저명한 인사로 알려진 로스토프 백작은 현재 메트로폴 호텔에 거주하고 있다. 내무 인민위원회이 열려 그에 대한 연금형을 선고했다. 앙시앵 레짐의 일원인 구세대의 일원으로 숙청되어야 마땅한 인물이지만, 혁명 이전 혁명시를 발표하는 등 영웅으로 간주될 만한 행동으로 인해 그나마 시베리아 유형은 면한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내려진 6대 도시 거주 금지형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으리으리한 호텔 생활이라고 하지만, 갇혀 산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사샤는 자신이 살던 스위트룸에서 쫓겨나 다락방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간은 모름지기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평생 해온 루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선친이 남겨주신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백작은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교양을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백작은 혁명 시기 굳이 러시아로 돌아와서 할머니는 서방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미래가 불투명한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조국에 남게 된 걸까라는 질문이 소설 초반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우매한 독자여, 조금만 기다리시라, 그 이유도 곧 밝혀질 테니.

 

로스토프 백작이 지겨운 호텔 연금생활을 버텨 내기 위해선 단순히 책읽기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연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물론 경제적 생활과 백작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한 금전도 필요했겠지. 백작은 특유의 사교성과 기지를 발휘해서 다급한 문제들부터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를 제공하는 전설적 식당 보야르스키의 지배인 안드레이와 주방장 에밀은 백작(훗날 웨이터 주임이 된다)과 삼총사를 구성해서 제한적이지만 다양한 모험을 시작한다.

 

8살 꼬마 소녀 니나 쿨리코바와의 우정 또한 기가 막힌 스토리텔링 전개에 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공주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당돌한 소녀에게 백작은 자신이 가진 다양한 교양과 예절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주변인들과의 누리는 이런 사소한 즐거움이 없었다면 호텔에 갇힌 백작의 삶은 형편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백작은 당대 최고의 영화스타 중에 한 명이었던 안나 우르바노바의 숨겨진 애인이 되는 영예도 누리지 않았던가. 물론 절친 미시카의 관계 역전 때문에 고뇌할 때도 있었지만, 체호프 서신 사건으로 미시카가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백작은 자신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친구를 잃게 된다.

 

서구사회 자본가 계급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볼셰비키들에게 백작은 구세대의 일원일 따름이었지만, 혁명의 혼란을 딛고 최악의 독재자 스탈린의 영도 아래 서구사회와 관계 회복을 위해 프랑스와 영국사회의 문화를 공부하려던 당간부 오시프는 호텔의 노란방에서 백작에게 과외를 청하기도 한다. 월스트리트에서 투자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저자 에이모 토울스는 지난한 고증과정을 통해 1920년대부터 시작된 러시아 볼셰비키 시절을 절묘하게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어쩌면 사소한 예법 하나에까지 신경써야 하는 게 신사의 본질이라는 백작의 생각에 동의하도록 유도하는 부르주아식 사고방식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 정말 다양한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체현해낸 점은 칭찬하고 싶다.

로스토프 백작은 음악이면 음악, 춤이면 춤, 귀족 사교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구시대의 마지막 신사로 묘사된다. 아마 어느 누구라도 보야르스키 식당에서 웨이터 주임으로 활약 중인 백작에게 서비스를 받게 된다면 아마 영광이지 않을까 싶다. 그의 애인 안나 우르바노바는 서구사회, 특히 미국에서 진행 중인 온갖 형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계문명의 발전을 찬양하지만 반대로 사샤는 올드스쿨 스타일의 품격 있는 서비스야말로 인간 삶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한다. 아마 노동해방을 꿈꾸는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들었다면 당장에 총살을 시키라고 주장했을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생각이 아니었던가.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저작 <소음의 시대>에서 스탈린 폭정의 시대를 살았던 천재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불안을 정확하게 타격해냈다. 그런 반스와는 상대적으로 토울스는 스탈린 시대를 간략하게 그려냈다. 히틀러를 상대로 한 애국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독재자 스탈린의 죽음을 조문하는 기이한 시민들의 행렬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백작은 청년 시절, 이념 논쟁으로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사회의 최선봉에 서 있었던 투자자문가 출신 소설가는 그런 이데올로기 논쟁보다는 엄혹한 볼셰비키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백작 주변의 소시민들의 삶에 더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예를 들어, 애국전쟁 당시 마지막 베를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외아들의 방을 유지하고 싶은 지배인 안드레이의 소박한 희망이 그렇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와 이반 뇌제의 경우를 들어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자기파멸적인 경향이 있더라는 식으로 백작이 고뇌하는 장면도 간략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가.

