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 대디
제임스 굴드-본 지음, 정지현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 <댄싱 대디>를 만났다. 새로운 작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제임스 굴드-본은 지금은 리투아니아에 산다고. 보어드판다라는 웹사이트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무슨 일을 했나 그래. 사실 작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러니 작품이 집중하는 수밖에.

 

우리의 주인공은 대니 머룰리다. 나이가 28세였던가. 십대 시절 아내 리즈와 불장난으로 아들 윌리를 얻게 됐다. 꼬마 윌리는 어느새 11세가 되었고, 14개월 전인가 1년 전에 엄마 리즈는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 아들 윌리는 리즈가 하늘나라로 간 다음, 선택적 함구증에 돌입했다. 세상과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이제 대니에게 남은 사람은 아들 윌리 밖에 없는데...

 

설상가상이라고 대니는 4년간 일하던 공사장에서 잦은 지각 때문에 짤렸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다. 악랄한 집주인 레그는 대니 부자 쫓아내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대니는 변변한 기술조차 배우지 않았다. 그냥 건설 현장에서 허드렛일만 해오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제법 잘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 대니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널렸다는 냉혹한 노동현장의 현실 앞에 우리의 싱글 대디는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거리공연하는 이들이 제법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니. , 바로 이거였다! 별다른 기술도 없는 이들이 저렇게 많은 돈을 땡기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코스튬 가게에 가서 그야말로 피같은 돈을 들여 판다 코스튬을 골랐다. 역한 냄새가 나는 탈바가지를 쓰고 쭈뼛쭈뼛 공연에 나서는 대니. 참고로 타고난 댄서였던 죽은 아내 리즈와 달리 대니는 몸치에 가까운 캐릭터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내가 죽기 전에 먹고 살기 위해 춤이라도 배웠어야 했는데. 말하지 않는 아들과 좀 더 살가운 관계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다 소설 <댄싱 대니>는 지나간 시절에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후회의 이야기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그렇게 묻혀진 시간 속에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공원에서 마크 일당에게 시달리던 윌을 판다곰 탈을 뒤집어 쓴 대니가 도우면서 아빠와 아들간의 정상적 관계가 아닌, 말하지 않는 판다곰과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소년의 기묘한 우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윌리가 판다곰이 자기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 하나의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대니는 공원에서 얼치기 춤을 추는 판다곰으로 위장해서 아들과의 관계회복에 나선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폴 댄서 크리스털의 도움을 얻어 거리공연에 필요한 댄스 기술들을 수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니와 윌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짜잔하고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로 1만 파운드의 상금이 걸린 거리공연 배틀이다. 그러니까 대니가 안무가 크리스털의 도움으로 배틀에서 우승하기만 한다면, 한 숨 돌릴 수 있게 될 것이고 뒤이어 새로운 삶의 무대가 열릴 것이다. 과연 대니의 플랜대로 소설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읽어 보시라.

 

사실 소설 <댄싱 대디>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소설을 보다 다채롭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건 바로 캐릭터들과 제임스 굴드-본 작가가 곳곳에 녹여낸 사회 경제적 이슈들이다. 어떤 일도 독고다이 주인공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안다. 더더군다나 대니 같이 아무런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무런 기술과 자본 없이 냉정한 자본주의 3.0 시대에 내동댕이쳐진 싱글 대니 아니 싱글 대디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일자리 구하기도 그랬지만, 거리공연 자체가 그랬다.

