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문학상이란 작가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 받는 노벨문학상이라고 한다면. 지난 35년 동안, 7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소설집을 발표한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금년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작년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에 이은 설화를 단박에 제압해 버리는 그런 의외의 결과였다고 해야 할까. 노벨문학상이 무척이나 정치적인 결과들을 도출해 낸다고 하지만, 처음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기억될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최소한 적어도 하루키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연휴는 이시구로 선생의 책읽기에 온전하게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원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 완독에 목표를 두었지만, 지난 목요일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가 나면서 나의 연휴 독서 계획은 오롯하게 이시구로 선생 읽기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모두 5권의 책을 읽었다. 만족할 만한 수작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판타지와의 만남도 있었으며(<파묻힌 거인>),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유머에 대한 일격(<녹턴>)도 대면할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그가 35년 전에 처음으로 발표한 <창백한 언덕 풍경>이다. 아무래도 이십대 청년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다 보니 솔직하게 말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 저자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츠코 상에게 투영한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는 에츠코 셰링엄 부인은 최근 딸 게이코의 장례식을 치렀다. “자살 본능”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가운데 멀리 떨어진 맨체스터에 사는 딸 게이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로에 이은 자신의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니키가 엄마를 찾아와 위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시구로 선생은 플래시백으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일본 나가사키로 무대를 옮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억총옥쇄를 주장하던 일본 군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분쇄되었고,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이라는 패전의 치욕을 감내하던 시절로 저자는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 중에는 원수였지만, 패전 뒤에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남기 위해 미군정이 지도하는 방향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기존 질서들을 뒤엎는 전복이 진행 중이다. 에츠코는 전자 회사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지로 군과 신접살림 중이며, 현재 첫째 아이인 미래의 게이코를 임신 중이다.

 

에츠코는 남편 지로와 함께 새로운 주거 공간인 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반면, 그녀와 우정을 쌓게 되는 사치코 씨는 딸 마리코와 황무지 오두막에 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공간의 분리는 마치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 일본과 제국주의 시절 구세대 일본의 단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마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을 연상시키는 그런 삶을 걷는 사치코와 전쟁 와중에 딸을 살해한 여인이 언제 자신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마리코를 에츠코는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이십대의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아마 기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영국 남편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본 나가사키 시절 권위적인 남편상을 보여 주었던 지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들이 누락되어 있다. 물론 영국에서 패전국가 출신 동양 부인이 셰링엄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점도, 남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기이한 모습들에도 설명이 빠져 있다. 이런 점을 신예 작가의 문학적 시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나같이 무지한 독자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대한 해명을 원한다.

 

사치코가 에츠코를 통해 일자리를 얻은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에 대한 은유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 전, 그러니까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모든 것을 상실하기 이전 그녀의 집안은 한 자락하는 유지였던 모양이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의 생존만이 패전 국가 일본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을 방문한 오가타 상은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후지와라 부인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시대를 건너 뛰어, 특별할 일도 하지 않은 채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는 막내딸 니키의 모습이 미군정 아래 자주적으로 세운 어떤 국가적 목표 없이 부유하던 시절의 일본과 닮았다고나 할까.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는 변주야말로 청년 작가 이시구로가 목표로 삼았던 지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시구로 선생은 프랭크 상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사치코와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한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일본에 주둔한 정복자 미군들과 교제하는 사치코를 주변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우리가 마치 예전에 그녀들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시선들이 참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미국이 딸 마리코에게 더 나은 환경을,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며 프랭크 상을 기다리지만 그녀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할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치코와 마리코에게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략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미래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좀 더 본질적인 신구세대 간의 갈등은 전직 교장선생님인 오가타 상과 아들 지로 군의 친구 마쓰마 시게오 군 사이에서 벌어진다. 교원들이 보는 잡지에서 자신이 추천한 마쓰다 시게오가 기고한 구시대 교육인들(엔도 박사와 자신 같은 제국주의 교육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읽은 오가타 상은 분노한다. 새로운 전쟁국가 일본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는 아베 신조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놀랄 정도였다.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총칼 같은 무기가 부족해서였지, 자신들의 시스템이나 과오 탓이 아니었다는 말은 정말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 아니었던가. 규율과 충성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의무감을 강조하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언사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울러 미국식 민주주의 이식에 대한 불신과 우려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장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시절을 장식했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반성할 줄 모르는 오가타 상의 모습에서 탈아입구 방식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나섰던 제국주의 일본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수많은 가해자의 모습들을 단 두 방의 원자폭탄 투하와 피폭으로 피해자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가치전도의 장면도 더 이상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시구로 선생은 일본인이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패전국가 일본의 모습을 자신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을 통해 그려보겠다는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멋진 시도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남아 있는 나날>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 대한 저자의 저술은 한층 성숙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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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10-1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휴를 온전히 채운 독서 덕분에 이렇게 노벨상 작가의 세계를 알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레삭매냐 2017-10-10 13:35   좋아요 1 | URL
너무 멋진 작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를 보고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골 국물처럼 우려나온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7-10-10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유독 별점이 짜네요.ㅋ
하루키 보다 나은 선택이란 말씀에 한표요!
전 매년 하루키가 되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어요.
그럴 바엔 쿤데라가 받는 게 50배쯤 낫다고 봅니다.ㅋ

이번 연휴는 정말 알차게 보내셨네요. 부럽습니다.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ㅠ

레삭매냐 2017-10-10 14:48   좋아요 1 | URL
별점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날들> 그리고 <녹턴>에
별점을 더 후하게 줘야 해서요 ~ ㅋㅋ

전 이제 이시구로 선생의 마지막인
<위로받은 사람들> 읽기에 돌입합니다.

cyrus 2017-10-1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로 이시구로의 책을 소개하는 포스팅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중에는 리뷰라고 보기 힘든 글도 있어요. 레삭매냐님처럼 책을 읽고 쓰는 리뷰를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이 글에 땡스투 적립금을 받아야 하고요.

레삭매냐 2017-10-11 09:06   좋아요 1 | URL
과찬의 말쌈이십니다.

그나저나 예전의 땡스투 시스템에 좋았는데
지금도 작동하고 있나요?
서로 윈윈이 되는 것으로 가면 좋은데 받는
분에게만 지원이 되니.

아직도 이시구로 선생의 책 리뷰를 두 개는
더 써야 하네요 :>

shuai 2017-10-2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다시 보는 레삭매냐님의 이 리뷰가 정말 좋군요. 저는 더 보탤 말이 없네요.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10-26 20:25   좋아요 0 | URL
부족하기 짝이 없는 리뷰를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