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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서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주제로 다룬 책들 가운데, 흔히 눈에 띄는 제목이 몇 개 있다. 경성과 조선이 바로 그 키워드이다. 이름 역시 조선조 왕들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이한 작가의 <조선 아고라>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서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 이전의 왕정국가 조선과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으로 민회나 재판이 열리곤 했다는 아고라, 다시 말해서 의사소통의 장으로써의 개념이 만나 한 권의 책이 나왔다고 하니 호기심이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부제로 달린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이라는 타이틀은 나의 궁금증에 그야말로 타는 불길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이 책에서는 모두 다섯 개의 조선왕조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들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개국 이래 한양(지금의 서울)으로의 천도 논쟁, 세종 조의 공법(조세제도) 논쟁과 현종 대의 벌어진 조선 최대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두 차례의 예송논쟁 마지막으로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 논쟁이 그것이다.
모름지기 논쟁이라 하면 어느 사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나눠지기 마련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의 얼굴 모양만큼이나 각각의 생각들이 다른 만큼 한 가지 사안을 놓고 보는 시각도 그만큼 다르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논쟁이나 국가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를 세우는 논쟁에 있어서, 찬반논쟁은 당연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논쟁은 주도자이자 결정권자였던 태종과 세종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다른 진행양상을 보여 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염원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모토대로 고려조의 수도였던 개경(오늘날의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는 500년 이상 한 국가의 수도였던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는 것인 만큼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성계에 못지않게 뚝심이 있었던 태종 이방원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천도를 강행한다. 의견은 듣되, 자신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과연 찬반논쟁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등장하는 세종 시절의 공법논쟁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가 된다. 거의 대신들을 반협박하다시피 해서 진행시켰던 천도논쟁과는 달리 조선조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백성들의 의견까지 종합을 해서 기존의 손실답험법을 대신한 새로운 형태의 공법제도를 추진한다. 모든 반대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수렴해서 진행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계속해서 흉년이 되면서, 공법제도의 형태는 갖추어졌지만 시행에 있어 적잖이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했다. 결국 토지의 질과 풍흉에 따른 전분9등급제와 연분6등급제로 17년간의 긴 논쟁 끝에 공법제도가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토지제도로 정착이 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 국사 시간에 얼핏 들었던 조선 초기의 조세제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전율을 느꼈다. 당시엔 무조건 외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젠 무얼 외우라고 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현종 치세의 예송논쟁이다. 조선시대의 고질로 인식이 된 붕당정치의 폐해, 다시 말해 당파싸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상례(喪禮)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효종이 승하하면서,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가 기년복(1년 상복)을 입어야 할지 아니면 3년복을 입어야 할지에서 비롯된 논쟁의 중심에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 있었다.
문제는 효종(봉림대군)이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이었다. 이상주의자이자 타협이라고는 몰랐던 성리학에 충실했던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둘째 아들)였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년설을 주장했다. 그 누가 뭐래도 타협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모두 송시열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허목이나 윤선도와 같은 인물들은 효종 정통설을 주장하며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상소로 인해 주류 서인들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던 예송논쟁은 15년 뒤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촉발된다.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현종은 서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신하들이 모두 기년복(1년)이 아닌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처음의 주장을 정정하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두 번째 예송논쟁을 격발시킨다. 예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와 절대군주였던 국왕의 첨예한 대립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논쟁은 정조 이산이 주도했던 문체반정논쟁이었는데, 상당한 관심을 끌면서도 이전에 소개된 논쟁들과는 달리 찬반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통 보수주의자였던 “꼰대” 정조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 많은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에 반해서 전래의 경학에 근거한 고전적 스타일로 돌아가자는 정조 임금 자신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저자 이한 씨는 친절하게도 각론에서부터 시작해서 각 논쟁마다 어떻게 해서 시작이 되었고, 주인공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으며 자세한 진행과정과 그 후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멋진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소통을 하고 보다 나은 방법에 도달할 수는 없는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봤다. 무릇 논쟁이라 하면, 그런 소통을 통해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타협을 하고 가능한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역사 속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매도는 물론이거니와 인신공격과 악의적인 모함도 서슴지 않는 장면들이 보였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소모적인 모습들에서 오늘날 우리의 정치현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자고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좋은 롤 모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세계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