 

우선 합법적으로 거리공연에 나서기 위해서는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득 우리나라 버스킹에도 허가증이 필요한 지 궁금해졌다. 대니는 당장 돈이 필요한데, 허가증을 정식으로 발급받으려면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하는 것. 여기서 저자가 준비해둔 공사 현장의 동료 우크라이나 사람 이반이 등장한다. 이반은 소설의 엔딩에서 크게 한몫하는 캐릭터다. 그러니 기대하시라. 게다가 큰 사고가 날 뻔한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준 대니에게 참으로 서윗하게 자신의 아내를 팔아 대니 부자에게 맛난 호두파이를 구워 주기도 한다. 이반은 참으로 멋진 의리남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도우미는 크리스털이다. 내가 붙인 부제목이 <아빠는 춤추는 판다곰>이다. 그렇다면 몸치인 대니가 아내가 좋아하던 <더리 댄싱>을 비롯한 뮤지컬에 가까운 음악 영화들을 섭렵하면서 몸에 리듬감을 익혀야했다. 이건 그냥 취미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대니에게 최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레벨인 거리공연 배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가에 가까운 선수가 필요했고, 이번에도 역시 예비해둔 폴 댄서 크리스털이 출격한다.

 

우리는 대니 부자가 거리공연 배틀에서 환상적 공연으로 우승을 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대니 부자의 삶이 극단적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제임스 굴드-본 작가는 대니 부자에게 거리공연 배틀의 우승 대신, 특히 대니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걸 까면 스포일러의 완성이니 역시 엔딩을 기대하시라.

 

<댄싱 대디>의 스토리라인과 전개는 노련한 독자의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하긴 평범함 속에 언제나 진리가 있는 법이지.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에서 굉장한 모티프를 제시해 주는 영화 <더리 댄싱>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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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오키 다케시 지음, 박삼헌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밀덕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세계의 다양한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 그건 아마도 오래전, 한국일보사에 나온 타임라이프 시리즈 WWII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권당 5,000원씩 하던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를 꾸준하게 수집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려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단가의 책이라 더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지금도 가끔 헌책방에서 그 시리즈를 만나면 염통이 쫄깃해진다.

 

그중에서도 내가 보유하지 못한 독소전과 두 번째 세계대전의 분수령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시리즈는 아예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시절부터 전쟁사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나 추론해 본다.

 

얼마 전 만난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읽는 인간>을 통해 일본의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에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 AK커뮤니케이션 출판사에서 <독소전쟁>이 나왔다는 소식에 환호작약했다. 냉전 시대에 권위 있는 전사 전문가 행세를 하며 역사를 왜곡해온 파울 카렐의 실체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도 오키 다케시 선생의 <독소전쟁>을 읽으면서 알게 된 큰 수확이었다.

 

사실 그동안 거의 홀로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의 무적의 나치군과 싸운 공산주의 소련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대세였다. 한때 유럽 대륙을 제패할 것 같았던 독일 전쟁기계에 제동을 걸었던 주인공은 미영연합군 주도의 제2전선이 아니라,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었다. 오키 다케시 저자는 구소련의 붕괴 후, 서방 세계에 알려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독소전쟁의 실체규명에 나선다.

 

히틀러의 독일군과 스탈린의 소련군이 맞붙었던 독소전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통상전쟁과 전혀 달랐다. 서로 공존할 수 없었던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상극의 이데올로기가 맞붙은 세계관 전쟁이었다. 동시에 총통 히틀러는 동방의 소련을 제압하고, 독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생존의 공간확보(레벤스라움)라는 차원의 수탈 전쟁이기도 했다. 독일군의 공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1941년과 1942년을 지나면서 통상전쟁과 세계과 전쟁 그리고 수탈 전쟁이라는 삼각축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상대에 대한 철저한 전멸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기대이상의 블리츠크리크로 엄청난 전과를 올린 독일국방군은 동방의 소련전선에서도 전쟁의 초반에는 비슷한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 스탈린은 1937년 군부를 상대로 엄청난 숙청을 진행하면서 훗날 독소전쟁에서 병사들을 지휘할 장교들을 대거 상실했다. 독소전에 앞서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할 거라는 많은 양질의 정보들을 얻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보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독일 전쟁기계를 상대로 엄청난 패배를 강제당했다.

