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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다시 루이스 세풀베다를 읽었다. 어제 새로 오픈한 북수원홈플러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서 모두 4권의 책을 샀다. 원래 계획했던 책 2권 그리고 즉석에서 산 2권. 후자의 두 권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이었다. 물론 <핫 라인>은 오래 전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당시에 책을 사진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던 것 같다. 나의 몇 안되는 전작주의 작가 목록에 당당하게 올라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이니 당연히 컬렉션에 추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보니 간간히 소개되는 그의 책을 읽고서도 리뷰를 쓰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읽고 쓰지 못한 리뷰를 써야지 싶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은 2002년에 발표된 책으로 흑색 소설 계로 분류된다는 역자 후기를 읽었다. 1973년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가 극악한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로 전복된 이후, 칠레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사그라 들어 버렸다. 소설에서는 마누엘 칸데라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군부독재의 대표선수가 자그마치 16년 동안이나 나라를 통치하면서, 칠레의 자유를 짓밟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조국이 지상천국이라는 선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씁쓸하게도 어느 나라의 현재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군부와 결탁해서 독재의 과실을 즐긴 기득권층에게 조국은 지상천국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런 나라 칠레의 오지 파타고니아, 아이센 해협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양갈비를 뜯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가축 도둑들을 잡는데 매진하는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다. 참고로 조지 워싱턴 형사의 형제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한다. 어느 날,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지역 사람들의 가축을 훔친 가축 도둑들에게 어김없이 정의의 총질을 해댔다. 문제는 그 중 하나가 국가 최고 권력자 칸데라스 장군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카우카만을 지도하는 서장은 자기 휘하의 유능한 형사의 파멸을 두고 볼 수 없어, 수도 산티아고에서 성범죄를 담당하는 부서로 전출시키기에 이른다.
카우카만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음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화자가 만난 카우카만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안 좋”다는 예감을 충분히 받았다. 그의 말대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 천지에, 파타고니아와는 달리 자연친화적이지 않은 수도의 분위기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존재는 택시운전사 아니타 레세스마 뿐이다. 둘의 나이가 합쳐 여든이 넘어가는 두 남녀는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빠르게 사랑에 돌입한다.
새 부임지의 동료 형사들은 최고 권력자 아들의 엉덩이를 날려 버린 마푸체 인디오 출신 카우카만 형사에게 아무 일도 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지만,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가의 녹을 축낼 수는 없지 않은가. 혹독한 군사독재를 피해 칠레를 떠났던 배우 커플이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 시작한 사업은 바로 핫 라인을 이용한 폰 섹스 비즈니스였다. 어떤 미치광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업은 나름 호조였던 모양이다. 우리의 주인공 파타고니아의 카우보이 카우카만 형사는 바로 무언가 안 좋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는다. 과연 주인공 카우카만 형사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협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라틴 아메리카 문학 씬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시절에도 루이스 세풀베다는 추세를 따르지 않고, 현실도피 대신 정면승부를 택했다. 비록 군부에 의해 추방되어 독일과 스페인을 전전했지만 필생의 업이었던 문학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써댔다. 16년 기나긴 피노체트 독재를 끝내고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피노체트 시절 군사독재에 협력했던 기득권 우파 세력의 벽은 강고했다. 그런 칠레의 현실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환경파괴를 소재로 삼아 다양한 글을 세풀베다는 발표해왔다. 누가 봐도 누아르 계열의 소설이라는 점을 <핫 라인>에서 느낄 수 있는데, 어둠을 어둠으로 제압하겠다는 설정이었을까. 마지막 칸데라스 장군과의 대결에서 카우카만은 인디오는 지난 수백년 동안 패배를 거듭해 왔지만, 우이냐(아라우코 산맥에 사는 작은 고양이)가 승부가 뻔히 보이는 개들과의 대결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칠레 민주화 투사로 투쟁하던 배우 커플이 귀국해서 에로틱한 전화 사업자로 변신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칠레가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올곧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사업에 종사했을까? 법 위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횡행하는 비정상 국가에서 정의와 불의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다.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을 개인적 원한 때문에 사적으로 전용하고, 형사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킬러가 자신을 제압한 인디오 형사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실소가 터져나왔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소설이지만, 결말은 지극히 판타지에 가깝다. 어쩌면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설정을 한 걸까. 마지막 문단에서 수도 산티아고의 쓰레기 수거차량들이 자기 본연의 임무를 위해 부지런히 도심을 누비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어주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이지만, 잊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게 해줬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