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1984-1987 1 -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실뱅 사부아 그림, 마르제나 소바 글, 김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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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북클럽 패밀리 세일에 갔다가 이 책을 사왔다. 그전부터 점찍어 두고 있던 세미콜론의 책이었는데, 때 마침 눈에 띄어서 바로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만화라 가볍게 생각한 탓일까. 금세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읽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동안에 다른 책들과 만나느라 그랬긴 했지만 어쨌든 울림이 있는 책이었다.

 

가장 먼저 부제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정말 안드로메다처럼 멀게 느껴지는 1980년대 초반에 폴란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구 소련의 위성국가 폴란드에서 석유파동에 따른 살인적인 물가폭등 때문에 임금인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이런 역사적 사실을 사전에 알고 이 만화를 보면 훨씬 더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나 역시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야루젤스키 폴란드 국방장관 겸 총리(그리고 나중에는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약관에 나이에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서방의 프랑스로 넘어온 이 그래픽 노블의 주인공 마르지는 우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나라 폴란드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잉어의 날이라고 들어 봤는가? 폴란드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장에 나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잉어를 사다가 욕조에 두는 풍습이 있단다. 공산주의도 사람들의 식욕은 이기지 못하나 보다. 프랑스 출신의 만화가 실뱅 사부아는 꼬마소녀 마르지의 시선을 통해 심각한 경제난으로 자동차 연료는 물론이고 만성적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폴란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렇게 선전하던 물자부족으로 공산국가에 사는 이들은 하다못해 빵을 하나 사려고 해도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문제는 그렇게라도 빵을 얻을 수가 있는 체제가 좋은지 아니면, 주변에 살 것은 넘쳐 나지만 그 물자를 살 수 있는 재화가 없어 고통 받는 체제가 좋은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초인종 놀이를 하고(초인종 누르고 도망가기 놀이는 아마 글로벌한 놀이인가 보다), 텔레비전에 나온 폴란드 국민들의 영웅 요한 바오로 2세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비록 공산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뿌리 깊은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볼 수가 있었다. 마르지 역시 나중에 영성체를 받을 무렵에 온 식구가 나서 준비를 해주고 축하해 준다. 부족한 물자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시골 농장에 가서 수확한 채소와 작물을 아파트에 싣고 와서 동네 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장면에서는 당시 폴란드의 사회상과 동시에 실패한 계획주의 경제의 단면이 비치기도 한다.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선포한 계엄령은 폴란드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임금 인상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노조의 주장에 폴란드 공산정부는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이웃나라 소련이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거짓 선전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노조의 모든 활동을 금지하고, 파업 노동자들, 노조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체포에 나선다. 국가 지도자의 느닷없는 전쟁상태 돌입 선언에 어린 마르지는 당장에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7살 박이 폴란드의 소녀의 눈에 비친 폴란드의 일상은 단조로우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다. 왜 우리는 돈이 있어도 원하는 만큼 물건을 살 수가 없는 것일까? 마르지의 아버지는 한 덩이의 고기를 사기 위해 엄동설한에 완전무장을 하고 밖에서 밤새도록 줄을 서야했다. 컬러텔레비전 역시 마찬가지다. 감수성 어린 소녀가 가까스로 산 화장지 목걸이를 목에 걸고 터덜터덜 걷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무엇을 하나 얻기 위해서는 갖은 증명서와 무궁무진한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나라가 바로 폴란드였다.

 

1편에서 가장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글귀는 맨 끝에 마르지의 글이다. 그녀가 나무에 오르기 좋아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소녀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또 어떤 부분은 성인이 되어서 냉철한 시선으로 그 시절을 되돌아본 회고였구나 하는 생각에 메이트릭스에서 깨어났다. 2편에서는 십대 소녀 버전의 이야기가 나오려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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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2 3 - 그런 시절도 있었더랬다 낢이 사는 이야기
서나래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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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웹툰이 나의 일상 속으로 슬그머니 밀고 들어왔다. 사실 웹툰 그림체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유치하다는 생각에 멀리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조석님의 <마음의 소리>를 통해 그런 개인적 고정관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게 됐다. 만화의 그림체도 물론 만화 구성과 선택의 중요한 요소겠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웹툰의 정수가 아닐까 한다. 물론 계속해서 연재되는 만화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나래 만화가의 새로운 웹툰책이 출간되었다는 말에 가장 먼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캐릭터는 바로 둥글레 씨였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휙휙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작가의 애완 달팽이 생각이 나다니, 놀랄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두 번째 시즌에서도 애완 달팽이 둥글레 씨는 반갑게도(?) 열심히 먹고 싸며, 미끈한 것을 쉴 새 없이 그렇게 생산해 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좀 곁길로 샜지만,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는 서나래 만화가는 이번 시즌에서는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시절에 카세트테이프로 노래 좀 들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런 체험들,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들어서 늘어난 카세트테이프가 들려주는 기괴한 소리하며, 끊어진 테이프 이어 붙이기 신공 등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다이어트 강박시대에 사는 나 역시 그녀의 다이어트 그리고 언젠가 나도 운동을 해야지 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에 절로 귀가 솔깃해진다. 10KM 단축 매러썬에 나선 그녀의 이야기에선 멀리 이웃나라 작가 하루키 선생까지 갈 것 없이 달리기/매러썬에 중독되어 도가니가 나간 지인의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야 그렇게 운동할 일이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타임머신을 좀 더 돌려 보면, 분홍이-뽀얀이-곱슬이 그리고 흰둥이 같은 촌스럽지만 정감 넘치는 인형과 보내던 시절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역시 압권은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끼고 먹여 주시는 배추보쌈의 추억이다. 일손이 달리는 김장철에 고양이 손이라도 돕겠다고 무지막지하게 정신없이 갈다 보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라니. 노동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보상 같은 예의 배추보쌈 맛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싶다.