 

총통 히틀러는 뚜렷한 전쟁 목표 없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패망으로 몰고 갈 독소전에 나섰다. 프랑스 공략에 이어 서방의 마지막 저항세력이었던 영국 제압에 나섰지만, 수세기 동안 대양의 패자였던 영국 해군에 독일 해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항공기를 동원한 영국 본토 공방전에서도 결국 실패했다. 영국의 고집쟁이 총리 처칠은 히틀러를 상대로 항복도, 강화도 하지 않은 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에 나선다. 바로 그 시점에서 히틀러는 동방에 웅거한 불구대천의 대적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독소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군의 전략 목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정복을 위한 북부집단군, 적도 모스크바를 제압하기 위한 중부집단군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얻기 위한 남부집단군으로 나뉘어 독일국방군은 폭풍 같이 러시아의 대평원을 질주했다. 문제는 독일 총사령부에서 소련군의 저항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지만, 침략자 독일군은 우선 스탈린 체제 아래 불만을 품고 있던 소련 시스템에 반대하는 이들의 포섭하는데 실패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한 가혹한 처우나 공산당 정치위원들을 포로로 잡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는 총통의 명령에, 독일군에게 항복하면 결국 죽게 된다면 사실을 알게 된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파시스트 독일군의 가공한 침략을 맞이한 소련은 기존 체제가 가지고 있던 내부의 모순들을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극복해냈다. 129년 전 나폴레옹이 이끄는 40만 그랑 아미를 상대로 벌였던 조국전쟁을 모델로 삼아, 이번에는 대조국전쟁이라는 신화 창조와 프로파간다에 나섰다. 한정적 자원과 병력으로 동방원정에 나선 독일군과 달리, 소련군은 개전 초기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전투에서 몇 개의 집단군이 포위 섬멸되어도 곧바로 새로운 사단들을 창조해냈다. 전통적 전략인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번다는 방식이 이번에도 유효했다. 결국 독일군의 진격은 정치 사회 경제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돈좌되었다. 사상 유례 없는 혹한이 변변한 방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독일군을 덮쳤고, 주코프 장군이 주도하는 소련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독일국방군이 구가하던 궁극의 승리는 좌절되었다.

 

그동안 주류를 이루던 독일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 학살부대의 활동과는 무관하다는 통설 역시 오키 다케시 선생은 철저하게 격파한다. 모든 과오를 죽은 히틀러에게 독박 씌우려던 독일 장성들의 회고록이나 파울 카렐로 대변되는 역사 왜곡과 달리 전장에서 독일국방군이 총통이 계획한 전멸전에 적극 가담했다는 비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신화가 붕괴됐다. 아울러 화력 운용과 훈련을 통해 질적으로 우수한 독일국방군이 야만적 인해전술로 무장한 소련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 역시 나치가 고안한 프로파간다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현지 절대사수로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 총통은 나머지 전쟁의 국면에서 불필요한 사수 명령을 남발하면서 결국 자신의 파국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기도 했다. 독소전쟁의 두 번째 해에 분수령이었던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과정에서도 적도 모스크바 대신 보다 손쉬운 먹잇감으로 생각한 남부의 그로즈니와 마이코프의 석유에 눈을 돌린 히틀러는 간단하게 제압하는 것으로도 끝낼 수 있었던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집착하면서 결국 결정적 패착을 초래했다. 소련군은 남부집단군의 허약한 고리였던 이탈리아-헝가리-루마니아 추축군이 맡고 있던 전선을 붕괴시키고 독일 최정예 6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히틀러가 집착한 현지 사수 명령과 포위된 6군에게 항공 병참 공급이 가능하다는 판단 착오로 결국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의 6군은 괴멸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군의 역공에 독일군은 궤멸에 가까운 붕괴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이 때 등장한 총통의 소방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잔존부대들을 규합해서 승기를 타고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소련군에게 하르코프에서 제대로 매운맛을 보여주었다. 이때 돌출된 쿠르스크 지역을 두고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에 나선다. 쿠르스크 전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꺾이면서, 독일의 패배는 베를린까지 이어지게 된다.

