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보통의 경우 작가에 잘 모를 경우, 리서치를 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북글을 쓰는 편인데 오늘은 그러지 않으련다. <단순한 열정>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김탁환 선생의 독서열전을 통해 알게 됐다. 책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할까. 여담이지만 김탁환 선생의 책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아주 도발적인 선언이었다!)와 중국 거시사를 다룬 레이 황 교수와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큰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아니 소설이라기보다 은밀한 사적 체험담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동유럽 출신의 어느 남자 A와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사랑이었다. 자신의 첫 포르노 시청 경험으로 시작하는 권두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역자의 후기에서 아니 에르노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대지 말 것을 권유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 프랑스에서 한다하는 작가가 자신의 혼외정사를 다룬 내용의 책을 발간했다는 파격 때문이었을까.

 

아니 에르노의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대상은 연하의 동유럽계 남자이다. 그리고 유부남이란다. 시작에서부터 무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들이 열거되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연애 행각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의 전이들을 담담하게 혹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의 상념들을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철저하게 변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지, 두어 가지 핑계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열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욕망(열정)을 위한 권리의 투쟁이라는 식의 이야기들. 결정타는 39쪽에 나오는 대로 A와의 관계의 노출은 시답잖은 대중을 위한 노출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노출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열정이 담겨 있었던(그녀가 원하는 대로 반과거 시제로 표현해줄까) 이야기들을 글의 소재로 써먹지 않았던가.

 

<단순한 열정>은 도대체 맹목적인 열정에 눈먼 사랑인가? 아니면 제목 그대로 단순한 열정인가? 열정(passion)은 본래대로의 뜻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수난과 고통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아니 에르노에게 A와의 관계는 뜨거운 열정이면서도 동시에 전부를 소유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도 수반하고 있었다. 그와 만남은 그녀에게 전부이면서도 동시에 예고된 이별에 뒤따르는 상실감, 우울증 그리고 음주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그녀는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그녀의 전공인 글쓰기로 통해 돌파하려는 욕구를 강력하게 천명한다. 타인과는 다른 시공간에 사는 그녀는 자신 외에 모두를 배제한 철저한 1인칭 시점을 고수한다. 그녀가 고집하는 반과거 시제의 사용은 지나간 A와의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미망의 은유적 표현일까, 마치 연애의 선수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작가의 센스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느끼는 열정의 순간들이 휘발되어 버리고 난 뒤에 남는 감정들은, 아니 에르노가 말한대로 살아 있는 텍스트들이 (감정의) 찌꺼기와 무의미한 흔적들로(63) 치환되어 버리고 마는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순환구조에서의 실종처럼 다가왔다.

 

아니 에르노는 또한 죽음의 가정법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무엇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죽어도 좋다는 식의. 그것조차 제한된 사랑 뒤의 결말처럼 들린다. 그녀는 자신이 쓴 대로 욕망이라는 자산을 모두 탕진시켜 버리고 난 뒤에 오는 쾌락에 반대급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육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공허한 피로감처럼 엄습한다.

 

아니 에르노는 도대체 왜 소설을 썼을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신만의 일기장에 고이 모셔 두어도 족했을 법한 글을 말이다. 자신은 A를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썼지만, 과연 한 때 아니 에르노 열정의 대상이었던 A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세계에 나는 그렇게 단순한 독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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