 

단순명료하면서도 독자에게 가하는 불의의 일격이야말로 낢 씨의 평범해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에피소드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명랑쾌활한 만화를 보면서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 한참 진화한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웹툰은 또 어떻게 진화해 갈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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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 격변의 시대, 영혼의 치유와 참된 행복을 찾아 나선 영원한 구도자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 / 새물결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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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본 순간, 우선 두께에 놀랐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성 어거스틴의 삶 자체가 시대정신의 발현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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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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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우 작가에 잘 모를 경우, 리서치를 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북글을 쓰는 편인데 오늘은 그러지 않으련다. <단순한 열정>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김탁환 선생의 독서열전을 통해 알게 됐다. 책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할까. 여담이지만 김탁환 선생의 책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아주 도발적인 선언이었다!)와 중국 거시사를 다룬 레이 황 교수와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큰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아니 소설이라기보다 은밀한 사적 체험담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동유럽 출신의 어느 남자 A와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사랑이었다. 자신의 첫 포르노 시청 경험으로 시작하는 권두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역자의 후기에서 아니 에르노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대지 말 것을 권유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 프랑스에서 한다하는 작가가 자신의 혼외정사를 다룬 내용의 책을 발간했다는 파격 때문이었을까.

 

아니 에르노의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대상은 연하의 동유럽계 남자이다. 그리고 유부남이란다. 시작에서부터 무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들이 열거되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연애 행각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의 전이들을 담담하게 혹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의 상념들을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철저하게 변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지, 두어 가지 핑계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열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욕망(열정)을 위한 권리의 투쟁이라는 식의 이야기들. 결정타는 39쪽에 나오는 대로 A와의 관계의 노출은 시답잖은 대중을 위한 노출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노출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열정이 담겨 있었던(그녀가 원하는 대로 반과거 시제로 표현해줄까) 이야기들을 글의 소재로 써먹지 않았던가.

 

<단순한 열정>은 도대체 맹목적인 열정에 눈먼 사랑인가? 아니면 제목 그대로 단순한 열정인가? 열정(passion)은 본래대로의 뜻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수난과 고통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아니 에르노에게 A와의 관계는 뜨거운 열정이면서도 동시에 전부를 소유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도 수반하고 있었다. 그와 만남은 그녀에게 전부이면서도 동시에 예고된 이별에 뒤따르는 상실감, 우울증 그리고 음주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그녀는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그녀의 전공인 글쓰기로 통해 돌파하려는 욕구를 강력하게 천명한다. 타인과는 다른 시공간에 사는 그녀는 자신 외에 모두를 배제한 철저한 1인칭 시점을 고수한다. 그녀가 고집하는 반과거 시제의 사용은 지나간 A와의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미망의 은유적 표현일까, 마치 연애의 선수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작가의 센스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느끼는 열정의 순간들이 휘발되어 버리고 난 뒤에 남는 감정들은, 아니 에르노가 말한대로 살아 있는 텍스트들이 (감정의) 찌꺼기와 무의미한 흔적들로(63) 치환되어 버리고 마는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순환구조에서의 실종처럼 다가왔다.

 

아니 에르노는 또한 죽음의 가정법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무엇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죽어도 좋다는 식의. 그것조차 제한된 사랑 뒤의 결말처럼 들린다. 그녀는 자신이 쓴 대로 욕망이라는 자산을 모두 탕진시켜 버리고 난 뒤에 오는 쾌락에 반대급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육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공허한 피로감처럼 엄습한다.