공산주의 세례를 받아 콤소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니나는 어느 날 갑자기 백작 앞에 등장해서 6살짜리 딸아이 소피야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나선다. 물론 우리는 니나가 다시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까스로 연금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백작에게 소피야의 등장은 새로운 문제에 다름이 아니었다. 물론 조금 느슨해지던 스토리텔링에 힘을 실어 주는 건 불문가지다. 그건 마치 체스 고수가 몇 수 앞을 예상하고 준비한 수를 던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토울스의 작법과 스타일은 정말 대단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한 사샤에게 소피야의 존재는 그야말로 특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게다가 그녀가 음악 연주에 소질을 보여 깜짝 놀랄 정도로 실력을 피아니스트가 되어 성공가도를 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소설이 시작된 1922년으로부터 시작되어 자그마치 32년이 되어 백작은 마침내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 그런 일탈을 감행한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혁명과 전쟁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로스토프 백작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귀족 신분으로 볼셰비키 시절에 당연히 처단되어야 할 처지에서, 친구 미쉬카가 대필한 시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백작에게 연금형은 어쩌면 축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메트로폴 호텔에서 환경을 지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외부세계에는 치열한 체제경쟁, 다른 이름으로 냉전이라는 이름의 열전이 시작되었다. 백작은 ‘무식한 야만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말렌코프를 필두로 한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러시아 최고권력자가 되는 장면을 목격했고, 오브닌스크 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로 모스크바의 불빛이 깔리는 장면을 직접 보기도 했다. 에밀과 안드레이 삼인조와 결합해서 한밤의 부야베스 파티를 벌인 장면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훗날 파리 대사가 되는 리처드 밴더와일의 스파이 제안도 거부한 사샤가 오로지 자신의 딸 소피야의 미래를 위해 조국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자기 역시 망명길에 오르는 장면에서는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시장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체제 승리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끝까지 첩보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뒤로하고 역시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장면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에이모 토울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 필력이라면 정말 두 번째 소설이 아니라 열 번째로 발표한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출간 전 사전연재 때문에 초반에 고전하긴 했지만, 예의 고비를 넘기고 나자 그야말로 거칠 게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달려온 느낌이다. 700쪽이나 되는 작품이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구성 덕분에 분량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제 역주행해서 에이모 토울수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을 읽어봐야겠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올해 읽은 최고의 책 중에 하나로 꼽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8-07-30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1월인가 읽었는데 아주 좋아하는 책이에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18-07-30 15:41   좋아요 0 | URL
저는 책 나오자 마자 사서 바로 읽기는 시작
했는데 도중에 그놈의 로맹 가리 읽기에 미
치는 바람에...

그래도 달 넘기지 않고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읽다만 책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네요 ㅋ
책은 진짜 재밌었습니다.

목나무 2018-07-30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양철나무꾼님의 리뷰에 이어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연달아 읽으며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급 상승했습니다. ㅎㅎ
이렇게 괜찮은 책을 왜 놓쳤을까 싶을 정도네요. 두께의 압박이 있지만 곧 저도 만나보렵니다. ^^

레삭매냐 2018-07-30 15:53   좋아요 0 | URL
로맹 가리의 <징기스 콘의 춤>을 한참 읽다가
옆에 내팽개쳐 두었던 <모스크바의 신사>를 어제
저녁에 문득 집어서 조금만 읽고 자야지 했는데
순식간에 400쪽을 넘게 읽었네요.

재미는 대단합니다 !!! 새로운 작가의 발견이라고
나 할까요.

