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승부사들 -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돌파한 사람들
서신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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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 전의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에 근거한 계급주의 사회였다.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조선 건국 이래의 신분제는 인본주의를 숭상하는 성리학의 근본과 정면으로 대치점에 서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꿈과 비전을 펼치지 못하고 그늘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었다.

서신혜 작가의 <조선의 승부사들>은 바로 그런 수많은 숙명 가운데 대표적인 10명의 뛰어난 전문가적인 소양과 능력을 갖추고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이 과거의 인물들을 접하는 가장 빠른 통로는 바로 사극 같은 드라마이다. 과거 인물들 특히 주변인들에 대한 서적들은 거의 찾을 수가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다.

어쨌든 다양한 경로로 통해 접하게 된 장영실, 허준 그리고 김홍도 같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상례전문가 유희경, 임진왜란 시대를 풍미했던 역관 홍순언, 청중들을 위해 기꺼이 연주를 마다하지 않았던 악공 송경운, 출판과 교정의 대가였던 장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요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공으로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던 시기에 선조를 모시고 끝까지 천리 몽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행하면서 입으로만 국가에 충성을 부르짖던 사대부들의 위선적인 모습들을 통쾌하게 쳐부순다. 물론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세자 광해군의 병과 선조를 모신 것에서 비롯된 군왕의 전폭적 신뢰가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의술은 인술이라는 자신만의 올곧은 지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불후의 명저 <동의보감>을 편찬하면서 당대의 의술을 한 차원 더 끌어 올린 그의 빛나는 업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바로 책의 말미에 등장한 장혼(張混)이었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된 조선대의 출판 및 교정 전문가이자 아동교육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체적 장애까지 딛고, 양반이 아닌 위항자들의 삶과 문화를 책을 통해 후세에 전하는 아주 귀중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의 삶까지도 역전시켜 준 그의 눈부신 활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편, 이러한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인물들이 활약을 가능하게 했던 시대의 위기상황들도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요소들일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던 임진왜란과 삼전도에서의 치욕적인 항복으로 끝난 두 차례의 호란은 조선 후기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대변되는 실학사상의 도래를 예고한다. 이에 더해, 조선 최고의 학자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정조대의 신분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이 <조선의 승부사들>에서 펼쳐지고 있다.

<조선의 승부사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는건 바로 서신혜 작가의 철저한 역사적 고증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단선적인 인물들의 편린들을 마치 하나의 퀼트 이불을 깁는 기분으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 나거나 혹은 잊혀진 인물들을 과거의 역사 속에서 부활시키는데 성공한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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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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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타벅스 매장이 많은 나라일수록 이번에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타격을 많이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미국식 자본주의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일수록 이번 경제위기에서 취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십년 전, IMF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과정에서 타의에 의해 통째로 경제구조 자체를 미국식으로 뜯어 고친 전력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바로 여기에서 츠츠미 미카가 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의 화두는 시작된다. 구소련이 몰락한 이래, 전 세계에서 유일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던 아메리카가 빈곤대국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그녀의 글을 통해 펼쳐진다. 일단 이번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는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금융대출을 통한 이익의 창출해낼 방법이 없어지자, 투기 금융자본들은 파생금융상품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약자들을 상대로 한 가계대출에 나서기 시작한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하류층이나 불법이민자들이 그들의 얄팍한 상술에 걸려들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은 물론이고 한 때 천정 높을 줄 모르고 치솟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게 되면서 대출 상환을 못하게 되면서 파산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철저한 신자유주의 이론과 후진 서비스라면 모두 민영화시키자는 말도 안 되는 구호로 국민들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의료와 문제마저 모두 경제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게 되었다. 이제 무엇을 먹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이들 빈곤층의 직면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3억 미국 인구 중의 1/6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분류가 되어 푸드 스탬프로 연명을 하게 되고, 싸구려 저질 음식을 먹게 된 청소년들은 비만과 갖은 질병으로 시달리게 된다. 미국 중산층의 막대한 개인 의료보험에 의한 지출로 인한 파산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이미 마이클 무어가 영화 <식코>에서 보여준 것처럼 의료보험 민영화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기본권마저 앗아가 버렸다. 게다가 날로 벌어지는 빈부간의 격차로 인한 교육의 불평등과 천문학적인 교육비의 증가는 빈곤층에서 신분상승의 유일한 길로 여겨지는 대학 교육의 기회마저 어린 청년들에게서 빼앗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또 다른 유혹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군대다. 도대체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라크 전쟁에 천문학적인 정부 예산을 쏟아 붓고 있지만 해결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라크에 엄청난 수의 군대를 파견해야 하는 미국 정부는 부족한 병력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혹은 졸업을 앞둔 청소년들, 심지어는 살인적인 학비에 시달리고 있는 대학생들에까지 입대를 권유하고 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예전에 번영과 영광을 구가하던 미국의 중산층이 하루가 다르게 처참하게 몰락해 가고 있는 과정을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본인들은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 이유는 바로 미디어를 장악한 대자본의 지배를 받는 대기업과 더 이상 자국민의 건강과 교육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그나마 신자유주의 정책이 그 절정으로 향하던 레이건 정부 때보다, 닉슨 행정부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미국의 공공 의료시스템의 붕괴는 이미 닉슨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식코>를 한 번 보고 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르포라는 사실을 알리는 본연의 임무에서 보면 이 책은 탁월한 성과를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제 문제점들을 기반으로 해서, 보다 건설적인 해결 방안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와 문제제기를 보여 주었다면 더 좋은 책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배어났다. 물론 책 말미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 다루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빈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진행될 21세기에 더 이상 경제대국이 아닌 빈곤대국으로 불릴 미국의 모습이, 100여 년 전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가 몰락해 버린 영국의 그것과 오버랩되는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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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특별한 악마 - PASSION
히메노 가오루코 지음, 양윤옥 옮김 / 아우름(Aurum)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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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왜 주인공의 이름이 프란체스코였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시시 출신의 가난한 자들의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프란체스카라고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계속해서 책을 읽다 보니, 주인공의 젠더는 여성이지만 그와 불편한 동거를 하는 또 다른 까칠한 성격의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었던가. 조금 이해가 되는 명명이었다.

