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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파묻힌 거인>은 2015년에 발표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7번째 소설이자, <나를 보내지 마> 이후 자그마치 10년 만에 나온 최근작이다. 국내에서는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모든 작품들이 민음사에서 나온 반면, 이 책만 시공사에서 출간됐다. 게다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을 자랑한다. 무려 판타지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이 책을 읽는다면,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의 책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동시에 조금 우려가 되기도 했었다. 영국 작가들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통의 소재(우롱차처럼 한껏 우릴 수 있는) 아더 왕의 전설이 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의 노파심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독후감상은 대만족이었다.
소설은 현재로부터 자그마치 1,5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후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가 전간기나 패전 뒤의 시간적 배경을 장기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또한 파격이 아니겠는가. 우매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된다. 십대 소년으로 보이는 프로도 일행이 반지원정대를 구성해서 세상을 구하는 대원정에 나섰다면,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 원정대가 등장한다. 기억이 상실된 시대, 잉글랜드에 사는 브리튼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던 간에 기억과 상실은 소설의 주요한 소재로 인식된다.
번역서에서는 도깨비라고 되어 있는데 오거(ogre)가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안전한 마을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악령과 오거가 날뛰는 험악한 시절에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는 왜 위험한 여행길에 나서려는 걸까. 그것은 어딘가에서 둥지를 틀고 있을 아들을 찾기 위함이다. 심지어 노부부는 마을에서 어둠을 밝히는 초사용을 금지 당하지 않았던가. 깨달음과 계몽을 위한 불빛이 상징하는 빛[lightment]의 사용이 금지된 이유에 대해 이시구로 선생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 정도.
노부부 원정대에 오거에게 잡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색슨족 소년 에드윈과 역시 같은 색슨족 출신 전사 위스턴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어느 섬에 가기 위해 뱃사공에게 도강을 의뢰했다가 낭패당한 이야기가 등장했던가. 아마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노부부의 여정이 아들을 찾기 위함이라는 명목상의 이유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사공은 바로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아니었던가. 뒤에 등장하는 뒤에 연이어 등장하게 될 아더왕 전설과 더불어 기존의 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재창조(re-creation)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본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시구로 선생은 능수능란하게 서사 구조를 이어간다. 단단한 스토리 구성에 노년과 청장년을 아우르는 캐릭터 구성에까지 그리고 곳곳에서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등장하는 사이드킥들까지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어 보일 지경이다.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결 구도는 정착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내면에는 브렉시트로 귀결된 이슬람 난민 문제에 대한 문학적 은유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더왕 시대의 암용은 입김을 뿜어 사람들의 망각을 유도한다.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쉬울 지 몰라도, 인간에게 망각이란 또 필요악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전사 위스턴은 브리튼족 사이에서 전사로 성장했지만, 그들이 색슨족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미래의 전사이자 사냥꾼 에드윈에게 각인시킨다. 이렇게 구전되는 분노와 증오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암용의 입김이 만들어낸 선효과가 아닐까. 비어트리스가 험난한 여행 중에 말한 것처럼, 좋지 않은 기억조차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저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파묻힌 거인>은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로드무비 같은 원정대의 여정,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 그리고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망각에 대한 저주 등. 게다가 무서운 암용과 오거들이 출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기사의 등장,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를 이은 갈등 구조만으로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시구로 선생은 이제 자신의 커리어에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까지 얹었으니 영화 마케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면서 여정에 나선 액슬의 과거 역시 흥미진진하다. 신사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색슨족을 학살한 아더왕의 결정에 분연히 반대한 유능한 외교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이름 없는 농부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액슬(러스)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주하게 될 삶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에 소설의 방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사 위스턴의 활약상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회상, 부조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도 등을 자신의 저작들에서 주로 다룬 이시구로 선생이 이렇게 멋진 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원정대의 험난한 여정을 헤쳐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캐릭터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암용을 처치하라는 아더왕의 밀명을 받았다는 기사 가웨인 경의 등장도 흥미롭다. 아더왕의 조카로 수많은 세월을 경험한 노련한 기사는 때로는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입체적 면모를 선사해준다. 말미에서 반드시 암용 케리그를 처리해야 하는 위스턴과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결은 소설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전투 씬 역시 영화화된다면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바로 연상되는 수도원은 <파묻힌 거인>에서 신에게 서약한 수도사들이 묵언수행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 온갖 비밀과 음모 그리고 협잡이 넘실거리는 공간으로 치부된다. 물론 선을 위해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는 일단의 수도사들도 있지만, 다수의 수도사들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위스턴의 숙적 브레누스 경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과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장면이 영화화된다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지경이다.
이시구로 선생의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서 죽음과 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해 보게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죽음은 곧 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이런 망각의 일상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음이 있을 지어다.
49-50p 액슬은 말한다.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