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로 이용하는 알라딘 중고서점은 산본점과 수원점 그리고 분당점이다. 산본점이야 걸어서 바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자주 가지만 수원이나 분당은 생각보다 좀 더 멀다. 그래도 필요한 책이 있다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가는 편이다. 가기 전에 검색을 해서 책 소장유무를 확인하고 간다. 그래야 가서 헛걸음을 하지 않으니까. 가는 도중에 누군가 책을 사간 경험도 있다. 그리고 매장에 가서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다가 미처 몰랐던 책을 만나는 경우도 많다. 알라딘 중고서점의 강점 중의 하나는 매일 같이 스캔해서 책 위치를 파악해 주는 서비스가 아닐까. 내가 가장 최근에 방문한 북수원홈플러스 4층에 자리잡은 알라딘 서점도 새로 오픈해서 직원분들이 스캔작업을 하느라 분주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단독매장으로 자리잡은 다른 알라딘 중고서점과 달리 북수원홈플러스 알라딘 중고서점은 팝업스토어 개념으로 다른 매장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바로 옆에 상상노리라는 키즈카페가 있는 걸 봐도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저층에는 먹거리를 파는 푸드 스토어와 홈플러스가 입점하고 있어서 장 보고 책 읽는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다는 점이 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경우 알라딘 매장들은 대부분 지하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수원홈플러스 매장은 지상 4층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연면적을 임대해서 그런지, 매장 내 공간이 다른 매장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넓고 이동이 용이했다. 평일 낮시간에 방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고객들이 비교적 적은 편이어서 마음껏 책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시간만 좀 더 충분했다면 더 둘러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출발하기 전에 검색한 책들의 위치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가서 서가에 비치된 책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고 싶은 단 한 권 밖에 없다면 책의 퀄러티는 중요하지 않겠지만, 두 권 이상의 책이 있다면 퀄러티 비교는 필수다. 물론 퀄러티에 따라 가격 차가 발생하는 건 당연히 감수해야할 사항이다.
책을 둘러 보다 보니 집에 사서 모셔 두고 아직까지도(!!!) 읽지 않은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만나 당황한 기억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출신 작가 마틴 에이미스의 <누가 개를 들여놓았다> 역시 그런 책이었다. 나의 서가 정중앙에 떡하니 꽂혀 있는데 이렇게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래. 대산세계문학 전집으로 출간된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도 서가에서 발견하고는 “음~”하는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윙거의 책을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보유하고 있는 책이라 차마 살 수가 없었다.
아직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나로서는 한가롭게 서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있어서 좋았지만, 종로나 강남 알라딘처럼 손님들로 벅적댔으면 하는 그럼 바람이 들었다. 책을 저렴하게 만날 수 있는 나로서는 책의 주요 수급처가 늘어나는 현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책의 유통과 순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 이해하지만 책의 소비자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원래 준비해간 자료를 보고 선정한 네 권의 책을 독서대에 두고 찬찬히 살펴 보는 중이다. 창비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로 나온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제일 먼저 골랐는데, 생각보다 두꺼워서 깜짝 놀랐다. 맨 위에 놓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은 한 때 전작에 도전하느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는 사지 않은 기억이 난다. 세풀베다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서 예전에 나온 책들이 소리 소문 없이 품절, 절판되고 있는지라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책 바구니에 담았다.
다음은 밀로라드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으로 역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을 득템했다. 그리고 보니 파비치의 <바람의 안쪽>도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아직 안 읽고 버티고 있는 중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피터 니콜스의 <록스 호텔>은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 생각 이상으로 재밌다.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루루와 제랄드 두 남녀 사랑과 이별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가는 기술이 남다르다. 왜 이렇게 좋은 작가들의 책은 우리나라에 드문드문 소개가 되는 걸까. 피터 니콜스의 다른 책도 만나 보고 싶다.
이제 진짜 레어 아이템이 된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도끼 전집의 레드정장본을 수 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미 <죄와 벌> 그리고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입수를 했지만 미처 읽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라 선뜻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라. 모름지기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데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 잡지 못하니 책 사는 행위가 점점 마음 한 구석의 부담이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어서 적절하게 구매를 자제하게 되었다.
서가의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문득 오래 전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을 한 권 만났다. 내가 수년 전에 서평계에 처음으로 입문하면서 만났던 책이 <달라이 라마 자서전>이었고 두 번 째 책이 바로 이날 다시 만난 <만사형통>이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힘을 잔뜩 들여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것 같다. 다 지나고 나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지만, 또 그땐 그랬으니까. 그 시절을 되돌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도서 분류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발터 뫼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영미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더라. 책에 대해 조금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직 훈련과 교육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 외에도 그런 부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그런 점들을 다 꼬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나의 마지막 장바구니는 처음에 골랐던 대로 채워졌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 밀로라드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 피터 니콜스의 <록스 호텔> 그리고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이렇게 네 권의 책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네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얇은 <핫 라인>은 이미 읽었고, 오늘부터 <록스 호텔>을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출발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