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산 지가 벌써 만 3년이 되었구나.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막바지 광풍이 불던 시절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 <녹턴>을 샀다. 그리고 읽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가, 이시구로 선생의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에 열심히 찾아 얍삽하게 읽어내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참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녹턴’이라고는 쇼팽의 야상곡으로 대니얼 바렌보임이 연주한 op.9-2가 유일했다. 이제 나의 녹턴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모두 5개의 음악과 해질녘에 관한 단편소설들이 <녹턴>을 장식한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이 소설집의 특징을 잡아내는 키워드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유머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내가 읽은 이시구로 선생의 책들에는 유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십년에 한 편 꼴로 소설을 발표하는 진지모드의 과작(寡作) 작가에게 유머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무래도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이런 색다른 시도가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작은 베네치아다. 동구권 폴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야네크는 어릴 적 자신의 우상 토니 가드너와 아주 우연히(소설에서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어렵고 암울하던 시절을 야네크의 어머니는 토니 가드너가 불러제끼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던가. 공산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는 점에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토니 가드너는 모종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아내 린디에게 세레나데를 들려 주기 위해 야네크를 초빙해서 곤돌라 위에서 크루너(crooner)로서 공연을 계획한다. 다들 ‘한물간 딴따라’라고 치부하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아내 린디와의 27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새로운 출발, 컴백을 위해 이혼 이벤트를 거행하려고 한단다. 인간사 모든 것이 금전으로 계량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문학가의 저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가는 거지.

 

슬슬 발동을 건 이시구로 선생의 유머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비가 오나 해가 뜨나>에서 폭발한다. 사반세기 전 대학동창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 명의 대학동창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어떤 점에서는 슬랩스틱 스타일의 미국식 코미디가 연상되기도 했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영어교사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던 레이(먼드)는 여느 때처럼 런던의 찰리와 에밀리를 방문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 레이의 예상대로 찰리는 바람이 났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는 동안 아내 에밀리의 화를 삭여 달라는 분부대로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이 꼬여만 간다. 어쩌면 런던 금융계에서 성공한 이들 부부는 레이에게서 자신들과는 다른 패배자의 모습을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 출발은 같았지만, 2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는 이렇게 달라졌다라고. 레이가 찰리의 지시대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인공적으로 개냄새를 만들기 위해 찰리의 낡은 신발을 삶는 동안 나타난 에밀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과연 먹혔을까. 소설집 <녹턴>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친구들에게 이용당하는 레이의 모습이 슬프기도 했던. 여기서 얻은 교훈 하나, 타인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 것이니.

 

<말번 힐즈>는 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기타리스트로 런던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성공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다는 매기 누나의 제안에 그녀와 매형이 말번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빌붙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상주의자다. 매기 누나가 그를 그냥 먹여 주고 재우고 싶어서 불렀을까? 아니다. 여름철 손님들이 늘어나니 일손이 부족해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가하게 음악이나 만들면서 보내고 싶은 주인공의 심리와 매기 누나의 현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누나가 빚어내고 자신이 ‘새로운 분노’라고 명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렇게 샘솟는 법이지. 예전 자신의 학창시절을 악몽으로 만들었던 프레이저 선생님에 대한 증오감과 매기 누나네 카페에서 서비스에 대해 혹평을 하던 스위스인 부부를 골탕 먹이려던 시도는 그들을 알게 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연주 혹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청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는,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청중이 주는 긴장감에 대한 묘사 등은 정말 탁월했다. 한 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는 이시구로 선생의 음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다.

 