그나저나 내침 김에
비키 바움의 <그랜드 호텔>과 에카 쿠르니아완의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sslmo 2018-07-30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역사적인 쪽으론 좀 취약해서 읽는 내내 듬성듬성 구멍이 뚫리는 듯 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그 부분이 보완되어 선명해지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그나 저나 저도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 부분에 니즈니노브고로드 주가 언급되어 혼란스러웠습니다~--;

레삭매냐 2018-07-30 17:03   좋아요 1 | URL
에이모 토울스 작가가 아무래도 미국 출신 작가
이다 보니 이데올로기 이슈를 상대적으로 다루
는데 주저하게 된 게 아닐까 싶네요.

스탈린 시절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맥이 줄리언
반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임스 설터의 최근 작품에서도 느꼈듯이 대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균질한 작품의 완성도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로맹 가리 전작읽기 중에 만난 <여자의 빛>도 그랬던 것 같다. 여성성이야말로 자기 작품 추구의 목적이라고 읊조리는 노년의 로맹 가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 미셸 폴랭은 명백한 작가의 페르소나이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파리의 어느 날, 주인공 미셸은 40대의 매력적인 리디아 토바르스키를 만난다. 리디아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딸과 남편을 잃었다고 미셸에게 고백한다. 첫 만남부터 위태로운 관계가 피어오를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물스물 퍼진다. 미셸 역시 불치병에 걸린 아내 야니크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죽어가는 아내를 대신할 새로운 ‘여자의 빛’을 리디아에게서 발견할 걸까. 모호한 대화 속에 진심들이 가끔씩 드러나는 대화가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

 

리디아와 함께 들어간 카페에서 동물조련사 세뇨르 갈바를 만나게 된다. 분홍색으로 염색된 푸들과 침팬지가 파소도블레를 추는 공연을 미셸은 역겨워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데카당스한 쇼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늘상 어색한 만남에서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마 라스베이거스라고 했었지. 유혹과 각종 환락이 넘실거리는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 죽음이라는 공통 과제를 가진 남녀에게 달나라만큼이나 먼 듯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런데 로맹 가리는 왜 느닷없이 세뇨르 갈바를 등장시킨 걸까. 결국 세뇨르 갈바도 소설의 막바지에 죽음을 맞게 된다. 침팬지와 푸들의 파소도블레 공연이 벌어지는 가운데 말이다. 별 인연이 없던 미셸은 자신의 여행가방을 챙겨 무심하게 죽음의 현장을 떠나 버린다.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고, 소설은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에 초점이 맞춰진 가운데 그럭저럭 굴러간다.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은 미셸이 리디아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시어머니가 주최한 리셉션 장에서 일어난다. 처음에 죽었다던 남편 알랭은 죽은 게 아니라, 거의 식물인간 같은 존재가 되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되뇌인다. 그에 장단을 맞추든 ‘유대인식 유머’를 동원해서 미셸은 맞장구를 치는 장면. 죽은 아내가 있는 곳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 ‘여자의 빛’이 필요하다며, 리디아를 데리고 나선 배짱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자신의 누나에게 이러면 안되었다며 항의하는 처남에게, 자신은 어쨌거나 행복을 추구하겠다며 응대하는 미셸의 모습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로맹 가리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혼한 아내 진 세버그가 죽었어도, 난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홀아비의 비양심적인 선언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면에서 항상 듣는 말인, 산 사람은 살아야지 뭐 그런 말이 연상되기도 했다.

