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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단 이틀만에 다 읽은 필립 지앙의 <파문>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연상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케페시 교수는 <파문>의 주인공 마르크와 판박이다. 프랑스 모처의 고향 마을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53살난 마르크는 특별한 매력도 없이 문학을 다루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섹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의 학생인 바르바라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더라는 사실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자 우리의 지성인 교수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찰에게 신고할 것인가? 아니다. 마르크는 죽은 바르바라를 끌고 자신이 예전에 발견한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교수라는 박봉에 다 낡은 피아트를 끌면서, 같은 대학 행정처에 근무하는 누이 마리안과 사는 마르크. 어째 불편해 보이는 삶의 편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정확한 판단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모진 학대와 매질, 감금을 당한 두 오누이는 가족을 넘어 야릇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실종된 바르바라를 찾아 경찰이 나서지만, 대학교수 출신 마르크가 사체유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경찰의 접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르바라의 계모라는 미리암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이 소용돌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보다 훨씬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어온 마르크에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미리암은 색다른 도전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미리암이 자신에게 준다는 확신에 빠진 마르크는 비록 계모지만 제자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물론 대학 사회에서 제자들과 성관계 그리고 학부모와의 관계를 엄금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의 도전과 위기를 체험한 마르크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말초적 여흥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일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정말 몰랐단 말인가? 이런 위험을 감수한 스릴이야말로 일별 파렴치해 보이는 교수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마르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뛰어난 후광과 명성을 얻게 될 그런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은 모양이다. 그나마 죽은 바르바라가 재능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고, 새롭게 자신에게 접근해온 지역 유지의 딸 아니 에그바움의 육탄공세는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온통 미리암이 뒤흔들고 있는데 치기 어린 불장난을 상대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마르크의 실존적 위기는 다른 곳엣 찾아온다. 문학강의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대학에서 그의 정리해고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는 누이 마리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 중인 학과장 리샤르 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제되기에 이른다. 시류에 편승해서 학과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리샤르 올소를 맹목적으로 경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런 그와 만나는 누이 마리안에 대한 애증을 필립 지앙은 그대로 잡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크가 집요하게 집착하는 흡연은 말미에 등장하게 될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였을까? 흡연이 더 이상 쿨한 행동이 아닌 세상에서 번갯불을 맞은 것 같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에게 담배는 유일한 구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산책하기 좋아하는 숲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자 피난처였다. 아프간에 파병한 미리암 남편의 부재를 틈타 그녀의 애인이 된 마르크는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그녀의 매력이 빠질수록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사체유기에 이어 자신을 도우려던 경찰이 죽은(그가 직접 경찰을 죽였던가?) 뒤에 그 역시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처리한다. 욕실에서 피범벅이 된 그를 목격한 마리안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다.
될대로 되라는 방식의 삶을 사는 그에게 거절당한 아니 에그바움의 물리적 복수는 위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저러다 큰 일나지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우리의 주인공 마르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죽은 바르바라의 관계가 끝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아니 에그바움과의 관계는 그동안 마르크가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유혹하고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금융 사기꾼처럼 생긴 그의 아버지가 어깨들을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에게 미리암의 정체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누이간의 비밀이 밝혀지고, 파국이 이어진다.
소설 <파문>의 몰입도는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마르크가 바르바라나 경찰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명백한 범죄(사체유기)를 저지르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지만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이 사실 좀 이해가 가진 않았다. 범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추후에 벌어질 또다른 범죄의 전주곡처럼 다가왔다.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의 섹스도 범죄는 아니지만, 대학사회에서 용인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도 불편했다. 어쩌면 더 이상 도덕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타락한 시대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계량화되어 평가받고 금전적 가치로 치환되는 시절에 한 지식인의 일탈로 간주하기엔 마르크는 너무 많이 나간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는 결말에서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파문>은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이다. 다양한 층위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이야기를 섬광 같은 파국으로 인도한다. 마치 숲 속에서 니코틴이 절실하게 필요한 마르크가 정신을 잃은 채 맞이한 몽롱한 감정의 전이 같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