표제작 <녹턴>에서는 <스쿠너>에서 등장했던 토니 가드너의 전처 린디 가드너가 주인공 스티브처럼 얼굴이 붕대를 친친 감고 등장해서 멋진 호흡을 맞춰준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붕대감은 세션 연주자로 뛰어난 테너 색소폰 주자이지만, 실패자형 추남(원서에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이라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하는 남자 스티브다. 이 남자는 아내 헬렌을 뺏아간 샛서방의 제안으로 그리고 매니저의 강권에 못이겨 할리우드에서 성형수술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워할 전문의 닥터 보리스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맡긴다. 그것 참,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닌가. 닥터 보리스의 걸작품으로 재탄생하길 원하는 스티브의 바람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연상되기도 했다. 재능을 가지고 정상을 향해 달리길 원하다면, 마케팅 전략(성형수술)이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설득에 줏대 없는 실패자형 추남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과 동병상련에 있는, 천박함의 대명사지만 할리우드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린디 가드너와 의기투합해서 한바탕 헛소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부와 명예를 위해 내달리는 스티브와 린디의 조합이야말로 한밤의 ‘야상곡’ 같다는 의미에서 이시구로 선생은 과감하게 <녹턴>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닐까. 그 또한 작가가 던진 유머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대미를 장식하는 <첼리스트>에서 저자는 다시 독자들을 최초로 소설이 시작된 베네치아로 다시 인도한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번에는 집시처럼 베네치아에서 음악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연주자들의 눈에 들어온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에 대한 이야기다. 저명한 스승에게 사사 받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티보르지만, 정작 밥벌이의 지겨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광장의 카페에서 값비싼 커피를 마시는 그를 보고 다른 연주자들은 ‘낭만적 바보’라고 폄하한다. 그런 그가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스스로 저명한 첼로 주자라고 주장하는 중년의 엘로이즈 매코믹 양을 만난 것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스승의 대를 이어 저명한 첼리스트가 될 티보르의 행운이었을까? 그들은 아마 전자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엘로이즈 양의 티보르에 대한 개인교습이 진행되는 가운데, 과연 그녀가 진짜 첼로를 켤 줄 아는 사람이었나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사기꾼 명연주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집 <녹턴>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된 삶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원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이별의 노래로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변형(성형수술)을 통한 성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바로 그런 음악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인연의 매개체로 음악을 그리고 해질녘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휘발시켜 버린다.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음악처럼 그렇게 소설 <녹턴>도 독자의 가슴 속에 잔영을 남긴 채 사그러지는 것이다. 뭐 음악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남은 것은 그런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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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0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숨어서 지냈던(?) 이시구로 덕후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군요. ^^

레삭매냐 2017-10-11 09:02   좋아요 0 | URL
노벨상 받기 전까지 꼴랑 이시구로 선생
의 책 두 권만 읽어서 덕후 인증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

이젠 덕후라도 해도 괘않겠네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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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묻힌 거인>은 2015년에 발표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7번째 소설이자, <나를 보내지 마> 이후 자그마치 10년 만에 나온 최근작이다. 국내에서는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모든 작품들이 민음사에서 나온 반면, 이 책만 시공사에서 출간됐다. 게다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을 자랑한다. 무려 판타지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이 책을 읽는다면,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의 책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동시에 조금 우려가 되기도 했었다. 영국 작가들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통의 소재(우롱차처럼 한껏 우릴 수 있는) 아더 왕의 전설이 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의 노파심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독후감상은 대만족이었다.

 

소설은 현재로부터 자그마치 1,5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후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가 전간기나 패전 뒤의 시간적 배경을 장기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또한 파격이 아니겠는가. 우매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된다. 십대 소년으로 보이는 프로도 일행이 반지원정대를 구성해서 세상을 구하는 대원정에 나섰다면,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 원정대가 등장한다. 기억이 상실된 시대, 잉글랜드에 사는 브리튼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던 간에 기억과 상실은 소설의 주요한 소재로 인식된다.

 

번역서에서는 도깨비라고 되어 있는데 오거(ogre)가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안전한 마을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악령과 오거가 날뛰는 험악한 시절에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는 왜 위험한 여행길에 나서려는 걸까. 그것은 어딘가에서 둥지를 틀고 있을 아들을 찾기 위함이다. 심지어 노부부는 마을에서 어둠을 밝히는 초사용을 금지 당하지 않았던가. 깨달음과 계몽을 위한 불빛이 상징하는 빛[lightment]의 사용이 금지된 이유에 대해 이시구로 선생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 정도.