 

오키 다케시 작가의 <독소전쟁>은 짧기 때문에 전술적 차원에서의 재미와 국지전에 대한 디테일은 확실히 떨어지지만, 대국적 차원과 새로운 시점에서 독소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학살과 각종 전쟁범죄로부터 독일국방군은 무관했다는 종래의 가짜 선전을 뒤엎는 전복적인 시도부터 시작해서, 뚜렷하지 못한 독일의 전쟁 목적의 부재 혹은 혼선이 빚은 문제점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독일인들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결국 총통과 함께 운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적당한 분량에, 핵심을 찌르는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에 그만 반해 버렸다. 다음번에는 <메이지 유신>을 읽을 예정이다. 다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누군가 신청한 희망도서의 순서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우리 동네에 나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년 말에, 일본에서 <태평천국>을 다룬 이와나미 신서가 나왔다고 하던데, 그 책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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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2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 가격+내용+표지=만족

시리즈 번역물 계속나와주길 바라는데 판매량이 영 신통치 않은가봐요

메이지 유신
도널드 킨/조용한 혁명-성희엽
추천 사알짝 ㅋㅋㅋ

레삭매냐 2021-02-02 11:23   좋아요 2 | URL
역시나 고수다우신 추천이었습니다.

키누 도나루도 상의 <메이지라는 시대>
맛보기로 보고 있는데.... 대단하네요.

굽시니스트 작가의 저작은 그야말로 맛
보기였다는.
두 책 모두 분량이 ㅎㄷㄷ하다는 게 단
점이랄까요 :> 단가도...
 


1월에는 모두 17권의 책들을 만났다.

그중에 굽시니스트 선생의 책들이 거진 절반이다. 연초를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를 다룬 책들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여파로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강준만 샘의 책과 만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읽는 인간>도 만났다.

다른 일본 작가인 홋타 요시에에게 빠져 비교적 신간인 <시간>을 필두로 <고야> 시리즈와 <라 로슈푸코>도 만났다. 미셸 드 몽테뉴도 쓰셨는데 고 책은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도서관이고 온라인 서점에서 만날 수가 없어서 대신,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으로 퉁쳤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평전이 더 읽고 싶어진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꼬리에 꼬리는 무는 독서가 전개되고 있는 그런 느낌.

일 년 전에 시작해서 읽다만 독서광 알베르토 망겔 선생의 책도 만났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만난 브라질 작가의 책도 궁금해서 며칠 전에 중고책으로 구매했다. 아직 펴지도 못했다.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 <그 후>도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 책들은 부지기수고, 나의 시간과 노력은 항상 부족하다.

 

2월에는 고야 나머지 3권을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한다. 아직 3권과 4권은 수배하지 못했다.

올해는 기대하는 신간들이 줄줄이 나온다고 하던데, 다만 그 시기가 후반이라 좀 아쉽다.

그렇다면 신간은 포기하고 구간 위주의 독서를 해야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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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1 1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배 ㅋㅋㅋ 매냐님을 책사냥꾼으로 만들어버린 홋타요시에 ㅜ.ㅜ 혹시 그 브라질 작가가 브라스 꾸바스?? 표범 저책 어떻게 완독을 !! 오타랑 협착 번역한 영어 중역판 !!!

레삭매냐 2021-02-01 11:51   좋아요 3 | URL
저는 창비의 표기법에 반대하기 때문에
브라스 쿠바스라고 하겠습니다.
대단하십네다... 맞습니다 브라스 쿠바스
지난 주에 사서 쟁여 두었습니다.

표범이 어찌나 잘 읽히지 않던지 싶었는
데 그런 연유가 있었군요.

저의 책사냥은 계속 됩니다. 쿵야.

붕붕툐툐 2021-02-01 1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빽빽히 들어찬 1월 독서 달력이 보기만 해도 흐뭇해 지네용~ 나도 읽는 인간 읽겠다 한지가 언젠데.. 하... 2월에도 열심히 우리 달려보아요!!^^

레삭매냐 2021-02-01 18:47   좋아요 2 | URL
복기해 보니 중반에 이 책 저 책
찝적거리지만 않았어도 20권도
읽을 판이었네요 ㅋㅋㅋ

2월도 갑니다앗 ~~~

stella.K 2021-02-01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이런 독서 달력 기능이 있나요?