 

아니 에르노는 도대체 왜 소설을 썼을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신만의 일기장에 고이 모셔 두어도 족했을 법한 글을 말이다. 자신은 A를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썼지만, 과연 한 때 아니 에르노 열정의 대상이었던 A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세계에 나는 그렇게 단순한 독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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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 - 17세기 수녀원의 내밀한 역사
크레이그 할라인 지음, 이영효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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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읽을 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주제에 따라 책을 고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주제가 크로스오버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 책을 살 것이다. 크레이그 할라인의 <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는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 있어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종교 개혁 시대 그리고 미시사(microhistory)라니. 정말 오래 간만에 읽는 활자 책의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미국국립인문학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구 스페인령 네덜란드, 지금의 벨기에의 기록보관서에서 오래된 서류를 뒤지던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는 신구교 할 것이 없이 종교개혁의 바람이 몰아치던 17세기 초반 뢰번(나는 왜 루뱅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드는 걸까)에 있던 회색 수녀회 소속 베들레헴 수녀원의 어느 수녀가 남긴 장문의 편지를 발견해냈다. 그 편지 뭉치가 이번에 읽은 <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의 단초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뢰번의 마가렛 스뮐더르스 수녀는 프로테스탄트의 신교개혁에 대항해서 구교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각종 개혁안이 포고되던 17세기 초반, 뢰번의 작은 수녀원 베들레헴 수녀원에서 종신 서원을 하고 수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예의 수도원 생활은 그녀가 서원했던 신에 대한 경건과 수도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고해신부의 스캔들로 그녀는 처음으로 수녀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마가렛 수녀는 베들레헴 수녀원을 관할하는 고위 성직자에게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편지로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400년 전, 지구 반대편의 작은 수녀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분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와 만나게 됐다.

 

마가렛 수녀와 베들레헴 수녀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녀들과의 작은 전쟁은 어느 시각에서 보면 성실한 고해신부 헨리 요스와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마가렛 수녀의 진정으로 알려진 스캔들 때문에 헨리 요스 신부는 베들레헴 수녀원 고해신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진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과 교정을 원하는 일단 수녀와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다수 수녀의 대결로 비화된다. 저자 크레이그 할라인은 마가렛 수녀의 기록을 신중하게 검토하며,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 그녀가 베들레헴 수녀원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쫓겨나는 치욕을 감내하면서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원장 수녀였던 아드리아나 트라위스와 그녀의 충실한 추종자 안나 피흐나롤라와 마리아 요스 일파의 비난이 수녀원의 제일 가는 덕목 중의 하나인 자매애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지 독자에게 꾸준한 질문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경건한 묵상과 성무일도 그리고 공동노동과 분배가 당연하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중세/근대 수녀원의 실상은 마가렛 수녀의 기록과는 정반대였다. 상대적으로 기부금 모금이 자유로웠던 남자 수도원과는 달리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수녀원에서 연금 형식으로 지원받는 부유한 수녀와 마가렛처럼 그렇지 못한 수녀의 차별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수녀원의 공동재산이 수녀원의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원장과 재무 담당 수녀에 의해 편파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일부 몰지각한 수녀들이 신에게 헌신이라는 본업보다 질 좋은 맥주를 실컷 마시고 흥청대는 파티를 벌이고, 수녀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속인 남자들과 수다 떠는데 열중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이 신에게 서원한 수녀인가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아드리아나 원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수녀들에게 수녀원 밖에서 망루의 참새처럼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시하고 상급 성직자들에게 고발하는 마가렛 수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주교가 내린 명령도 가볍게 무시하고, 기존의 문제를 교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크레이그 할라인은 그 원인을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차로 분석한다.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적 미덕이 두 적대적인 세력 사이에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는 마가렛 수녀의 치명적인 실수도 빠트리지 않는다. 마가렛 수녀는 치유를 위해 머물던 성지 스헤르펜회벌에서 후원자들의 허가 없이 베들레헴 수녀원으로 복귀를 감행하면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이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은 그녀의 적들에게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후원자들을 실망시켰다. 개인적으로 더 궁금했던 점은 왜 그녀가 베들레헴 수녀원에 그렇게 머물기를 원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자기 정화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는 베들레헴 수녀원과 동료 수녀들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베들레헴 수녀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돋보기를 대고, 종교개혁이나 종교전쟁 같은 거시적인 안목이 아니라 수녀들 간의 불화 혹은 다툼 같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의 시도와 관점이 신선하다. 주관적인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수녀들을 강제하던 조직적인 시스템과 위계질서에 대항한 마가렛 수녀의 기록은 그런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스스로 고립된 수녀원 생활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편애와 따돌림에 고통 받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은 그녀의 노력 덕분에 격변의 시대를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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