 

노부부 원정대에 오거에게 잡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색슨족 소년 에드윈과 역시 같은 색슨족 출신 전사 위스턴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어느 섬에 가기 위해 뱃사공에게 도강을 의뢰했다가 낭패당한 이야기가 등장했던가. 아마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노부부의 여정이 아들을 찾기 위함이라는 명목상의 이유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사공은 바로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아니었던가. 뒤에 등장하는 뒤에 연이어 등장하게 될 아더왕 전설과 더불어 기존의 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재창조(re-creation)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본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시구로 선생은 능수능란하게 서사 구조를 이어간다. 단단한 스토리 구성에 노년과 청장년을 아우르는 캐릭터 구성에까지 그리고 곳곳에서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등장하는 사이드킥들까지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어 보일 지경이다.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결 구도는 정착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내면에는 브렉시트로 귀결된 이슬람 난민 문제에 대한 문학적 은유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더왕 시대의 암용은 입김을 뿜어 사람들의 망각을 유도한다.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쉬울 지 몰라도, 인간에게 망각이란 또 필요악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전사 위스턴은 브리튼족 사이에서 전사로 성장했지만, 그들이 색슨족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미래의 전사이자 사냥꾼 에드윈에게 각인시킨다. 이렇게 구전되는 분노와 증오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암용의 입김이 만들어낸 선효과가 아닐까. 비어트리스가 험난한 여행 중에 말한 것처럼, 좋지 않은 기억조차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저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파묻힌 거인>은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로드무비 같은 원정대의 여정,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 그리고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망각에 대한 저주 등. 게다가 무서운 암용과 오거들이 출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기사의 등장,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를 이은 갈등 구조만으로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시구로 선생은 이제 자신의 커리어에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까지 얹었으니 영화 마케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면서 여정에 나선 액슬의 과거 역시 흥미진진하다. 신사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색슨족을 학살한 아더왕의 결정에 분연히 반대한 유능한 외교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이름 없는 농부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액슬(러스)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주하게 될 삶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에 소설의 방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사 위스턴의 활약상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회상, 부조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도 등을 자신의 저작들에서 주로 다룬 이시구로 선생이 이렇게 멋진 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원정대의 험난한 여정을 헤쳐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캐릭터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암용을 처치하라는 아더왕의 밀명을 받았다는 기사 가웨인 경의 등장도 흥미롭다. 아더왕의 조카로 수많은 세월을 경험한 노련한 기사는 때로는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입체적 면모를 선사해준다. 말미에서 반드시 암용 케리그를 처리해야 하는 위스턴과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결은 소설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전투 씬 역시 영화화된다면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바로 연상되는 수도원은 <파묻힌 거인>에서 신에게 서약한 수도사들이 묵언수행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 온갖 비밀과 음모 그리고 협잡이 넘실거리는 공간으로 치부된다. 물론 선을 위해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는 일단의 수도사들도 있지만, 다수의 수도사들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위스턴의 숙적 브레누스 경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과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장면이 영화화된다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지경이다.

 

이시구로 선생의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서 죽음과 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해 보게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죽음은 곧 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이런 망각의 일상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음이 있을 지어다.

 

49-50p 액슬은 말한다.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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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7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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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상이란 작가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 받는 노벨문학상이라고 한다면. 지난 35년 동안, 7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소설집을 발표한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금년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작년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에 이은 설화를 단박에 제압해 버리는 그런 의외의 결과였다고 해야 할까. 노벨문학상이 무척이나 정치적인 결과들을 도출해 낸다고 하지만, 처음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기억될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최소한 적어도 하루키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연휴는 이시구로 선생의 책읽기에 온전하게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원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 완독에 목표를 두었지만, 지난 목요일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가 나면서 나의 연휴 독서 계획은 오롯하게 이시구로 선생 읽기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모두 5권의 책을 읽었다. 만족할 만한 수작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판타지와의 만남도 있었으며(<파묻힌 거인>),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유머에 대한 일격(<녹턴>)도 대면할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그가 35년 전에 처음으로 발표한 <창백한 언덕 풍경>이다. 아무래도 이십대 청년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다 보니 솔직하게 말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 저자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츠코 상에게 투영한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는 에츠코 셰링엄 부인은 최근 딸 게이코의 장례식을 치렀다. “자살 본능”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가운데 멀리 떨어진 맨체스터에 사는 딸 게이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로에 이은 자신의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니키가 엄마를 찾아와 위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시구로 선생은 플래시백으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일본 나가사키로 무대를 옮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억총옥쇄를 주장하던 일본 군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분쇄되었고,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이라는 패전의 치욕을 감내하던 시절로 저자는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 중에는 원수였지만, 패전 뒤에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남기 위해 미군정이 지도하는 방향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기존 질서들을 뒤엎는 전복이 진행 중이다. 에츠코는 전자 회사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지로 군과 신접살림 중이며, 현재 첫째 아이인 미래의 게이코를 임신 중이다.