레삭매냐 2021-02-01 18:48   좋아요 2 | URL
알라딘은 아니고요...

그래24에서 제공하는 앱인 것
같습니다. 저도 어디선가 보고
서 사용하게 되었네요.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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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미셸 드 몽테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에세>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 정도만. 그러다 이달에 홋타 요시에 선생의 저작들을 만나게 됐고 그의 저술을 통해 몽테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다만 홋타 요시에 선생의 3권 짜리 몽테뉴 평전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몽테뉴 평전을 사서 읽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에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격렬하게 종교전쟁을 치른 당대 프랑스의 이모저모에 대한 디테일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츠바이크의 몽테뉴 전기는 오롯하게 몽테뉴라는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코뉴 보르도 출신의 몽테뉴는 1533228일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청어를 파는 생선 장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군주를 따라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귀족 행세를 하게 됐다. 어머니 가계는 에스파냐의 개종한 유대인 출신의 위그노였다고 한다. 법관과 보르도 시장을 역임한 피에르 에켐은 아들 미셸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그것은 당대 상류 계층으로 나갈 수 있는 마법의 도구였던 라틴어 교육이었다. 아직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아들을 위해 독일에서 프랑스어는 한 마디로 하지 못하는 라틴어 교사들을 초빙해 왔다고 했던가. 샤토 몽테뉴가 왠지 스카이 캐슬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버지 피에르 에켐이 제공한 금수저 덕분에 몽테뉴는 미래의 뛰어난 지성인이자 문필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법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샤를 9세의 시종으로 루앙 포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평생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았던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종교전쟁과 내란의 시기였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적 갈등과 폭력은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관용의 정신을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으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자 츠바이크가 가장 싫어한 집단 광증과 선동이 난무하던 그런 시기였다. 츠바이크는 1940년대 자기 삶의 말년에도 몽테뉴의 시절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로부터 또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 전염병(몽테뉴 시절에는 페스트였다) 그리고 집단 광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만 재현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위대한 지성인이자 철학자는 집단 광기의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해도 그들은 거부했다. 몽테뉴는 강호가 어지러워질수록,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했다. 광신도들과 극단적 종교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몽테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영어로 된 짧은 너튜브 철학 동영상(그렇다 이제 너튜브는 진리까지 독점해 버렸다)을 찾아보니, 르네상스의 후예인 그가 당시 유행하던 고대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아 탐구에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 후반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샤토 몽테뉴로 돌아온 철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속인들처럼 철인 몽테뉴 역시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우리로 치면 선비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직접 노동은 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자그마치 6명이나 되는 딸들(그중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식은 한 명 뿐이었다)을 먹이고,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금전은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책이 상당히 고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소장한 천권의 책들이 얼마나 대단한 재산이었을까.

 

대법관으로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의 거성에서 <수상록>을 집필하던 시절이야말로 몽테뉴 인생의 최절정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전문적인 문인이나 역사가가 아니었기에,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극단과 전란의 시기에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키며 시간을 보내기에 책읽기와 집필만한 것이 또 있었을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없이 쓰고, 자신을 묘사했다. 츠바이크는 젊어서 만난 몽테뉴의 생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유의 향연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그의 <수상록>이나 여행기를 만나 보지 못했기에 그저 대가의 가르침을 얼치기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읽기의 대선배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허무주의에까지 도달하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공부해 가면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What do I know? 진정한 의미에서 순도 백퍼센트의 자유주의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자신도 타인들로부터 어떠한 자유의 제한도 원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닐까.

 

아울러 그는 에피쿠로스의 영향 아래, 자신이 좋은 것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게 사냥이 공부든 부동산 투자든 뭐든 간에 말이다. 책이 좋은 사람을 책을 읽으란다. 우리 독서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격려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다만, 즐거움의 경계까지는 가되, 그 경계는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니까. 이 위대한 예언자는 미래의 책읽기 동지들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로 꼽는 부분이다. 무슈 몽테뉴가 내게 하는 위로의 정수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니 츠바이크 선생과의 합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샤토 몽테뉴에서 십년간의 은둔 생활을 마친 무슈 몽테뉴는 여행길에 나선다. 2년 동안, 프랑스-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대한 정신은 여행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젊었던 시절의 나와 똑같은 여행 스타일인지 깜짝 놀랄 정도다.