책의 표지를 보면, <내 안의 특별한 악마> 옆에 달린 부제로 “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수줍게 달라붙어 있다. 이 단어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열정’이라는 뜻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자, 그럼 이제 주인공 프란체스코의 열정과 수난의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주인공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왼쪽 팔뚝에 종기가 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종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사람의 낯짝을 닮은 종기(인면창이라고 불린다)는 원래 자리에서 프란체스코의 은밀한 곳으로 위치이동을 해서 그녀와 수년간에 걸친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만이면 좋다, 도저히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프란체스코에게 온갖 폭언에 독설을 퍼붓는다. 그럼 이 짜증나는 상황에 대한 프란체스코의 대처방식은? 그녀가 이름 붙인 이 인면창인 고가 씨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고 사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녀는 고가 씨의 말에 수긍을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독특한 발상을 착안한 작가 히메노 가오루코는 <내 안의 특별한 악마>를 네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소녀의 기도”, “세레나데”, “엘리제를 위하여”, 그리고 “백조의 호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피아노 소품들을 제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녀가 독설가 고가 씨의 입을 빌려 내뱉은 이야기들은 모두 섹스와 관련된 말들뿐이다. 그녀에게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남녀 간의 관계는 바로 그 섹스로 귀결이 된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무슨 짓거리를 하던 간에 마지막 종착지는 빤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뻔뻔한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갯짓으로 상념들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자신의 연애사는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프란체스코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개조해서 치바 최고의 러브호텔로 만들어서 청춘남녀들에게 제공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이 참 재밌었다.

그리고 주인공 프란체스코의 이미지는 작년 여름에 아주 재밌게 봤었던 아야세 하루카 주연의 <호타루의 빛>에 나오는 여주인공 ‘건어물녀’와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연애는커녕 에로에는 젬병인 주인공, 그 주인공을 계몽하는 역할을 맡은 고가 씨와 부쬬(부장)의 그것 또한 거의 유사했다.

어쨌든 <내 안의 특별한 악마>는 재밌다. 다만 지난 천년에 나온 책이 우리에게 조금 늦게 도착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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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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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주제로 다룬 책들 가운데, 흔히 눈에 띄는 제목이 몇 개 있다. 경성과 조선이 바로 그 키워드이다. 이름 역시 조선조 왕들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이한 작가의 <조선 아고라>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서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 이전의 왕정국가 조선과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으로 민회나 재판이 열리곤 했다는 아고라, 다시 말해서 의사소통의 장으로써의 개념이 만나 한 권의 책이 나왔다고 하니 호기심이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부제로 달린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이라는 타이틀은 나의 궁금증에 그야말로 타는 불길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이 책에서는 모두 다섯 개의 조선왕조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들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개국 이래 한양(지금의 서울)으로의 천도 논쟁, 세종 조의 공법(조세제도) 논쟁과 현종 대의 벌어진 조선 최대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두 차례의 예송논쟁 마지막으로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 논쟁이 그것이다.