 

에츠코는 남편 지로와 함께 새로운 주거 공간인 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반면, 그녀와 우정을 쌓게 되는 사치코 씨는 딸 마리코와 황무지 오두막에 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공간의 분리는 마치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 일본과 제국주의 시절 구세대 일본의 단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마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을 연상시키는 그런 삶을 걷는 사치코와 전쟁 와중에 딸을 살해한 여인이 언제 자신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마리코를 에츠코는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이십대의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아마 기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영국 남편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본 나가사키 시절 권위적인 남편상을 보여 주었던 지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들이 누락되어 있다. 물론 영국에서 패전국가 출신 동양 부인이 셰링엄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점도, 남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기이한 모습들에도 설명이 빠져 있다. 이런 점을 신예 작가의 문학적 시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나같이 무지한 독자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대한 해명을 원한다.

 

사치코가 에츠코를 통해 일자리를 얻은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에 대한 은유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 전, 그러니까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모든 것을 상실하기 이전 그녀의 집안은 한 자락하는 유지였던 모양이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의 생존만이 패전 국가 일본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을 방문한 오가타 상은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후지와라 부인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시대를 건너 뛰어, 특별할 일도 하지 않은 채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는 막내딸 니키의 모습이 미군정 아래 자주적으로 세운 어떤 국가적 목표 없이 부유하던 시절의 일본과 닮았다고나 할까.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는 변주야말로 청년 작가 이시구로가 목표로 삼았던 지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시구로 선생은 프랭크 상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사치코와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한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일본에 주둔한 정복자 미군들과 교제하는 사치코를 주변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우리가 마치 예전에 그녀들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시선들이 참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미국이 딸 마리코에게 더 나은 환경을,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며 프랭크 상을 기다리지만 그녀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할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치코와 마리코에게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략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미래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좀 더 본질적인 신구세대 간의 갈등은 전직 교장선생님인 오가타 상과 아들 지로 군의 친구 마쓰마 시게오 군 사이에서 벌어진다. 교원들이 보는 잡지에서 자신이 추천한 마쓰다 시게오가 기고한 구시대 교육인들(엔도 박사와 자신 같은 제국주의 교육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읽은 오가타 상은 분노한다. 새로운 전쟁국가 일본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는 아베 신조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놀랄 정도였다.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총칼 같은 무기가 부족해서였지, 자신들의 시스템이나 과오 탓이 아니었다는 말은 정말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 아니었던가. 규율과 충성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의무감을 강조하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언사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울러 미국식 민주주의 이식에 대한 불신과 우려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장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시절을 장식했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반성할 줄 모르는 오가타 상의 모습에서 탈아입구 방식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나섰던 제국주의 일본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수많은 가해자의 모습들을 단 두 방의 원자폭탄 투하와 피폭으로 피해자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가치전도의 장면도 더 이상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시구로 선생은 일본인이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패전국가 일본의 모습을 자신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을 통해 그려보겠다는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멋진 시도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남아 있는 나날>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 대한 저자의 저술은 한층 성숙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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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10-1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휴를 온전히 채운 독서 덕분에 이렇게 노벨상 작가의 세계를 알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레삭매냐 2017-10-10 13:35   좋아요 1 | URL
너무 멋진 작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를 보고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골 국물처럼 우려나온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7-10-10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유독 별점이 짜네요.ㅋ
하루키 보다 나은 선택이란 말씀에 한표요!
전 매년 하루키가 되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어요.
그럴 바엔 쿤데라가 받는 게 50배쯤 낫다고 봅니다.ㅋ

이번 연휴는 정말 알차게 보내셨네요. 부럽습니다.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ㅠ

레삭매냐 2017-10-10 14:48   좋아요 1 | URL
별점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날들> 그리고 <녹턴>에
별점을 더 후하게 줘야 해서요 ~ ㅋㅋ

전 이제 이시구로 선생의 마지막인
<위로받은 사람들> 읽기에 돌입합니다.

cyrus 2017-10-1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로 이시구로의 책을 소개하는 포스팅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중에는 리뷰라고 보기 힘든 글도 있어요. 레삭매냐님처럼 책을 읽고 쓰는 리뷰를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이 글에 땡스투 적립금을 받아야 하고요.

레삭매냐 2017-10-11 09:06   좋아요 1 | URL
과찬의 말쌈이십니다.