 

하지만 세상은 이 위대한 철인이 자유를 만끽하는 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아버지 피에르 에켐처럼 시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국왕까지 나서서 명령을 하는 바람에 영원한 자유인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프랑스 왕국은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인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부르봉 가문의 나바르 공 앙리가 추대되었던 것이다. 살리카 법에 따라 부르봉 가의 앙리가 프랑스 왕국의 대권을 얻게 된 것이다. 유혈사태 없이 왕위계승이라는 권력의 트랜지션을 위해 나바르 공 앙리의 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상적 중재자로 무슈 몽테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홋타 요시에의 다른 저작 <라 로슈푸코>의 주인공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6세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무슈 몽테뉴는 정치와 행정 그리고 문학까지 아우르는 다방면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르도를 덮친 페스트를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쫄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라 로슈푸코가 인간에 대한 본질이라고 주장한) 자기애 덩어리로서 무슈 몽테뉴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해 본다. Nobody's perfect. 훗날 나바르 공 앙리가 왕이 되었을 때, 명실상부한 왕의 고문관으로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안분지족을 아는 미덕의 소유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깨끗하게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대신해서 만난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은 기대이상의 수확이었다.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의 감동과 과정을 부족한 리뷰에 다 담을 수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한 갈급함은 어찌 달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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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1-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구하시면 꼭! 리뷰 부탁드립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식인종에 대하여‘도 읽고 아주 좋았어요. 역자가 주석도 세심하게 달아주시고요.

레삭매냐 2021-01-30 21:25   좋아요 0 | URL
2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할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길사에서 다시 내주면 좋겠으나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21-01-30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1월 츠바이크를 몰아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도 구해야겠네요.독서인생이 너무 짧아 딱히 열광하는 작가가 없는데 츠바이크는 앙뜨와네뜨 전기소설 읽고 단번에 팬이 됐습니다. 레삭님의 리뷰가 제 가슴을 설레이게 하네요☺

레삭매냐 2021-02-01 11:52   좋아요 1 | URL
저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열렬 팬입니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더 오래 사셔도 인류에게 더 많은
책들을 남겨 주셨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
울 뿐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메리 스튜어트 책
마저 읽어야 하는디...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도대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눈이 멀게 될까? 실명한 도서관장(같은 경우로 실명한 네 번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라고 한다) 보르헤스에게 수년간 책을 읽어준 알베르토 망겔의 이야기다. 그는 긴 유목민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살다가 도서관장직 제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같은 저주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망겔은 위대한 독서가이고 그의 책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우리 같은 독서인들에게 참으로 위험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느냐는 준엄한 꾸지람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같은 대지의 숨을 쉬는 이런 동지가 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나의 독서 스타일은 일단 꽂히는 작가가 생기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의 책들을 모은다. 그리고 읽는 건 나중의 일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사서 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달만 하더라도 홋타 요시에 작가에 꽂혀서 일단 책부터 사들이지 않았던가. 기세 좋게 시작한 <고야>는 아직도 1권을 못 읽었다. 그동안 다른 책들을 읽느라.