 

미셸과 함께 애욕의 사막을 건넌 리디아가 한동안 멀리 떠나겠다는 말에 미셸이 그녀에게 충분히 감정을 다스리고 충전의 시간을 가진 다음에 돌아오라는 말을 했을 땐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새로운 ‘여자의 빛’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스러져가는 노년을 맞고 있던 로맹 가리의 씁쓸한 회한 같은 것들이 느껴진 그런 작품으로,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아니 여성성에 대한 극진한 예찬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바람둥이 작가의 숨길 수 없는 로망으로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쨌든 <별을 먹는 사람들>이나 <레이디 L> 같이 강렬한 한 방도 부족했던 것 같고. 어쨌든 로맹 가리의 전작읽기의 가도에서 만난 책이라 완독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독서였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건국 잔혹사 - 설계자 이방원의 냉혹하고 외로운 선택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이 어떻게 세워졌더라.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배운 바에 따르면, 40여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과 그후 친원 세력에 의해 장악된 고려 조정은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으로 일반대중들에 대한 착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도 몰락하는 국가에 역시 한몫했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조정이 위태로운 가운데 친원세력으로부터 자주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이 등장해서 잠시 개혁의 움직임이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해산 중에 사망하면서 공민왕과 고려의 운명을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군벌 무장세력과 대표선수 정도전이 직접 나선 신진사대부들이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판갈이를 해야겠다며 나선 끝에 조선이 세워지게되었다. 이상이 조선 건국에 대한 기본적인 개략일 것이다.

 

배상열 저자는 조선 건국에 얽힌 이야기 중에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몽주 암살사건과 왕자의 난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참신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실 <조선 건국 잔혹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는 책의 내용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가 깔려 있으니, 유념해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우선 스러져 가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 암살사건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로 알려진 만고의 충신 정몽주의 최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26세의 혈기 방장한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전우였던 정몽주를 죽여야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 수 있다는 취지 아래 행동에 돌입했다고 역사에서 혹은 각종 사극 드라마에서 배워왔다. 그런데 저자는 당시만 하더라도, 이방원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고 분석한다. 게다가 사건 당시 이방원은 개경에 있지도 않았을 거라는 추정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정몽주 암살을 주도한 주범은 누구란 말인가.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바로 이성계의 차남 이방과(정종 혹은 공정왕)이었다는 것이다. 한씨 소생의 막내아들 이방원보다 장성한 이방과는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면서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겪은 베테랑 선수였다. 발톱을 숨기고 있던 정몽주의 마지막 기회였던 이성계 낙마사건을 전후해서, 얼마 남지 않은 고려 충신들을 규합해서 이성계의 심복들을 일거에 제압하려던 정몽주의 기획 아래 돌아가는 정국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이방원보다는 이방과에게 있었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언제나 역사 공부에서 나오는 표현이지만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던가.

 

<고려사> 혹은 <고려사절요> 등의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자들이 누구인가. 조선의 녹을 먹는 조선 사관들이 아니었던가. 있는 진실만을 기록한다는 것이 사관의 임무라고 하지만,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들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을까? 천만에 만만에 콩떡일 따름이다. 공민왕이 황음무도했다는 썰이나, 우왕과 창왕이 요승 신돈의 자제였다는 그야말로 확인되지 않은 그야말로 저잣거리에서나 들을 법한 요설들을 그대로 실록에 기록하는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던가. 분명 훗날 태종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이방원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 만들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는 동아시아에서도 몽골의 원나라가 북방으로 축출되고 주원장의 한족 중심의 명나라가 세워지는 시기와 절묘하게 겹쳤다. 고려가 백여 년을 섬김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외교 전략을 구사했다면 국익에 최고의 이익이 되었겠지만, 고려조 훗날 조선의 집권세력이 되는 신진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올인해 버리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에 잔혹한 독재자 주원장은 그야말로 조선을 동맹국이 아닌 하청업체 수준에서 모욕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바로 이런 사대주의에 대한 책의 어떤 부분에서도 보다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야말로 가장 충성적인 동맹국을 공깃돌 가지고 놀듯 하며, 공식 사신 이염에게 몽둥이질을 해서 거의 죽일 뻔하기도 하였다.