모름지기 논쟁이라 하면 어느 사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나눠지기 마련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의 얼굴 모양만큼이나 각각의 생각들이 다른 만큼 한 가지 사안을 놓고 보는 시각도 그만큼 다르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논쟁이나 국가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를 세우는 논쟁에 있어서, 찬반논쟁은 당연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논쟁은 주도자이자 결정권자였던 태종과 세종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다른 진행양상을 보여 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염원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모토대로 고려조의 수도였던 개경(오늘날의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는 500년 이상 한 국가의 수도였던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는 것인 만큼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성계에 못지않게 뚝심이 있었던 태종 이방원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천도를 강행한다. 의견은 듣되, 자신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과연 찬반논쟁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등장하는 세종 시절의 공법논쟁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가 된다. 거의 대신들을 반협박하다시피 해서 진행시켰던 천도논쟁과는 달리 조선조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백성들의 의견까지 종합을 해서 기존의 손실답험법을 대신한 새로운 형태의 공법제도를 추진한다. 모든 반대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수렴해서 진행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계속해서 흉년이 되면서, 공법제도의 형태는 갖추어졌지만 시행에 있어 적잖이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했다. 결국 토지의 질과 풍흉에 따른 전분9등급제와 연분6등급제로 17년간의 긴 논쟁 끝에 공법제도가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토지제도로 정착이 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 국사 시간에 얼핏 들었던 조선 초기의 조세제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전율을 느꼈다. 당시엔 무조건 외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젠 무얼 외우라고 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현종 치세의 예송논쟁이다. 조선시대의 고질로 인식이 된 붕당정치의 폐해, 다시 말해 당파싸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상례(喪禮)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효종이 승하하면서,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가 기년복(1년 상복)을 입어야 할지 아니면 3년복을 입어야 할지에서 비롯된 논쟁의 중심에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 있었다.

문제는 효종(봉림대군)이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이었다. 이상주의자이자 타협이라고는 몰랐던 성리학에 충실했던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둘째 아들)였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년설을 주장했다. 그 누가 뭐래도 타협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모두 송시열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허목이나 윤선도와 같은 인물들은 효종 정통설을 주장하며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상소로 인해 주류 서인들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던 예송논쟁은 15년 뒤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촉발된다.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현종은 서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신하들이 모두 기년복(1년)이 아닌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처음의 주장을 정정하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두 번째 예송논쟁을 격발시킨다. 예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와 절대군주였던 국왕의 첨예한 대립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논쟁은 정조 이산이 주도했던 문체반정논쟁이었는데, 상당한 관심을 끌면서도 이전에 소개된 논쟁들과는 달리 찬반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통 보수주의자였던 “꼰대” 정조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 많은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에 반해서 전래의 경학에 근거한 고전적 스타일로 돌아가자는 정조 임금 자신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저자 이한 씨는 친절하게도 각론에서부터 시작해서 각 논쟁마다 어떻게 해서 시작이 되었고, 주인공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으며 자세한 진행과정과 그 후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멋진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소통을 하고 보다 나은 방법에 도달할 수는 없는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봤다. 무릇 논쟁이라 하면, 그런 소통을 통해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타협을 하고 가능한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역사 속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매도는 물론이거니와 인신공격과 악의적인 모함도 서슴지 않는 장면들이 보였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소모적인 모습들에서 오늘날 우리의 정치현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자고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좋은 롤 모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세계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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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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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사놓고서도 한 동안 읽지 못한 채 나의 책상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책을 손에 집어 올리는 순간 레오와 에미가 글로 빚어내는 사랑과 질투, 시기, 증오 그리고 의심으로 복합된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느꼈다.

그렇다, 잡지 구독을 끊기 위해 레오 라이케에게 에미가 보낸 이메일이 계기가 되어 그 둘은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언제나 모든 사랑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관계의 발단이 된다. 레오는 언어심리학자고, 에미는 웹디자이너란다. 직업 따위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 둘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위태롭게 지속되는 이메일을 통해 쉴 새 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레오는 최근의 전 애인이 되어 버린 마를레네와의 관계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유부녀인 에미는 ‘완벽한 가정생활’ 가운데서도 그녀만의 ‘외부세계’를 원한다. 그렇게 그 둘은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조심스런 탐색전에 나선다. 온라인을 통한 익명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단계가 있다. 그건 바로 직접적인 대면.

레오보다 에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실제로 만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한편, 옛 연인에게 버림 받은 레오는 새로운 현실세계에서의 관계 대신이 자신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외부세계’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화성에서 온 여자는 현실을 원하고, 금성에서 온 남자는 자신만의 환상만을 원한다. 에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이 두 명의 환상적인 메일 파트너들은 글로 만든 유토피아 속에서 어떠한 구속 없이 자유롭게 유영한다.

독일 출신의 작가 다니엘 글라타우어는 현실세계에서 누구나에게 일어날 법한 일을 가지고 이메일 대화체를 이용해서, 멋진 판타지를 구축해냈다. 관계의 시작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레오와 에미의 대화들은 어쩔 때는 초단위로 또 어쩔 때는 며칠씩 걸리는 상호작용을 거쳐 서로에 대한 감정들을 점증시킨다. 결국 우리의 주인공들은 불가피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거다.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물론 몇 번이 아슬아슬한 만남의 위기들이 스쳐 가지만, 작가는 뻔뻔하게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곳곳에 멋진 부비트랩들을 설치해 두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미가 레오에게 자신의 본심과는 달리 소개시킨 미아다. 메일을 쓸 때나 혹은 쓰지 않을 때 그리고 모든 순간마다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아니 그 후의 결말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이기적인 사랑의 속성상,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내가 만든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야기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조금은 급작스러운 결말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누구나 친밀한 소통을 원하면서도 타인과의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 속에, 훅하고 입김으로 불어 버리면 날아가 버리고 말 것 같은 가냘픈 사이버 사랑의 칼날 같은 긴장감과 애절함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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