그나저나 예전의 땡스투 시스템에 좋았는데
지금도 작동하고 있나요?
서로 윈윈이 되는 것으로 가면 좋은데 받는
분에게만 지원이 되니.

아직도 이시구로 선생의 책 리뷰를 두 개는
더 써야 하네요 :>

shuai 2017-10-2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다시 보는 레삭매냐님의 이 리뷰가 정말 좋군요. 저는 더 보탤 말이 없네요.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10-26 20:25   좋아요 0 | URL
부족하기 짝이 없는 리뷰를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에 난폭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장장 열흘이나 되는 긴 연휴의 끝은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의 난폭>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실 이번 연휴는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에 도전하기가 목표였던 것처럼 지난 주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 그의 작품을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읽어댔다. 그렇게 어느 작가에 빠져 읽은 적이 있었던가? 아마 그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난 8월부터 잡고 있었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한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에 난폭>으로 끝을 맺었다.

 

지난 여름, 절반 가량 읽다만 책의 중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장 재미가 있어지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사랑의 난폭>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세 모모코 씨는 결혼 8년차 위기의 주부로, 결혼 전 성은 다케노우치다. 그녀의 남편은 마모루로, 자그마치 16살이나 어린 연하의 여성과 바람이 났다. 애인의 이름은 미야케 나오, 현재 임신 중이다.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 변신한 스타일 좋은 미녀 모모코 씨는 비누교실 강사로 소일하며, 병으로 몸져 누운 시아버지의 병간호에도 소홀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 집안의 비밀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모모코는 시어머니 데루코가 사시는 안채를 드나들며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마모루의 중재로 불륜에 얽힌 삼자가 대면헤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호텔에서 모모코 씨가 보여주는 히스테리는 우리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익숙해서 그런가, 사실 덤덤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간에 마모루는 모모코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나오와 새출발을 계획 중이다.

 

마모루와 나오의 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에서 사건의 실체를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미션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 실체에 도달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올해부터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범작은 아닌 <사랑에 난폭>. 한 남자를 두고, 그 남자를 서로 사랑한다고 우기는 두 여성 모모코와 나오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결말을 이루게 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자, 이제부터 스포일러 들어갑니다.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치명적인 요소이니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요시다 슈이치가 남성작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이 능구렁이 같은 작가는 어쩌며 이렇게 여성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지 그리고 약간 헷갈리는 일기 구성으로 사실은 모모코가 리츠코와 결혼 생활 중이던 마모루의 결혼을 파탄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게다가 임신이라는 무기로 결혼에까지 골인하는데 성공했지만 계류유산으로 이미 아이는 그녀의 뱃속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독자는 모모코 씨의 현재 일기와 과거 일기가 중첩되는 가운데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한 번 불륜으로 결혼을 파탄낸 과거가 있는 남자가 두 번이라고 마다할까. 모모코 씨는 한사코 마모루의 이혼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만, 어쩌면 이미 그녀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분노, 분함 그리고 비참함이라는 3종 세트의 감정이 그야말로 회오리바람처럼 그렇게 몰아 닥친다.

 

시어머니가 자신이 몰래 파놓은 육첩다다미를 뒤졌다고 분노하지만 막상 자신 역시 시어머니의 본채를 마음대로 드나들지 않았던가?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에 난폭’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격렬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렇구나. 왜 역지사지로 사유해 보지 않았던 걸까? 자신도 이미 비슷한 상황으로 리츠코 씨의 결혼을 파탄낸 장본인이면서 이번에는 나오 씨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노라고 버티는 장면에선 그야말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삶이란 그렇게 가는 거지.

 

별채를 찾아온 마모루에게 모모코가 파경의 이유를 찾는 장면은 그래서 더 추해 보였다.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던지. 친구 하즈키의 조언대로, 챙길 것은 챙기고 미련 없이 보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바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은 간과한 채, 마모루와 모모코의 부부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아들 편을 드는 시월드의 주인장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 ‘어이가 없네’라는 말 따위로 자신의 아들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는 걸 시어머니는 과연 몰랐을까? 나중에 모모코 씨가 진실을 들려주었을 때 한사코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역시나 정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

 