 

누가 뭐래도 내가 읽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을 다른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망겔 선생 역시 도서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새로운 독자들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책읽기가 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혈독서광인 선생은 단발성 캠페인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양성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모바일 게임에 흥미진진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너뷰트를 상대로 수천년 동안 종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책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건덕지가 1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애서가 혹은 열혈독서광들은 쿨하게 패배를 선언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망겔 선생은 솔직하게 자신이 탐욕스러운 책의 약탈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도 예전에는 책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책에 메모는커녕, 접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비닐로 싸서 보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게 다 무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4B연필로 간단한 메모와 밑줄을 죽죽 그어 가며 망겔 선생에 버금가는 탐욕스러운 약탈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오독일 지도 모르겠으나, 망겔 선생에 따르면 글쓰기라는 문학의 스타일은 모방과 반복의 연속이다. 조금은 신학적 귀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완벽한 창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상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불완전하다는 말일까. 저자도 언급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명명하는 장면은 지난 수세기 동안 논의되어온 고전적인 주제라고 한다. 원래 그들의 이름이 존재했던 걸까? 아담은 무슨 수로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동식물들의 이름을 명명할 수가 있었을까. 무지한 일개 독자로서는 저자가 제기한 질문들에 골이 깨질 지경이다.

 

또한 망겔 선생은 문학은 영원불멸의 골렘이라고도 선언한다. 요 골렘이라는 녀석은 내가 즐겨하는 모바일 게임에 나오는 몸빵 돌멩이 몬스터가 아니라, 유대인의 무슨 설화에 나오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나. 우습게도 어리석은 독자는 대가가 만든 명제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저자가 만들어낸 보편(이데아)의 질서를 따라가야 하는 걸까?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어 보인다. 창작 자체가 불완전한 것일진대, 불완전한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오만가지 질문들이 책을 읽는 내내 쏟아져 내린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알베르토 망겔 선생이 의도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책을 읽고 누군가 회의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새로운 책에 대한 도전정신을 불태우게 만드는 것 말이다. 무언가 알려고 사유의 단계로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

 

망겔 선생은 사전 예찬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니 나도 어려서 국어선생님이신 아버지가 집에 비치해 두신 엄청 두꺼운 두 권짜리 국어사전으로 모르는 낱말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자전은 또 어떤가? 그나마 사전은 쉽기라도 하지, 부수를 모르면(사실 획수도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김찬삼 선생이 세계일주를 구술한 여행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횡서가 아닌 종서라 읽다 보면, 줄을 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정자도 아닌 약자를 왜 그리 쓰셨는지. 세상의 온갖 정의를 담은 사전의 세계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책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의 벽을 부수기 위해 꼬마 독서전사는 사전에 자신의 계몽을 의탁했었다.

 

문득 어제 오랜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너튜브 콘텐츠의 깊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기억이 났다. 하긴 짧은 시간 동안에 영상을 통한 정보 전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무엇이 다룰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전권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밀레니엄 시절에 콘텐츠 제작은 새로운 스타일의 글쓰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기존의 작가들이 글쓰기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책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새로운 시대에는 동영상 제작이라는 방식으로 책을 대체할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예전에 책을 소비하던 방식대로, 그렇게 생산된 동영상 콘텐츠들을 비판 없이 꾸역꾸역 소화해 내고 있는 중이다. 전통의 책이 지배하던 시절과 달리 댓글이라는 유용하면서도 치명적인 소통의 방식이 더해지면서 콘텐츠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창작자의 창작 의욕을 깨부수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책을 대체할 새로운 미디엄으로 너튜브 세계의 확장에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너튜브 콘텐츠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독자들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책을 찾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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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7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튜브에서 눈과 손가락을 못떼고 있는 1人 매냐님말에 동감 ㅋㅋㅋ

레삭매냐 2021-01-27 14:36   좋아요 1 | URL
저도 비판적으로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너튜브에 이미
영혼을 털렸네요...

syo 2021-01-27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이라는 곳에 무슨 문제 있는 게 아닐까요? 석면이라든가..... 헛소리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0   좋아요 1 | URL
아 씨오님!
씨게 쳐주시네요... 점심 묵다 보고
는 빵 터져부렀습니다.

석면 때문이었고나.

2021-01-27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6   좋아요 1 | URL
아, 참말로 부끄럽습니다.

대가 망겔 선생이 의도한 바를
과연 제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허명은 없는가 봅니다.

얼마나 열심으로 책을 읽으시면
그런 지경에까지 도달할까요.
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 적당
하게 읽어야지 싶습니다. 아 무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