 

더 웃기는 건, 우왕 시절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소국이 대국을 정벌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사불가론을 들어 쿠데타에 성공한 이성계와 정도전이 주원장의 무리한 요구에 요동정벌을 계획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따로 없었다. 사실 조선의 개국 공신들이라는 위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백성을 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보기 좋으라고 내세운 선전선동일 따름이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철저하게 도모한 엘리트 이익집단의 역성혁명이었다. 경기도 전지의 1/3에 달하는 토지를 공신전으로 하사받고, 자자손손 누릴 면책특권까지 요구한 이들에게 신국에 대한 기대는 그야말로 요원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군벌과 엘리트 계급의 연합? 그로부터 한 587년 정도 지나 비슷한 케이스를 우리 현대사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저자의 다음 타겟은 첫 번째 왕자의 난이다. 어찌어찌 해서 결국 조선이 세워졌다. 비록 홍무제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해 반편이 스타일로 구겨지긴 했지만, 어쨌든 신국이 건설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국본 바로 세우기, 세자 책봉이었다. 다른 역사책에서는 정몽주 암살로 건국의 지대한 공훈을 세운 이방원이 세자가 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조선의 진짜 설계자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 강력한 왕권주창자인 이방원은 맞지도 않는 선수였다. 그 결과,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 위에 올랐다. 다음 후계자 자리가 엉뚱한 형제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한 나머지 형제들의 분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특히나 야심찬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다음 순서는 몽골족의 원나라에 붙었다 다시 고려에 투항했다를 번복한 배신자 집안 이성계 집단의 근원이 사병혁파였다. 그리고 보니 이성계 집안에서 반역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안 내력이었던 모양이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족에게 붙었고, 군벌 출신 이성계 자신 역시 고려를 뒤집어엎고 신국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그런 선수의 아들 이방원 무리 역시 아버지에게 어퍼컷을 날리길 주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배신자 집안에게 ‘해동 육룡이 나라샤’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를 쓴 조선의 어용 지식인들에겐 아마 공맹의 가르침 중의 하나인 수오지심 따위는 없었나 보다.

 

이방원에게 봉화백 정도전이 계획한 대로 배다른 막내아우 이방석이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순간, 자신의 운명은 끝장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를 쳐야만 했다. 아주 절박했을 것이다. 조선 최고 천재 정도전의 정보망이 가동되어, 이방원과 그의 책사 하륜 그리고 행동대장 이숙번이 모여 역적모의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리라. 이마 사병혁파는 척척 진행되어, 병장기까지 반납된 마당에 가장 우수한 병사들로 구성된 왕실경호대가 포진한 경복궁을 상대로 무력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그야말로 자폭행위였을 것이다.

 

다만 정몽주 암살사건 때처럼, 이번에도 이성계의 건강이 문제였다. 이방원 일당에겐 그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말도 안도는 상황에서 급조된 반란은 순전히 운빨로 성공에 이르게 된다. 실제 전장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역전의 용사이자 상승장군 출신 노장 이성계가 반란진압에 나섰다면, 역도의 무리라는 오명은 정도전과 이방석이 아니라 감히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이방원 일당에게 뒤집어 씌워졌을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한 번 이번 가사의 진짜 주범은 이방원이 아니라, 이성계의 심복이었지만 거사를 앞두고 말을 갈아탄 조영무였노라고 밝히고 있다. 이성계 휘하에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전사답게, 가히 동물적 감각으로 정국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판돈을 이방원에게 올인한 것이다. 한 사람의 선택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첫 번째 왕자의 난에서 조영무의 선택이 조선 왕조의 큰 물줄기를 바뀌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 건국 잔혹사>를 읽으면서 느낌 점을 하나로 집약한다면, 모든 역사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지 말라는 점이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 아는 기본은 누구라도 다 알듯이 바로 <실록>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록이 진실만을 다루고 있냐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왕조에 불리한 사실들이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순진한 게 아닐까. 그러니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바로읽기에도 세심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선 많이 읽어야 하고, 읽고 느낀 점들이 서로 융합을 이루어 최종판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화를 걷어낸, 단백한 역사의 크레바스에 빠져 버린 사건을 부검하고 새로운 사실 혹은 결론을 적출해낸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보낸다. 다만, 수나라를 창건한 사람이 양제이고, 고구려가 당태종 이세민 대에 멸망했다는 오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유 때문에 별점 두 개를 제외한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자유지만, 틀린 역사에 대한 기록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