<사랑에 난폭>은 순수한 열정 아니 욕망으로 시작된 격정적인 사랑에 이은 결혼생활이 8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이제 열정은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부부에 대한 요시다 슈이치의 흥미로운 리포트가 아닐 수 없다. 역대급 장기간의 연휴를 마무리하는데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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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인문여행기 1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북한 핵미사일 개발 때문에 결국 국내 사드 배치가 기정사실이 되고야 말았다. 여전히 사드 배치가 국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고 있다. 우선 이웃 중국의 격렬한 반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복이 시작됐고 신세계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중국 시장 철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동안 국내 면세점을 싹쓸이하다시피 해온 유커들의 국내여행 제한으로 관광업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역시 보이지 않는 불매의 여파 탓인지 매출이 급락 중이라는 뉴스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단순하게 중국을 우리의 상품시장으로만 생각해온 게 아니었던가 하는 착각 말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의 젊은 지식인 쉬즈위안이 자국을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단상들을 기록한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는 우리가 중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와 거래하면서 재미를 본 기업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폭스콘 정도가 있지 않나 싶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중국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대신해서 여전히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즈위안 역시 아무래도 체제 안에서 생활을 해야 하다 보니, 극도로 조심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열이 존재하고, 인터넷을 통한 소통조차 국가적 차원에서 막는 나라가 중국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쉬즈위안이 이 책에서 키워드로 삼은 단어는 바로 단절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시절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 사람인 저자는 내가 그동안 만난 작가들인 옌렌커나 위화, 류전윈 혹은 하진이 자신들의 조국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른 시선을 유지한다. 보다 객관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앞선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을 직접 겪은 세대라고 한다면, 쉬즈위안은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킨 문화대혁명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에 해당한다. 오히려 개혁개방의 세대라고 해야 할까. 마오쩌둥이 시작한 어처구니없는 문화대혁명이 어떻게 중국을 과거와 현재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분열 단절시켰는지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라고 해야 할까.

 

쉬즈위안은 만주에서부터 시작해서 윈난에 이르는 그리고 아직도 중국이 수복하지 못한 타이완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을 선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오래된 가치들은 모두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오로지 개발에 입각한 도금주의가 판치는 세계가 과연 현재 중국의 지향점인지 저자는 묻는다. 이천 년된 고성을 허물고, 어떤 개성도 보이지 않는 신축 건물들이 치솟아 오르는 중국의 오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을 수 없는 중국 인민들을 과연 그들의 지도자들은 관심을 기울일까?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욕구 대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담보해야 하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의 고민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는 부분이 아쉬웠다. 덩샤오핑의 시장자본주의 도입 이래 가속화되가는 사회적 불공평과 사회복지 그리고 분배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벌써 9년이나 되었지만, 아편전쟁 이래 서방 열강들에게 치욕적인 영토할양과 침탈을 당해온 중국이 대국굴기의 기점으로 잡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쉬즈위안의 스케치는 주목할 만하다. 베이징의 수많은 마천루를 실제로 만들어낸 농민공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국제적 이벤트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까.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천두슈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설계자이자 이데올로그였던 천두슈를 트로츠키파라고 폄하하고,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니 우리의 상황과도 비교가 됐다. 우리도 여전히 소모적인 건국절 타령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서세동점의 19세기말, 청나라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서 마지막 수명을 연장해 보려고 했지만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청말 급진적 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치오 같은 인물들고 보황파로 몰리지 않았던가. 좀처럼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제국의 균열을 위해 오월 열사 같은 인물들이 청나라 관료들에 대한 테러로 혁명의 씨앗이 되고자 했다는 사실도 쉬즈위안의 글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어쩌면 쉬즈위안은 시스템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는 작금의 상황을 청나라 말기의 상황에 비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쑨원이 이끄는 혁명이 그렇게 순식간에 제국을 뒤엎게 될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물론 그 뒤에 따른 환멸의 과정을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현대 중국 예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보니, 저자가 중원 주유기 후반에서 다룬 자장커나 중국 최고의 현대미술가로 손꼽힌다는 천단칭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자의 저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장커의 영화나 천단칭의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반박이라도 하겠는데 아는 게 없으니 그저 저자가 기술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꼭지에서 다룬 위화 작가의 경우에는 적잖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읽었던 <형제>에 대해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엮어낸 것 같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그리고 문제의식은 좋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했던가. 작가가 정치지도자가 아닌 바에야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에서 쉬즈위안이 다루는 바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담준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점을 저자가 인식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의 인물들과의 다양한 인터뷰가 게재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둔한 독자가 무식한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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