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산 지가 벌써 만 3년이 되었구나.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막바지 광풍이 불던 시절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 <녹턴>을 샀다. 그리고 읽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가, 이시구로 선생의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에 열심히 찾아 얍삽하게 읽어내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참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녹턴’이라고는 쇼팽의 야상곡으로 대니얼 바렌보임이 연주한 op.9-2가 유일했다. 이제 나의 녹턴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모두 5개의 음악과 해질녘에 관한 단편소설들이 <녹턴>을 장식한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이 소설집의 특징을 잡아내는 키워드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유머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내가 읽은 이시구로 선생의 책들에는 유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십년에 한 편 꼴로 소설을 발표하는 진지모드의 과작(寡作) 작가에게 유머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무래도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이런 색다른 시도가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작은 베네치아다. 동구권 폴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야네크는 어릴 적 자신의 우상 토니 가드너와 아주 우연히(소설에서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어렵고 암울하던 시절을 야네크의 어머니는 토니 가드너가 불러제끼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던가. 공산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는 점에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토니 가드너는 모종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아내 린디에게 세레나데를 들려 주기 위해 야네크를 초빙해서 곤돌라 위에서 크루너(crooner)로서 공연을 계획한다. 다들 ‘한물간 딴따라’라고 치부하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아내 린디와의 27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새로운 출발, 컴백을 위해 이혼 이벤트를 거행하려고 한단다. 인간사 모든 것이 금전으로 계량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문학가의 저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가는 거지.

 

슬슬 발동을 건 이시구로 선생의 유머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비가 오나 해가 뜨나>에서 폭발한다. 사반세기 전 대학동창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 명의 대학동창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어떤 점에서는 슬랩스틱 스타일의 미국식 코미디가 연상되기도 했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영어교사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던 레이(먼드)는 여느 때처럼 런던의 찰리와 에밀리를 방문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 레이의 예상대로 찰리는 바람이 났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는 동안 아내 에밀리의 화를 삭여 달라는 분부대로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이 꼬여만 간다. 어쩌면 런던 금융계에서 성공한 이들 부부는 레이에게서 자신들과는 다른 패배자의 모습을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 출발은 같았지만, 2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는 이렇게 달라졌다라고. 레이가 찰리의 지시대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인공적으로 개냄새를 만들기 위해 찰리의 낡은 신발을 삶는 동안 나타난 에밀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과연 먹혔을까. 소설집 <녹턴>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친구들에게 이용당하는 레이의 모습이 슬프기도 했던. 여기서 얻은 교훈 하나, 타인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 것이니.

 

<말번 힐즈>는 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기타리스트로 런던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성공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다는 매기 누나의 제안에 그녀와 매형이 말번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빌붙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상주의자다. 매기 누나가 그를 그냥 먹여 주고 재우고 싶어서 불렀을까? 아니다. 여름철 손님들이 늘어나니 일손이 부족해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가하게 음악이나 만들면서 보내고 싶은 주인공의 심리와 매기 누나의 현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누나가 빚어내고 자신이 ‘새로운 분노’라고 명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렇게 샘솟는 법이지. 예전 자신의 학창시절을 악몽으로 만들었던 프레이저 선생님에 대한 증오감과 매기 누나네 카페에서 서비스에 대해 혹평을 하던 스위스인 부부를 골탕 먹이려던 시도는 그들을 알게 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연주 혹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청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는,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청중이 주는 긴장감에 대한 묘사 등은 정말 탁월했다. 한 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는 이시구로 선생의 음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다.

 

표제작 <녹턴>에서는 <스쿠너>에서 등장했던 토니 가드너의 전처 린디 가드너가 주인공 스티브처럼 얼굴이 붕대를 친친 감고 등장해서 멋진 호흡을 맞춰준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붕대감은 세션 연주자로 뛰어난 테너 색소폰 주자이지만, 실패자형 추남(원서에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이라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하는 남자 스티브다. 이 남자는 아내 헬렌을 뺏아간 샛서방의 제안으로 그리고 매니저의 강권에 못이겨 할리우드에서 성형수술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워할 전문의 닥터 보리스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맡긴다. 그것 참,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닌가. 닥터 보리스의 걸작품으로 재탄생하길 원하는 스티브의 바람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연상되기도 했다. 재능을 가지고 정상을 향해 달리길 원하다면, 마케팅 전략(성형수술)이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설득에 줏대 없는 실패자형 추남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과 동병상련에 있는, 천박함의 대명사지만 할리우드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린디 가드너와 의기투합해서 한바탕 헛소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부와 명예를 위해 내달리는 스티브와 린디의 조합이야말로 한밤의 ‘야상곡’ 같다는 의미에서 이시구로 선생은 과감하게 <녹턴>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닐까. 그 또한 작가가 던진 유머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대미를 장식하는 <첼리스트>에서 저자는 다시 독자들을 최초로 소설이 시작된 베네치아로 다시 인도한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번에는 집시처럼 베네치아에서 음악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연주자들의 눈에 들어온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에 대한 이야기다. 저명한 스승에게 사사 받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티보르지만, 정작 밥벌이의 지겨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광장의 카페에서 값비싼 커피를 마시는 그를 보고 다른 연주자들은 ‘낭만적 바보’라고 폄하한다. 그런 그가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스스로 저명한 첼로 주자라고 주장하는 중년의 엘로이즈 매코믹 양을 만난 것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스승의 대를 이어 저명한 첼리스트가 될 티보르의 행운이었을까? 그들은 아마 전자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엘로이즈 양의 티보르에 대한 개인교습이 진행되는 가운데, 과연 그녀가 진짜 첼로를 켤 줄 아는 사람이었나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사기꾼 명연주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집 <녹턴>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된 삶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원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이별의 노래로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변형(성형수술)을 통한 성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바로 그런 음악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인연의 매개체로 음악을 그리고 해질녘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휘발시켜 버린다.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음악처럼 그렇게 소설 <녹턴>도 독자의 가슴 속에 잔영을 남긴 채 사그러지는 것이다. 뭐 음악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남은 것은 그런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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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0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숨어서 지냈던(?) 이시구로 덕후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군요. ^^

레삭매냐 2017-10-11 09:02   좋아요 0 | URL
노벨상 받기 전까지 꼴랑 이시구로 선생
의 책 두 권만 읽어서 덕후 인증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

이젠 덕후라도 해도 괘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